시는 사물의 본질을 획득하는 통찰력과 관물(官物)을 통한 내정(內情)의 시적 표현력 가운데 어디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할까? 우문일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거창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은 좋은 시는 두 측면을 두루 겸비해야 한다는 너무도 자명한 해답을 뛰어나게 획득해온 정일근 시인의 시를 애기하기 위해서이다.

그의 시는 쉽되 힘이 있고, 힘이 있되 리듬감이 있어 울림이 크다. 그만큼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때로는 남성적 웅혼한 톤을 구사하다가도 어느 순간 섬세한 내면을 건드리는 대목에 이르면 왜 그의 시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된다.

 

       

 

적요한 겨울 산길 따라 오체투지로 기어왔지만

산문(山門)이 그 길 뚝, 멈추게 한 뒤

내 신발 밑에 숨어 따라온 저잣거리의 노랫소리

소매 끝에 슬쩍 묻어온 달콤한 음식 냄새

휙휙, 단칼에 끊어버린다

 

바람도 신발을 벗어 들고 조심조심 지나는 그곳에

사람의 길도 말씀의 길도 다 끝난 그 마지막에

겨울산을 마주 보고 단단하게 앉은 절 집 한 채

달마의 짙은 눈썹처럼 꿈틀꿈틀 선정(禪定)에 들어 있다

 

        - 정일근 시, 내 마음의 동안거(冬安居)1, 2

 

내 마음의 동안거(冬安居)는 그의 평소 열망이 어디에 놓여있는가가 잘 드러난다. ‘통도사 도심(道尋)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시는 통도사 선방에 들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 들지 못하고 애달파하는 시인의 내면이 절실하게 와 닿는 시이다.

사실 한 번 닫힌 마음문은 단 1mm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석 자가 못되는 돌계단이지만 그 단호한 거부 앞에 시인은 몇 년째 전전긍긍하고 있다. 왜일까? 자신이 그 돌계단을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여전히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 공부 하러 왔습니다, 인사하고 선방(禪房) 계단 오르는데

네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돌계단이 금강(金剛)의 손바닥을 펴고

내 두 뺨을 철썩철썩 사정없이 두들겨 팬다

 

산토끼도 폴짝 뛰어오를 수 있는 불과 석 자 높이 계단 아래

속진(俗塵)은 입도 열지 못해 산짐승처럼 엎드려 크렁크렁 울고

그 위로 열락(悅樂)은 구름처럼 둥실둥실 떠간다

저 단순한 경계의 높이 밟고 오르지 못해

나는 벌써 여러 해 겨울을 전전긍긍하고 있다

 

         - 정일근 시, 내 마음의 동안거(冬安居)3, 4

 

시인은 적요한 겨울, 산길을 오체투지로 기어 산문에 이르렀다. 속진을 끊어버리고 그곳, 바람도 신을 벗고 조심조심 지나고, 사람의 길, 말씀의 길 다 끝난 그곳, 시인은 비로소 겨울 공부 하러 왔습니다하고 방문 목적을 드러낸다. 그러나 선방 계단을 오르지도 못하고 그만 거부당한다. 불과 석 자 높이, 산토끼도 뛰어오를 수 있는 높이를 시인은 오르지 못해 산짐승처럼 엎드려 크렁크렁 운다.

사실 그 계단을 오르기 위해 시인은 여러 해 겨울을 전전긍긍하며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수많은 고뇌와 열망으로 코피가 터지고, 살과 뼈가 사위어 이제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왔지만, 여전히 그 경계를 건너기가 어렵다. 도대체 어찌해야 선방에 드는 일이 가능할까? “기름진 오장육부 들어내고 살 오른 시()마저 던져버려야가능할까?

5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대라고 하는 도심(道尋)’이 등장한다. 그 계단을 오르면 도심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다. ‘도심(道尋)’은 시인과 연이 있는 동안거 든 스님인 듯이 여겨지며, 그러면서도 도를 찾는구도(求道)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에게 여전히 그 길은 멀어 보이고, 쉽게 올라 가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계단을 오르지도 못한 채 나는 검붉은 코피 펑펑 터지고

사위어가는 살과 뼈로 가벼워져 여기까지 기어왔지만

저 엄숙한 경계의 깊이 건너뛰기에

내 몸 여전히 무겁다, 너무 무겁다 한다

 

기름진 오장육부 들어내고 살 오른 시()마저 던져버려야

그대 곁에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것인지

 

꽝꽝 소리 내며 물 얼고 눈 내리는데, 한뎃솥 걸고 한뎃잠 자며

나는 비루먹은 망아지처럼 겨울 들판에 서 있다

 

                - 정일근 시, 내 마음의 동안거(冬安居)5, 6, 7

 

이 시는 공간상으로는 산문(山門) 안과 밖, 선방 안과 밖, 계단 위와 아래(벌판), 시간상으로는 현재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거 여러 해가 복합적으로 엮여 있다. 시인이 기어이 도달하고 싶어 하는 계단 위 선방 안은 끝내 시 속에 비쳐지지 않는다. 다만 그곳이 어떠한 곳인가는 몇몇 시구를 통하여 알 수는 있다. “네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라며 단호하게 거부하는 그곳은 속진(俗塵)을 용납하지 않는 곳, “열락은 구름처럼 둥실둥실 떠가는 곳, 그리고 무겁고 기름진 몸으로는 건널 수 없는 엄숙한 경계이다.

사실 계단 위 선방만이 그러하지 않고, “달마의 짙은 눈썹처럼 꿈틀꿈틀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한 채 절집 전부가 그러하지 않을까. 오체투지로 왔어도 저잣거리의 노랫소리/ 소매 끝에 슬쩍 묻어온 달콤한 음식냄새도 단칼에 끊어버리는 산문 역시 선방 계단을 오르는 것만큼의 엄숙한 경계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엄숙한 경계는 결코 산문 안쪽 선정에 든 절집 한 채의 선방 돌계단이 아니라 그것을 오를 자격이 있는가를 척도하는 내면에 있었다. 시인의 내면이 스스로 금강의 손바닥을 이루어 자신의 정신을 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자격 심사를 몇 해째 통과하지 못한 열망만이 고뇌에 차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라. 선방에 드는 것만이 선정에 들 수 있는 절대 방법이 아님을 마지막 연은 보여준다. 시인은 결국 한뎃솥 걸고 한뎃잠 자며겨울 들판에서 선정에 든다. 그 선정은 선방에 들기 위한 각고의 노력, 기름진 오장육부를 들어내고 살 오른 시마저 던져버리려는 용맹정진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시인의 동안거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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