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현대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찰 가운데 하나로 운주사를 꼽을 수 있겠다. 감동적인 창건설화와 깊은 불교사상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찰이 어디 있을까마는 운주사 산과 계곡의 천불천탑 조성설화는 어느 것보다도 드라마틱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민중적 백그라운드는 새 세상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결부되면서 어느 시대에나 연결되는 묘한 상징성을 지닌다.

역사 이래로 억압과 소외와 수탈로부터 자유로운 민중이 었었던가. 그 민중은 시인 누구에게나 가슴 저 밑바닥에 자리한 오랜 연인이자 잊지 못할 첫사랑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대흠 시인의 시「천년 동안의 사랑」(시집 『귀가 서럽다』, 창비, 2010년)을 그런 도식적 해석과 상징성 부여로만 이끌어 가고 싶지는 않다. 이 시는 그런저런 생각 다 버리고 그냥 소리 내어 읽어 보면 가슴 저린 사랑의 연시, 이런 것이 아름다운 한 편의 서정시라는 사실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긴 시편을 끌고가는 잔잔한 어투에서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다칠까봐 어루만져 주는 품새, 힘들게 산을 오르는 하이힐 연인의 손을 잡아 주기도 하고, 자신의 보폭을 일부러 줄이는 마음도 엿볼 수 있다.  그런 시인의 마음이 왜 내 마음 같아지는가. 나만 그러할까. 마음 절절한 사랑 한 번 가져보지 못한 이 누가 있겠는가. 사랑해본 사람치고 그 사랑이 ‘천년 동안의 사랑’이 아니었던 이 누가 있겠는가.

이대흠의 「천년 동안의 사랑」은 1연 43행으로 이루어진 시이다. 비교적 긴 시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함 없이, 오히려 오래고 오랜 얘기에 깊이 빠져들었다가 문득 깨어나듯 가슴 아래께에 찡한 통증이 오는 시이다.

    

처음으로 와보네, 라는 그녀와
운주사에 갔네 빨리 온 찬바람에 말라 쪼그라진 나뭇잎들
잎들은 저마다 곱게 물들길 원했을 것이나
계절은 참혹한 운명을 선사하였네
그래도 끝끝내 제 상처를 다스려 가을을 물들인
감잎을 보며 그 감잎처럼 저물어가는 그녀에게
사랑을 말하진 못했네 노을 같은 측은함으로 나
그녀의 손을 잡았을 뿐 언제 지은 절인지
누가 지은 절인지 알 수가 없어
더 믿음이 가는 돌부처들 지나 와불 뵈러 가는 길
하필 머슴부처가 뭐냐고 부처도 주인 있고 머슴 있냐고
우리는 동시에 이맛살을 찌푸렸네
       <이대흠 詩 「천년 동안의 사랑」, 1~12행>

“처음으로 와보네, 라는 그녀와” 시인은 운주사엘 간다. 32행의 ‘하이힐’로 유추해 보건데 아마도 시인이 먼저 운주사에 가보자고 제안했을 것이다. 또한 운주사행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분명해 보인다.

왜 그곳엘 가자고 했을까? 직접적인 이유를 일러주기보다는 주변 상황으로 조금씩 조금씩 드러내준다. 그녀의 현재는 “빨리 온 찬바람”의 계절, 운주사 나무 모습으로 대신 설명된다. 그녀와 시인의 사랑은 “곱게 물들길” 원한 나뭇잎과 같았으나 “참혹한 운명을 선사하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제 상처를 다스려 가을을 물들인/ 감잎”처럼 참혹한 운명의 상처를 다스려 자신을 물들인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시인은 차마 “사랑을 말하진” 못한다. 대신 “노을 같은 측은함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을 뿐” 무엇도 알려줄 수 없어 다만 “와불 뵈러” 가자 한다.

왜 “노을 같은 측은함”일까? 무슨 사연으로 인해 헤어지게 된 두 사람의 이별이 마지막 스러지는 빛의 잔상, 잔영인 노을만큼 마음 슬픈 색깔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는 40행에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가는 길에서 “머슴부처”를 만나고, “하필 머슴부처가 뭐냐고 부처도 주인 있고 머슴 있냐고” 동시에 말하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둘의 마음이 일치한다. 와불 뵈러 가는 길, 누구도 먼저 속의 말을 하지 못하고 이러저런 다른 얘기들을 했을 테고, 마침 “머슴부처”를 만나자 그런 말을 동시에 했을 것이다. “머슴부처”는 ‘머슴인 부처’가 아니라 이 땅 ‘머슴들의 모습을 한 부처’이리라. 가장 헐벗고 가장 낮고 괴로운 머슴들을 구재하기 위해 오신 부처가 아니실까. 그걸 모를 리 없는 두 사람이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의도로 표면상의 이름이 주는 못마땅함을, 그것도 동시에 거론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두 사람은 그렇게 와불에 이른다.

   

나뭇잎 몇 덮고 누운 와불은 말이 없고
천년을 합궁하고 있는 와불을 보여주려
그녀의 손을 잡고 높은 곳으로 끌어올릴 때
나는 잠시 와불이 되어 그녀를 이불 속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네
아주 잠깐의 천년 그녀는
부론 폐사지에서 보았다는 느티나무 이야기를 하였네
처음엔 너럭바위였다고 그러나 손톱으로 두드려보니
텅 터엉 목어가 되어 울더라고
천년 세월이란 나무가 돌이 되는 시간이라고 하였네
오래된 나무의 뿌리는 누군가의 속울음으로 다 받아들여
그렇게 검어진 것이라고 쓴 적이 있네
그 뿌리 천년의 세월을 다 받아들이면
돌이 되겠지 저렇게 캄캄히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잎 내지 못하는 돌이 되겠지
나는 천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네
나무의 가지들처럼 엉킨 기억의 끝 어디쯤에
천년 전 기억이 맺혀 있을 것인데
가슴이 조금 뛰었을 뿐 그녀 얼굴이 아른했을 뿐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네
       <같은 詩, 13~31행>

와불은 “빨리 온 찬바람에” 떨어진 “나뭇잎 몇 덮고” 말없이 누워있다. 시인은 “천년을 합궁하고 있는 와불을 보여주려/ 그녀의 손을 잡고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렸고, 이 행위는 그녀에게 와불을 보여주려는 행위인 동시에 잠시 와불이 된 시인의 이불 속으로 그녀를 끌어들였던 것이기도 하다.
14~15행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된다. 13행으로 미뤄보건데 두 사람은 이미 “나뭇잎 몇 덮고 누운” 와불을 친견하였다. 그런 후 시인은 누운 와불 모습이 전체적으로 다 보이는 “높은 곳으로” “천년을 합궁하고 있는 와불을 보여주려”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올리는 것이다. 반면 14~15행은 13행에서 친견한 와불을 왜 보여주려 했는지를 언급하고 바로 그 와불이 누워있는 “높은 곳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올린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시의 전개 순서상 앞의 것이 더 가까워 보이지만 말의 뉘앙스와 시적 느낌은 뒤의 것이 더 잘 어울린다. 물론 둘 모두로 이해해도 무방하리라.
그 순간은 “아주 잠깐의 천년”이다. 천년은 너무도 오랜 시간이어서 역설적으로 표현한 “아주 잠깐의 천년”이라는 말에 목이 멘다. 그런 마음을 알았던 듯 “그녀는/ 부론 폐사지에서 보았다는 느티나무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는 너럭바위인 줄 알았는데, “손톱으로 두드려보니/ 텅 터엉 목어가 되어” 우는 나무였다는. 그리곤 “천년 세월이란 나무가 돌이 되는 시간이라고” 더하여 말한다. 둘 사이의 사랑하고 헤어진 세월이 그러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무가 돌이 되는 시간”은 “누군가의 속울음을 다 받아들여/ 그렇게 검어진” “오래된 나무의 뿌리”와 상통한다. 그녀는 “나무가 돌이 되는” 천년 세월을 얘기했고, 시인은 그러한 “누군가의 속울음을 다 받아들여/ 그렇게 검어”지고 “천년의 세월 다 받아”들여 돌이 된 시인 자신의 천년 세월을 얘기한다.
그러나 그 “천년 세월”은 결코 희망적이지는 않다. “저렇게 캄캄히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잎 나지 못하는 돌이” 될 것이다. 심지어 “천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지만 “가슴이 조금 뛰었을 뿐 그녀 얼굴이 아른했을 뿐/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잔인하리만치 곧이곧대로 얘기한다. 천년만년이 지나도 잊혀질 것 같지 않던 당시 기억이 잠시 “아른했을 뿐/ 선명히 떠오르지” 않는 것이 세월의 냉정한 힘이다.

    

가파른 길을 걸으며 하이힐을 벗어버릴까 나를 보던 그녀
나는 그녀가 맨발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 그녀를 부축하였네
나 그녀와 맨발의 세월로 돌아가게 되었다면
어쩌면 운주, 그 배에서 내리지 못했을 것이네
나는 절인 배추처럼 젖은 목소리로 나이 듦과 건강과
가족의 안부 묻는 말 따위나 하였네
처음이 아닌 것 같네, 라는 그녀와 운주사를 빠져나왔네
천 년 전 우리가 나란히 누워 사람들의 시름에 캄캄해지면서
노을 같은 분홍울음을 쏟아냈던 기억
천 년 동안 합궁하며 세상의 쓸쓸함을 다 어루만지는
바람을 자식으로 두었다는 그 사실도 잊고
운주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네
       <같은 詩, 32~43행>

그녀는 “가파른 길을 걸으며 하이힐을 벗어버릴까” 하고 시인에게 눈빛으로 동의를 구한다. 하이힐은 단지 가파른 길을 걷는데 불편한 존재만이 아니라 세상의 길, 그녀가 가고 있는 길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길의 힘들고 어려운 그녀의 운명을 벗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맨발의 세월”이란 천년 동안의 일이고, 천년 동안의 세월이다. 그리로 돌아가는 건 원래대로의 회귀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녀가 맨발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를 부축”해줄 뿐이다. 힘들고 어려운 길에서의 부축은 잠시의 위로와 힘을 더해주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해결이나 벗어남은 아니다. 시인은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녀와 맨발의 세월로 돌아가게 되었다면/ 어쩌면 운주, 그 배에서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시인은 시시하고 상투적인 “나이 듦과 건강과/ 가족의 안부를 묻는  따위”로 화제를 돌린다.

   

천 년 전으로의 원대복귀 문턱에서 시인은 현재의 길로 내려선다. 그래, “천 년 전 우리가 나란히 누워 사람들의 시름에 캄캄해지면서/ 노을 같은 분홍울음을 쏟아냈던 기억/ 천년 동안 합궁하며 세상의 쓸쓸함을 다 어루만지는/ 바람을 자식으로 두었다는 그 사실”조차도 잊는다.
그러나 그런다고 천년의 사랑이 다 잊혀질까. 천년의 사랑이 파묻혀버릴까. 설사 “맨발의 세월로 돌아가게 되었”더라도 천 년 전의 사랑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천 년 전 “그녀 얼굴이 아른했”을지라도, “노을 같은 분홍울음을 쏟아냈던 기억” “바람을 자식으로 두었다는 그 사실”조차 까마득히 다 잊어버려도 천 년 전의 사랑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운주를 빠져나온다. “처음이 아닌 것 같네”라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천년 세월이 다 들어 있다. 그게 단지 기시감일 뿐일까. 슬프고 아린 천년 사랑이다. “분홍울음을 쏟아냈던 기억”마저 아른해지고 잊혀지는 현실이어서 더욱 저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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