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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바치는 책:

움베르토 에코(1932-), <장미의 이름>(1980)

       

 

 

 

 

 

 

 

 

 

 

 

 

 

 

 

<장미의 이름>은 노수도사 아드소가 젊은 날 배스커빌 사람 윌리엄을 따라 이탈리아의 모 수도원에 갔다가 겪은 일을 기록한 수기다. 수도원장은 종교재판관이었던 윌리엄에게 아델모 사건의 수사를 부탁한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수도사들이 요한묵시록에 예언된 방식으로 죽어가고 종국에는 그들도 사건에 깊이 연루된다.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이자 탐정소설인 <장미의 이름>은 중세에 대한소설일 뿐만 아니라 중세에서쓴 역사소설(<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이기도 하다. 종교 권력(교황/수도원장-사서)과 세속 권력(황제/봉건영주)의 대립이 작품의 주된 축을 이룬다. 수도원만 놓고 본다면 지역 영주의 사생아인 수도원장과 외지 출신 장서관 사서(부르고스 사람 호르헤)의 어두운 계약’, 수도원 내부의 지역감정과 갈등이 중세의 암흑의 이면을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장미의 이름>덧없는 이름”(=기호)만 남은 지난날의 장미”, -텍스트에 관한 -텍스트이자 -물건에 바치는 또 다른 -물건이다. 수도원의 장서관은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할 만큼 많은 책과 희귀본을 소장하고 있다. 목록은 열람할 수 있으되 사서의 허락이 없으면 실제 책은 볼 수 없고 외부 반출은 전면 금지되는 폐가제를 취하는 것은 중세 책의 생산 및 유통 환경, 그 특성과 위상에서 기인한다. 책을 번역하거나 필사하고(베난티오) 아름답게 채식하고(아델모)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관리하는(베렝가리오, 말라키아 등) , 간단히 책(=지식-)은 권력이며 모든 권력은 위계를 갖는다. 장서관의 사서가 장차 수도원장으로 가는 요직인 것도, 장서관이 중세의 TO지도를 모델로 한 수학적 미궁의 복잡성을 갖춘 것도 당연하다. 희생양이 된 수도사들은 모두 금서에 손을 댄 자들, 또 대부분 그리스어를 읽을 줄 알았던 자들이다. 호르헤가 장서관의 밀실(<아프리카의 끝>)에 감춰둔 채 살인까지 불사하며 지키려 책은 대체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은 그의 비극론(<시학> 1)을 잇는 희극론로서 완전히 소실되었거나 숫제 쓰이지 않은 걸로 알려져 있다. 웃음과 희극에 관한 많은 책 중 유독 이 책만 문제 삼는 것은 젊은 수도사들 사이에서 이 이교 철학자의 권위가 너무 높은 탓이다. 웃음 관련 논의는 소설의 초반부터 활발하다. 원칙주의자에 근본주의자인 호르헤는 인간의 본()인 그리스도가 웃었다는 말이 없음을 근거로 웃음 결사 반대론을 펼친다. 여기에 맞서는 윌리엄(그리고 죽은 아델모, 베난티오 등)의 논리는 인간은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를 따른다. 웃음은 목욕과 같은 것”, “우울증의 특효약”(242)이자 사악한 것의 기를 꺾고 그 허위의 가면을 벗기는”(246) 기능을 한다는 것. 웃음을 두고 기독교 전통(특히 구약, 순수 히브리 전통)이교인 고대 희랍(나아가 라틴-로마) 전통, 또한 신학과 철학(문학)의 한 판 승부가 펼쳐진다. 자칫 고리타분한 탁상공론으로 전락할 수 있는 얘기가 이토록 흥미로운 것은 플롯의 촘촘함은 물론이거나 인물들의 또렷한 형상 덕분이다.

 

가령 로저 베이컨을 숭배하고 오컴의 윌리엄과 친분을 유지하는 윌리엄은 뛰어난 과학 지식(영국식 경험론)에 덧붙여 각종 편견에서 최대한 자유롭고 심판과 처형(종교재판관 베르나르 기)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일을 푸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다. 수시로 오류를 범하고 갈팡질팡, 더러 분을 못 이겨 호통을 치는 그의 모습이 생기롭다. 그가 당시로는 고령인 50세임에도 호리호리한 몸매에 건장한 체력을 갖춘 것도 눈에 뜨인다. 반면 박학다식에 여러 이교도 말에 능통할 뿐더러 많은 희귀본을 직접 구해온 호르헤는 스페인의 꼬장꼬장한 선비정신의 구현이다. 몹시 여윈 몸에 고령, 심지어 장님임에도(혹은 그렇기에) 극도로 발달된 다른 감각과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수도원 내에서 무소부재(無所不在)’하는 이 인물은 신비와 공포, 즉 카리스마 자체이다. 제 손으로 독약을 발라놓은 책을 먹어치움으로써 (밀실 침입을 시도하다가 통로-틈새에 끼여 질식사했을 수도원장에 이어) 스스로를 일곱 번째 제물로 바치는 결말 역시 전율스럽다.

 

내가 곧 무덤이 될 터이다. 그 비밀을 나는 나의 무덤에 봉인하리라!”(853)

 

그의 첫 웃음이자 마지막 웃음에서 평생 동안 균열과 이탈을 몰랐던 한 수도사-학자의 희비극이 엿보인다. 윌리엄이 애증의 감정을 담아 말하듯 호르헤야말로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848), 즉 진짜 악마이며 또한 철학에 대한 증오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871)에서 태어난 가짜그리스도다.

 

 

 

 

 

 

 

 

 

 

 

 

 

 

 

 

상아탑에 적()을 두되 속세’(=대중)의 각종 쾌락도 마다하지 않은 재기발랄한 석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열렬한 숭배자를 자처하며 “[모범] 독자를 위해서”(<노트>) ‘즐거운 지식의 소설을 써주었다. <장미의 이름>을 발표했을 때 에코는 이미 미학 연구자이자 중세 연구자, 이어 기호학자로서 명성을 떨치던, 볼로냐 대학의 중년 교수였다. 이후 <푸코의 진자>를 비롯해 최근작 <프라하의 묘지>에 이르기까지 그 스스로 개척한 장르의 걸작을 연이어 내놓았음에도 그는 천생 소설가가 아니라 학자-교수로 여겨진다. 상아탑에 스스로를 감금한 장님 학자-소설가(보르헤스)가 축조한 바벨의 도서관’, 즉 메타문학의 성취를 십분 흡수하되 플롯의 귀환”(<노트>)을 위해 축배를 드는 소설! 소설 속 윌리엄(아드소)과 호르헤의 승부는 소설 밖 에코(이탈리아)와 보르헤스(스페인)의 승부처럼 읽히기도 한다.

 

 

 

 

 

 

 

 

 

 

 

 

 

 

 

<책앤> 2013년 ??월호. 저 때 원고 매수를 12매로 줄이라고 하는 바람에, 남는 말들은 따로 메모를 해두었다. http://blog.aladin.co.kr/koshka75/6609199

 

-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에 "아이구 깜짝이야~"할 나이는 한참 지났다. 에코의 최근작을 번역한  선생님을 통해, 그가 건강 때문에 비행기 타기가 힘들어 한국에 못(안) 왔다, 하는 식의 얘기를 재작년인가 언제 들은 것도 같다. 하긴, 돌아가신 팔십대 후반까지 정정하셨던 할머니, 아흔을 앞두고도 정정하신 외할머니를 봐도, 그러니까 아무리 정정해도 '8+0'은 장난이 아니다. 그럼에도  참, 아이구 깜짝이야, 다. 그 정도로까지 그는 '현역'이었던 것이다. 대학 때 처음 읽은(다른 메모에 썼지만, 의자가 뒤로 젖혀지 않는 통일호 안에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장미의 이름>은 여전히, 아이구 깜짝이야, 할 만한 소설이다. 에코에겐 여러 이름이 붙지만 내게는 영원히 이 소설의 작가일 터. 영면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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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일주일 남았다. 영화 한 편 못 보고(에바 그린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싶다!) 방학이 끝났다. 몸과 마음이 모두 개강 직전의 우울에 절어 있다. 어제는 경희대 후마니타스 오리엔테이션에 다녀왔다. 원래 2학기에 <도-키> 강의만 했는데 이번 학기, 즉 1학기에 <톨스토이>를 개설, 봄학기도 다니게 됐다. 중앙선을 타고 가며 읽었던 책은 <백치> 하권. 연필로 "비오는 날 중앙선"이라고 써놓은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소설을 쓰고 싶었으리라!) 2015년 2학기, 역시나 중앙선을 타고 이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 2016년 2학기, 아마 비슷한 시간에 또 그 부분이었을 거다. 어제, 그러니까 2월 18일 논문 쓰면서 다시 그 페이지. 재작년 <백치> 때 아이는 폐렴으로 입원했고(퇴원한 뒤 수족구 걸렸고) 작년 <백치> 때 장염 걸려 집에서 쉬었고 <백치> 갖고 논문 쓰려는데 A형 독감 걸렸다. 우리 아이는 <백치>를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도 <백치>가 마뜩치 않았다. 책이 왜 이리 안 팔리냐고. 물론 표현은 이보다는 점잖아서 '대중 독자들 사이에서 반응이 좀 시원찮다'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전작보다 인기를 못 누리니 작가로선 당연히 불만. 그 전작이 <죄와 벌>인데, 헐 누가 보나, 어떻게 <죄와 벌>을 이기냐. 주제 파악을 하시라.

 

나도 이제 싫어지려 한다, <백치>. 3부에서 고골 소설 얘기 늘어놓는 장면, 4부에서 가브릴라 오누이 얘기 장황하게 늘어놓는 부분, 4부에서 므-킨이 가톨릭 어쩌고 하고 떠드는(그러다 화병 깨는데 차라리 그냥 여기서 바로 발작을 하시지-_-;;) 부분, 편집자는 이런 거 좀 안 덜어내고 뭐했냐..ㅠ.ㅠ 다른 소설은 조연이 빛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감초(?!) 역할을 해야 하는 이볼긴 장군이나 레베제프도, 죄송하지만, 너무 재미없다. 학적으로야 이런 저런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일단 그냥 소설로 읽기에, 인물로 쭉 좇아가기에 너무 매력이 없단 말이다. 이볼긴 장군은 실컷 떠들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질 때 한 번 웃겼다 -_-;;  

 

 

 

 

 

 

 

 

 

 

 

 

 

 

 

 <열린책들>의 <백치> 번역도 좋지만 나도 번역하고 싶다. 일에 순서가 있으니 일단 하던 일부터 끝내고. 암튼, <백치>를 다시 읽다가 이 부분에 꽂혔다. <백치> 하면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이 워낙 세기(!) 때문에, 또 그 밖에 강렬한 이미지들(주로 참수)이 많아서 곧잘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어제 나는 당신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어느 그림을 생각해냈어요. 화가들이란 하나같이 복음서의 얘기에 의거해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어요. 하지만 나라면 달리 그리겠어요. 나는 그리스도 한 사람만 그리겠어요. 그의 제자들도 이따금 그를 혼자 남겨 둘 때가 있었을 테니까요. 나는 오로지 어린아이 하나와 함께 있는 예수를 그리겠어요. 아이는 그의 곁에서 놀고 있는 거예요. 아마 아이는 그리스도에게 무언가 애들끼리 하는 말을 들려주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리스도는 아이의 말을 듣고 있으나 지금 생각에 잠겨 있지요. 그의 손은 무심결에 잊혀진 듯이 아이의 귀여운 머리 위에 놓여 있는 상태지요. 그는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의 시선 속에는 이 세상만큼 거대한 사상이 깃들여 있는데, 얼굴은 수심에 차 있어요. 아이는 입을 다물고 그의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고개를 들어 아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를 유심히 바라바고 있는 거예요. 태양은 뉘엿뉘엿 지고 있고요... 이게 내가 구상하는 그림이에요!”(2, 699.) / 8: 380)

 

이것은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가 므이쉬킨의 약혼녀나 다름없는 아글라야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이다. 화가 난 아글라야는 세 통의 편지를 모두 므-킨에게 건네주고(다시는 이런 편지를 보내지 말게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렇게 그녀의 편지를 손에 넣은 므-킨은 무작위적으로 편지를 읽어본다. 고로, 위의 부분은 편지를 쓴 주체인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는 물론 그녀의 연적인 아글라야, 또 이 두 여성과 연결된 두 남자(로고진은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가 모든 편지를 자기에게 보여줬다고 말한다) 등 다시금 4자가 모두 공유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킨에 의해 독자인 우리에게 공유되는 이 이미지는 홀바인의 그림과 쌍벽을 이룰 법하다.

 

 

이 그림에 대한 도-키(작품 속에선 입폴리트)의 말이 대거 참조되는 그리스테바의 이 책도 오랜만에 상기해본다.

 

 

 

 

 

 

 

 

 

 

 

 

 

 무덤 속 그리스도 주검이 말 그대로 죽음-어둠의 극한이라면(최소한의 희망마저 죽여 버리고 믿음의 씨를 말려 버리는!), 석양빛을 받으며 아이와 단 둘이 앉아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삶의 극한이다. 그럼과 동시에, ‘말씀과 행적으로 가득 한 그리스도의 삶 속에 (황야에서의 수행 외에) 유일한 휴식과 명상(사색)의 순간, 그러기에 너무도 소중한 순간일 수 있겠다. 이 그림 속 그리스도가 어쩌면 나..이 므-킨에게 원했던 모습, 그리스도의 이상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작가인 도-키가 원했던 모습일 지도. 아무튼 <백치>의 세 청춘(아글라야까지 포함하면 넷이지만)의 운명이 모두 파국을 맞이한 다음 다시 조망하는 이런 이미지, 사색에 잠긴, 고독하되 온화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역설적으로, <백치>의 깊이를 더 한다. 그리스도 옆에서 귀엽게 조잘대는 것도 같은 어린아이는 다시금 길 잃은 어린 양이던가. 어찌해도 비극의 정조는 감해지지 않는다.

 

예브게니 미로노프가 므-킨 역을 맡은 러시아 판 <백치>. 로고진 역을 맡은 배우(블라지미르 마쉬코프)는 오래 전 <마이 러브 카티샤>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된, 레스코프 원작의 <므첸스크 현의 맥베스 부인>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이기도 하다. 워낙 어릴 때(아마 2학년이었나) 봤던 영화라, 구강 성교 장면 때문에, 또 아마도 납득이 안 되는 격한 열정(?) 때문에 무척 충격을 받았던 영화이기도 하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로도 잘 알려진 작품이다. <마이 러브 카티샤>는 번안을 한 것이지만 원작의 스토리는 거의 보존되었다. 열정과 질투와 살인의 드라마이다. 배우들의 연기(대사도 별로 없고 거의 표정과 몸짓으로 표현되는데)가 무척 훌륭했던 걸로 기억된다.

 

 

 

 

 

 

 

 

 

 

 

 

 

 

 

이 영화의 여우 주연은 보다시피 저렇게 알몸을 하고 있어도 엄청나게 기품 있고 지적인 배우였는데, 그런 이미지에 일조하는 것이 볼륨감이 별로 없는 깡마른 몸매와 어딘가 서늘하고 건조한 시선이었다. 리투아니아인가 어디쪽 배우로, 미할코프 감독의 <위선의 태양>(태앙(스탈린을 말한다)에 지친 자들) 에서 여주인공 역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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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중 제일 행복한 순간은 셔틀에서 내리는 아이를 받을 때이다. 문학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생길까봐 결혼이 두려웠다는(그래서 펠리체와 끊임없이 파혼한) 카프카는, 그의 불안은, 가당찮지만, 근거가 영 없지는 않다. 아무래도 그의 문학은 '가장의 근심'과는 너무 거리가 멀지 않나. 게으름의 호사를 누리기 힘드니(문학은 게으름의 소산인데!) 문학이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것 같은 불안이 수시로 든다. 하지만 잠깐만 정신을 차려봐도 이건 헛소리다. 문학은 게으름의 소산이지만, 그럼에도 부지런함의 소산이다. 봄 신상품도 좀 사고(헐헐^_^) 몸과 마음을 다잡자. 마흔 넘으니 다 몸 싸움이다.

 

- "**아, 오늘 생새우 야채죽 맛있게 먹었어?"(식단표에 적힌 어제 아침 간식 메뉴)

- "아니, **이 당근죽 먹었어."
- "뭐?? 새우는 없었어?"

- "없었어."

- "그럼 당근만 있었어?"

- "아니, 부추도 있었어." (이후, 새우 볶음밥에서 새우만 찍어 먹기 시작..ㅋ)

어조와 억양이 좀 어눌해도 이렇게 '핑퐁 대화'도 잘 하건만 왜 아직 밥도 잘 못 떠먹는 것이냐, 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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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1564-1616), <리어왕>(1606)

- 인간 본연의 어리석음에 대한 단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노년에 이른 브리튼의 왕 리어가 자식들에게 효성의 정도에 근거하여 영토를 미리 물려준 다음 겪는 불행을 다룬 비극이다. 교훈인즉, 프로이트의 명쾌한 정리대로 첫째,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재산을 주지 말 것, 둘째, 감언이설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 것이다. 달리 말해 이토록 명백하고 진부한 의미를 전하기 위해 <리어왕>이 쓰였을 리 없다. 프로이트조차 충격이라고 한 이 작품의 격렬한 정신적 흥분”(프로이트, 세 상자의 모티브)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리어왕>11, 사후의 유산 분쟁을 우려한 리어왕이 생전에 이 문제를 매듭짓고자 하는 것은 충분히 상식적이다. 당혹스러운 것은 분배의 근거이다. 리어왕은 세 딸들에게 아비인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로 표현해보라고 한다. 화려한 수사를 동원한 첫째 딸(고너릴)과 둘째 딸(리간)에 이어 셋째이자 막내딸 코딜리아는 “(할 말이) 없습니다하고 운을 뗀 다음 낳아 기르시고 사랑해주신 것에 대한 합당한 의무복종하고 사랑하며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다. 금방 리어왕의 분노를 산 이 답은 정녕 어리무정함에도 진실한 것으로서 본능에 기초한 부모의 자식 사랑과, 반대로, 윤리(“도리-”)에 기초한 자식의 부모 사랑이 갖는 본질적인 모순을 환기한다.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 엄연한 진리인데,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어린아이처럼 발악하는 늙은 아비의 투정과 분노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우리에겐 알려지지 않은 리어왕의 과거를 상상해보자. 현재의 막대한 부와 광활한 영토가 암시하는바, 분명 그는 용맹함과 현명함을 두루 갖춘 중세의 왕-전사의 전형이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을 그가(세 딸을 낳아준 아내는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 지금껏 가장 사랑해온 막내딸을 겨우 몇 마디 말 때문에 땡전 한 푼 주지 않고 내쳤다. 이 황당무계한 간택을 동기화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뿐이다. , 리어왕은 극이 시작될 때 이미 노망에 걸렸거나 그에 준할 만큼 이성과 판단력이 마비된 상태이다. 요컨대 그는 한 시절 위대했을 수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어리석고 편협한 인간의 상징이며, 그의 시련과 파멸은 그것에 대한 단죄가 아닐까 싶다. 문자 그대로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닐 정도로 미친 리어가 글로스터에게 하는 말대로 우리는 모두 바보들이다.

 

우리는 울면서 여기 왔어. / 알다시피 공기 냄새 처음으로 맡았을 때 / 앙앙대며 울었어. 내 설교 잘 들어봐. () / 넓고 넓은 바보들의 무대로 나왔다고 / 태어날 때 우는 거야.”(144)

 

비극의 교과서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주인공의 비극이 운명의 아이러니(신탁을 피하려다 오히려 아버지인 줄 모르고 살해하고 어머니인 줄 모르고 동침함)에 의해 발생한다면, 리어왕의 경우에는 오셀로의 오해, 맥베스의 야망, 햄릿의 우유부단함처럼 그 자신의 잘못이 문제이다. 모든 것이 자신의 어리석음과 판단착오에서 기인한 것임에도 큰딸을 무자비한 언어로 저주하는 아비의 모습도 추하기 짝이 없다.

 

이 여자의 자궁에 불임증을 옮기고 / 생식 기관 다 말려 썩어빠진 그 몸에서 / 그녀를 존중해 줄 아이는 절대 아니/ 태어나게 하소서.”(51)

 

리어왕의 비극과 나란히 전개되는 글로스터 백작의 비극도 흥미롭다. 그는 서자(에드먼드)의 계략에 말려 적자(에드거)를 쫓아내고 콘월 공작(리간의 남편)에게 두 눈마저 잃게 된다. 두 눈이 뽑히는 순간 비로소 진실을 보게(알게) 된다는 역설과 선량하지만 어리석은 성격에 있어 글로스터는 리어왕(‘눈 뜬 장님’)의 변주이다. 자식들의 경우에도 리어왕의 첫째 딸과 둘째 딸이 악의 전형인 것과 비슷하게 에드먼드는 서자로서의 열등감을 악행으로 풀어낸다. 그의 형제살해 욕망과 아비살해 욕망은 <리어왕>의 사건을 이끌어가는 동력이기도 하다. 미남인 그는 두 왕비(고너릴과 리간)를 동시에 유혹하면서 이간질하고(결국 언니가 동생을 독살하고 자살한다) 코딜리아를 사형에 처한다. 반면, 그의 형 에드거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나 불쌍한 톰(거지 톰) 행세를 하다가 부녀간의 정쟁에 휘말려 불운을 겪은 아버지를 거두고 반란자가 된 동생을 처단함으로써 효와 충을 실천한다. 아무래도 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에 가까운 그는 최악을 말할 수 있는 한 최악은 아니다.”와 같은 많은 경구를 남길 뿐더러 올바니 공작(고너릴의 남편), 켄트 백작과 함께 최후까지 살아남는다. <리어왕>의 마지막 대사도 그의 몫이다.

    

최고의 노인이 최고로 견디셨소. 젊은 우린 / 그만큼 보지도 살지도 절대 못할 겁니다.”(177)

 

저 말이 암시하듯, 리어왕의 비극이 의미심장한 것은 그가 감내야했던 크나큰 고통 때문이다. <리어왕>리어왕의 속죄”("The Redemption of King Lear")로 정의한 고전적인 독법(브래들리,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그래서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리어왕의 방랑(특히 3막 폭풍우 장면)과 광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가장 소중한 딸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다는 점이다. 코딜리아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녀는 1막에서는 그의 죄(어리석음과 판단착오)를 완성하기 위해, 5막에서는 그의 벌(딸의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 등장한다. 두 언니의 악덕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처럼 그녀 역시 아무런 근거 없이 선의 상징이 되어 민담 속의 착하고 예쁜 셋째 딸의 역할을 맡는다. 아비를 구하기 위해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귀국했다가 패배하여 체포된 그녀의 말이 그녀의 존재 이유를 확증해준다. “최선의 의도로 / 최악을 부른 건 우리가 처음은 아니에요.” 그녀의 죽음(선의 패배)을 통해 권선징악을 향한 독자와 관객의 소박한 열망은 배반당하고 신 없는 세계의 황량함과 삭막함이 다시 한 번 강조된다 

 

 

 

 

 

 

 

 

 

 

 

 

 

 

 

<리어왕>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제일 홀대를 받아온 작품이라고 한다. 다소 역설이지만, 좀처럼 매력적인 인물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작품 자체와 주제가 빛나는 듯하다.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에서 그리고리 코진체프 감독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와 함께 대륙적 기상이 두드러지는 영화 <리어왕>(1971)을 탄생시켰다. 일본의 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역시 자신의 후기 페르소나인 나카다이 타츠야를 내세워 셰익스피어의 <리어왕>보다 더 훌륭한 리어왕<>(1985)을 선보였다. 장 뤽 고다르의 <리어왕>(1987)도 넓은 의미에서 이 작품과 셰익스피어 대한 오마주이다. 국내의 독자 사이에서 살짝 오역이 되어 더 멋스러워진 문장으로 인기를 누려온 대사(“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도 리어왕의 절규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 날 아는 사람? / 이건 리어 아니다. / 리어가 이리 걷고 말하나? / 두 눈은 어디 갔어? / 지능이 줄었거나 분별력이 마비됐어. - / ! 자는 거야? 깬 거야? 분명코 그건 아냐. /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사람?”(49)

 

--- <책앤> 2015년 9월(?)

 

마지막에 언급한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는 한때 이름을 날린 한 작가의 (아마도) 데뷔작의  제목이었다. 요즘은 뭐하시는지, 잠시 궁금하다.  

 

 

 

 

 

 

 

 

 

 

 

 

 

 

마지막에 영화 얘기 많이 썼는데, 러시아 판 <리어왕>도 후덜덜인데, '영국적'(=섬)이라기보다는 정녕 '러시아적'(=대륙적)이다. 특히 리어의 포스.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는 다들 아실 터. 화려한 색감, 원작보다 더 빛나는 스토리(번안의 힘이란!), 뛰어난 연출과 연기 등 역시 거장의 힘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리어를 연기한 나카다이 타츠야는 <카게무샤>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놀라운 건 이 배우가 초기작에도 꾸준히 나왔다는 것. <요짐보>에도 나왔다고 해서 다시 한 번 찾아봤는데, 정말 존재감이 낮았다(?).(하다못해 <7인의 사무라이>에도 출연 ㅋㅋ) 그도 그럴 것이, 젊은 날 구로사와 아키라의 페르소나라고 할 법한 토시로 미후네의 존재감이 너무 컸던지라, 뭐, 다른 배우들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 한데, 그런 배우가 꾸준한 수련을 거쳐, 보다시피 노년에는 그가 아니면 안 될 명연기를 선보인다. 

 

 

말미에 언급한 고다르 영화는 스킵하여 대충만 봤는데, 자막도 없어서 뭐 거의 봤다고 할 수 없다 -_-;; 다만, 그 존재를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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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오베 얘기가 처음(혹은 제대로) 나오는 것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인가. 이 책을 제법 꼼꼼히 읽었지만(그래서 작은 글도 하나 썼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 정도 나에겐 재미가 없었던 얘기. 요지인즉, 아들 딸이 골고루 무척 많은(7명씩이었나, 10명씩이었나, 암튼 많이도 낳았다!) 어머니(이자 동시에 테바이(?)의 왕비)인 니오베는 자신의 행복을 떠벌리며 오만하게 굴어 신들에게 혹독한 벌을 받는다. 결국 그렇게 자랑스러워한 모든 자식들을 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화살에(맞나?) 잃게 된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물론 '신'에 대한 인간의 오만에 대한 응징이다. 이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신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 인간이여, 니 주제를 알라.

 

지금 니오베 얘기는 다른 식으로 의미심장하다. 여자에게 엄마, 그 이름과 자리는 무척 놀라운 것이다. 지금도 가능하다면 최소 둘은 낳고 싶은 욕심, 어느 여자에게나 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둘이 뭐냐, 낳을 수 있다면, 키울 수 있다면 니오베처럼 많은 아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으면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니오베가 왕비니 그 새끼들은 모두 왕자, 공주다. 이미 남아선호 사상은 거의 없어졌고, 동생들 부부를 봐도, 아들 혹은 딸에 대한 욕심도 말하자면 이렇게 자식을 많이, 두루두루 갖고 싶은 욕심의 연장인 듯하다. 아들이 있으니 딸고 갖고 싶고, 딸이 있으니 아들도 갖고 싶고, 심지어 빨리 결혼해 이십대에 두 아이 낳은 어느 후배 말대로, 아들딸 다 있으니 한 '세트' 더 갖고 싶고. 엄마로서의 여자의 욕심도 끝이 없다.  그 다음, 아이 낳고 나면, 극성 엄마 아닌 엄마 없다. 아닌 경우는 친모가 아니거나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거나.

 

애초 엄마의 자리를 꿈꾸지 않았던 탓인지, 엄마로서의 내 자리에 깜짝 놀라곤 한다. 더 정확히, 내 안의 모성애에. 아마 세상에서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해온 여동생이 더더욱 놀란다. 자기처럼 성격 좋은 사람도, 평생 좀처럼 화를 안 내는 사람도 두 아이 엄마로서는 매일 짜증의 연속이라고. 반면, 나는 걸핏하면 화를 내는 성격인데, 오히려, 애 낳고 (적어도 아이에겐) "보살"됐다고. 맞다, 아이가 너무 좋다. 하지만 이건 동생도 나의 24시간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아이에게 엄마가 절대적인 존재인 건, 절대적으로 맞다. 엄마와 아이는 원래 한 몸이었다. 정자 한 방울에 어떻게 비기랴.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사랑은 아이를 키워가며, 아이와 상호 작용하며 형성된다.  제삼자는 한마디로 못 알아듣는 아이의 말을 엄마는 다 알아듣는다. 심지어, 말이 아닌 표정이나 몸짓으로만 표현되는 의사도 엄마는 다 이해한다. 아이는 어릴 수록, 약할 수록(정신 박약 포함), 아플 수록 더 엄마만 찾는다. 우리 아이가 엄마한테 많이 집착하는 것도, 발달 지연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진즉 인정한 터이다. 옛말 다 맞다. 눈 먼 놈이 효도하고, 못난 놈만 내 자식이다. 잘난 놈은 결국 부모 품을 떠나게 돼 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최대한 멀리. 적당히 잘난 놈은 국가의 자식, 더 잘난 놈은 세계의 자식, 예수같은 자는 한 여자 마리아의 자식이 아니라 온 인류의 자식이다.

 

아이는 무한히 사랑스럽지만 육아는 너무 힘들다. 모성, 모성애는 물론 본능이지만,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언젠가 읽은 권보드래 교수의 칼럼대로, 사회가 은연중에 작당, 모의를 한 건지도 모른다. 엄마인 네가 다 책임져, 넌 엄마잖아, 모성은 위대해! 이런 식으로. 더 극단적으로, 부모자식간의 범죄를 일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가면 문제는 단순해질 수 있으나, 이 역시 비겁한 일일 수 있다. 요즘 부모가 어린 아이를 학대하거나 심지어 살해하는 뉴스가 빈번하다. 대부분의 반응은 경악인데, 특히 엄마가 범행의 주체라면 더 경악한다. 엄마란 그런 존재이다. 하지만 요즘 생각은 좀 다르다.

 

 

 

 

 

 

 

 

 

 

 

 

 

 

 

통상 살부(살모)에 대한 논의는 제법 활발하다. 세계문학사의 대표적인 텍스트 세 편, 위의 것이다. 그 반대(?)는 어떠냐. 즉,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것 말이다. 이 역시 연원이 깊다. 크로노스(시간)가 가이아(땅/대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자식을 삼키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도 <변신 이야기>던가. 아무튼 유명한 일화. 고야의 소름 돋는 그림으로 더 유명하다.

 

아마 저 신화 자체는 시간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여기에는 또 남자 대 남자, 즉 부자 간의 권력 다툼이 개입되니 문제는 또 복잡해진다.(헐, 우리의 사도세자!) 잘했다는 것이 물론 아니고, 불가피했으리라 여겨지는 어떤 지점은 분명히 있다. 아무렴, 아버지가 자식을 집어삼키는 것의 공포는 정말, 후덜덜이다.

 

돌도 안 된 아이, 심지어 백일 전후한 아이를 그냥 방치한 것에 덧붙여 사실상 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엄마들이 있다. (최근의 그 냉장고 냉동실 사건은, 참, 소설의 내용이라고 해도 어처구니없다..ㅠ.ㅠ 토막 이후에 치킨이라는 이 도저한 산문성은 뭐냐...ㅠ.ㅠ)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나도 응당 "세상에, 엄마라는 사람이!"라고 쉽게 말했을 터이다. 하지만 막상 아이를 낳고 4년 반 정도  키워 보니 "오죽하면!"이라는 소리도 나온다. 내 뱃속에서 나와 호흡하며 키운 아이를 세상 밖으로 빼내고, 오직 나밖에 몰라 죽자사자 나한테 매달리는 핏덩어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까지  분명히 몇 단어로 요약이 안 되는 복잡한 정황이 있었을 것이다. 엄마 자체의 몸과 마음의 건강, 주변 인간들의 무성의(심지어 폭력), 때론 아이 자체의 문제(심지어 장애에 가까운 질환이 있거나) 등등. 마지막 요소도 무척 심각하다. 많이 보채고 떼를 심하게 쓰는 것도 어느 지점에서는  약물 치료까지 요하는 장애이다. 가령 흔히 말하는 adhd는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그 심각성을 모른다. 학동기, 이미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되는 나이에서 아이의 인성이나 행동이 지나치게 문제적일 때는 엄마로서 더 좌절할 것 같다.   

 

'모성'의 메타퍼들이 있다. 지난 번에도 얘기한 울리츠카야의 소설 중 하나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박경리의 <토지> 역시, 굳이 작가가 여성이어서라기 보다는(물론 이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겠다 - 그리고 여자가 여자처럼 쓰는 건 나쁜 게 아니다) 소설의 문체나 어떤 분위기 때문에 항상 그런 느낌이 들었던 듯하다. 겸사겸사, 어떻든 이 소설은 최서희의 일대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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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에 낮잠이 들면 어떡하나, 정말 난감하다. 내 몸도 힘들지만, 남의 몸, 즉 아이의 몸을 건사하는 것은 그에 비길 바 아니다. 컨디션 조절이 잘 안 되는 것도 역시나 발달 지연의 일부일 터. 요즘은 모든 것을 다 여기에 갖다 붙이는 비겁한(?) 버릇까지 생겼다 -_-;; 아이의 지연 혹은 장애보다 더 무서운 것은 타인의 시선을 자꾸만 의식하는 나의 소심함인가, 에효. 그러게 '맷집'이 필요하다.

 

몇 달 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곧잘 듣던 아이와의 대화. 1인칭 대명사를 잘 못 쓰던 때의 일이다.

- **아, 싸우자! 엄마는 황산벌에 계백할 테니까 너는 맞서 싸운 관창 해.

- 싫어. **는 역사할 거야. 역사는 흐른다~

 

한 일주일쯤 전, 잠자리에 들어 뭔가 열심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런 말을 한다.  

- 엄마, 고추는 매운데 왜 내(**이) 고추는 안 매워? 먹는 고추는 매운데 사람 고추는 왜 안 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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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점의 꿈을 접은 것은 좀 더 이후, 대학 다닐 때였다. 청년 모비딕은 대학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매일, 하루 종일 책을 나르고 꽂고 빼고 만지고 정리했다. 한마디로 책과 더불어 살았다. 책과 부대끼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작 책 속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책의 향기 보다 종이와 먼지와 곰팡이 냄새와 싸우는 시간이 더 많았다. 서적상이 웬만한 작가나 학자보다 더 박식한 다독가인 것은 정녕 딴 나라 얘기였다. 하루 종일 몇 십 권, 때론 백 권 이상의 책을 정리하고 나면 삭신이 쑤셨고 이라는 청각영상만 떠올려도 혐오감과 공포감이 밀려왔다. 급기야 책이 그의 악몽의 주인공이 되기에 이르렀다.

꿈속의 그는 한 평 남짓한 방에서 모로 누워 곤한 잠을 자고 있었다. 갑자기 벽과 한 몸이 된 서가가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빼곡히 들어차 있던 책이 그를 덮쳤다. 두툼한 <자본>의 모서리가 제일 먼저 떨어져 그의 척추 아랫부분을 툭 쳤다. 소프트카버여서 충격과 통증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잠이 확 달아났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는 찰나 <이방인>의 모서리가 그의 접힌 몸의 정중앙, 생식기에 떨어졌다. 짧고도 격한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뒤로 젖히는 순간, <존재와 시간>이 직사각형의 자세 그대로 목젖이 보일 것 같은 그의 목 위로 고스란히 떨어졌다. 참수가 완료됨과 동시에 책들이 그의 머리통과 몸통 위로 와르르 쏟아져, 그는 그대로 책 밑에 매장되었다. 꿈속의 그의 삶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꿈의 후반부에서 그는 책의 칼날에 댕강 잘린 목을 천연덕스레 다시 붙인 채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의 등짝(그것은 무한대로 넓고 두툼했다!)에는 니체 전집, 프로이트 전집, 카뮈 전집, 이상 전집을 비롯하여 각종 세계문학전집, 각종 한국문학전집이 얹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양손(이 역시 무한대로 컸다!)에는 그가 사놓고, 혹은 빌려놓고 읽지 않은 각종 책들이 들려 있었다. 이 벌이 영겁의 세월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는 책을 몸에 붙인 채 정작 읽지는 못하는 만성고통에 길들어져 갔다.

한없이 둔중한 와중에 갑자기 뭔가 저릿하고도 찌릿한 느낌. 요의와 변의를 동시에 느끼며 그는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기도 전에 요란한 선풍기 소리가 귀를 때렸고 온 몸을 적셔놓은 끈적끈적한 땀의 촉감과 냄새가 감지되었다. 일순간 불쾌지수가 어마무지하게 치솟았다. 눈을 떴다. 사지와 몸통을 괴롭힌 묵직한 압통의 진앙은 한쪽 벽에 세워둔 서랍장 위에 얹어놓은 겨울 이불, 그리고 세간살이 몇 개였다. 괜찮아, 사장이 되면 괜찮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공동욕실 겸 화장실로 달려갔다. 찬물에 땀이 씻겨 내려가면서 정신이 명료해졌다. 과연? 회의가 들었다. 사장이란 항상 하얀 목장갑을 끼고 책 상자를 나르거나 맨 손으로 주판을 튕기며 장부를 정리하는 자가 아닌가. 글쎄. 청년 모비딕은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속에 열어두었던 서점 문도 영영 꼭 닫혔다.

(...)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무슨 사건이냐마는 이십대 때는 마구잡이로 하던 이 일이 이제는 정말 무슨 벼슬이 돼 버렸다. 왜 이리 안 써지는 것이냐, 하는 내적인 문제도 있다. 물론, 이게 제일 큰일, 제일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1월, 계획에 없던 소설창작 강의를 두 회 하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쓰는 글을, 그러니까 글 자체와 쓰이는 행위를 보고서 얻은 깨달음(!)이 크다. 뭐, 거의 에피퍼니(조이스냐 ^^;;) 수준이다.  한때는 나도 가졌었으나 이제는 없는 것, 그 젊음(=치기)을 무엇으로 보상할 것이냐. 결국은 성실이다. 이것은 농부인 아버지가  정한 우리 집 '가훈'이기도 하다.  정작 당신은 오히려 게으름-과에 가깝지만, 생각함에 있어서만은 '성실'하셨던 듯하고 거의 노동 불능 상태인 지금은 더 그러신 듯하다... 육신이 맛이 가니 정신은 더 맑아져...-_-;;

 

두 번째로 시간의 부족을 꼽을 수도 있겠으나, 이거야말로 염치 없는 핑계, 헛소리이다. 아니, 소설가가 소설 쓰느라 바빠야지, 딴 짓, 다른 일 한다고 바쁘면 그게 소설가냐. 특히 장편을 쓰기 위해서는 정녕 두루마리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이 여의치 않다 함은 그만큼 열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밖에 그럴 듯한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다시금 오직 내적인 이유여야 한다. 즉, 장편이 나의 '영혼의 형식'이 아니다, 이런 것. 간단한 예.

 

 

 

 

 

 

 

 

 

 

 

 

 

 

 

 

톨스토이와 살풋 동시대인이기도 한 체호프는 쟁쟁한 대가들의 제자-후배답게 장편에 대한 갈망이 컸지만, 본인의 재능은 아무래도 단편(기껏해야 중편)에 한정되었다. 적어도 그의 잘 쓴 소설은 모두 중단편이고, 지루한 소설은 다 (도-키, 톨-이에 비하면 엄청 짧지만!) (경)장편이다. 에드가 앨런 포우도 단편이 걸작들이고, 그 다음, 이 경우 응당 얘기되어야 하는 보르헤스는 그 문학의 체질상, 또 원칙상 장편을 쓸 수 없는(쓸 필요도 없는) 작가이다.

 

 

 

 

 

 

 

 

 

 

 

 

 

 

75년 1월 생이고 93학번인 나는 굵직한 장편을 읽으며 문학의 세계로 들어섰다. 물론 중학교 때 필독 단편을 거쳤지만, 문학에 대한 꿈은 아무래도 장편을 통해 다져졌다.  굳이 전공인 도-키를 비롯한 러시아 소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국 소설의 경우에도 박경리 [토지], 박완서 [나목]을 비롯한 많은 장편들 이 곧 소설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항상 쪼가리(?!) 글 밖에 못 쓰는지. 그때  카프카가 나타나 위로를 해주었으나, 이것도 이십대 얘기이다. 서른 되기 전에 <이방인> 정도는 쓰겠지. 그 서른도 벌써 십여년 전에 내 몸을 뚫고 가버렸다. 그 흔적이  배와 허벅지의 군살로, 얼굴과 목, 손등의 주름으로 남았다. 

 

 

 

 

 

 

 

 

 

 

 

 

 

 

 

 

소설과는 무관하지만,  정초부터 집안에 '우환'이  크다. 아이의 염좌, 깁스에 이어, 서방이 죽을 뻔하다 살아나 나에게 이런 존재가 있(었)음을 아주 강하게 각인시켰다.  (초기 바흐친 말대로) 흡사  통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신체의 일부 같다. 다행히 얼굴 몇 군데 꿰매고 코뼈 수술을 하는 정도 마무리 되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새삼, 내가 어린 놈, 늙어가는 놈 등 두 남자와 살고 있음을, 심지어 그 두 놈을 키우고(!) 있음을 환기하곤 화들짝 놀라버렸다. 뭐냐, 난 내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들단 말이다, 이것들아!  사고 좀 그만 쳐라, 아웅~

 

 

 

 

 

 

 

 

 

 

 

 

 

 

 

 

아이 키우는 것이 무슨 유세는 아니지만, 이제는 이것이 소설을 읽는 하나의 잣대처럼 작용하는 듯도 싶다. 하루키가 환갑을 넘기고도 여전히 순정만화 같은, 2D 일본 애니메이션 같은 소설을 쓰고 있는 것도 그의 무한한 자유(그는 여전히 대학생이다!)와 무관하지 않을 터. 한편, 처음부터 우리에겐 '아줌마' 작가였던  그들의 필력과 ,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웅숭 깊은 시선 역시, 명실상부한 아줌마가 된 나를 자극한다. 

 

 

 

 

 

 

 

 

 

 

 

 

 

 

어느 문화권이나 '아줌마' 작가는 있다. 언젠가 <창비>에 서평도 썼던 작가.

 

 

 

 

 

 

 

 

 

 

 

 

 

 

집안의 우환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적잖이 줄었으나 그렇기에 그 틈새에 낀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다.  툴툴대지 말고 쓰자. 쓰고 쓰고 또 쓰자. 

 

나는 서른 살 때 멋진 솜씨를 발휘했다. <구토>를 쓴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확언하지만 아주 진지하게, 내 동족들의 정당화될 수 없는 씁쓸한 존재를 묘사하고, 나 자신의 존재는 시비의 대상에서 제외해 버렸다.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로캉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내 삶의 곡절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이었다.(사르트르, <말>, 267-268) 

한 줄이라도 쓰지 않은 날은 없도다. / 이것이 내 습성이요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쓸 필요가 있다. 그래도 무슨 소용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교양은 아무것도, 또 그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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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하루종일 봤다. 학구적인 그대, 좋아 ㅎㅎㅎ

 

하지만 역시 육아는 힘들어 아침에 모셔다(!) 주고 하원 시간을 빨리 하는 중. 깁스를 하고도 눈 구경을 하고 싶냐, 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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