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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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 듣는 음악보다 글로 보면서 느끼는 상상 속의 음악이 더 아름답다고 느껴질 줄이야. 클래식은 전혀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상상 속에서 내 맘대로의 음악을 상상하며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다. 사실 소설을 읽다가 소설 속 콩쿨 음악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유튜브를 찾아서 해당음악을 들어보기도 했지만, 역시 내 머릿속의 상상 음악이 더 좋았다. 사람의 머릿속에 너무나 실제 처럼 대상을 묘사해서 콕콕 박아주는 온다리쿠의 힘은 대단하다. 첫번 째 읽었던 온다 리쿠의 소설은 [밤의 피크닉] 이란 책이었다. 고등학교에서 수학여행 대신 하룻밤 꼬박 전교생이 함께 떠나는 야간보행제에 대한 얘기였는데, 밤새도록 걸으면서 아이들끼리 나누는 시시껄렁한 얘기 부터 맘 속에 숨어있던 비밀 얘기들 , 걸을수록 달라지는 풍경들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선선한 가을밤에 친구들과 함께 실제로 걷고 있는것처럼 느끼며 단숨에 다 읽었던 적이 있다. 온다 리쿠는 확실히 생생한 묘사의 달인이다.


꿀벌과 천둥은 보통 사람들에겐 별로 친근하지 않은 클래식 피아노 콩쿨에 관한 이야기다. 거기다 700페이지나 되는 엄청난 분량의 책 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날개 단 것처럼 엄청난 스피드로 술술 읽힌다. 나는 이틀만에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어버렸다. 그 힘이 뭘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때 우리가 엄청나게 열광했던 슈퍼스타K와 같은 감동과 드라마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재는 피아노 콩쿨이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재능있는 사람들이 대회에 참가해서 자신의 능력을 뽐내고, 서로 우정도 쌓으며, 그들 사이의 미묘한 실력 차이를 가늠하는 심사위원들에게 감탄하기도 하고, 누가 우승자가 될지 마음 졸이며 지켜보는 마음, 그 모든 것이 슈스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 감동과 두근거림의 드라마가 이 소설속에 다 담겨있다.


이 소설은 요시가에에서 벌어지는 콩쿨의 예선 1차부터 시작해서 본선 대회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열 여섯살의 피아노 천재이자 꿀벌왕자 가자마 진, 라틴계의 잘생기고도 실력까지 좋은 피아노계의 엄친아 마사루, 어릴적 천재 피아노 소녀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의욕을 잃고 피아노 업계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에이덴 아야, 직장인이지만 자신의 꿈을 이뤄보기 위해 잠도 줄이고 돈도 투자해가며 1년여간 준비해서 대회에 출전한 아카시 등 다양한 배경과 성격을 가진 주인공들의 얘기가 드라마 인듯, 현장 스케치 인듯 다채롭게 펼쳐진다. 한명 한명의 캐릭터가  무척 분명하고 개성이 강해서 머릿속에서 그들의 얼굴을 직접 본 듯한 생생한 느낌이 든다. 


피아노를 배운적도 없고, 심지어 집에 피아노도 없이 양봉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유랑하듯 떠돌아 다니는 가자마 진은 얼마전 세상을 떠난 피아노 거장 유진 폰 호프만의 제자이다. 제자를 두는 것에 엄격해 콩쿨의 심사위원들 조차 호프만의 제자로 완벽히 인정받지 못했는데, 당당히 호프만 선생님의 추천장까지 받고 나타난 정체불명의 소년 가자마 진은 심사위원들의 질투로 인해 초반에 분노와 미움을 받기도 하지만, 뛰어난 그의 실력은 결국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데 성공한다. 그는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에 신비로운 기운을 선사하는 아이다.  마사루와 아야는 어릴적 소꿉친구로 만나서 같은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는 친구인데 마사루가 프랑스로 떠나면서 헤어졌다가 콩쿨에서 기적적으로 다시 만났다. 핑크빛이 감도는 이들의 사이가 소설에 긴장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 속 흔한 천재들 가운데 홀로 평범한 범재로써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카시다.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함으로써 느끼는 순수한 기쁨을 콩쿨을 하면서 점점 깨달아가는 그를 보면서, 우리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다. 이들의 아름다운 우정을 보는 것도, 콩쿨에서 경쟁을 하는 와중에도 서로를 보며 더욱 자극받고 성장해 가는 모습도, 또한 부족함을 느끼며 좌절하는 모습들 마저도 다 좋았다. 


그들이 콩쿨에서 연주하는 곡들은 제목을 들어도 잘 모르는 곡들이지만, 그 곡들이 연주될 때 느껴지는 풍경들을 글로 너무 아름답게 표현해 놓았다. 이 책의 표지를 보고 새삼 표지 한번 기가 막히게 잘 뽑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꽃과 나무가 흐드러진 들판에서 꿈결같이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듯한 행복감을 느꼈다. 음악 이라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글로만 이루어진 소설에서도 사람들은 머릿속에 저마다의 음악을 가지고 있어 상상만으로도 행복해 질 수 있으니까. 



"음, 꽃꽂이는 음악하고 비슷하네요."

"그래?"

진이 가위를 다다미 위에 가만히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재현성이라는 점에서 꽃꽂이하고 똑같이 찰나에 지나지 않아요. 이 세상에 계속 붙잡아놓을 수는 없죠. 언제나 그 순간뿐, 금방 사라지고 말아요. 하지만 그 순간은 영원하고, 재현하고 있을 때는 영원한 순간을 살아갈 수 있죠."

< 꿀벌과 천둥 p.500>


찰나에 지나지 않는 음악이란 녀석을, 자신이 원할 때 붙잡아서 언제나 영원한 순간을 살아갈 수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은 자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행복하게 하기 때문에 그 힘이 더 크다. 

음악의 대단함과 아름다움, 이야기의 감동을 동시에 전해준 작가가 일본 서점대상 과 나오키상을 최초로 동시 수상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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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파이어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최민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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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욕설이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대화들이 오가는 소설을 읽었다. 이런 "강아지"," X같은" 단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아주 와일드한 이 소설은 미국 뉴욕주 북부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소녀들이 사회의 부조리에 대응해서 만든 비밀조직 '폭스파이어'에 대한 이야기다. 소녀들의 조직이라고 해서 무시할 것이 못된다. 왠만한 남자아이들보다 깡다구 있는 여자아이들의 무서운 모임이니까.  요즘 말로하면 걸크러쉬를 뿜뿜하는 아이들이라고나 할까.  그녀들은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서로에게 사랑과 충성을 맹세하는 아이들이다. 자기들만의 의식을 통해 어깨에 타오르는 불 모양의 문신을 하고, 상처에서 난 피를 서로 비비며 피를 함께 나눈 자매라고 선언한다. 


소설은 폭스파이어의 멤버 중 하나였던 매디가 연대기 작가로서 조직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아 정리한 문서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자신이 겪었던 경험담이자 한명의 관찰자로서 이 조직이 어떻게 만들어져 활동을 시작했으며, 어떻게 불타올랐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 그 불꽃이 사그라들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렉스, 매디, 리타, 골디, 라나로 이루어진 이 조직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렉스이다. 범상치 않은 몸놀림과 용기, 리더십을 갖추고 소녀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령관이다. 폭스파이어가 만들어지고 처음 그녀들이 한 일은 조직의 일원인 리타에게 수업시간마다 성희롱을 하고, 은근슬쩍 가슴을 만지기도 하는 변태 수학선생님에게 복수를 하는 일이다. 선생님이 자신의 잘못을 알 수 있도록 선생님의 차에다 커다랗게 낙서를 해놓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른채 빨간 글씨로 자신은 수업시간에 학생을 성희롱하는 수학선생이라는 글씨가 써진 자동차를 몰고 시내를 돌아다녔던 선생님은 결국 동네와 학교에서 엄청난 모욕을 당하고는 결국 선생님을 그만두고 먼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다. 폭스파이어의 첫번째 승리인 셈이다. 


이 일에 용기를 얻은 아이들은 매디의 삼촌이 매디를 성희롱하려는 현장을 덮쳐 곤죽이 되도록 다함께 패주기도 한다. 그 삼촌은 소녀들에게 얻어맞았다는 것이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소녀들을 피해다닌다. 원래는 비밀조직으로 시작되었던 이 조직은 점점 사람들 사이에 어떤 존재로 점점 인식되기 시작한다. 어른들에게는 두려움의 존재임과 동시에 또래 아이들에게는 우러러보는 존재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여자를 우습게 보는 남자들을 향한 적대심을 표현하는 비폭력적인 행동에 그쳤던 그녀들의 행동은 점점 과격해지고, 대담해진다. 렉스는 폭력과 절도 사건에 휘말려 레드뱅크라는 끔찍한 감옥에 다녀오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아이들은 서로가 함께 모여 살며 자기들만의 공간을 이루는 꿈을 꾸게되고 실제로 낡은 집을 빌려 아이들은 함께 모여살게 되는데,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자금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돈이 필요해진 그녀들은 남자들이 어린 소녀들만 보면 추근덕 된다는 것을 이용해 남자들을 꼬드겨내어 돈을 벌기도 하고, 좀 더 큰 돈을 손에 쥐기 위해 점점 더 과격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게 되는데.... 그런 과격한 계획들 속에서 아무리 무서운 조직이라도 아직 소녀에 불과한 아이들의 헛점은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책은 영화로도 이미 2번이나 제작되어 나온  적이 있는 스토리이다. 이 소설의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는 50여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엄청나게 많은 소설을 써낸 훌륭한 작가라고 한다. 이 소설에 쏟아진 수많은 찬사를 보며 적잖은 기대를 하면서 소설을 읽었는데 한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우선 번역이다. 


작가의 문체를 번역이 온전하게 나타내는 것은 물론 힘든 일이겠지만 소녀들의 와일드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다고 하더라도 너무 심하게 와일드해서 보는 내내 좀 불쾌하기도 했다. 소설적인 장치로 꼭 필요하지 않은 곳까지 곳곳에 쌍욕이 들어가 있어서 꼭 이럴 필요까지 있었나 싶었다. 소녀들의 조직 이야기인데 번역가가 남자분이라서 그런지 너무 심하게 와일드하게 표현하신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 번역 문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한참 읽다가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나 싶어 다시 돌아가 읽은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좀 정리가 안되고 산만한 느낌의 글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이건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 



이 소설은 정말 단지 그 순간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폭스파이어의 문신처럼, 그녀들의 구호처럼, 

폭스파이어, 타올라라, 타올라라.

다 타버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니 하얀 재밖에 남아있지 않다. 매디는 이 연대기를 정리하면서 스스로 이 모든 과거를 정리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내 마음이 얼마나 떨리는지 숨기려 노력하며 말했다. 

"그럼 너는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도 안 믿겠네?"

렉스가 웃으며 말했다. 

"아마 우리에게 영혼이야 있겠지. 하지만 그게 우리 존재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의미일 이유는 없잖아?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는 동안만 존재해도 정말 충분한거야. 그렇지 않아? 설사 불꽃이 꺼지는 때가 온다고 해도."


그녀들은 정말 화르르 타오르다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갑자기 사라진 그녀들을 보며 허탈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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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는 동물이 얼마나 똑똑한지 알 만큼 충분히 똑똑한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이충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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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동물 움짤을 보다가 이런 장면을 목격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냉장고를 열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간식을 꺼내려고 시도하는데 간식이 자기 키보다 높은 곳에 있자 바로 옆에 있는 식탁의자를 끌고 와서 유유히 간식을 꺼내먹는 장면이었다. 이런 사연도 봤다. 집에 정수기를 설치했더니 그 집의 반려묘가 정수기에서 물이 나오는 방법을 알아채고 낮이고 밤이고 정수기 스위치를 눌러 콸콸 쏟아지는 시원한 물을 낼름거리는 바람에 정수기 반납을 신청한다는 유머글이었다.  이런 똑똑한 동물들의 사연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아니, 집에서 반려동물을 오랫동안 키워본 사람은 이 정도 일은 놀라운 일도 아닐 것이다. 


난 나의 반려묘 다림이를 보면 이 녀석이 구강 구조만 받쳐준다면 나에게 곧 말을 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자신이 좋아하는 간식이 어디에 들어있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선 너무나 적극적으로 명확하게 요구하기 때문에 안 들어줄 수 가 없다. 이런 일을 늘 겪으며 사는 나에게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 은 아주 흥미로운 책이었다. 그렇다. 난 그들의 생각이 알고싶다. 말을 못한다고 생각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와 의사소통 방법이 다를 뿐이고, 생활방식이 다를 뿐이다. 우리가 여타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전제하에 다른 동물들의 인지능력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폄하하는 시각은 참으로 오만하다.  



우리는 동물이 얼마나  똑똑한지 알 만큼 충분히 똑똑한가?


이 말이 어쩌면 이 책의 전체 내용을 꿰뚫는 질문일 것이다. 책의 초반부에서 놀랐던 점은 동물 연구 초반시절, 과학자들은 동물의 인지능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생각과 인지가 가능한 것은 오로지 인간이라는 것이다. 동물은 오로지 기계처럼 훈련된 법칙대로만 움직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기 위해 동물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환경으로 인한 영향을 줄이기 위해 폐쇄적인 분위기에서 비교연구를 진행했다. 그런 과정에서 동물들이 학대아닌 학대를 당하고 힘들어 하기도 했는데 이것도 또한 인간이 충분히 똑똑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 아니겠는가. 



행동주의와 동물행동학의 차이는 늘 '인간의 통제' 대 '자연적 행동'의 차이였다. 행동주의자들은 동물을 실험자가 원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빈약한 환경에 둠으로써 그 행동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 만약 동물이 실험자가 원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런 행동은 '잘못된 행동'으로 분류했다. (...) 반면에 동물행동학자들은 자발적 행동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 동물 행동학은 어떤 종의 모든 구성원들에게서 자연적으로 발달하는 행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한가지 핵심 문제는 어떤 행동이 무슨 목적에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p.. 65~67>


이 책의 저자는 위의 행동주의와 동물행동학의 장점을 합친 '진화인지'라는 개념을 조심스럽게 내놓는데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지 않고 진화하는 관점에서 발전하는 인지능력을 연구해보자는 것이다. 동물의 진화에 관해서는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 이라는 유명한 책이 있는데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진화론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과 함께 봐도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조금은 어려운 얘기로 시작하지만 (책의 첫 부분은 좀 어려워서 사실 좀 지루할 수 있다;) 그 부분을 넘어가면 재미있는 동물들의 일화가 많아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우리와 진화적으로 가장 비슷한 유인원, 즉 원숭이에 대한 일화는 사실 별로 놀라울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긴 하지만, 꾀가 많은 사람처럼 능청스러운 원숭이 이야기는 신기했다. 사육사가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여기저기 숨겨놓고서 원숭이들을 풀어줬는데, 한 원숭이는 바로 옆 수풀 속에 있는 바나나를 보고도 마치 못본 척 유유히 그 옆을 지나간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낮잠 시간이 되어 다른 원숭이가 다 잠들자 조용히 일어나서 그 바나나를 찾아내서 혼자 맛있게 먹는다. 동료들이 다 깨어 있을때 바나나를 발견했다면 분명 동료들에게 빼앗길 것을 계산하고 나중으로 미뤄둔 것이다. 처음에 바나나를 발견하고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못본척 지나가는 빠른 계산이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능청스러운 원숭이에게 혀를 내두를 일이다. 


그나마 원숭이는 인간과 비슷하게 진화한 영장류니까 그렇다 치고 더 놀라운 것은 조류에 대한 이야기였다. 흔히 머리 나쁜 사람을 보고 '새대가리'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까마귀한테는 절대 그런말을 하면 안될 것 같다. 까마귀는 사람의 얼굴을 한명 한명 기억하고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특정 가면을 쓰고 까마귀에게 안좋은 기억을 심어준 후  나중에 그 가면을 쓰고 거리를 걷고 있을 때 해당 까마귀는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를 괴롭힌 그 사람의 가면얼굴을 알아보고 자신의 동료들까지 몰고와서 깍깍거리며 괴롭혔다고 한다. 사람도 사람끼리 못알아보는 경우가 있는데 심지어 까마귀가 사람의 그 비슷비슷한 얼굴을 다 구별하고 알아보다니 놀라울 뿐이다. 그 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앵무새에 대한 얘기였다. 아프리카회색앵무새 인 앨릭스에 관한 얘기이다. 앨릭스는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있는데, 그냥 사람 말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내용을 인식하고 계산하여 대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는 똑똑해 보이는 새를 보는데, 이 새는 말을 걸면 사물의 이름을 아주 정확하게 발음하면서 대답을 한다. 이 새 앞에는 물체들이 가득 담긴 트레이가 있는데, 물체들은 털실로 만든것도 있고 나무로 만든 것도 있고 플라스틱으로 만든것도 있으며, 각자 일곱 가지 무지개 색 중 하나를 띠고 있다. 

이 새에게 부리와 혀로 모든 물체를 만지게 한 뒤 물체들을 모두 트레이에 도로 담고 나서 모서리가 두 개인 파란색 물체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느냐고 묻는다. "털실"이라고 정답을 말할 때, 새는 색과 모양과 재질에 관한 지식을 이 특정 물체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기억과 결합한다. 혹은 하나는 초록색 플라스틱으로, 다른 하나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열쇠 두개를 보여주면서 "둘의 차이가 뭐지?"라고 물으면, 새는 "색"이라고 대답한다. "어느색이 더 큰가?"라고 물으면, 새는 "초록색"이라고 대답한다

<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 p. 168>


이 정도 쯤 되면 이건 인간의 언어와 뭐가 다른가 싶은 생각까지 든다. 이 새는 단순히 기계적으로 외워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을 하고 그 생각들을 나름대로 결합해서 대답을 하는 것이다. 주인이 흥분하거나 화를 내면 옆에서 나직이 "진정해" 라고 말한다. 이것은 진정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의인화된 말하는 동물, 캐릭터 그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우리는 아직 동물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할만큼 똑똑하지 못하다. 어쩌면 어떤 동물들은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어 속으로 인간들을 비웃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난 이 지구에서 어떻게 인간만이 진화를 거듭해 언어를 가지고 문명을 만들어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어쩌면 인간만이 문명을 만들어냈다는  말조차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간의 관점에서만 그렇게 보일 뿐. 



이 책은 인간의 관점에서 동물을 바라보는 오만한 관점을 와장창 깨준다. 

누구한테 욕할 때 "이런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지 말자. 

그 짐승이 인간보다 똑똑할 수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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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 죽음을 질투한 사람들
제인 하퍼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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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범인은 누구인가. 아니, 진짜 범인이 있기는 한 것인가. 도시와 동떨어진 시골 마을 특유의 폐쇄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문은 계속 양산되고, 한번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사람들의 믿음 속에서 진실을 변질시키기도 한다. 숨 막히도록 무더운 여름날 이런 소설을 읽으니 혓바닥이 서걱서걱 말라가고 숨을 쉴 때마다 모랫바람이 코로 들어올 것 같다. 사막처럼 황폐한 느낌의 마을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가는 이 소설은 중반부까지는 가뭄처럼 목이 마르고 숨이 차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처럼 비밀들을 콸콸콸 쏟아내는 소설이다. 마을 사람 모두를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진실을 저울질 하다가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망치로 후려맞는 듯한, 얼얼하지만 통쾌한 한방이 있다.         


가뭄이 지속되면서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호주의 작은 마을 키와라의 작은 농장에서 일가족 모두가 살해되는 일이 벌어진다. 아내 캐런과 아들 빌리는 집 안에서 총을 맞은채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되고, 남편 루크는 집에서 좀 떨어진 작은 주차장에서 자살 한듯 총으로 머리를 쏴 얼굴 전체가 거의 날아간채로 발견된다. 남편인 루크가 모든 가족을 살해하고 스스로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사건이었다. 


친구인 루크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멜버른에서 경찰로 일하는 에런 포크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을 찾는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포크를 알아본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만은 않다. 어린시절 루크와 포크와 함께 어울리던 여자아이들이 둘 더 있었는데 그중 한명인 엘리가 물에 빠져 죽은 시체로 발견되고 나서이다. 그녀의 주머니에서 나온 '포크'라는 이름과 그녀가 죽은 날짜가 적힌 메모는 포크가 그녀를 죽인 살인범으로 몰리기 충분한 조건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의심과 괴롭힘에 못이겨 포크와 그의 아버지는 어느 날 도망자처럼 집을 빠르게 처분하고 마을을 떠나 멜버른으로 향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었다.


엘리가 죽은 후 경찰이 포크와 주변 친구들의 알리바이를 조사할 때, 그 시간 강의 상류에서 혼자 낚시를 하고 있었던 포크가 혹시 의심을 받을까봐 루크는 자신과 함께 농장에서 토끼사냥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라며 신신당부를 한다. 루크가 절대 혼자 토끼사냥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는 포크는 루크에게 고마우면서도 혹시 루크가 엘리를 죽인 범인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막연히 한다. 서로가 자신이 본 것과 알고 있는 것을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은 친구와 가족끼리도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상황이다. 과거의 일어난 엘리의 죽음과 현재에 일어난 루크 일가족의 죽음은 그래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루크가 그때 엘리를 죽인 것이 맞다면 이번 사건도 정말 루크가 온 가족을 살해했을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루크의 아버지는 경찰인 포크에게 루크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부탁하고, 포크는 처음의 계획을 수정하여 마을에 일주일 정도 더 머물며 그 지역 경찰인 라코와 함께 비공식적으로 마을의 비밀을 수사하면서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루크가 정말 온 가족을 살해했을까? 과거 엘리의 죽음도 연관이 있는걸까? 혹시 다른 사람이 루크의 가족을 살해하고 루크에게 뒤집어 씌운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왜? 모든 의문이 따라다니며 뜨겁고 건조한 여름을 더 답답하게 만든다. 마을에는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많다. 죽은 엘리의 아버지와 그의 삼촌, 그들은 루크와 계속 사이가 좋지 않아 항상 으르렁대던 사이였다. 루크가 죽기 직전 만났던 아랫마을의 제이미, 처음에 그가 포크에게 말했던 알리바이가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지며 의심에 불을 지핀 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의심하는 것처럼 포크도 사람들을 의심하고, 독자도 '도대체 누가 범인이야'라는 생각으로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의심하며 읽게된다. 


이 책의 띠지를 보면 "모든 페이지에 비밀이 담겨있다. " 라고 되어있다. 책의 중간중간에는 과거에 있었던  진실들이 돋음체로 쓰여져 현재의 이야기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가뭄으로 퍽퍽해진 현재와 푸른 숲이 있고 강물이 흐르던 과거의 이야기를 동시에 읽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비밀이 뭔지 눈치채기 어렵다. 작가가 무수히 던져놓은 밑밥들이 너무 많아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러다 소설의 말미에 그동안 던져놓은 밑밥을 정말 탁월하게 모두 거둬들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중반부까지 약간은 답답하고 지루한 마음으로 읽다가 후반부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모든 장면들이 머릿속에 영상처럼 스쳐가듯 또렷해지는 경험을 했다. 책장을 정신없이 넘겨가며 결론을 다 읽고 나자 이건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소설 전체에 비밀이 담겨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읽었을 때는 단지 여러개의 파편에 지나지 않던 것들이 진실을 알고 나자 그것들이 어떻게 변형되어 의심을 일으키고, 비밀로 숨겨졌으며, 진짜 피해자는 누구이고, 가해자는 누구인지 명확해졌다. 이 책은 제인 하퍼라는 작가의 첫 소설이라고 한다. 첫소설을 내자마자 수많은 문학상들을 수상한 기록들이 띠지에 나와있다. 비로소 상을 받은 사실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책속 여기저기에 아무렇지 않게 뿌려진 수많은 사실들로 인해 등장인물들간에 가질 수 있는 오해와 의심들을 정교하게 그려내고, 모든 오해와 의심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진실은 무엇인지 너무나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마치 모래먼지가 잔뜩 낀 더러운 창문을 통해 밖을 보다가 갑자기 깨끗하게 잘 닦여진 창문으로 명확한 세상을 보게 된 기분이 든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의 곳곳에 숨겨진 비밀들을 가지고 진실의 퍼즐을 맞추는 게임을 해보길 바란다. 그 퍼즐들이 딱 맞어 떨어지는 최후의 순간, 매우 짜릿한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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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박생강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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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다양한 경험은 이래서 중요한 것인가. 박생강이라는 귀여운 필명의 작가는 고급 멤버쉽 피트니스 사우나의 매니저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위 우리나라의 상위 1%라는 사람들의 민낯 뿐만 아니라 알몸(?)을 공개하는 소설을 쓰기에 이른다. 이름하야 [우리 사우나는 JTBC 안봐요] 라는 소설이다.  소설 제목에 특정 방송사의 이름이 들어가다니 놀라운 발상이다. 정부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리기로 유명한 방송사 JTBC의 방송은 절대로 안본다는 헬라홀 피트니스의 고급 멤버쉽 회원님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걸까? 사우나 매니저의 눈으로 본 그들의 까발려진 진짜 모습이 궁금하다. 


소설 속 주인공인 '손태권' 그도 저자 박생강처럼 소설가이다. 잘나가는 학원의 논술강사로 일하기도 했고,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긴 했지만 몇몇 단편밖에 낸 적이 없어 자신의 책 하나 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가난한 소설가이다. 여자친구의 분리형 원룸에 얹혀살던 그는 더이상 돈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일자리를 찾아나서다가 우연히 멤버쉽 피트니스 사우나의 매니저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와 함께 일하는 사우나 매니저 팀장은 한때는 잘나가는 사업가였지만 지금은 모조리 다 말아먹고 빈털털이가 되어 이 곳으로 흘러들어왔다. 사우나 매니저 일을 지원하는 이들은 주로 인생의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잠시 숨을 돌리며 쉬어가는 정류장 같은 곳으로 이곳을 택한다. 사우나 매니저의 할일은 오로지 상위 1% 회원님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수건을 잘 수거한 다음 세탁해서 반듯하게 쌓아놓고, 다 늘어진 운동복을 각잡아 보기좋게 개어놓으며, 회원님들이 바닥에 떨어뜨린 물기는 슬리퍼를 벗어 재빨리 양말 신은 발바닥으로 훔쳐내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눈에 띄면 안됩니다. 

우린 늘 이곳의 회원님들께 없는 듯 있는 사람이어야 해요.


회원들은 매니저들을 부를 때, "어이~ 락카", "어이~ 사우나" 등으로 부른다. '회원님'들에게 매니저는 인간이 아니라 사우나 공간에 놓여져 있는 비품과 비슷한 위치인 것이다. 젊은 시절 고생해 성공을 이루고 이제 부는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뒷방 늙은이로 전락해 가고 있는 늙은 회원들은 오로지 회원권 보증금만 3000만원에 달하는 프리미엄 멤버쉽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한다.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고급 멤버쉽 사우나 이지만 남탕 천장은 곰팡이가 까맣게 뒤덮여 있고, 운동복은 여러번 입어 목과 허리가 늘어나 볼품 없으며, 양말 바닥엔 매직으로 큼지막하게 '대여품'이라고 쓰여있다. 회원들은 조금이라도 목과 허리가 덜 늘어난 운동복을 찾으려고 금방 정리해서 개어놓은 운동복을 헤집어 놓기도 하고, 새로 들어온 양말은 며칠만에 반쯤은 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양말 발바닥에 대여품이라고 크게 써놓아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특단의 조치를 한 것이라 팀장은 말한다. 


사회에 나가서는 근엄하고 품위있는 척 행동하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그들이 사우나에 들어와 자신이 입은 모든 옷을 덜어내면 그들의 진짜 민낯을 드러난다. 자기 것은 아껴쓰지만 공용으로 사용하는 사우나의 스킨 로션은 온몸에 바르는 것도 모자라 발바닥에까지 바르고 돌아다니는 그들, 그러면서도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는 우월감으로 사우나 매니저 따위는 없는 사람처럼 투명인간 취급을 하거나, 부품처럼 대한다. 


사우나에 틀어놓은 TV 프로그램에서 박근혜의 탄핵소식이 들려오자 사람들은 쯧쯧 혀를 차며 "역시 여자가 대통령을 하면 안됐어, 어디 감히 아랫것들이 대통령을 끌어내려" 같은 내용의 말을 하며 투덜거린다. 그들은 자신이 시민보다는 대통령과 더 가까운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자신이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명령이 아닌 아래에서 위로 이루어진 혁명을 불편해하는 법이다.  


소설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도중, 나는 고급 호텔식 사우나 시설이 아닌 새하얀 형광등이 켜진 곳곳이 낡은 동네 사우나의 모습을 소설의 배경으로 상상하는 나를 발견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고급 멤버쉽 피트니스 사우나라는거 말고는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전혀 고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설 말미에 헬라홀 사우나 근처에는 백화점에서 운영하는 더 깨끗하고 시설 좋은 피트니스가 생겼다는 얘기가 나온다. 헬라홀의 시설을 불평하며 다른 곳으로 옮겨갈거라고 매니저를 협박하는 '회원님'들은 결코 그곳으로 옮겨가지 않을 것이다. 그 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고, 헬라홀 처럼 멤버쉽 피트니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특권의식은 '나는 아랫것들과 달라' 이다. 이 곳 헬라홀이 아무리 낡았어도 비싼 회원권 탓에 어느정도 성공한 자들 만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다는 특권의식을 주기에는 충분하니까. 



그런데 실은 힐튼 호텔이나 하얏트 호텔의 멤버쉽 피트니스를 악착같이 흉내 낸 자그마한 코스프레 멤버십 헬라홀이야말로 이 신도시의 우아한 코털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우아한 공간에서 느릿느릿 걸어 다니는 헬라홀의 남자들도 그들이 꿈꾸는 1퍼센트의 찬란한 삶을 현실에서 코스프레하기 위해 이곳에 오는지도 몰랐다. 이곳에서 코스프레가 아닌 현실을 오가는 사람들은 나나 팀장 같은 사우나 매니저들이었다. 우리는 이곳의 초라한 뒷모습을 아는 사람들이자, 그 초라한 뒷모습을 어떻게든 감추려고 버둥거리는 일꾼들이었다. 

<p.186>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남탕, 그것도 상위 1%만 들어갈 수 있는 고급 멤버쉽 피트니스 사우나의 이야기는 그래서 흥미롭기도 했지만, 왠지 탕에 들어가서 실컷 때를 불리고는 때를 밀지 않고 그냥 나온 것처럼 찝찝하고 헛헛하기도 하다. 주인공인 태권의 입담이 그나마 재치있어 소설을 읽다 픽픽 웃긴 했다. 1% 회원님들 앞에서도 재치있게 응수하는 모습 때문에 그나마 좀 시원하기도 했다.   



"오, 소설가. 은근히 알짜던데. 여자친구가 여배우라고 했지. 여기서 가까이 있는 그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네, 회원님, 맞습니다." 

"이야, 다시 봐야겠는데. 성형 티가 좀 나기는 해도 말 잘 듣게 생긴 미인이던데. 실은 어젯밤에 와이프하고 같이 보러 갔거든. 제목이 달라져서 다른 연극인가 했지만 말이야. 사실 별로 재미는 없더라고. 그런데 여주인공은 미인이데. 어떻게 꼬셨어? 글로 꼬셨겠지? 처음으로 소설가가 부럽게 여겨졌어. 역시 예쁜 여자는 다들 먼저 채간다니까. 하여간에 정말 미인이야. 처음에 나왔던 그 돼지 같은 년하고 비교가 되니 그런가?"

나는 회원님들이 엉망으로 만든 운동복 셔츠를 다시 접으며 대답했다. 

"회원님, 그 돼지 같은 년이 바로 제 여자친구 인데요, 원래 그 정도는 아니고 연극때문에 좀 더 찌웠습니다."

일꼬 회원님은 잠시 손에 양말을 든 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물끄러미 서있었다. 그가 의도한 대로 대화가 풀리지 않아 어색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주 잠깐 일꼬 회원님에게 예의에 대해 설교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병이 갑에게 예의 운운할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예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1퍼센트의 젖소에게 경읽기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p. 159~160>


어차피 그들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우리 중 누구라도 가진게 많아지면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나보다 아랫 것들은 눌러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자기보다 아랫사람은 깔아뭉개고 싶은 것이 어쩌면 인간의 진짜 민낯인지도 모르니까.  

아무 것도 없이 오직 몸뚱이만 가지고 갓 태어났을 때처럼 알몸 상태로 만나본 그들의 민낯이 씁쓸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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