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파이어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최민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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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욕설이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대화들이 오가는 소설을 읽었다. 이런 "강아지"," X같은" 단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아주 와일드한 이 소설은 미국 뉴욕주 북부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소녀들이 사회의 부조리에 대응해서 만든 비밀조직 '폭스파이어'에 대한 이야기다. 소녀들의 조직이라고 해서 무시할 것이 못된다. 왠만한 남자아이들보다 깡다구 있는 여자아이들의 무서운 모임이니까.  요즘 말로하면 걸크러쉬를 뿜뿜하는 아이들이라고나 할까.  그녀들은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서로에게 사랑과 충성을 맹세하는 아이들이다. 자기들만의 의식을 통해 어깨에 타오르는 불 모양의 문신을 하고, 상처에서 난 피를 서로 비비며 피를 함께 나눈 자매라고 선언한다. 


소설은 폭스파이어의 멤버 중 하나였던 매디가 연대기 작가로서 조직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아 정리한 문서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자신이 겪었던 경험담이자 한명의 관찰자로서 이 조직이 어떻게 만들어져 활동을 시작했으며, 어떻게 불타올랐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 그 불꽃이 사그라들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렉스, 매디, 리타, 골디, 라나로 이루어진 이 조직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렉스이다. 범상치 않은 몸놀림과 용기, 리더십을 갖추고 소녀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령관이다. 폭스파이어가 만들어지고 처음 그녀들이 한 일은 조직의 일원인 리타에게 수업시간마다 성희롱을 하고, 은근슬쩍 가슴을 만지기도 하는 변태 수학선생님에게 복수를 하는 일이다. 선생님이 자신의 잘못을 알 수 있도록 선생님의 차에다 커다랗게 낙서를 해놓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른채 빨간 글씨로 자신은 수업시간에 학생을 성희롱하는 수학선생이라는 글씨가 써진 자동차를 몰고 시내를 돌아다녔던 선생님은 결국 동네와 학교에서 엄청난 모욕을 당하고는 결국 선생님을 그만두고 먼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다. 폭스파이어의 첫번째 승리인 셈이다. 


이 일에 용기를 얻은 아이들은 매디의 삼촌이 매디를 성희롱하려는 현장을 덮쳐 곤죽이 되도록 다함께 패주기도 한다. 그 삼촌은 소녀들에게 얻어맞았다는 것이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소녀들을 피해다닌다. 원래는 비밀조직으로 시작되었던 이 조직은 점점 사람들 사이에 어떤 존재로 점점 인식되기 시작한다. 어른들에게는 두려움의 존재임과 동시에 또래 아이들에게는 우러러보는 존재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여자를 우습게 보는 남자들을 향한 적대심을 표현하는 비폭력적인 행동에 그쳤던 그녀들의 행동은 점점 과격해지고, 대담해진다. 렉스는 폭력과 절도 사건에 휘말려 레드뱅크라는 끔찍한 감옥에 다녀오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아이들은 서로가 함께 모여 살며 자기들만의 공간을 이루는 꿈을 꾸게되고 실제로 낡은 집을 빌려 아이들은 함께 모여살게 되는데,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자금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돈이 필요해진 그녀들은 남자들이 어린 소녀들만 보면 추근덕 된다는 것을 이용해 남자들을 꼬드겨내어 돈을 벌기도 하고, 좀 더 큰 돈을 손에 쥐기 위해 점점 더 과격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게 되는데.... 그런 과격한 계획들 속에서 아무리 무서운 조직이라도 아직 소녀에 불과한 아이들의 헛점은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책은 영화로도 이미 2번이나 제작되어 나온  적이 있는 스토리이다. 이 소설의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는 50여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엄청나게 많은 소설을 써낸 훌륭한 작가라고 한다. 이 소설에 쏟아진 수많은 찬사를 보며 적잖은 기대를 하면서 소설을 읽었는데 한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우선 번역이다. 


작가의 문체를 번역이 온전하게 나타내는 것은 물론 힘든 일이겠지만 소녀들의 와일드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다고 하더라도 너무 심하게 와일드해서 보는 내내 좀 불쾌하기도 했다. 소설적인 장치로 꼭 필요하지 않은 곳까지 곳곳에 쌍욕이 들어가 있어서 꼭 이럴 필요까지 있었나 싶었다. 소녀들의 조직 이야기인데 번역가가 남자분이라서 그런지 너무 심하게 와일드하게 표현하신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 번역 문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한참 읽다가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나 싶어 다시 돌아가 읽은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좀 정리가 안되고 산만한 느낌의 글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이건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 



이 소설은 정말 단지 그 순간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폭스파이어의 문신처럼, 그녀들의 구호처럼, 

폭스파이어, 타올라라, 타올라라.

다 타버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니 하얀 재밖에 남아있지 않다. 매디는 이 연대기를 정리하면서 스스로 이 모든 과거를 정리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내 마음이 얼마나 떨리는지 숨기려 노력하며 말했다. 

"그럼 너는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도 안 믿겠네?"

렉스가 웃으며 말했다. 

"아마 우리에게 영혼이야 있겠지. 하지만 그게 우리 존재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의미일 이유는 없잖아?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는 동안만 존재해도 정말 충분한거야. 그렇지 않아? 설사 불꽃이 꺼지는 때가 온다고 해도."


그녀들은 정말 화르르 타오르다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갑자기 사라진 그녀들을 보며 허탈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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