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광균의 <은수저>란 시다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37p)

‘저녁밥상에 애기가 없다’는 현실은 ‘한 쌍의 은수저’로 그리고 그것은 ‘은수저 끝에 눈물’로 도드라진다 애기가 없은 슬픔이 느껴진다 문득 이기주의 <글의 품격>에서 본 이야기가 생각난다 헤밍웨이에게 누군가가 6단어로 구성된 소설을 쓴다면 당신의 필력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헤밍웨이는 이렇게 썼다고 한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김광균 보다 더 압축시킨 아이를 잃은 상실의 슬픔이 느껴진다 ‘한번도 신지 않은 아이의 신발’을 덩그러니 내놓은 그 풍경, 그 샷이 주는 슬픔의 미는 어떠한가!

역시 헤밍웨이의 “빙산이론(생략이론)”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글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 자체, 나의 삶이 다른 이에게 보여지는 것은 삶의 전부가 아니라 파편일 수 있다 소위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너’일 수 없기에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타인을 100% 판독하고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우린 우리의 눈으로 ‘타인의 삶의 빙산의 일각’을 보면서 판단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현실이고 노릇이다



2
이윤기가 말한다
‘나는 이미 많은 정보를 내 기억의 창고에다 우겨넣었다 더 우겨넣는 수고가 망설여진다 그래서 가만히 기다리면서 구정물이 맑아질 때를 기다리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자주 나 자신에게 묻는다 더 알아야 하는가? 우겨넣은 짓 이제 그만하고 가만히 되새김질해 볼 때가 된 것 같은데, 아닌가?’(68p)

이미 고인이 된 작가가 스스로 질문하는 내용이다 “더 알아야 하는가?” 구약성경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 왕은 이런 말을 했다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전도서 12:12)

배움에는 끝이 없고 이 세상엔 수많은 공부의 요소들이 있다 수많은 책들이 존재한다 자연의 풍광도 공부의 요소가 될 수 있겠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에게 팔색조보다 더한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가! 100년이란 시간 안에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이 얼마일까? limit가 없는 것이리라 이윤기는 ‘우겨넣는 수고가 망설여진다’고 했다 나는 아직 조금 시간이 있으니 더 우겨넣는 수고가 있어야겠다 근데 오늘 이 페이퍼는 정말 읽기를 쉬기 위한 pause time이다 계속 우겨넣음 머리에 쥐가 날 듯 해서다



3
그리스로마 신화학자로 알려진 그가, 딸(번역가이다)의 말을 빌면 이윤기는 늘 ‘소설가’로 불려지고 싶어했다고 한다 도서관에 꽂힌 1000쪽이 넘는 이윤기의 우람한 양장본 소설책이 떠오른다 목차를 보고 책쪽수를 보고 얼른 덮었다는 기억이 있다 우린 이윤기를 소설가보다는 그리스로마학자로 잘 알고 있다 거기서 대박을 터트렸으니.
근데 이윤기가 그리스로마 신화의 전문가가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고 한다

‘터키의 흐린 주점에서, 나의 흑해를 건너야 한다고 결심하지 않았으면 나는 어찌 되었을꼬! 나의 신화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좌절해있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쓴다 흑해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 흑해를 건너야 한다’(81p)

인생의 기회는 한 순간에 포착되는 듯 하다 나는 얼마나 많은 흑해를 피하였던가? 지금은 그 흑해를 건너고 있는가? 그렇다고 자위해 본다


4
‘어머니는 한 번도 날 무시하지 않았다(151p)’

‘지진아였던 내가 지금은 작가가 되었다 때로는 전세계를 누비기도 한다 내 분야에서는 실수도 별로 없다 어머니가 나를 무시하고 능멸했다면 나는 진작에 자멸했을 것이다 내 아들 딸도 부모로부터 무시당하거나 능멸당한 적이 거의 없다 지금 잘 자라 있다 사람은 남으로부터 무시당하거나 능멸당한 경험이 없다면 남을 무시하거나 능멸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154p)

나는?
그냥 이 대목이 울컥했다 이윤기가 학창시절에 학교 1년 쉰다고 했을 때도, 1년 쉬다 다시 학교간다고 했을 때도 이윤기의 어머니는 그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줬다고 한다 근데 그건 정말 쉬운게 아닌 듯 하다 능멸당한다는 것은 존재가 쪼그라드는 경험이다 그 경험이 진짜 비극적인 체험이다
나는?
그리고 나는 자녀들에게 무시하지 않는 아버지인가? 자신이 없다 나도 그렇게 잘나지 않았고 잘 나게 커 온 것도 아닌데 이것도 트라우마이자 컴플렉스인 것 같다 괜히 애들에게 미안하다


5
“작가의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 10년 뒤에 온다”

이 말은 프랑스 속담이다 작가가 죽은 뒤 10년이 지났는데도 책이 서점에, 서가에 꽂혀 있고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면 그 작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 이란 의미이다 우리의 존재가 싸늘한 시체로 변한 후에도 영향력을 미치려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


6
Stat rosa pristine nomine, nomina nuda tenemus.
지난 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 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 없는 이름뿐.(176p)


역시 흑해를 건너는 수많은 여행에서 온 이윤기의 ‘빙산의 일각’이 보여주는 풍광이 글로 스치고 가는 느낌이 멋쩍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일지라도 나의 삶은 그래도....감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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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10-18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이윤기 혹은 그의 작품이 카알벨루치님으로 하여금 이 페이퍼를 쓰시게 하였을까 잠시 궁금했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카알벨루치 2019-10-18 08:45   좋아요 0 | URL
그리스로마신화를 2권읽다가 중도하차한 기억이 있네요 도서관에서 이윤기의 에세이라? 그래서 집어들었는데 의외로 생각할 꺼리가 많더군요 필사노트를 뒤지다가 기억을 더듬어 그냥 마음 가는대로 적었을 뿐입니다 원래 제가 무계획적인 것을 좋아라 해서요 댓글 감사합니다 님도 즐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
 
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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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글쓰기의 동기, impulse의 핵심에는 “부끄러움”이 있다 타인의 시선, 편견, 판단, 비난, 욕설, 평가, 저주 등. 이 모든 타인의 것에 대한 자기 자신의 벌거벗은, 나체화된 수치심의 실체를 직면하고자 그녀는 글을 쓴 것이다 그 느낌은 어떤 것일까?

박완서의 <박완서의 말>을 보면 박완서는 40세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녀는 소설은 자기만의 자전적 스토리에다 상상력을 부과한 그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는 듯 했다 일단 나를 그렇게 이해했고 받아들였다 자기 이야기, 스토리는 nonfiction인데, 상상력이 결합되면 faction이 될 것이고, 더하면 fiction이 될 것이다 아니 에르노의 “벌거벗은 글쓰기”는 nonfiction인 셈이다 “부끄러움”을 글쓰기로 승화시킨 그녀의 매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듯 하다 그래서 그녀가 커보인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자


“책이 나온 뒤에는 다시는 책에 대해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 나는 항상 그런 책을 쓰고 싶다는 역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열 두 살에 느꼈던 부끄러움의 발치에라도 따라가려면 어떤 책을 써야 할까?”(138p)

“내게 글쓰기는 헌신이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글쓰기가 없다면, 실존은 공허하다 만일 책을 쓰지 않았다면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21p)


비천하고 가난하며 우울하고 엉망진창인 가정환경과 가정사, “내가 열 두살 때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었어” 라는 고백으로 시작하며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운 과거를 까발리는 것은 그녀의 상처에 상처를 덧대는 작업이지만, 진정한 치유와 회복은 정면승부이기에 그녀의 그런 일생의 용기가 진짜 크게 느껴진다 작가는 다들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다


용기있는 자만이 글을 쓸 수 있다??!!
내게도 벌거벗는 용기가 있기를. I hope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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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0-08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양반은 자신이 경험한 것만
쓴다고 하던데 말이죠.

암튼 특이한 작가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10-09 08:05   좋아요 0 | URL
세상엔 다르디 다른 사람이 너무나 많으니 작가군도 다양하다 다양한거 아니겠습니까? 모든이로부터 자유한다는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글쓰기는 또 다르겠다 싶기도 하고 그렇네요~

cyrus 2019-10-09 0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상대방의 부끄러운 점을 약점으로 삼아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남들 앞에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게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카알벨루치 2019-10-09 08:14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자기의 약점이나 부끄러움을 공유하는것은 공감이기도 하고 관계가 더 깊어질수 있는 단계인데 그걸 역이용하는 심리가 인간에겐 있네요 도끼가 그런 이야길하는데 인용은 안할랍니다 ㅎㅎ
 
태양은 다시 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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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이 아닌 청년 헤밍웨이가 쓴 작품

1 헤밍웨이가 27살에 쓴 『태양은 다시 뜬다』는 출판하자말자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27살? 도대체 그 나이에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단 말인가? 헤밍웨이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음악가였다. 『노인과 바다』에서 보여준 낚시군 산티아고의 모습에서 헤밍웨이가 첼로를 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릴적 그는 첼로를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어릴적부터 낚시를 좋아했고, 이 작품에서도 낚시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젊을 때부터 '영문학'에 두각을 나타낸 그는 당대의 문인들, 에즈라 파운드, 피츠 제랄드, 거트루드 스타인 등과 교류하면서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고 결국 이 작품이 등장하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폴 오스터였던가? 수많은 이들에겐 스승이 있었고, 도제식 교육과 배움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윌리엄 포크너처럼, 헤밍웨이도 대학의 시스템교육을 거절하기도 했다. 천재적 문학적 영민함은 시스템의 온실 속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야생에서 자라나는 듯 하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여전히 학벌과 학력을 잣대로 삼는 듯하다. 과연 그 시스템에서, 그 학력의 프로필에서 천재가 탄생할 수 있을까? 그건 모를 일이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헤밍웨이는 전쟁에 참여한다. 몇 개월후 그는 다리를 다친다. 그 병상체험과 전쟁체험이 그를 더 원숙하게 만든 게 아닐까? '충격을 먹으면 성숙한다'는 일개의 우스갯소리처럼 그는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삶을 배워갔던것이다. 기자출신의 작가여서 그런지 문체가 간결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2 문체 이야기가 나오니 헤밍웨이의 '빙산이론'(iceberg theory) 즉, '생략이론'(omssion theory)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본질과 중심과 핵을 숨기고 '빙산의 일각'만을보여주는 이런 문체와 글은 에즈라 파운드의 영향이거나 에즈라 파운드가 심취했던 일본 하이쿠의 영향이란 이야기도 있다. <빙산이론>에는 당연히 수많은 메타포metaphor와 상징, 은유가 등장할 수 밖에 없다. 등장인물 제이크의 성불구자 모습을 빗댄 술자리에서의 친구들과의 농담과 대화 가운데 단순함을 넘어선 수많은 상징과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다. 





3 헤밍웨이하면 <Lost Generation>을 빼놓을 수가 없다. 전쟁이후의 거대한 상실감은 주인공, 등장인물들의 끊임없는 방황과 방탕과 표류를 보여준다. 20대의 대한민국 청춘들의 방황처럼은 아니더라도, 그들은 끊임없이 표류하고 표류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여주인공 브렛을 들 수 있다. 한 남자와 헤어지고 이 남자, 저 남자로 옮겨다니면서 대단한 남성편력을 보여주는 청춘녀, 브렛...어디에서고 안정감을 얻지 못하는 브렛, 심지어 19살(브렛은 32살)의 젊고 매력적인 투우사 로메오에게 한 눈에 반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사랑에 올인하고, 감정에 올인하는 거기에서도 그녀의 만족은 찾아볼 수 없다. 브렛을 둘러싼 애정구도는 삼각, 사각, 이중, 삼중 그물망처럼 퍼져 있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의 심리적 안식처이자 피난처는 제이크이지만, 제이크는 성불구자이다.  

"난 마이크에게 돌아갈거야!"(332p)

그 마이크는 로메오 앞에서 술취해 생쑈(?)를 벌인 친구였건만, 과연 브렛은 마이크에게 온전한 안정감을 누릴 수 있을까? 여전히 불안하다. 그래서 lost generation인 것이다. 




4 이 청춘남녀들이 여행길에 오른 길은 산티아고 순례길이다.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안장된 전설때문에 유명해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길이고, 산티아고는 중세 때부터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기독교의 3대 순례지가 되었다.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의 변형이고, 콤포스텔라는 '별의 들판'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제이크는 Jacob의 애칭이며, Jacob은 야곱, 야곱의 야고보와 어원이 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제이크는 비극적인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큰 부상을 입어 성불구가 된다. 병원에서 간호하던 여인과 사랑에 빠지지만 맺어질 수 없는 관계로 전락한다. lost generation은 1차 세계대전 후의 상황의 세대를 지칭하기도 지만, 더 확대시키면 전 인류를 상징하기도 한다. '잃어버린 세대', '방황하고 표류하는 세대', 절대성과 유의미와 최고선, 가치를 상실한, 삶과 죽음 사이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인류 세대를 지칭하기에 이 작품이 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지금도 그 적용점이 존재하고 독자들의 사랑과 관심을 계속 받는 게 아닐까 싶다.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현대사회에서 삶의 모든 주체는 인간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까뮈(Albert Camus) 역시 현대사회에서 ()을 믿는 것은 현세의 아름다움에 대한 모욕이며 죄악이라고 주장하였다. 헤밍웨이는 대부분의 작품 속에서 신(God)의 부재(不在)나 죽음을 다루고 있고, 포오크너 역시 신은 아직 존재하되 너무 늙어 인간에게 더 이상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사실상 신(God)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본인의『소리와 분노』paper에서) 




5 제이크는 어쩌면 훼밍웨이의 종교에 대한 맘을 담은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랑하고 품고 용납하지만, 성불구자인 제이크....헤밍웨이는 청교도신도인 어머니의 신앙교육을 업악적으로 견디며 커왔기에, 종교는 그에게 커다란 짐이었다(이전에 헤밍웨이에 대한 나의 글을 참조하시길!). 어머니가 온전하고 경건한 신자였다면,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 친절하고 포용적이었더라면 그의 남편인 아버지가 권총자살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헤밍웨이의 집안에서 아버지, 헤밍웨이, 자신, 큰 여동생, 남동생 그리고 손녀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5명이 자살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의 가족, 집안사가 말 그대로 'lost generation'이 되버린 셈이다.




6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과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산티아고 순례길'...헤밍웨이는 끊임없이 길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 순례자의 모습이 역력하다. 노벨문학상 조차 수상한 그가, 그토록 낚시와 사냥과 투우를 즐기면서 열정적인 삶을 살며, 수많은 여인과 결혼하고 이혼을 거듭한 천재작가는 아픈 몸과 우울증으로 자신의 애장하던 엽총으로 자신을 쏴 버린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가 오건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다시 뜨고 다시 지며, 뜬 곳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바람은 남으로 갔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빙빙 돌고 돌아 그 가던 길로 돌아온다. 모든 강은 바다로 흐르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으며 강물이 비롯된 곳으로 돌아간다"(구약성경 전도서 1:4-7)




7 문득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의 유명한 대사가 떠오른다.

"스트레이 십, 스트레이 십stray sheep..."

Lost Generation은 'Stray sheep'인 셈이다. 하지만 작품의 제목은 <The Sun also Rises>인데, 제목이 너무나 희망적이었다는 생각이다. 아마 헤밍웨이가 27살의 피끓는 청춘에 탈고해낸 수작이라서 더 그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태양은 다시 뜬다'...그것은 사실이고 진실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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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10-02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J. D. 샐린저가 헤밍웨이의 영향을 받은 거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샐린저의 문장도 ‘빙산의 일각’ 같은 느낌이 들어요. 특히 샐린저의 단편에 있는 문장들이 그래요. ^^

카알벨루치 2019-10-02 17:56   좋아요 0 | URL
그게 일반독자의 눈에 안 보이는데. 전문가가 “빙산이론”이라 하니 그런갑다 싶고...참 문학의 샘물은 파도 파도 끝이 없나 봅니다~

소피아 2019-10-02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칭구^^

카알벨루치 2019-10-02 23:14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 소피아님 즐독, 열독, 광독(?)하소서! 휴일 잘 보내세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알베르 카뮈는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이다라고 했고,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포크너를 칭찬했다. 윌리엄 포크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노벨문학시상 연설에서 마크 트웨인은 문학의 지도에 미시시피 강을 그려놓았다면, 50년 후 윌리엄 포크너는 미시시피 주를 21세기 세계문학의 랜드마크로 창조해냈다고 격찬하기도 했다. 포크너는 아무튼 범접하기 힘든 경지의 작기임에는 틀림없다.

 

 

 

 

2 나의 사견을 밝히자면,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인이라는 것이다. 미국인이란 말의 의미에는 미국이란 나라는 청교도적인 세계관이 기저에 깔려 있다는 말이다. 헤밍웨이가 태양은 다시 뜬다의 도입부에서 구약성경의 전도서의 구절을 인용한 것 또한 헤밍웨이가 미국인, 미국작가이기 때문이다. 한국 작가가 만약 기독교적인 철학적 바탕을 깔고 소설을 썼다면, 독자들이 접근하기가 훨씬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유교적인 세계관이 본능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포크너의 은 이런 기독교적인 창조의 가치관이 배여 있다고 볼 수 있다.

 

 

 

 

3 구약성경 창세기 1:27-28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개역개정)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 최초의 인류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고 관리하라고 하셨다. 인간의 자연만물의 관리자, 정복자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 정복하라는 말엔 오해의 여지가 존재한다. 모든 자연 삼라만상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는 말 그대로 정복자가 인간이란 느낌과 뉘앙스가 풍긴다. 하지만, 창세기의 이 구절에는 인간의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2가지의 책임이 깃들어 있다.

 

 

첫째, 개발과 계발의 책임이다. 자연 만물을 발전시키고, 문화를 창조하고, upgrade시키라는 말이다. 영어의 cultivate(경작하다, 농사짓다)란 동사에서 culture(문화)가 나왔다. 땅을 경작하는 농경생활의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에게서 문명이, 문화가 시작된다.

 

둘째, 보존의 책임이다. ‘정복하라는 의미에는 파괴시키고, 짓누르고, 억압하고, 무조건적인 군림의 의미가 다분하다. 하지만 인류가 으로부터 부여받은 정복은 보존의 책임이 존재한다. 이 말은 발전시키고, 개발시킨다는 명목하에 자연의 질서, 생태계의 뿌리까지 파괴해가는 인간의 개발은 조물주의 뜻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자연만물의 정복자라는 의미는 관리자란 의미가 더 가미되어져야 한다.

 

 

 

 

4 포크너는 에서 이런 기독교적인 철학 위에 인간의 책임을 지적한다.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땅을 창조하셨는지 쓰여 있습니다....인간과 그 자손들에게 땅을 이리저리 조각내 대대손손 영원히 침범할 수 없는 명의를 붙이라 하신 것이 아니라, 형제애를 바탕으로 익명하에 공동으로 땅을 보전하고 사용하라 하셨어요.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 요구하신 유일한 사용료는 연민과 겸허, 관용과 인내, 그리고 땀 흘려 식량을 얻으려는 노력 뿐이었습니다.”(103p)

 

 

하지만 인간은 자연이 주는 모든 혜택, 땅이 주는 모든 유익에 감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연과 땅, 환경을 파괴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불청객으로 전락하고 만다. 포크너는 여기 작품에서 숲 속의 수호신, 숲의 정령과도 같은 곰, 올드벤을 등장시킨다. 숲 속의 터줏대감처럼 든든히 지키고 있던 올드벤(), 종종 마을의 여러 이웃들의 가축과 재산에 해를 끼치는 곰이었다. 곰 사냥의 목적은 결국 성취된다. 십수년 동안 온 몸에 수십 발의 총알 자욱이 박혀있던 올드벤은 그렇게 죽는다. 포크너는 이 작품의 1, 2, 3, 5장에서 사냥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인간은 자연을 사냥하고, 사냥하고, 사냥한다. 개발하고, 개발시키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다. 문득 100년 전의 일본의 인기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行人)에서 피력한 대목이 생각난다.

 

자네가 말하는 불안은 인간 전체의 불안이지. 유독 자네 혼자만 괴로워하는게 아니라고 깨달으면 그만 아닌가? 결국 그렇게 유전해나가는게 우리들 운명이니까.”

 

인간의 불안은 과학의 발전에서 비롯되네. 앞서가기만 하고 멈출 줄 모르는 과학이 일찍이 우리에게 멈추도록 허락한 적이 없네. 도보에서, 인력거로, 인력거에서 마차로, 마차에서 기차로, 기차에서 자동차, 그 다음엔 비행선, 그 다음엔 비행기, 아무리 가봐도 쉬게 내버려두지 않아. 어디까지 끌려갈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참으로 두렵다네.”(327p)

 

소세키는 100여전에 이미 인간 본유의 불안을 감지한 것이다. 계속되는 문화의 upgrade로 인해 인간은 덜 불안해야 하는데, 더 불안해 한다, 더 고독해진다.

     

 

 

5 마크 맨슨의 최신작 희망버리기 기술에서 이것을 진보의 역설이라 했다.

 

사람들은 사는 게 나아지면 나아질수록 더욱 불안해하고 더욱 자포자기한다.’(17p)

 

마크 맨슨은 설문조사 이야기를 한다. ‘1980년대 실시한 설문조사에 지난 6개월 동안 자신의 개인사를 몇 명이랑 상의했느냐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은 3명이었다. 2006년 다시 같은 설문조사를 했다. 가장 많은 대답은 ‘0’이었다’(18p)고 한다.

 

공짜 와이파이와 침대의 안락함에 젖은 오늘날의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엄청나게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는 말이다.’(21p)

    

다시 포크너의 책으로 넘어오자.

곰에게 soul이 있는가? 곰은 자연의 소울soul로 상징된다. 인간은 자연을 박해하고, 사냥하고, 단맛만 빼 먹고 방치하다가 폐기처분해버린다. 그런 문명의 본질을 포크너는 이 작품을 통해 지적한다.

 

 

 

6 포크너는 이 작품에서 두 사람(유형)의 캐릭터를 대조시킨다.

샘 파더스(아이작 매캐슬린) VS 벤 호겐벡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자, 우주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혼혈인 샘 파더스는 곰의 죽음과 함께 자신도 유명을 달리한다. 반대로, 올드벤의 최후를 칼질로 목숨을 끊어간 분 호겐벡에게는 곰은, 자연은 단지 정복의 대상으로만 영점조준된다. 아이작의 할아버지, 그리고 세대의 세대들 또한 그런 라이프스타일에 익숙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분 호겐백은 다람쥐들에게 총질을 하면서 소리친다.

 

여기서 꺼져! 만지지 마! 아무것도 만지지 마! 다 내거야!‘(205p)

 

분의 모습은 파괴적인 정복자, 욕망가의 표상이 된 인간의 초상화이다. 포크너는 이런 분의 모습을 통해 개발은 실컷 하지만, 정작 보존의 책임을 망각하고, 유기하는 인류를 향해 경종을 울린 셈이다. 작품 중에 아이작 매캐슬린은 할아버지의 탐욕에 의해 일군 유산을 상속받길 거절한다. 4장은 21살이 된 아이작과 친척형 매캐슬린 에드먼즈 사이의 대화가 심오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4장에 대해 말이 많다. 사냥이야기의 이란 작품에 꼭 이야기가 필요하냐며 부류와 그 반대의 부류이다. 내가 생각건대 이 대목이 있어 작품이 더 궁극적인 가치에 도달하는 느낌이다.

 

 

 

 

7 앞에서 헤밍웨이 이야길 했는데, 그 작품 태양은 다시 뜬다의 첫 장에 실린 구약성경의 전도서 1:3-6이 박혀 있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여기 보면, 인간의 세대는 유한하지만, 땅은 영원하다고 이야기한다.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땅은 죽지 않는다. 사양화 되거나 황폐해지긴 하겠지만. 허나 사람은 죽는다. 세대의 반복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땅을 소유하고자 한다. 과연 인간이 땅을 소유할 수 있을까?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땅을 소유할 수 있느냐 말이다.

 

 요즘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우리가 과연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소유물의 실체나 물건이나 유형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얼마만큼의 돈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얼마나 큰 저택이나 집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냥 백년 안팎의 시간과 내 몸을 뉘일 수 있는 공간만 소유하고 떠나가는 것이 아닐까? 아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흘러가는 것Flow...flow...flow   

    

 

8 미투운동이 대두되면서 권력의 갑질에 대해 여기저기서 이야기가 많다. 갑질? 정말 무서운 것이다.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인간은 자연을 향해 권력의 자리에 군림하여 자연이 가만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고 갑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개발(계발)보존의 쌍두마차가 제대로 달려야만 인간과 자연이란 이 우주공동체는 더 조화로울 수 있지 않을까? 공존공생(共存共生), 동거동락(同居同樂)의 처지에서 인류는 오히려 자연에게 갑질하는 권력의 횡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윌리엄 포크너는 이 작품을 통해 곰에게 갑질하는, 자연에게 갑질하는 인류의 초상화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9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이 읽히기가 힘든 이유는 아마도 포크너의 글이 스토리의 줄기만을 가지고 치고 나가는 스타일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의 기억, 회상, 과거, 현재...등등.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번역자는 포크너의 영어 작품을 번역할 때 상당한 고충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결국 번역의 기준을 의미전달을 중시한 번역’(213p)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말은 포크너의 글이 주는 매력이 번역과정에 다소 거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만큼 포크너의 언어가 대단하는 말이다. 이래서 text는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인데. 영어실력도 실력이지만, 게으름 탓에 작품이라도 읽은 것이 어디냐며 스스로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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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지를 관광하면서 일체의 메모나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같으면 인증샷을 얼마나 남기려고 애쓰는가? 우리는 마치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찍고, 찍고, 찍고...하지만, 하루키는 다르다. 하루키는 집으로 돌아와 여행지에서 받은 느낌, 잔상들을 떠올리면서 후기식으로 글을 적는다고 한다. 오로지 자기의 감정, 그 때의 느낌을 오롯이 기억에 의존하여 여행일지, 여행일기를 쓰는 셈이다.

 

내가 이 책, 역사의 쓸모를 다 읽고 데스크에 앉아 내 마음에 가라앉은 것은 무엇일까? 하루키식으로 한번 돌아볼까? 기억의 잔상을 추적해 본다.

 

 

 

 

2

먼저, 최태성이란 저자의 매력을 들고 싶다. 무슨 임용시험, 자격시험, 공무원 시험은 이제 나하고는 거리가 있게 되었다. 그만큼 나이를 먹은 셈이다. 최태성이란 이름만 들어본 나는, 이 책의 뚜껑을 열면서 아하!’라는 감탄사를 연발케했다. 다소 대중적인 설민석보다 더 감동적인 역사 쌤이 있구나 싶었다. 설민석의 삼국지 1,2를 읽으면서 재미있고 흥미가 있었다. 중간에 삽화도 있고, 부연 설명도 괜찮았다. 이미 10권짜리 이문열의 삼국지를 재미있게 읽은 나로서도 <삼국지>는 여전히 흥미로운 소재이다. 나는 결혼 전에 이문열의 삼국지를 아내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물론, 아내는 아직 독서중이다. ㅎㅎ

 

 

   

 

3

설민석의 삼국지 1,2는 말 그대로, 삼국지 입문서로는 굿이다. 이현세의 <만화삼국지>도 너무 재미있게 보았는데, 설민석의 삼국지 1,2는 만화보다 쉽다고 하겠다. 쉽다는 말은 그만큼 압축되고 간단하고 수월하게 읽힌다는 말씀이다. 10권짜리 삼국지를 재독하려고 했을 때, 인상적인 대목이 어디 있던가 싶어 뒤적여 본다.

 

유비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길에 만난 한 허름한 노인이 이런 말을 날린다.

 

말이 많으면 마음이 빈다

 

, 어떻게 이런 심금 울리는 대사를 칠 수 있단 말인가? 또 하나 더 볼까?

 

 

유비가 또 다른 스승을 찾지 않고 집으로 가니 어머니가 왜 이리 일찍 왔느냐고 하자, 유비가 대꾸한 말이다.

 

글이 모자라서 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이 외에도 삼국지 군데군데 박혀 있는 주옥같은 명문장과 아포리즘은 가슴에 와 박힌다. 20대에 친구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술잔이 넘치는 것을 보면서 술 잔이 넘친다는 것은 정이 넘친다는 뜻이라며 삼국지의 이야기를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삼국지는 그만큼 수많은 보화들이 가득 찬 고전(古典)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설민석의 삼국지에서는 이런 맛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 

유비가 제갈공명을 찾아가는 대목이다. 제갈공명을 인재로 사용하려고 벼르고 벼르지만, 제갈공명이 만날 기회를 주질 않는다. 공명보다 스무 살이 어른인 유비의 공들이는 모습에 아우 관우와 장비가 불만을 토로한다. 또 다시 입이 튀어 나온 관우와 장비의 반응에도 아랑곳 없이 와룡산으로 향하는 유비였다. 고을에 도착한 유비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자고 한다.

 

여기서부터 걸어가자. 성의를 보여야지.”

아니 누가 본다고 벌써 그러시오? 여기서 그 집까지 가려면 거리가 얼만데?”

하늘이 보고 땅이 보질 않느냐? 진정한 성의란 남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보이는 거다.”(설민석의 삼국지 1, 311p)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안다’.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다른 이가 알아주는 것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는, 자기 자신이 알아주는게, 자기 자신에게 보이는 게 가장 최선이 되어야 한다는 대목이 나의 정곡을 찔렀다. 이 감동은 도대체 어쩔거냐?

 

    

 

4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대중적인 설민석과는 또 다른 최태성의 깊이와 식견이 여기서 드러난다. 교사로 재직중에 웬 학원에서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연봉으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저자는 고민했다고 한다. 당연히 고민해야지. 안 그런가?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때 그에게 선택의 길을 제시한 역사의 인물은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이었다고 한다.

 

서른 살 청년 이회영이 물었다.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눈을 감는 순간 예순여섯 노인 이회영이 답했다.

예순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40p)

 

저자는 역사를 통해 자신의 현실을 진단하고 선택을 내렸다. 그는 그 화려한 제의를 거절했다.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가치에 주사위를 던진 셈이다. 이 이야기가 심쿵했다. ‘최태성이란 저자가 솔직히 그냥 보이지 않았다.

 

 

 

5

둘째의 매력은, E.H.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란 이야기를 했다. 저자는 강의만 팔아먹는 장사꾼이 아니라, ‘역사적 사고를 하는 주체라는 점. 바로 역사적 사고란 단어가 기억에 남는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인기가 좋아서 연임 이후에 3선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주위의 수많은 이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양한다. 거절한다.

 

정계를 떠나고자 하는 내 선택이 주의와 분별의 잣대를 비추어 바람직할 뿐 아니라 애국심의 잣대에 비추어서도 그릇되지 아니한 선택이라 믿는다.”(58p)

 

초대 대통령으로서 좋은 선례를 남긴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박정희 대통령은? , 대통령을 다 닮아가는 한국인인가?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기득권과 안전장치를 내려놓은 이들이 드물다. 우리나라 사람이 미국 사람보다 욕심이 더 많은가? 아니다. 인간은 원래 욕심의 동물이고,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역사 속의 소수의 인물들은 우리를 더 부끄럽게 만든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보이지 않는, 드러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 이회영은 나라가 기울어가는 망국의 조짐을 보고서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압록강을 건넌다. 이회영 가족이 조선 땅을 떠난 이유는 가족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구차히 생명을 도모하지 않겠다’(219p)는 가족회의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국외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여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도왔다. 지금 시세로 따지면, 이회영의 재산은 헐값으로 매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600억 원이 넘었다. 만주 땅에서 땅을 사고, 집을 짓고, 학교를 짓고, 인재를 양성하고 독립투사들을 지원했다. 또한 형제들이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액수의 자산이 3년 만에 바닥이 나버린다. 가족들 모두가 강냉이죽도 마음껏 먹지 못했다고 한다. 이회영의 가슴에는 오로지 식민지 해방의 꿈이 있었던 것이다.

    

 

6

역사적 사고

쓸모 없는 것,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라...쓸모 없어 보이는 것들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 일연의 <삼국유사>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는 너무나 다른 색깔의 야사집과 같은 <삼국유사>가 과연 정말 쓸모없는, 쓰잘데기 없는 기록인가? 그렇지 않다.

 

역사는 기록으로 승부한다. 저자는 쓰잘데기 없는 시시콜콜한 <조선왕조실록>이 남아있기에 지금도 TV와 드라마, 영화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지 않은가! 과연 인간의 삶, 인간의 역사는 버릴 것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나라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이 기록화된다면, 과연 그것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을까? 그런 생각까지 뻗어간다. 내 자식들은 아비의 기록을 대하는 것에 의미가 없지 않겠지만, 후대의 사람들이 쓰잘데기 없는 1인의 기록이 역사라고 회자된다면? 역사는 기록이 있기에, 과거와 현재가 소통이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 백성들이 글을 깨우치고, 남편을 먼저 보낸 한 여인의 피맺힌 절규의 글이 19984월 안동에서 발견된다. 무려 400년 전인 1586년에 쓰인 편지였다.

 

당신 늘 나에게 말하기를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중략)

당신을 향한 마음,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도 끝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115p)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길 바라>라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제목처럼, ‘별 것 아닌 것이, 별 것 아닌 것이 아니더라는이야기이다.

 

 

 

7

나의 쓸모, 인생의 쓸모, 역사의 쓸모...

쓸데없어 보이는 내 인생의 쓸모를 역사적 선분 위에서 한번 생각해 준 작가에게 감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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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9-22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 씨의 책들은 너무 가벼워서 패스
하렵니다.

정사 삼국지가 아니라 소설 연의라는
걸 밝혀 주어야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소설이 역사를 대체하게 되었네요.

유비를 너무 빠ㄹ... 아니 추켜 세워서
2류 군벌을 한황실 부흥에 나선 춘추
대의를 받드는 영웅으로 격상시킨 게
바로 소설가라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
라고나 할가요.

그런 점에서 설 씨의 책과 일맥상통하
니 그렇게 비판적일 필요가 없겠구나
싶기도 하구요.

카알벨루치 2019-09-22 21:39   좋아요 1 | URL
설민석은 역사를 대중화시킨 한 사람 정도로 알아두면 되겠습니다 픽션인지 팩션인지 팩트인지는 언제나 독자의 몫인데 독자가 그걸 분별한 능력이 있어야한다는 전제가 깔리는데, 그게 쉽지 않은 것이 딜레마이기도 하고 원전을 대하지 못한 초보독서가에겐 흥미유발을 시킨다는 부분은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syo 2019-09-22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몇 권을 후루룩 엮어 내는 글은 정말 어떻게 하는 건지를 모르겠단 말이지요..... 호랑이님이나 사이러스님이나 카알님이나 참 부럽다.

카알벨루치 2019-09-22 21:40   좋아요 0 | URL
쓰다보니 그렇게 되는거지요 다 자기 스탈이 있으니 ^^어여 몸부터 회복시키세요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19-09-23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의 쓸모>를 사 두고서 못 읽었습니다. 오늘부터 읽기 시작하렵니다. ㅋ
저는 정비석의 <삼국지>를 읽었습니다. 다른 건 10권인데 이건 총 6권짜리라서 선택했죠.
너무 오래전에 읽은 거라 주옥 같은 아포리즘이 있는 줄 몰랐어요. 그땐 줄거리에 치중해서 읽었던 건지...

카버의 <대성당>으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을 읽었는데 표제작인 ‘대성당‘만큼 좋았습니다.
하루키, 역사란 무엇인가 등 모두 제가 알고 있는 책 이야기라서 댓글을 안 남길 수가 없네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09-23 23:15   좋아요 1 | URL
<삼국지>를 재독할려고 했을때 좋은 내용을 타이핑하면서 읽다가 중도에 하차했는데 ....그렇게 읽으니 음미할 꺼리가 더 있는 듯 합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세상엔 좋은 책이 왜 그리 많대요 ㅎㅎ

coolcat329 2019-09-23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글 잘 읽었습니다. 설민석의 책은 초딩 아이를 위해 샀는데 푹 빠져서 너무 재밌게 읽더군요 ㅎㅎ

카알벨루치 2019-09-23 23:16   좋아요 1 | URL
그냥 제겐 <역사의 쓸모>란 책이 너무 좋았네요 빌려 읽고 선물도 하고 했는데 다시 한권 사서 집에 구비해놓을 작정입니다 ^^

coolcat329 2019-09-24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야겠어요:)

이혜자 2019-09-29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댓글 잘 읽고 갑니다~
깊이있는 독서들을 하시는 님들의 댓글에 리스펙 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09-29 13:35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 댓글도 감사드립니다 ^^

하하호호 2019-10-02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글 읽고서 <역사의 쓸모>를 샀습니다. 제 인생에서도 쓸모를 찾고 싶어서요.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10-04 00:32   좋아요 0 | URL
후회하시지 않을겁니다 최태성작가한테 제한테 오히려 감사해야하겠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