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읽고 함께 살다 - 한국의 독서 공동체를 찾아서
장은수 지음 / 느티나무책방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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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표지

낡은 듯한 표지를 보면 수십년전에 나온 책 같다. 그러나 수년전에 나온 책이다. 플라스틱을 입히지 않아 표면이 거친 책이 좋다. 새 걸 사도 헌 옷 같은 게 오래 입어도 새 옷 같은 느낌처럼 말이다.

 

# 목차가 있는 표지

보통 책들은 표지를 넘겨야 목차가 나온다. 그러나 이 책은 표지에 목차가 있다. 이처럼 표지에 목차가 있는 책들은 녹색평론, 오늘의 교육, 작은책, 함께 여는 국어교육 같은 정기간행물에선 종종 있다. 그러나 단행본이 이런 경우는 드물다. 말을 길게 하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두괄식이 좋다. 그래서 이렇게 표지에 목차가 있는 책이 좋다.

 

# 독서

공식적으로 집계가 되는 독서 동아리가 전국에 4,356곳이 있다고 한다. 그 중 24곳을 저자가 찾아 가서 인터뷰한 책이다. 3년 이상 운영된 곳부터 30년 이상 운영된 곳도 있다. 독서가 좋다는 것은 알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방방곡곡에서 실재하는 생생한 사례를 통해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각 공동체에서 추천하는 책 목록도 아주 좋다.

 

# 공동체

같이읽고, ‘함께산다는 제목이 참 좋다. 게다가 독서 모임, 동아리가 아니라 공동체라 하니 더 좋다. 왜 같이 읽고 함께 살아야 할까? 혼자 읽기는 시작도 어렵고 지속도 어렵다. 혼자 사는 거도 그렇다.

 

# 밑줄

독서 동아리에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모여 읽기는 각자 자신이 원하는 책을 읽고, 그 감상을 나눕니다. 아주 쉽고 간단하지요. ‘모여 듣기는 같은 책을 함께 낭독하고, 듣는 감상을 나눕니다. 읽는 과정을 함께 하기에 웃고, 긴장하고, 놀라고, 감탄하고, 시원해 하는등의 반응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읽기 공동체를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죠. ‘감상 나누기말로 나누는 독후감비슷합니다. 책을 읽고 난 후 변화된 나에 대해 말하는 모임입니다. ‘토론하기는 회원들이 제기한 질문(논제)을 놓고 각자 주장과 의견을 나눕니다. 말로 하는 논술인 셈이죠. ‘통합적으로 읽고 활동하기는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고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새로운 생각을 하고 창작 활동을 합니다. 한 책에서 얻은 아이디어와 다른 책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제3의 아이디어를 만들어 가는 활동이 핵심이지요.

 

선진국일수록 국정이든, 검정이든 교과서가 있는 나라가 드물죠. 학교에서는 책을 읽고 학생이 그 책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수업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학급 자체가 일종의 독서 동아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학생들의 독서 교육이 주로 사교육 시장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나마 대화나 놀이나 토론보다는 학교 수업과 유사한 형태로, 주로 학원 선생님들이 강의하고 학생들이 듣고 받아 적는 경우가 많습니다.

 

각자 읽고 싶은 책을 두세 권 골라 와서 책 친구들 앞에서 설명한 후, 10~15분 정도 눈앞에서 읽은 시간을 준 후, 투표를 통해 고르는 게 가장 좋습니다. 결론이 너무 빤하지 않고 열려 있는 책, 즉 해석이 중충성이 있는 책일수록 같이 읽기에 효과적입니다. 고전같이 큰 질문을 던지는 책과 트렌드 서적 같이 작고 긴급한 질문을 던지는 책을 오가는 것이 의미 있는 토론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책과 책이 서로 질문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책을 같이 읽으면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가령, 유럽에는 엄마와 딸동아리가 흔합니다. 변화된 사회에서 새로운 고민을 하는 딸들과 다양한 사회 경험이 있는 엄마들 이야기가 서로 섞이면서, 서로의 인생 전반에서 감동적인 변화가 일어나곤 합니다. 공격적이지 않다면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는 사회적 장을 만나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깊은 경험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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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는 여행 쫌 아는 10대 - 낯선 길 위에서 하고 싶은 일을 만나다 진로 쫌 아는 십대 2
서와(김예슬) 지음 / 풀빛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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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은 자연과 함께하고, 도시는 인간과 투쟁한다. 물론 시골도 자연과 투쟁하고, 도시도 인간과 함께할 때가 있지만 비교적 그렇다는 얘기다.

 

이 책은 시골서 농사짓고 사는 한 여성청년농부의 글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홈스쿨러로 살았던 이야기, 학교밖 청소년과 함께 했던 이야기, 국토 순례와 산티아고 순례에 대한 이야기, 농사 짓으며 사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러한 삶이 지속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본인의 의지뿐만이 아니라, 부모님, 홈스쿨링 친구들, 그리고 공동체 열매지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립은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는 것이다.

 

 

<밑줄>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부모님이 나에게 홈스쿨링을 소개해 주셨다.

 

부모님은 나에게 홈스쿨링을 하자가 아니라 홈스쿨링이라는 길도 있어라고 이야기하셨다. 선택은 내 몫이었다.

 

학교 밖 길을 선택한 뒤로 내 삶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정답은 없었다. 선택 그리고 다음 선택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동네를 걸었다. 이른 아침에 나보다 늘 먼저 나와 있는 떡과 빵을 보면서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나 이 많은 떡과 빵을 만드신 걸까?’ 생각도 하고

 

내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한결같이 하시던 말씀이 있다. ‘가장 너답게 살렴. 그거면 충분해

 

내가 친구들을 만나고 활동했던 곳은 탈학교 청소년 네트워크 학교너머라는 곳이었다.

 

나에게는 소외되어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가장 먼저 눈에 보인다. 얼마나 힘들지 알기 때문이다.

 

나는 느린 사람이다. 말과 행동도 느리고, 새로운 것을 충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걸음도 느려서 걷기 여행할 때 가장 뒤에서 걷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느린 만큼 길을 세심히 들여다보며 걷는 재미가 있다.

 

글을 걸으면서 나에게 믿는 구석이 생겼다. 남들보다 더디고 느릴지 몰라도 틀림없이 목적지에 도착해 있을 거라는 믿음 말이다.

 

언니, 내년에 고3이지? 대학 안 가?’

나는 학교 안 다니니까 고3은 아니고, 그냥 19살이지. 아직 대학 갈 생각은 없어. 필요해지면 그때 생각해 보려고.’

, 대학 나와도 취업하기 힘들다는데 어쩌려고? 요즘 계산대 보는 알바들도 완전 고스펙이래.’

꼭 취업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취업이 아닌데?’

대박. 그럼 뭐 먹고 살려고? 우리가 홈스쿨러긴 해도 대학은 가야 하지 않아?’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친구 얼굴을 보니 홈스쿨러라고 모두 대학으로부터 자유로운 건 아니구나싶었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바라는 삶과 꿈도 다르다. 세상에 그만큼 다양한 길이 있길 바란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내야할 소리를 내고 용감하게 살고 싶다, 혼자 말고 같이.

 

선생님은 아집을 버리라는 것이 논어의 중심 이야기라고 하셨다. 아집이 있는 사람은 잘 배우려 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을 가둔다면서, 생각을 가두지 않는 것이 진리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사람마다 가진 생각이 있고, 지키려고 하는 중심이 있다. 그 중심은 삶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심을 지키는 것과 아집은 어떻게 다른 걸까? 그 둘을 나누는 기준은 돌아 나올 수 있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돈을 벌었지만, 계획했던 여행 경비보다 100만원이 모자랐다. 고민하는 나에게 부모님이 100만원을 지원해 주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 돈을 선뜻 받겠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 막 농촌에 들어와 농사로 생활비를 벌고 있는 우리 식구에게 100만원은 큰 돈이었다. 그런데 부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것을 다 혼자 힘으로 해내는 게 자립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건 자립이 아니라, 그냥 외로운 거야. 세상에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어. 때로는 도움을 주고, 때로는 받으면서 자기 삶에 담고 싶은 생각과 의미를 지켜가는 거지. 도움을 잘 받을 수 있어야 잘 나눌 수도 있어

 

나는 농사를 지어 먹고사는 농부지만 농사 말고도 하고 있는 일들이 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나무를 깍아 무언가를 만들기도 한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마을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책을 읽고 독서 토론도 한다. 이웃들과 힘을 모아 달마다 인문학교를 열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음악회도 연다. 이따금씩 다른 지역에 초대 받아 노래 공연을 다녀오고, 농부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러 다닌다. 돈벌이가 되는 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다. 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고, 내 삶을 채우는 데 충분한 역할을 하는 일이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보다

오늘 본 밤하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참고>

https://100in.tistory.com/3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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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1세기 기독교 시리즈 1
로버트 뱅크스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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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 (공동번역 신약성서 사도행전 )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비호감의 대상인 것 같습니다. 저도 제가 기독교인이라는 걸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얘기 못하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초대 기독교인들의 삶을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그들은 함께 지내고 평등하게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런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좋게 생각하고, 기독교인이 되어간 것이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평등한 삶을 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비기독교인보다 더 불평등한 세속에 절여져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비호감의 대상으로 지탄과 조롱을 받게 되는 것이죠.

 

이 책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는 초대 기독교인들의 예배를 소설 형식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특정인을 초대하지 않고 모두에게 열린 자리였습니다.

 

여자와 남자, 어린이와 늙은이는 물론 종과 주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이 이야기하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은사)은 신이 준 것이니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사용해야 한다는 매우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밑줄>

오늘은 일찍이 근처에 있는 한 가정의 저녁 식사에 다녀왔는데, 여러분들에게 들려주고 싶을 정도로 특이한 경험이었다. 동행한 친구들은 아굴라와 브리스가라는 유대인 부부로부터 매번 일곱째 날마다 식사 자리에 상시 초청을 받은 상태였다. 방문객들에게 열려 있는 자리였으므로, 내가 참석하는 데 별도의 초청은 필요하지 않았다.

 

자기 종의 접시 위에 음식을 덜어주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음식을 덜어 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 것과 정확히 똑같은 종류를 똑같은 양으로 담았다.

 

여기저기서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동안, 참석한 사람들이 보여 준 모임 참여도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런 열띤 토론은 나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 모임의 참석자들은 예의 바르게도 남은 음식과 포도주를 함부로 바닥에 버리지도 않았다. 다소 산만하긴 했으나, 단정하면서도 도를 넘지 않았다. 흔히 보이는 무례도 범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일어난 일들 가운데 종교적인 내용이라곤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예전의 틀은 고사하고, 어째서 사제조차 없단 말인가.

 

선창하자 곧 모두가 따라 불렀고, 아이들은 손뼉 치며 노래했다.

 

자기 신이 마치 같은 방 안에 있는 가까운 친구인 것처럼 아주 일상적인 말투를 썼다.

 

다른 사람이 말할 때도 똑같은 식이 되풀이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물론 아이들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두(은사)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지 이기적으로 숨겨두거나 자기 혼자만 누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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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토지와 경제정의
대천덕 지음, 전강수 외 옮김 / 홍성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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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조지의 진보와 빈곤이 톨스토이의 부활, 대천덕의 토지와 경제 정의를 낳았다

 

조지, 톨스토이, 대천덕 모두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성경(레위기 25:23)에 적혀 있든 땅은 신의 것이니 인간이 사고 팔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를 현대 사회에 적용하자면, 땅에 대한 세금만 물도록 하는 것, 즉 토지단일세의 실시이다.

 

<밑줄>

가난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헨리 조지는 일깨워 준다. 또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자기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 또한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이다 (요일 3:11~18, 4:20)

 

콘스탄틴 시대의 로마 제국의 지주들이 진정한 회개 없이 회심한 이래로 기독교회의 지도자들은 줄곧 예레미아 시대의 선지자 노릇과 제사장 노릇을 해 왔다. , 구약의 토지법을 일상생활에 실제로 적용하거나 실현하는 일은 애써 무시하면서 그 법의 영적 해석에 대해서는 자기 편한 대로 말을 바꾸는 짓을 일삼아 왔던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통상 교회가 토지법을 제정하거나 시행할 권한이 없다는 논리로 정당화되어 왔다.

하지만 AD 313년 관용령에 의해 교회는 집권 세력과 타협하였다. 더욱이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유권자의 다수가 그리스도인이다. 교회는 더 이상 올바른 토지법을 통해 정의를 실행할 권한과 책임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런데도 교회는 콘스탄틴 시대에 분분했던 토지법 문제를 애써 무시하였다. 결국 교회는 지주들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슬람은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그리스도인 지주들이 토착민들을 착취한 데 대해 토착민들이 저항하는 가운데 발흥하였다. 오늘날 교회는 이 토지법 문제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다.

 

BC 200, 즉 콘스탄틴 시대가 시작되기 500년 전, 로마가 카르타고를 정복했을 때 바알의 토지법이 많은 로마인들의 탐욕을 부추겼다. 바알의 토지법은 아합 시대에 이세벨의 친척들이 카르타고를 세운 이래 줄곧 카르타고의 지배원리였다.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상대로 싸웠던 로마의 참전 병사들은 카르타고 제국의 영토였던 북아프리카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의 구제도는 바알 제도로 대체되고, 이탈리아의 불굴의 자영농들은 새로운 지주 계급의 땅에서 농노로 전락하였다. “벽돌로 지어졌던 로마를 대리석으로 바꾸어 놓은”, 바로 그 바알 제도로 인해 로마 제국은 쇠퇴를 거듭해 끝내는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교회는 그 제도를 개혁할 마음이 없었고 오히려 지주들의 지배 아래 놓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북아프리카의 모든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서 기독교에 대항했으며,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구호 아래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이와 똑같은 상황이 중동에서도 재현되었다. 유럽에서는 야만인들의 침략으로 로마 문명의 유산이 파괴된 후, 교회는 좀더 평등한 토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교회가 진정한 경제정의의 비전을 회복하기에는 그 전에 바알 제도와 타협했던 기간이 너무 길었다.

16세기에 재세례파가 성경적 토지개혁을 요구했을 때,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그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교회는 이미 최대의 지주였던 것이다. 신교와 구교 사이의 전쟁에서 진정한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토지였다.

아일랜드의 역사만큼 이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도 없다. 대대로 잉글랜드 국왕은 영혼 구원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아일랜드인들의 토지를 강탈하여, 자신들의 심복인 국교도와 장로교도들에게 하사하였다. ‘아일랜드 문제란 다름 아닌 바알 문제이다. 바로 그 기독교적인유럽인들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를 땅에 굶주린 식민주의자들에게 분배하면서, 비교적 공정했던 아프리카의 토지 제도를 붕괴시키고 바알 제도를 수립하였다.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이로서 아프리카인들은 가난과 착취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토착민과 식민주의자들 간에는 깊은 증오심이 생겨났으며, 식민주의자들은 부패에 빠져 들었다. 식민 열강은 차나 커피 농장 아니면 다이아몬드와 기타 광산물의 생산을 위해 가장 생산성이 높은 토지를 샀으며’, 토착민들에게는 농장과 탄광에서 일하게 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임금만 지불한 채 거기서 나온 모든 이윤을 유럽으로 송금하였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로 있던 국가들이 정치적 독립을 되찾았다 하더라도 경제적 착취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아프리카는 전쟁과 살인, 분노, 두려움, 토양 부식, 기아 등으로 고통당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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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덕 자서전 믿음의 글들 167
양혜원 / 홍성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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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원 대천덕 신부님의 자서전에서 있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6.25 전쟁 이후 국가 재건 사업이 일기 시작했던 초기에는 거지 소년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 중 한 아이를 데려다가 신학교에서 양육하며 가족처럼 돌보아 주고자 했다. 나는 이 소년이 갑자기 떠나기 전까지는 신학생들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거칠게 굴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내게 어학(한국어)를 가르쳐 주던 나이 든 학생에게 왜 그 아이가 떠났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구속을 견딜 수 없었나 보죠

그 말을 들은 나는 당황하여 반문했다.

구속이라니요?”

그는 양손이 수갑에 묶여 풀지 못하는 시늉을 했다.

그게 구속의 뜻이라구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겠습니까?”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려고 그랬겠죠, .”

이 대답에 놀라 나는 한영 사전을 찾아보았다. 거기에는 동음이의어로 구속이라는 단어가 또 하나 실려 있었다. 즉 하나는 자유롭게 하다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억압하다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자유롭게 하다라는 뜻을 아는 학생은 하나도 없다는 것과, 그 말은 한자를 아는 신학자들만이 사용하는 용어로서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잡아 묶는 구속(拘束)과 풀어 주는 구속(救贖), 공교롭게도 음은 같지만 뜻이 완전히 달라서 혼란을 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설령 신학생들이 말로서 주님의 구속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삶에서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거지 소년을 괴롭혀 내쫓은삶은 풀어주는 구속(救贖)이 아니라 잡아 묶는 구속(拘俗)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속(拘束)하지 않고, 구속(救贖)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그러하여야 합니다.

 

https://youtu.be/55s3T7VRQ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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