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시선 326
천양희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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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양희 시인의 시를 오랜만에 마주한다.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이 좋았다. 우두커니가 된다는 말에, 공감해서일까. 멍한 듯 한자리에 박혀 사물처럼 공간을 지키는 일. 그리하여 존재감이 사라진 느낌이지만 때로 그렇게 어느 영역 안의 무언가로 잠시 있는 일이란 생각보다 편안하다. 가끔은 우두커니가 되는 게 정말로 좋다. 그때의 기분이 우울하거나 아무 생각 없거나 와는 별개로 말이다. 

 시집을 읽으면서야 시인이 나와 가까운 거리에 산다는 것을 알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수락산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 점을 나눠 쏘이거나 눈과 햇볕을 쪼개 썼을지도 모른다. 싱거운 생각인데도 기분이 좋은 건 시인의 <마들시편>과 <수락산>을 읽으며 괜스레 수락산 근처만 지나도 시인의 숨결이 느껴질 거 같아서이다. '산이 가파른 듯 내가 가파르다 삶을 수락하려는 듯 마들을 다 지나고서야 겨우 수락산에 든다' (67쪽, <수락산>에서 부분 발췌.) 

 시인은 언어유희를 즐긴다. 중첩의 의미를 이용하고 단어의 비슷함을 끌어내 의미를 부여한다. 아래에 적은 <사라진 것들의 목록>은 시 자체만으로도 마음에 닿지만 결국 이 시를 다 읽기도 전에 사리진 것들에서 살아진 나를 찾게 되었다. 사라져 간 것들 그리고 살아진 혹은 살아온 나 사이에는 어떤 공식이라도 있을까. 그런 게 중요하진 않을 것이다. 단 한 줄의 글로 독자의 마음을 열고 사고의 폭을 터준다는 것이 중요하다. 시인이 의도하건 아니건 간에. <사라진 계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외로움은 내 존재가 피할 수 없이 품은 그늘이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남은 유일한 이유였다', '이 세상에 와서 내가 없는 계절은 없을 것이었다'(94~95쪽. <사라진 계절> 부분 발췌.) 

 유독 시인과 시에 대한 시가 많았다. 시가 보여주는 것이 마음의 지도라고 한 <시는 나의 힘>, <그자는 시인이다>, <시인이 시인에게> 등이 있다. 특히나 <시인이 시인에게>의 마지막 말인 울분을 함께 나눠 가지면 안 되겠느냐는 시인의 말이 왜 이다지도 슬프게 들리는지. 시집을 보내주었던 한 시인의 부재가 몹시도 서글펐다. 어디선가 시를 쓰고 있을지 모를 나의 잃어버린 시인에게 그립다는 말을 수없이 보내고 싶은 밤이다. 시인의 울분을 나눠 가질 수 없는 시인이 아닌 나는 독자로 그저 시를 손에서 놓지 않고만 싶다. 

 깊어지는 시인의 시를 마주하며 내게 마음의 지도를 보여준 시인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기차를 기다리며>를 읽으며 오래전 소리 내 읽던 <단추를 채우며>란 시가 겹친다. 그렇다. 누가 읽어도 이건 천양희 시인의 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가 마음의 지도라면 시에 포함된 단어와 느낌 등은 지도를 이루는 섬이나 강줄기가 될 것이다. 내게는 이럴만한 섬과 강줄기가 있던가. 부러운 일이다. 

 삶을 노래하는 시인들에게 우리는 늘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네들의 성찰과 눈물과 그 무엇으로 쓰인 시 한 토막으로 위안받고 사니 말이다. 반찬 한 끼로 찬을 하기에는 너무도 미안한 일이다. 시집은 읽을 때마다 새롭지만, 더 많은 시를 읽지 못해 가끔은 조바심이 인다. 그러나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한 권을 읽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을 발견한다면 두고두고 읽어도 좋으니까. 

 끝으로 시인의 시를 인용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하자면,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86쪽, <어처구니가 산다> 부분 발췌.)

 

 


사라진 것들의 목록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가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목포댁 재봉틀 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지고 고전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지 오늘의

뒤켠으로 사라진 것들이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런데 왜 옛날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스며드는 것일까 어느

끈이 그렇게 길까 우린 언제를 위해 지금을

살고 있는지 잠시 백기를 드는 기분으로

사라진 것들을 생각하네 내가 나에게서

사라진다는 것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을 것이네

 

 ( 28~29쪽. 詩 <사라진 것들의 목록> 전문. )


  

'세상에서 가장 죄없는 일이

시쓰는 일이라고 아직도 믿으면서.' (시집 끝 시인의 말에서.) 
 

이 말을 들으며 대답했다. 

그러니 詩…. 많이 쓰세요. 시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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