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양장)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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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그중에서 단연 그들의 문장과 철학, 학문을 깊이 알고 싶다.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어찌나 많은 이야기가 샘솟는지 만날 때마다 탄성과 부러움에 취하지만 무엇보다 우정이 함께일 때 감동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김려는 들어보았는데 이옥은 이번에 처음 만나보았다. 아니다. 정민의『미쳐야 미친다, 2004년』에서 만났었구나! 아무튼, 난 이들의 문장에 단번에 빠져든다. 박지원이 자신의 문체를 버리지 않았듯 이옥도 끝끝내 굽히지 않으으로 유하지만 강하게 생을 마쳤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자신만의 문체를 마음껏 펼쳐볼 수 없었던 것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정조와 당시 시대상을 말할 수밖에 없다. 강명관의『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2007년』를 통해 조선 시대 문인들을 다양하게 만났었는데 그중에는 유명한 세종대왕, 정조, 이덕무 등 실로 매력적인 인물이 많다. 그중 정조는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조선 시대의 책보급은 널리 있었지만, 책과 사상을 탄압한 인물로 거론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정조의 문체반정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고 보니 강명관 저자가『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의 해설을 썼다.

 

 정조는 당시 유행으로 사대부까지 흠뻑 빠졌던 패관잡문, 소설류의 문체를 전적으로 막으려고 했다. 이는 당시 성리학 중심 세계관 더욱이 왕관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여러 상황에 누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얽힌 주도세력 등의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활발한 문예활동을 막지는 못했다. 이옥도 결국 자신의 문체를 버리지 않았고 김려는 이를 모아 이옥만의 책은 아니지만 여러 벗의 글을 묶어 문집(『담정총서』, 김려의 문집은 『담정유고』)을 완성했고 남겼기 때문이다.

 


임금은 자신을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칭했다. '하늘의 달은 하나뿐이지만 그 달은 모든 강물을 고르 비춘다.' 임금 또한 그렇다는 것이었다. 임금의 은총이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모두 미치기를 그는 꿈꾸고 또 꿈꾸었다. 만천명월주인옹은 그런 의미에서 성리학의 핵심 가치인 이일분수(理一分殊), 하나의 원리가 세상 모든 사물에 고루 드러난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세종 이래 처음으로 제대로 된 학식과 이념을 갖춘 군주가 등장한 것은 꽤 반가운 일이었다. 문제는 그에게는 세종 같은 아량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에 있었다. 임금은 고문의 신봉자이기도 했다.  글이라면 모름지기 인의예지를 다뤄야하고 그 형식은 당과 송의 것이어야 했다.  (이하생략)

 

(35~36쪽.)

 이 책의 핵심은 김려와 이옥의 글을 만날 수 있다는 것과 그들의 우정이 감동적으로 훈훈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덕무와 그의 친구들 이야기인『책만 보는 바보, 2005년』와 일맥상통한다. 그때의 감동을 이 책으로 다시금 느낀다. 그러고 보니 두 책의 공통점이 있다. 물론 조선 시대 문인 이야기(책이나 글/ 친구, 우정)라는 점도 있지만 둘 다 청소년을 위한 책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내가 청소년 때 이런 책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튼 모두에게 이토록 아름다운 우리 문학 책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줄거리는 이옥의 아들 우태가 김려를 찾아오면서부터 시작된다. 그간 잊고 지낸 죽은 벗 이옥의 글과 마주하며 그 시절을 생각해내는 과정을 좇다 보면 당시 시대상이 느껴져 절박한 이들의 심정에 공감한다. 그리고 공명은 점점 커져서 글이란 무엇인가, 우정을 나눌 친구 등에 대해 골몰하게 된다. 

 


  지금 내가 술을 마시고 있는데, 술병을 들어 찰찰 따르면 마음이 술병에 있고, 잔을 잡고서 넘칠까 조심하면 마음이 잔에 있고, 안주를 잡고서 목구멍에 넣으면 마음이 안주에 있고, 객에게 잔을 권하면서 나이를 고려하면 마음이 객에게 있다.  (중략) 몸을 근심하는 근심도, 처지를 근심하는 근심도, 닥친 상황을 근심하는 근심도 없다. 바로 이것이 술을 마심으로써 근심을 잊는 방도요, 내가 술을 많이 마시는 까닭이다.

 

 (107쪽, 이옥의 마음이 담긴 글.)


 할 일도 없고 외지기까지 하니(은비뫼 주: 여름날 외진 곳인 백운사에서.), 쓰지 않고 도대체 어떻게 이 지긋지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단 말인가.

 허허, 답이 되었나? 내가 글 쓰는 거창한 이유 따위는 없네. 지루해서 할 일이 없기에 쓴 것일 뿐.

 이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웠다. 글에 목숨 건다는 말보다 그냥 쓴다는 말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이옥에게 글은 공기요, 물이요, 밥이없다. 그의 곁에 그냥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니까 이옥은 자기 삶 전체를 글쓰기의 현장으로 승화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

 

(114쪽, 이옥의 대답과 김려의 생각.)


  생각하는 창문, 이는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의 오른쪽 창문에 붙인 현판이다. 내가 북쪽에 있을 때는 어느 하루도 남쪽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남쪽으로 옮겨 오게 되자 또 어느 하루도 북쪽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게 되었다. 생각이란 이렇듯이 때를 따라 바뀌는 것이지만 그 괴로움은 전날보다 더욱 심하였다. 창문에다 생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이 때문이다. (중략) 나의 생각은 어디에 있는가? 생각하여 느낌이 있으니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고, 소리에 따라 운을 붙이니 곧 시가 되었다.

 

(140~141쪽, 김려의 마음이 담긴 글.)

  이옥은 소소한 것까지 관심을 두었다. 사람들이 중심만을 볼 때 그 바깥쪽의 관심을 두지 않는 것들에 관심을 갖고 글로 표현했다. 그것도 섬세하고 생생하게. 그래서 마치 그 현장에 있거나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며 언어유희처럼 문장을 이으며 부드러운 리듬도 표현했다. 그에 비해 김려의 글은 차분하다고 할까. 물론 부령에서 유배생활 중 기생 연희에 대한 글 등에서도 담백한 맛이 느껴진다. 

 

 이들은 글을 버리고 살 수 없는 이들이었다. 지루해서 쓰고, 기분 좋아 쓰고, 유배지에서 절망하며 쓰고 그야말로 끝없이 쓴다. 이들의 글쓰기는 꾸밈이 없어서 좋다. 기교 없는 솔직한 글에서 마음이 느껴지고 당시 시대의 냄새가 되살아난다. 그리고 이 책의 또 다른 감동은 두 지기가 서로의 글을 아끼고 추린다는 점이다. 감동적인 부분이라 자세한 언급은 피하겠다. 이들의 우정의 향기가 진한 여운으로 독자를 흔든다. 얼마 전 사라진 봄바람처럼. 아쉬운 봄 향기처럼 그러나 다음 해에 되돌아올 아련한 잠재적 그리움 되시겠다.

 

 김려의 유배길에서 느낀 서러움을 통해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믿고 그에 따르는 이들의 더딘 걸음에서 지금의 나를 반추해본다. 좋은 책이었다. 읽는 동안 행복했으니까.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책만 보는 바보

청장 이덕무. 간서치라 불린 이덕무의 세계. 그리고 친구들(박제가 등.) 이야기. 책과 우정에 대한 감동.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조선에 대한 책을 내는 강명관. 조선의 책벌레들을 만날 수 있으며 이 책에서 수많은 길을 발견하게 될 행복함.

 

미쳐야 미친다


역시 조선지식인의 내면과 만날 수 있는 책. 조만간 다시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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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책 북멘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지음 / 더블유북(W-Book)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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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책 북멘토』(이하 북멘토)를 통해 나만의 책좋사를 돌아보게 되었다. 책과의 떨림을 기억하는 이라면 그것이 공유될 때의 떨림도 알 것이다. 책 한 권이 출판되려면 우여곡절이 많을 것이다. 작가부터 출판 그리고 독자에게 와서 마음의 책으로 남기까지 보이지 않는 페이지도 많다. 북멘토에는 그런 수고가 고스란히 들어 있는 거 같아서 소중했다.
 

 특히 앞부분의 소설, 에세이 쪽을 읽으며 마음에 수없이 파동이 쳤다. 한동안 소설에 미칠 정도로 좋아했는데 지금은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다. 다시 소설에 불을 지피는 힘이 이 책에 숨어 있다. 이들의 서평은 전문가처럼 객관적이거나 분석적이지도 않으며 맥을 짚어주지도 않지만 솔직하다. 자신만의 경험과 느낌에 근거하여 꾸미지 않고 적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이들의 서평이라 종합선물세트가 따로 없다.

 

 그래서 순수 아마추어들의 서평이지만 독자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여러 권의 책을 다시 읽고 싶어지거나 사야 할 판이다. 행복한 고민일 것이다. 후반부에는 경제경영과 자기계발서인데 개인적으로 좋은 서평들이었지만 조금 아쉬웠다. 문학과 비문학으로 크게 나누고 나머지 예술 등의 장르도 다 넣었으면 했다. 

 

 그러나 출판사도 크게 고민한 거 같다. 북멘토 책이 2권, 3권으로 계속 이어지길 바라기에 다음에는 더 개선될 것이다. 아울러 덧글을 적은 사람들의 글도 토막토막 있었지만 많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잘 읽었다거나 단순한 한 줄의 덧글이 많아지기 때문이 아닐까. 예전에는 덧글 자체도 상당히 길고 그야말로 의견을 나누는 듯한 대화의 덧글이 꽤 있었던 거 같은데 그런 덧글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쩌면 한동안 카페활동을 뜸하게 해서 내가 놓쳤는지도 모른다. 하루에도 수많은 글이 올라오니 내가 읽는 글은 너무도 한정적이다. 그러니 카페 분들은 일부만 보고 한 소리니 개의치 않기를 바란다.

 

 책은 읽을수록 새롭다. 단순한 책읽기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가는 건 개인의 깜냥과 노력이겠지만 소통과 편견 버리기가 함께여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고 싶다. 그나저나 제목을 정말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 읽어주는 책 북멘토』!!!!


 

* 카페 책을 좋아하는 사람 http://cafe.naver.com/bookish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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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리뷰 - 이별을 재음미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 책 읽기
한귀은 지음 / 이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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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당신의 연인은 독특한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불행히도, 그 책을 읽을 줄 모르고 품기만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은 자기 자신조차도 하나의 책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연인에게 읽힐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별한 자는, 파지가 몇 장 섞인 불안정한 책이거나, 시인 기형도가 말했듯이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 책일 것이다. 이제 당신이라는 책을 다른 책의 힘으로 다시 편집하고 제본할 차례이다.  (13쪽, 프롤로그에서 부분발췌.)

 

 이별을 재음미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 책 읽기는 <이별리뷰>의 부제이다. 책 그러니까 특히나 소설을 통해 위안을 얻고 깨닫고 고뇌하고 희망을 얻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한 독자라면 그것이 얼마나 신빙성 있는 일인지 이미 알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글에서 묻어나는 느낌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책 테라피를 라디오에서 진행한 국어교육과 교수여서 그럴까. 32편의 작품을 빗대어 이야기하는데 기대보다 훨씬 와닿 았다.

 

 이별을 재음미하라는 말은 곧 이별의 시간을 돌아보라는 의미일 텐데 결국 이별이라는 것에 흠뻑 빠져보라는 이야기이다. 이별 없는 세상이란 없다. 그러나 그 이별의 의미가 특히나 사랑하는 남녀 관계에서 성립될 때 만드는 치명적인 생채기를 저자는 끄집어낸다. 치유하기 어려워 허우적거리거나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기도 하는 아픔 이상의 것. 이별 자체에 푹 담겨볼 것을…. 왜 그다지도 애써 이별이란 것을 지우려 나를 학대했을까 싶었다. 감수성이 예민해서 손해 보는 경우였다고 나름의 위안을 삼고 풋풋하던 시절의 짝사랑을 보냈던 젊은 날을 돌아보았다. 이별의식은 사랑을 꿈꾸고 바랐던 이들에게 절망보다 희망을 줄 것임을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은 이별로 끝나지 않고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 후라서 그런지 수많은 작품 속에서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만교 저』와 두 희경씨들(은희경, 노희경)에게 더욱 공감한다. 이렇게 말하니 결혼에 완전 회의적인 거 같지만 사실 노희경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결국, 결혼도 사랑의 연장선이니 같은 부류일 수 있겠지만, 확실히 사랑과 결혼은 다르다. 은희경의 『내가 살았던 집』은 잊을 수 없는 작품으로 드라마에서 배종옥이 보여준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저자가 말하는 이야기가 작품 속 인물들로 되살아나면 동시에 내면에서도 무언가가 출렁인다. 그것이 타인의 기억이나 행동을 빌어 나타난 또 다른 나의 일부이겠다. 별거 아니라 생각한 파편이 꽤 많이 들어 있는 셈이다.

 

 "결혼한 사람은 모두 불행을 견디고 있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견디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불행이 아니라 권태야. 하지만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에 현상을 바꿀 의지없이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 권태의 장점이지." 은희경, 위의 책(205쪽.)

 

 나는 권태를 느끼지는 않지만, 결혼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감정 또한 권태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현상을 바꿀 의지란 대단한 결단력을 요하기 때문에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것일지도 모르며 그러면서 상대를 이해한다고 긍정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저자의 후기에서 언급했듯 가면을 쓰지 않고 온 정성을 쏟자고 자신에게 주지시키는 것을 부단히도 노력해야겠다.

 

 사람이란 책을 읽는다는 건 정말이지 흥미진진하고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도 요약집 하나도 만들기 어려운 거 보면 말이다. 그동안 소설을 부러 읽지 않고 있었는데 다시 소설 속으로 깊게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별리뷰』를 책상 한편에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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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15
허먼 멜빌 지음, 김정우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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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비 딕, 백경이란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레 그레고리 펙이 나왔던 영화 <모비딕>이 떠오른다. 20대의 어느 날 지하 합주실에서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본 처절한 영화였고 더 거슬러 가자면 학창시절에 보았던 진귀한 영화였다. 물론 영화에서의 결말이 너무도 강렬해서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원작과는 다르지만, 영화가 주는 시각적 효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하브 선장에게 꼭 어울리는 결말 같았기 때문이다. 집채만큼 거대한 모비 딕의 몸뚱이에서 최후를 맞는 아하브 선장의 표정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전율로 기억된다.

 

 다시 모비 딕과 마주한다. 이번에는 푸른숲에서 나온 <모비 딕>으로 청소년용이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잊고 있던 주인공 이스마엘이 첫 문장을 건넨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는 많은 것들이 두루 담겨 있다. 그러나 이번에 내가 주목한 부분은 미시적인 부분이다. 어디까지나 독자에 따라 미시적인 부분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광기에 서려 복수를 꿈꾸는 아하브 선장에게 치중할 수도 있고 아니면 모비 딕 자체 또는 이스마엘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들 모두가 아닌 바다에 집중한다. 꽤 추상적이고 포괄적인데 왜 하필 바다에 집중하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그 영화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 내게 무섭게 본 공포영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주저 없이 오픈 워터(Open Water)라고 할 것이다. 무한(無限)한 바다와 유한(有限)한 인간의 대조적인 모습은 어쩌면 처음부터 승패가 결정된 싸움이었다.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자연과 맞서도 이길 승산이 적은 확률인데 맨몸뚱이로는 생명의 근원인 모(母)계 바다를 이길 수 없다. 극한의 상황이 오면 인간은 미쳐버리거나 포기하거나 아니면 초인적인 의지로 버티거나 이중 하나이다.

 

 오픈 워터에서 주인공 스스로 삶의 종지부를 찍듯 모비 딕의 아하브 선장도 스스로 창조한 광기에 갇혀 바다 아래로 내려간다. 바다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또한 잠식한다. 거대한 지구의 자궁이 품고 있는 것들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소멸한다. 이들은 태어난 모계의 자궁이 아닌 자연의 자궁으로 사라진 것이다. 비극적이지만 이들의 마지막을 잊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며 동시에 번잡한 내 안을 마주하는 거 같은 심정이기도 하다. 이런 마음이 나만이 갖는 게 아님을 모비 딕은 말한다.

 

바다는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선사한다. (...중략...) 나에게 바다는 이 세상이 모든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바다 속을 눈이 빠지도록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는 광대한 우주의 움직임을 미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때마다 상쾌한 기분을 맛보았다. 삶에 대한 불꽃이 내 핏줄 속에서 다시 고동친다는 것을 느낀다.  (본문 11~12쪽 부분발췌. 이스마엘.)

 

 아하브 선장의 광기는 자신을 불구로 만든 모비 딕에 대한 집착이기도 하면서 증오 어린 한을 하나로 집중시키는 동력이었다. 그에게 이성은 사라지고 선원을 이끌어야 하는 선장의 책임감도 광기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모비 딕은 상징이었다. 아하브 내면의 수면을 요동치게 해서 마음의 평화를 산산조각내는 그 무엇. 이를 심연의 밑바닥으로 가라앉혀 다시 뜨지 않도록 억누르지 못했다.

 

 산다는 건 날마다 고요가 깨진 마음을 다잡아 가는 연속이 아닐까. 어떤 날은 실패도 하면서 그렇게 파도가 일렁이기도 하고 다시 잠잠해지기도 하는 바다처럼. 미지의 바다를 알아가는 것처럼 사람 마음의 바다를 잘 건사하는 일 또한 한 사람에게는 평생이 그리고 세대를 이어가는 인류에게는 헤아릴 수도 없이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소설을 두고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을 동시에 들이댈 수 있다는 건 고전의 힘일 것이다. 다음에 읽을 때는 어떤 느낌일까. 다음번에는 다른 모비 딕을 찾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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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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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책이 나오는 게 중단되지 않는 이상 책장을 정리하는 일은 끝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읽고 있는 책, 읽으려고 쌓아둔 책, 읽다가 먼저 읽은 책을 뒤적거리는 일 등은 내 삶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집에서는 육아와 살림을, 밖에서는 사람들과 만나며 행복을 느껴도 책이 주는 행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날숨과 들숨을 의식하지 못하듯 책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다만, 좀 더 깊이 책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간서치(看書癡)라 불려도 기쁘게 받아들인 이덕무와 드디어 만났다. 오래전부터 간서치하면 이덕무란 공식 아닌 공식을 들어와서 궁금했는데 책만 사두고 잊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 읽은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저>를 통해 이번에는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 돌이켜보니 이미 예전에도 이 두 책의 순서를 정해두었었다. 시작은 <죽비소리, 정민 저>였다. 이덕무의 <이목구심서 耳目口心書>에 나오는 글 때문이었다. 돌고 돌아 이제야 마주한 것이다. 계획을 이제야 실행했다. 옛날 사람들이 책을 대하는 태도를 마주할 때마다 감동하고 또한 적잖이 반성한다.

 

 이덕무는 조선 시대 서파라는 신분을 타고났다. 자신이 직접적인 서자가 아니어도 조상 중에 있었기에 자동으로 태어날 때부터 바꿀 수조차 없는 불운했던 꼬리표. 그가 아무리 학문에 정진한다 해도 뜻을 펼칠 수조차 없었다. 삶은 고단하고 가난이 뱃가죽을 등과 붙여둘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책을 놓지 않았으며 오히려 책읽기에 대한 즐거움을 노래했다. 희망이 없는 나날 속에서도 유일한 빛이 되어준 책이 있었기에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갈라진 틈새로 들어오는 매서운 바람으로 등불이 흔들리자 논어로 바람막이를 만들고 맹자를 팔아 밥을 먹는 등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 정겹다.

 

 그렇다고 책 속에만 함몰되어 살았던 것은 아니다. 분명히 그 누구보다 책과 마주하는 시간이 많고 깊었지만, 그와 같은 상황의 벗들과 끊임없이 왕래한다. 바로 백탑파(원각사지 10층 석탑)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이었는데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당시 시대상과 학문뿐 아니라 우정을 볼 수 있어서 의미 있다. 어쩌면 이들은 서로에게 등불과도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이런 지기들과 함께 보낼 수 있었기에 이덕무는 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알아주는 벗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으리라. 막막한 삶에서 이보다 더 튼튼하고 믿음직한 끈이 또한 어디 있었을까. 그것도 한 명도 아닌 여러 명의 벗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했다. 이들에게는 높은 벽의 현실 그리고 책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긴다는 게 공통점이었다.

 

 벗들이 힘을 모아 청장서옥(靑莊書屋)ㅡ청장은 이덕문의 호. 푸른 백로라는 뜻.ㅡ을 지어준 모습도 감동적이다. 모두 처지가 비슷했기에 넉넉하지 않았을 텐데도 초라한 이덕무의 집에 그만의 공간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자신들의 책을 팔아서 지어준 공부방이라니! 얼마나 큰 위안과 힘이 되어주었을지 알만하다. 비록 서로 무릎을 맞대고 앉아야만 하지만 그래서 또한 정겹지 아니한가 싶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책 또한 귀히 여겨 읽고 또 읽으며 깊게 곱씹을 수밖에. 지금 우리가 책을 어떻게 마주하는지 떠올리면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도 쉽게 얻고 또한 쉽게 읽고 책장에 넣어버리곤 한다. 항상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 문제는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문제이다.

 

 이덕무는 책만 읽는 사람이기 전에 글에도 능했으며 성격이 차분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뜻을 펼치고자 해도 허락되지 않았지만 39세에 규장각에 들어간다. 정조가 인재를 두루 등용한 결과였는데 그가 얼마나 기뻐하고 열심히 일했을지 눈물이 난다. 책에 대한 이야기부터 벗들의 이야기 그리고 중국 유리창 서점 이야기, 규장각에 들어가기까지 한 편의 감동적인 영화가 따로 없다. 실로 오랜만에 가슴을 뛰게 하였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나온 책이지만 모두가 함께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부제가 '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이므로 이덕무뿐 아니라 백탑파를 함께 만날 수 있어서 더없이 진귀한 시간이었다. 더 넓은 책의 세계인 유리창(중국의 거대 서점가.)으로 가서 그들이 보고 느낀 그리고 맺은 인연(홍대용을 물꼬를 텄다. 필담만으로 중군인 친구를 사귐.) 그리고 규장각에 들어가고(드디어 이들에게도 할 일이 생기고.) 각자의 책을 쓰는 일(박제가의 <북학의> 등.) 등을 보며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마치 내 친구들의 일처럼 그러했다.

 

 조선 시대 이들을 책으로 만나 이렇게 몰입하고 그 어떤 소설보다 흥미롭게 읽게 될 줄이야. 아마도 책과 진정한 벗들의 이야기라 그러했으리라.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내는 것만이 아닌 나누고 쪼개서 더욱 크게 만드는 일인 듯하다. 책만 보는 현재의 바보들에게 고하는 것이리라. 책에 함몰되지 말 것이며 책 속에서 길을 찾고 만들어 성큼성큼 걸어나가라! 마음이 통하는 벗이 있다면 더욱 좋으리라.

 

 

* 알라딘 서점에서 품절도서를 단독으로 판매하는데 거기에 이덕무의 <책에 미친 바보, 미다스북스>가 있는 걸 보았다. 함께 읽어도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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