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백경이란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레 그레고리 펙이 나왔던 영화 <모비딕>이 떠오른다. 20대의 어느 날 지하 합주실에서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본 처절한 영화였고 더 거슬러 가자면 학창시절에 보았던 진귀한 영화였다. 물론 영화에서의 결말이 너무도 강렬해서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원작과는 다르지만, 영화가 주는 시각적 효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하브 선장에게 꼭 어울리는 결말 같았기 때문이다. 집채만큼 거대한 모비 딕의 몸뚱이에서 최후를 맞는 아하브 선장의 표정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전율로 기억된다. 다시 모비 딕과 마주한다. 이번에는 푸른숲에서 나온 <모비 딕>으로 청소년용이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잊고 있던 주인공 이스마엘이 첫 문장을 건넨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는 많은 것들이 두루 담겨 있다. 그러나 이번에 내가 주목한 부분은 미시적인 부분이다. 어디까지나 독자에 따라 미시적인 부분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광기에 서려 복수를 꿈꾸는 아하브 선장에게 치중할 수도 있고 아니면 모비 딕 자체 또는 이스마엘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들 모두가 아닌 바다에 집중한다. 꽤 추상적이고 포괄적인데 왜 하필 바다에 집중하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그 영화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 내게 무섭게 본 공포영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주저 없이 오픈 워터(Open Water)라고 할 것이다. 무한(無限)한 바다와 유한(有限)한 인간의 대조적인 모습은 어쩌면 처음부터 승패가 결정된 싸움이었다.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자연과 맞서도 이길 승산이 적은 확률인데 맨몸뚱이로는 생명의 근원인 모(母)계 바다를 이길 수 없다. 극한의 상황이 오면 인간은 미쳐버리거나 포기하거나 아니면 초인적인 의지로 버티거나 이중 하나이다. 오픈 워터에서 주인공 스스로 삶의 종지부를 찍듯 모비 딕의 아하브 선장도 스스로 창조한 광기에 갇혀 바다 아래로 내려간다. 바다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또한 잠식한다. 거대한 지구의 자궁이 품고 있는 것들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소멸한다. 이들은 태어난 모계의 자궁이 아닌 자연의 자궁으로 사라진 것이다. 비극적이지만 이들의 마지막을 잊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며 동시에 번잡한 내 안을 마주하는 거 같은 심정이기도 하다. 이런 마음이 나만이 갖는 게 아님을 모비 딕은 말한다. 바다는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선사한다. (...중략...) 나에게 바다는 이 세상이 모든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바다 속을 눈이 빠지도록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는 광대한 우주의 움직임을 미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때마다 상쾌한 기분을 맛보았다. 삶에 대한 불꽃이 내 핏줄 속에서 다시 고동친다는 것을 느낀다. (본문 11~12쪽 부분발췌. 이스마엘.) 아하브 선장의 광기는 자신을 불구로 만든 모비 딕에 대한 집착이기도 하면서 증오 어린 한을 하나로 집중시키는 동력이었다. 그에게 이성은 사라지고 선원을 이끌어야 하는 선장의 책임감도 광기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모비 딕은 상징이었다. 아하브 내면의 수면을 요동치게 해서 마음의 평화를 산산조각내는 그 무엇. 이를 심연의 밑바닥으로 가라앉혀 다시 뜨지 않도록 억누르지 못했다. 산다는 건 날마다 고요가 깨진 마음을 다잡아 가는 연속이 아닐까. 어떤 날은 실패도 하면서 그렇게 파도가 일렁이기도 하고 다시 잠잠해지기도 하는 바다처럼. 미지의 바다를 알아가는 것처럼 사람 마음의 바다를 잘 건사하는 일 또한 한 사람에게는 평생이 그리고 세대를 이어가는 인류에게는 헤아릴 수도 없이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소설을 두고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을 동시에 들이댈 수 있다는 건 고전의 힘일 것이다. 다음에 읽을 때는 어떤 느낌일까. 다음번에는 다른 모비 딕을 찾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