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없음이 오히려 할 일이거늘

사립문을 밀치고 졸다가 보니 

그윽이 새들은 나의 고독함을 알아차리고

창 앞을 그림자되어 어른대며 스쳐가네
 
 
 
 「법어집」에서 경허스님의 선시.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자꾸만 되뇌어 보게 하는 시.
 
 
 
  ⓒ 박항률 화백의 작품. The Dawn (http://www.hangryul.com/)


  
 -4340.10.30.불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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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쓸쓸함은 그대 강변에 가서 꽃잎 띄워라
내 쓸쓸함은 내 강변에 가서 꽃잎 띄우마
그 꽃잎 얹은 물살들 어디쯤에선가 만나
주황빛 저녁 강변을 날마다 손잡고 걷겠으나
생은 또 다른 강변과 서걱이는 갈대를 키워
끝내 사람으로는 다 하지 못하는 것 있으리라

그리하여 쓸쓸함은 사람보다 더 깊고 오랜 무엇
햇빛이나 바위며 물안개의
세월, 인간을 넘는 풍경
그러자 그 변치 않음에 기대어 무슨 일이든 닥쳐도 좋았다

ⓒ 시: 김경미, <쉬잇, 나의 세컨드는>/ 일러스트: 카가야(http://www.kagayastudio.net)

-4340.10.28.해의 날. 시를 전해준 친구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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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하늘이 오늘도
 가까이 있다.
 올려다보고
 뛰어드는 
 하늘이 있는 한, 
 큰 하늘을 하늘로
 알고 사는 한,
 새야,
 너는 날아다니고 나는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고마운 일이다.

 당신을 보는 하늘에
 바람결도 보이는 한
 속으로 크게 울 수 있고
 참 크게 고마운 일이다.
 

-4340.10.14.해의 날. (고은의 시, 하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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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도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사진 찍을 때도 억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태양 아래 살고 있는 것이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조각은 아닐까?
악마는 존재하는지, 악마인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지,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만 나일 뿐인데 그것이 나일 수 있을까..

아이가 아이였을 때
시금치와 콩, 양배추를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잘먹는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낯선 침대에서 잠을 깼다
그리고 지금은 항상 그렇다

옛날에는 인간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옛날에는 천국이 확실하게 보였지만
지금은 상상만 한다
허무 따위는 생각 안 했지만
지금은 허무에 눌려 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아이는 놀이에 열중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열중하는 것은 일에 쫓길 뿐이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사과와 빵만 먹고도 충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딸기만 손에 꼭 쥐었다
지금도 그렇다
덜 익은 호두를 먹으면
떨떠름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산에 오를 땐 더 높은 산을 동경했고
도시에 갈 때는 더 큰 도시를 동경했는데 지금도 역시 그렇다
버찌를 따러 높은 나무에 오르면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도 그렇다
어릴 땐 낯을 가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항상 첫눈을 기다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막대기를 창 삼아서 나무에 던지곤 했는데

창은 아직도 꽂혀 있다 . 

 

 

 때가 되면 저절로 떠오르는 그런 것들이 있다.
추워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입에서 피어나는 따스한 입김이라던가,
마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포옹했을 때의 안락함, 노란 은행잎,
다기그릇으로 잎 녹차 마시기, 코코아는 뜨겁지만 달콤하게, 빌 에반스,
별자리, 누군가 말했던 누이 같은 국화차,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시간 떠올리기 등. 

 생각만 해도 편안한 그런 것들과 또한 그렇지 않은 것들과의 충돌.
올해는 그 충돌이 줄었나 싶어도 늘 그대로인 삶.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는 그저 그렇게 잠시 내버려 둔다. 


 덧,
이미지는 잠산의 일러스트. (http://jamsan.com)
      시는 피터 한트케(Peter Handke) 
     이 시를 알게 된 것은 좋아하는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때문이다. 

얼마전 알라딘 서재이웃의 어느분이 올리신 걸 읽고 떠올랐다.

-4340.09.28.쇠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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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내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 - 김남조, <편지>
 ⓒ 포토- 네이버 이미지 검색 후 흑백처리.

  -4340.09.17.달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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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7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비뫼 2007-09-19 21:52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