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한 뒤 그녀는 한번도 자기의 첫사랑을 고백하지 않
았다. 그녀의 남편도 물론 자기의 비밀을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렇잖아도 삶은 살아갈수록 커다란 환멸에 지나지 않았다.
환멸을 짐짓 감추기 위하여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
을 했지만, 끝내 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환멸은 납가루처럼 몸 속에 쌓이고, 하지 못한 말은 가슴
속에서 암세포로 굳어졌다.

환멸은 어쩔 수 없어도, 말은 언제나 하고 싶었다. 누구에
겐가 마음속을 모두 털어 놓고 싶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마음놓고 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비슷한 말을 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다가 그런 구절이 발견되면 반가와서 밑줄을 긋기도
했고, 말보다 더 분명한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
나 끝까지 자기의 입은 조개처럼 다물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끝없는 환멸 속에서 살다가 끝끝내 자기의 비
밀을 간직한 채 그들은 죽었다. 그들이 침묵한 만큼 역사는
가려지고 진리는 숨겨진 셈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는 그
들의 삶을 되풀이하면서 그 감춰진 깊이를 가늠해 보고, 이
세상은 한번쯤 살아 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ㅡ 조개의 깊이, 김광규

시인 김광규 -1941년 서울생. 서울대 독문과 및 대학원 졸업.
1975년에 <<문학과 지성>>으로 데뷔. 현재 한양대 독문학교수.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등의 시집과
시선집, 영역/독역시집과 산문집을 간행. 김수영 문학상, 오늘
의 작가상, 편운 문학상, 녹원 문학상 등을 수상.

저녁으로 새꼬막을 반찬 삼아 먹으면서 이 시가 떠올랐다.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동감이 되는 시.
타인이 만나 이런 공간을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이가 들고 결혼이 가까워지면서 돌아본다.
이렇게 무감각하게 살아간다면 미처 버리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삶이란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상황에서든
그 삶을 살아내고자 한다.

- 4339.01.04.물의 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이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 기형도, 그집 앞 ]

- 4338.11.18. 쇠의 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늘은 지붕 위로
저렇듯 푸르고 조용한데,

지붕 위에 잎사귀를
일렁이는 종려나무.

하늘 가운데 보이는 종
부드럽게 우는데,

나무 위에 슬피
우짖는 새 한 마리.

아하, 삶은 저기 저렇게
단순하고 평온하게 있는 것을.

시가지에서 들려오는
저 평화로운 웅성거림.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울고만 있는 너는.

말해 봐, 뭘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네 젊음을 가지고 뭘 했니?


[ 베를렌 - 하늘은 지붕위로 ]


베를렌의 시집 <예지>에서 손꼽히는 걸작.
걸작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공감이 가는 시라는 게 중요하지.
"네 젊음을 가지고 뭘 했니?"
끊임없이 나도 저런 질문을 퍼부어 된 적이 있었다.
삶은 단순하고 평화롭다는 그의 말처럼...
그런 삶 속에서 자주 평화로움이 깨져서 스스로도 평정함을 찾기 어려울 때.
그때 나는 그 속에서 무엇을 했던가?
. . .


Le Ciel Est, Par-Dessus Le Toit

- Paul verlaine


Le ciel est, par-dessus le toit,
Si bleu, si calme !
Un arbre, par-dessus le toit,
Berce sa palme.

La cloche, dans le ciel qu'on voit,
doucement tinte.
Un oiseau sur l'arbre au'on voit
Chante sa plainte.

Mon Dieu, mon Dieu, la vie est la,
Simple et tranquille.
Cette paisible rumeur-la
Vient de la ville.

-- Qu'as-tu fait, o toi que voila
Pleurant sans cesse,
Dis, qu'as-tu fait, toi que voila,
De ta jeunesse?

- 4338.11.15. 불의 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얘야,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
몇 장의 편지를 쓰자
찬물에 머리를 감고
겨울을 나는 법을 이야기 하자
가난한 시인의 새벽노래 하나쯤 떠올리고
눅눅한 가슴에 꽃씨를 심자
얘야, 우린 너무
나쁜 습관처럼 살아왔어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길은 끝나지 않는데
늘 채워두는 것 만큼 불쌍한 일이 어디 있어
이제 숨을 좀 돌리고
다시 생각해보자
큰 것만을 그리느라
소중한 작은 것들을 잃어온 건 아닌지
길은 길과 이어져 서로 만나고
작은 것들의 바로 곁에 큰 것이 서 있는데
우린 바보같이 먼데만 바라봤어
사람 하나를 만나는 일이 바로
온 세상을 만나는 일인데
조그만 나무 한 그루가
온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데
우린 참 멍청했어
술잔에 흐르는 맑은 도랑에 대해
왜 이젠 아무도 말하지 않는거지

마주 앉을 시간마저 없었는걸
그래
얘야, 오늘은 우리
그리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자
겨울이 오기 전에

[ 백창우, 겨울이 오기 전에 ]


그녀가 쓸쓸하고 외롭다고 한다.
무엇에도 정붙일 수 없을 만큼 허우적거려 이 가을마저 싫다고 한다.
그래서 내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
.
.
답장을 보냈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라고.
그리울 때마다 썼다가 모아서 전해주라고...
그녀의 그리움의 대상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야말로 편지를 써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시인의 말처럼 겨울이 오기 전에 말이다.


- 4338.11.14. 달의 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도 알고 있다. 행복한 사람만이
인기가 있다. 그런 사람의 말소리를 사람들은
즐겨 듣는다. 그런 사람의 얼굴은 아름답다.

마당의 뒤틀린 나무는
토양이 좋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나무가 불구라고 욕한다.
하지만 그것은 옳다.

준트 해협의 푸른 보트와 즐거운 요트를
나는 보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뿐이다.
왜 나는 마흔 살의 소작인 여자가 허리를 구부리고 걷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가?

소녀들의 가슴은
예전처럼 뜨거운데.

내 시에 각운을 쓴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보일 것이다.

내 안에선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광과
칠장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서로 싸우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펜을 잡게 하는 것은
두 번째 것뿐이다.


* 참고: 칠장이의 연설(히틀러의 연설)
*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 1898.2~1956.8 독일의 시인,극작가,연극개혁가


'내가 보는 것은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뿐이다.'
라는 말이 생각나서 올려본다. 임원에 다녀왔던 사진을 정리하면서...

- 4338.11.06.해의 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