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 멈췄다든지
매미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난밤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아 많이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 나태주, <오늘의 약속>
포토- 영화 <델마와 루이스>

  

-4340.09.09.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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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였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 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도종환
 

 

-4340.09.07.쇠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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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ㅡ 피 천 득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한 사실이다 

 
* 시인이 문득 그리워졌다. 요즘 범우사에서 나온 이 작고 오래된 시집을 가방

들고 다녔다. 읽을수록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 그의 詩는 이미 시를 떠나 내

게는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누구나 시를 써도 다 시로 남지 못하는데 그의 시

는 시를 떠나 새로운 그 무엇이 되는구나. 아마도 내가 시를 쓴다면 그것은 무

엇이 될까. 그저 그때의 상황을 적은 개인의 기록으로 남겠지.

-4340.07.28.흙의 날. 밤을 넘기고 아침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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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새가 날아간 길

                --  산에 들에2

 

나뭇가지에 앉았던 한 마리
새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그리고
잎과 잎 사이로 뚫린
길을 따라
가볍게 가볍게 날아간다


나뭇가지 왼쪽에서 다시
위쪽으로
위쪽 잎 밑의
그림자를 지나 다시
오른쪽으로


그렇게 계속 뚫려있는 하나의 길로
한 마리 새가 날아간다


나뭇가지와 가지 사이로
그리고 잎과 잎 사이로
뚫려있는그 길
한마리 새만 아는
그 길


한 마리 새가 사라진 다음에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그 길

 

오규원 시전집 2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한 마리 새로 날아간 시인에게.

-4340.02.03.흙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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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만나본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태어 났기에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와지면 가까와질까 두려워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져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 본적도 없지만은
둘이 되어 본적도 없습니다

***********
 
적정거리 유지
 
주말에 부모님과 드라이브를 갔다. 날은 쌀쌀했지만 차창으로 넘나드는 햇볕은 뜨겁기만 했다.
잠시 쉬기 위해 휴게소에 정차했다. 사실 나는 정말이지 배가 고팠다. 엄마는 아직 다리가 불편하시니 차에
계시고 아빠와 나왔다. 배고프다는 나의 말에 아빠는 어릴 때의 나에게 말하듯 먹고 싶은 거를 고르라며 또
사먹으라며 돈을 주시는 거였다. 풋풋 웃음이 나왔다. 아부지~ 제가 지금 몇 살인데요. 그런데 아직도 내가
아이로 보이 시나 보다. 아무튼 오랜만에 7살 박이 아이처럼 방글거리며 지폐를 받았다. 그런데 고작 산 것은
핫바 하나였다. 왠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만큼 배가 불러오는 느낌이라서...그리고 아빠는 엄마 주신다고
맥반석 오징어 등을 계산하시고 잠시 손을 닦으러 가셨다. 그리고 잠시 혼자가 된 나는 음식을 양손에 들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낯익은 사람의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선배다.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딱 그만큼의 거리에 서 있다.
유난히 긴 속눈썹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선배는 나를 보지 못했다. 아마도 옆 사람은 부인 같다.
누군가를 기다리듯 서 있는 모습인데 내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거 같아 잠시 쳐다보았다. 마주치면 인사
를 해야 하나라는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선배와 나는 그저 같은 과의 클래스메이트였다. 공과대의 복학생과
여학생. 이렇다할 추억은 없지만 재미있게도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정해진 거리가 존재했다.

'왜 집에 가지 않고 이러고 있어요?' -선배
'(약간 웃는 무표정)이제 가려고요.' -나

계단에 앉아 선배가 던진 말에 약간의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오다가다 마주치면 인사했다. 사실
짓궂은 친구 녀석이 선배와 내 이름이 비슷하다고 매일 놀려먹었다. 우리 둘이 녀석의 적정 시야에 포착되
면 어김없이 우리 이름을 애매하게 불러서 둘 다 녀석을 쳐다보게 하는 것이었다. 거의 한 학기 동안 매일
장난을 걸었는데, 우린 덕분에 늘 웃게 되어버린 이상한 관계였다.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는 잘 모르지만 선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서로 관심이 어느새 생겨버렸지만 그저 늘 똑같은 상태로 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지만 역시 간단한 안부를 묻고 돌아섰다. 후에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그때도 마찬가지겠지. 그 침묵을 깨지 않는 편이 서로 편할 거 같다. 학교 다닐 때는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기는 했는데(묻기보다 따져든 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아빠와 다시 차로 향했다. 입에는 핫바를 물고 차에 앉아 과일을 먹었다.
그리고 선배의 존재는 사라지고 갑자기 멀리 있는 연인이 생각났다.
거리상으로는 연인도 늘 그 거리에 있지만 마음에서는 거리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가끔은 내게 연인이 있는
지도 잊어버릴 정도인데 문제는 그런 현상이 내게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뻣뻣한 나와 반대인 연인은 그야말
로 부드러워서 늘 그 거리를 지켜준다.

어쩌면 사람 사이에서 가장 힘든 것은 무조건적인 밀어붙이기나 후진보다 적정거리 유지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평행선이 마음에 든다.


- 4340.01.13.흙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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