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쓰레기는 재활용되지 않았다 - 재활용 시스템의 모순과 불평등, 그리고 친환경이라는 거짓말
미카엘라 르 뫼르 지음, 구영옥 옮김 / 풀빛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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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 거품으로 덮인 콜롬비아 거리 (모스케라 로이터=연합뉴스) 27일(현지시간) 콜롬비아 모스케라의 거리에서 한 주민이 오염된 강에서 날아온 독성 거품을 피하고 있다. 2022.4.28 photo@yna.co.kr


며칠 전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이 사진 한 장은 엄청나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보기에 눈뭉치나 구름처럼 보이지만 저것은 거품이다. 사진의 설명글에서 이미 말하고 있지만 저것은 거대한 거품 덩어리인 것이다. 저것을 기자는 '거품의 습격', '자연의 역습'이라고 말했다. 세제등이 섞인 생활하수와 무단으로 방류된 산업단지의 폐수로 강물이 오염되었고, 강한 비가 내려 저렇게 거품이 되었다는 기사였는데 이것이 처음이 아니라 이미 예전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거품을 피해 달아나는 인간의 모습이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우리는 이미 환경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환경을 지배해보려고 모든 악행을 저지르면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교만이다. 느닷없이 왜 환경을 말하냐고? 우리에게 허울뿐인 '재활용'이라는 말의 포장을 이 책이 벗겨내고 있기 때문이다. '친환경'이라는 말에 우리가 얼마나 속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불순물은 질서를 방해한다. 일반적인 질서속에 설 자리가 없어 물리적, 상징적으로도 오염을 발생시킨다. 즉, 오염은 '불순'과 동의어다. 이는 확실한 '쇠퇴'를 의미하기 때문에 분리, 재조정, 정화 작업은 물론, 세계화 흐름속에서 폐기물을 '2차 원료'라고 상업적으로 재분류하는 언어적인 조작은 일시적일 뿐이다.(-42쪽) 산업화를 먼저 이룬 유럽이 근대화를 향해 이룩했다. 그리고 그들은 신나게 날아 올랐다. 너무나 많은 것을 만들어내다보니 멀쩡한 것도 쓰레기가 될 판이다. 그렇게 버려지는 것들이 하나 둘씩 쌓이기 시작하자 '쓰레기 무역'이라는 좋은 말로 포장해서 신생국이나 개발도상국에 팔아 넘겼다. "프랑스에도 이런 일이 있나?" "아뇨, 없는 것 같아요." "그럼 날 좀 프랑스로 데려가." (-60쪽) 이 책의 저자가 인터뷰했던 베트남의 쓰레기 마을에서 쓰레기를 분리하던 노인이 했다는 말이다. 저 말 한마디로 모든 설명은 필요없어진다. 영국이 세계 각지로 폐플라스틱과 알갱이 재료들을 수출하는 유일한 선진국은 아니다. 2008년에 프랑스는 아시아 여러 국가뿐만 아니라 유럽 인근의 재활용 천국 터키에 45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수출했고,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는 이탈리아산 쓰레기에 점령당했다. 서유럽부터 태평양까지 이어지는 쓰레기의 여정은 동서양의 무역 관계를 다시 그린다. 2017년에서 2018년으로 넘어갈 무렵, 중국은 더 이상 세계의 쓰레기통이 되기 싫다며 종이, 종이 상자, 플라스틱, 금속, 섬유 등 24종의 유해 물질 수입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중국은 실제로 미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유럽에서 오는 폐기물 거래의 중심 고리였다.(중략) 이 금지 조치는 쓰레기 국제 무역의 범위를 가시화시켜 경제적, 외교적 문제와 더불어 언론에 '위기'를 초래했다. 그때까지 이런 거래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영역인 동시에 국제 규제의 레이더망을 피해 왔기 때문이다.(-118쪽)

이 모든 것을 되돌리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열역학에서 말하는 엔트로피와 같은 것이다. 패자들은 모두 운하 근처에서 탄식만 할 뿐이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미래로 가는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퇴화에 대한 거론은 꺼리면서 그들이 가져온 발전과 공로만을 이야기하곤 한다.(-94쪽)

재활용 시스템의 모순과 불평등, 그리고 친환경이라는 거짓말.... 부제만 보고도 이 책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래서 어쩌라고? 할 지도 모른다. 모두가 급하게 뛰어가는데 나만 천천히 갈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 보여준 사진은 모든 것을 한마디로 정의한다. 이런대도? '쓰레기 마을'은 베트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 관한 다큐를 보았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바닥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들의 삶은 처참했다. 말이 '지구촌'이고 '지구는 하나'였을 뿐 힘이 없는 국가의 실체였다. "빙하가 녹고 있어요. 북극곰을 살려 주세요"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들에게 기부를 하면 좀 나아질까? 중요한 것은 지구를 살리기 위해 한사람이라도 플라스틱을 덜 사용하는데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지금 누리고 있는 편안함과 편리함을 조금은 포기해야 한다. 이미 정치적인 관념으로 굳어져가고 있는 환경오염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이들의 화학적 분쇄 방식은 생분해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히려 플라스틱 미세 입자와 오염 물질을 분산시켜 생태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그럼에도 산화해체성 플라스틱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특히 베트남에서는 이 봉투가 '친환경' 라벨을 붙이고 대형 마트의 계산대까지 배포되었다.(-113쪽) 베트남뿐일까? 뼈아픈 말이지만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쓰레기는 '재활용'이라는 말을 거쳐 다시 쓰레기로 태어날 뿐 그 '재활용'사업을 하는 기업가의 배만 불리워주고 있다는 말이 시선을 끈다. 재활용을 하기 위해 녹여낸 물질에 또다른 불순물이 섞이고 있다는 걸 누가 알까?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우매한 삶을 살고 있는지 한번 더 깨달아야만 했다. 또한 정치와 기업이 환경오염에 관한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외면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분리수거를 하며 '재활용'에 동참하는 듯 뿌듯해했고, 나름대로는 '친환경'적인 제품을 사려고 노력했던 시간이 부끄러웠다. '재활용'과 '친환경'이라는 말만으로 환경오염을 막지 못한다. 한시라도 빨리 저런 말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플라스틱 조각을 먹은 물고기가 우리의 밥상에 오른다는 말을 백만번한다해도 그것을 체감하기가 쉽지 않다. 오래전 어떤 영화를 통해 유행했던 말이 떠오른다. "뭣이 중헌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모두가 각성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비생각

일상의 경험과 풍경 속에서 우리 삶의 방식은 플라스틱 재활용의 발전과 그에 따른 영향에 타격을 받는다. 더구나 그 영향들은 처음에는 인지할 수 없지만 환경, 인간관계 그리고 사물과 존재의 관계에 깊이 주입되어 있다. 마치 극빈곤층이 주고 잡는, 쓰레기를 먹으면서도 생존력이 강한 물고기 틸라피아 같다.(-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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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 삶의 완성으로서의 좋은 죽음을 말하는 죽음학 수업
박중철 지음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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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삶을 요약해 본다면 어릴 때는 학습에 대한 부담에 내몰려 정신적으로 힘들고, 어른이 되어서는 높은 노동시간에 시달리고, 노인이 되어서는 빈곤으로 내몰리는 삶이다. 그래서 한국은 세계 10위 경제대국임에도 불구하고 국민 삶의 만족도는 조사 대상 OECD 37개국 중 36위로 바닥에 위치하고 있다.(-49쪽)


'일요일의 병'이란 영화가 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여인이 엄마에게 자신의 죽음을 맡기는 영화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그런 죽음이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죽음이었기에 고통없이 '인간답게' 죽기를 소망했던 딸의 마음을 받아들였던 엄마의 그 숙연함이 오래도록 울림을 전해줄 그런 영화였다. 한국인에게 가장 좋은 죽음이란 첫째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하는 것, 둘째 고통없이 편안한 죽음, 셋째 가족과 주변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것, 넷째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누리다 죽는 것이라고 (-24쪽) 한다. 죽음에 대해 얼마나 환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말이다. 저 네가지 중에서 개인적으로 원하는 죽음이 딱 하나가 있다. 가족과 주변에 부담을 주지 않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것. 그러나 그걸 아는가? 한국 사회에서 노화나 질병에 의한 죽음, 즉 병사로 인정받지 못하면 곧바로 '사건'으로 취급되어 사망 경위에 대한 경찰 수사를 받아야 한다. (중략) 병원이 아닌 곳에서 죽게 되면 사망진단서 대신 사체검안서가 발부된다. 대개 사망 원인이 '외인사', 혹은 '기타 및 불상'으로 기재된다. 이때 장례 절차를 진행해서는 안되고 사망진단서 없이는 장례식장 이용도 애당초 불가능하다. 대신 관할 경찰서에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는 신고를 해야 한다.(-74쪽) 집에서 죽고 싶어도 집에서 죽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병원에서 죽으면 사망진단서 발급도 편하고 바로 병원 장례식장을 이용할 수 있어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형병원들이 저마다 장례식장을 화려하고 크게 운영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 모두는 '객사'를 해야만 죽음이 인정된다는 것인데 내 집에서 내가 죽어도 그것이 '사건'으로 처리되어 장례도 마음대로 치를 수 없는게 한국의 현실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종종 생명과 삶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어에서는 생명과 삶은 모두 'life'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엄밀히 말해 생명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목숨 상태를 말한다. '인간답다'는 것은 목숨과 삶 둘 중 어디에 방점이 찍히는 것일까? 달리 말하면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구분되는 것은 목숨 자체가 다르기 때문인가, 아니면 삶이 다르기 때문인가?(-159쪽) 지금까지 내 삶에서 참 잘했다,고 칭찬해 줄 만한 것중 하나가 친정엄마 돌아가실 때 연명치료를 거부한 거였다. 의사의 물음앞에서 우리 삼남매의 의견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부하겠습니다!' 였다. 힘든 삶을 사셨던 엄마였기에 마지막만큼은 편히 보내드리고 싶었다고. 몇 분후에 엄마는 숨을 거두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 삶에서 가장 비참하고 처참했던 삶의 모습은 엄마가 돌아가셨던 중환자실의 어떤 분이셨다. 인공호흡기를 한 것도 모자라 옆구리에 난 구멍을 통해 또하나의 관이 연결된 채 살아계셨던 그 분을 보면서 저것이 과연 저분이 원하던 마지막 모습일까 싶었다. 그 분의 자식들은 그것을 인간적인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아울러 죽음 역시도 인간답게 맞이해야 한다. 손가락 하나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으면서 숨만 쉬고 있다면 그것을 삶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요양병원 수가체계에서 기계호흡장치와 정맥 영양을 받는 혼수상태 환자는 가장 높은 '의료 최고도'로, 급식관을 통해 지속적인 인공영양을 받는 환자는 그다음 등급인 '의료 고도'로 책정되어 있다. 요양병원 입장에서는 적극적인 인공영양 시행은 더 높은 의료수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200쪽) 병원이 환자를 돈으로 본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이다. 내가 환자가 아니라 그저 '진료'를 돈으로 사는 하나의 '고객'일 뿐이라는 생각을 병원에 갈 때마다 하게 된다. 코로나에 확진되었을 때는 서럽기까지 했었다.(결국 언론에서도 의료수가를 두고 떠들어댔지만) 저들이 보는 것은 나의 '아픔'이 아니라 아픔의 농도에 따라 달라지는 '의료수가' 라는 꺼림직함이라니. 그렇게 억울하면 안아프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환자와 의료인 모두 임종 과정에서 겪게 될 고통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 다음으로 의료인들이 원치 않는 치료로는 심폐소생술, 기계호흡장치, 급식관을 통한 인공영양 등의 연명의료로 확인되었다.(-203쪽) 의사들이 임종 장소로 가장 선호했던 곳은 호스피스 기관이었다고 한다. 호스피스 시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생애 말기의 고통을 최대한 줄여주고,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러운 임종을 돕는 것이라 한다. 무슨 이런 개똥같은 경우가 있는가? 다른 사람의 죽음은 끝까지 존중해주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죽음은 존중받기를 바란다고? 먹는 것으로 장난치는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만든 것만 먹고 살게 하는 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생전에 엄마가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싫은 건 남도 싫어한다고. 남에게 무엇을 나누어 줄 때도 내가 좋은 것을 나누어 주라던.


기술주의에 젖은 현대 의학의 모습을 보면 더 이상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마지막은 없는 것 같다. 현대인들 모두가 자신이 언젠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부정하며 살아가는데 의사들이 죽음에 대해 친절할 리는 만무하다. 언제쯤 병원과 의료인들은 기술주의를 넘어 인간에 대한 이해와 배려라는 모호성을 자신의 자부심으로 끌어안을수 있게 될까? 이를 위해서는 병원과 의료인들의 변화를 요구하기 이전에, 우리 사회가 생존 경쟁에 몰두하느라 꽁꽁 감춰왔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삶의 공간에 드러내는 노력이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86쪽) 이 책의 저자는 현재 가정의학과 의사이자 호스피스 의사다. 이 책을 쓰게 된 이유가 들어가는 글에서 설명되어져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의 틀은 지금의 내게 의료현장에서 이전과 같은 실수와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 실천적 윤리와 용기가 되어주고 있다고. 부디 한국 사회에서 사라져 버린 죽음의 문화에 대한 공론을 촉발하고, 사회적 담론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고.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변화의 물결은 시작되었는데 어쩌면 우리 모두가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라는 틀에 갇힌 채. 늘 다니는 병원의 의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지금 시대는 오래 살고 싶어서 오래 사는 게 아니고 약이 우리를 오래 살게 만든다고. 인간적인 삶, 인간적인 죽음에 대해 사회여론이 형성되면 좋겠다. 이 지랄같은 자본주의가 그걸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겠지만 말이다. 생명과 삶은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저자의 말에 백퍼센트 공감한다. 아울러 저자에게 그치지 않을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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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라는 모험 - 미지의 타인과 낯선 무언가가 하나의 의미가 될 때
샤를 페팽 지음, 한수민 옮김 / 타인의사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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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토록 마음속에 저장되는 영화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중의 하나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영화다. 중년의 남녀가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누지만 죽을 때까지 그 사랑을 간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침내 찾아온 진정한 사랑이라 여겼지만 그 만남을 위해 자신의 현재를 버리지 않았던 여인의 안타까움을 잘 그려주었다. 그 영화를 이 책에서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이 책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통해 그 여인의 가슴속에서 잠자고 있던 젊은 날의 꿈을 들여다 본다. 한 남자와의 짧은 만남이 버려야 했던 젊은 날의 꿈에 한발 다가서게 했다고.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가지 않은 길은 있다. 그리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역시 누구에게나 있다. 그 만남이 과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 주었을까? 어쩌면 반복되어지던 일상의 지루함을 달래줄 수 있었던 짧은 일탈과도 같은 만남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3일이란 시간은 해석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마주침'과 '만남'은 어떤 차이일까? 이 책에서는 '마주침'과 '만남'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짧은 소견이지만 '마주침'으로써 '만남'이 시작되는 경우도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남은 상당히 이론적이거나 환상적인 느낌을 갖게도 한다. 이론과 실제의 괴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 사람은 다 안다. 만남에는 좋은 만남도 있지만 나쁜 만남도 있다. '좋다', '나쁘다'의 정의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일 테지만 어떤 의도됨을 띠지 않는 만남이라면 그것을 우리는 아마도 '우연'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네트워크안에서의 만남이 주를 이루어가는 작금의 세태속에서 '만남'이란 말이 안고 있는 인간적인 의미를 되짚어보자는 취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팬데믹이란 상황이 어쩌면 우리에게 '만남'을 더 힘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실 팬데믹이란 핑계를 대지 않았어도 현대인들에게 자연스러운 만남이라는 것은 왠지 낯설게 다가온다. 마음을 앞세우지 않는 까닭도 있겠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잃은 탓일 수도 있다. 오죽했으면 만남을 모험에 비교했을까? '만남'이 주는 긍정적인 부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그랬기에 여러 방면을 통해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여는 방법에 대해 많은 예를 들며 이야기 한다. 철학과 심리학과 자기계발서가 교묘하게 버무려진 느낌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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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을 놓치지 마 - 꿈과 삶을 그린 우리 그림 보물 상자
이종수 지음 / 학고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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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머리에 쥐난다. 옛그림을 보니 학창시절에 열심히, 그저 열심히 외우기만 했던 기억이 스멀거리며 찾아온다. 그 때는 왜 그렇게 모든 걸 외우게 했었는지. 연대와 작가와 작품의 이름을 하릴없이 그렇게나 외워댔었다. 왜? 시험에 나오니까. 하지만 지금의 학생들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방식은 많이 달라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일까? 옛그림을 보면서 공감한다는 게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이런 해설서도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너무 해설서식으로만 그림을 바라보면 자신만의 느낌이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 아닌 염려를 하게 된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만의 보물상자에 담아놓은 그림을 모아놓았다고 한다. 그러니 소개할 때의 기분이 어떠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그리고 묻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보물상자가 있을 것인데 당신의 보물상자에는 어떤 것이 담겨있느냐고. 소개된 작품들은 많다. <세한도>, <월하정인>, <동궐도>, <자화상>, <화성행행도병풍>, <태조어진>과 같은 그림들은 수도없이 들었을 것이고, <곤여만국전도>와 <독서당계회도>같은 그림들은 정말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있다. 책속에는 보물로 지정된 그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그림도 있다. 작가의 아쉬움을 담아 소개하고 있는 그림들을 한번 더 바라보며 함께 생각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옛그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오래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았던 '고려 불화展'이다. 그토록이나 많은 작품을 다른 나라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이 얼마나 분했었는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볼 수 있으려나, 하는 마음에 두번이나 가서 꼼꼼하게 보았었는데 왜 한번 더 보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여전히 남아 있다. 반갑게도 이 책속에서 <수월관음도>를 만나게 된다. 백의를 입은 수월관음도의 아름다움은 정말이지 황홀할 지경이었다. 저자가 목차에서 가장 먼저 다루었던 김홍도의 그림 <마상청앵도>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너무나도 좋아하는 <주상관매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 위에서 매화를 바라본다는 그 작품을 처음 보았던 순간 그림속의 풍경이 마치 내 앞에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림속의 빈 공간들이 딱 한마디를 하고 있었다. "쉿!"..... 그 여운은 지금 보아도 똑같다. 단언컨대 내게는 최고의 그림이다. 그리고 내 보물상자에 담겨 있는 또 하나의 그림은 역시 김홍도가 그렸다는 <군선도>다. 신선도에 관심이 많았다는 김홍도는 자신만의 색깔로 신선을 표현했다고 한다. 연회에 초대되어 길을 떠나는 이들을 그리고 있지만 그림속에는 어떠한 배경도 없다. 사람들의 표정이 정말 다양하게 그려져 있고, 옷깃의 흔들림으로 바람의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길을 떠나는 사람들의 설레임과 분주함, 그리고 바람결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솔직하게 말해 그림은 볼 줄 모른다. 옛그림도 그렇지만 현대미술도 제대로 공감할 줄 모른다. 특히나 현대미술은 볼 때마다 뭐지? 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간혹 이렇게 강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림들이 있다. 그러면 된거지 거기에 무슨 포장이 필요할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였다는 三園 三齋... 壇園 김홍도ㆍ蕙園 신윤복ㆍ吾園 장승업이 三園이고, 恭齋 윤두서ㆍ玄齋 심사정ㆍ謙齋 정선鄭敾이 三齋다. 그들의 호를 따라서 일컫는 말이다. 그들의 작품이 이 책속으로 많이 불려 나왔다. 갑자기 박물관에 가고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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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떨어지지 않는다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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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니 그녀의 작품이 꾸준하게 번역되어져 출판되고 있었는데 리안 모리아티라는 작가의 이름이 낯설었다. <허즈번드 시크릿>,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 <아홉명의 완벽한 타인들>, <정말 지독한 오후>, <당신이 내게 최면을 걸었나요?>,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 이 책을 읽고 그녀가 썼다는 작품들의 제목을 바라보니 알 수 없는 끌림이 느껴진다. 그만큼 지독한 책이었다는 말이다. 글의 구성도 그렇고 짜임새의 밀도가 대단하다. 거미줄처럼 복잡한 듯 하면서도 평행선을 달려가듯이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는 듯한 씨줄과 날줄의 조화가 정말 멋있었다. '가족'이라는 주제는 이미 많은 작품으로 다루어져 있지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이채로웠다. 책을 읽다보면 마치 추리소설을 읽고 있는게 아닐까,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엄마에 대한 추론이 마치 이 세상에 떠도는 가상정보처럼 한 가족을 혼란속으로 밀어넣는다. 엄마는 죽었다, 라는 문장이 단 한 줄도 없었음에도 이미 엄마는 죽었을테니 누가 범인인가를 찾아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실소했다. 작가의 수에 말려들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는 거다. 이야기는 진지했으나 진부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되었고, 아이 넷을 낳았다. 그 아이들은 이미 장성하여 저희들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평범했었던 그 가족의 일상이 어느날 '잠적'하겠다는 짦은 문자만을 남긴 채 엄마가 사라져버린 그날부터 뭔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과연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또다시 가족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항상 곁에 머물러주는 사람인 까닭에 우리가 너무 소홀하게 생각한다는 가족, 너무 가까운 존재이기에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되어진다는 그 가족에 대해. 사전적인 말로만 들여다보지 말고 하나 하나의 개인적인 의미로 들여다봐야 그 깊이를 알 수 있는 게 가족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타인보다도 '가족'이라는 틀 안에 갇힌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상처를 받는 까닭이다. 가족이기 때문에 참아야 하고, 가족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는 착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오류였음이 밝혀진 까닭이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리고는 그 결정이 '옳았다'고 믿어버린다. 결과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네 탓'일 뿐이다. 이 책은 그토록 진부한 '가족'이라는 말이 주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 굵직한 한방을 날린다. 아직 자라지 못한 내 안의 어린아이와 화해를 해야 한다는 말은 심리학적인 말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해 등장하는 두 가족의 모델만 보더라도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이다. 작가에게 고마운 것은 해체되고 부서지는 이 가혹한 현실처럼 불행하지 않고 모두를 행복하게 마무리 해주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불러온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라고 지긋하게 질문을 남겨주고 있다. 엄마의 실종사건을 담당했던 형사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마라, 아무것도 믿지 마라, 모든 것을 점검하라."... 이 책은 그렇게 읽어야 한다. 그 형사가 결혼을 바로 앞에 둔 사람이었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코로나와 싸우면서 읽은 책이라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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