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쓰레기는 재활용되지 않았다 - 재활용 시스템의 모순과 불평등, 그리고 친환경이라는 거짓말
미카엘라 르 뫼르 지음, 구영옥 옮김 / 풀빛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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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 거품으로 덮인 콜롬비아 거리 (모스케라 로이터=연합뉴스) 27일(현지시간) 콜롬비아 모스케라의 거리에서 한 주민이 오염된 강에서 날아온 독성 거품을 피하고 있다. 2022.4.28 photo@yna.co.kr


며칠 전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이 사진 한 장은 엄청나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보기에 눈뭉치나 구름처럼 보이지만 저것은 거품이다. 사진의 설명글에서 이미 말하고 있지만 저것은 거대한 거품 덩어리인 것이다. 저것을 기자는 '거품의 습격', '자연의 역습'이라고 말했다. 세제등이 섞인 생활하수와 무단으로 방류된 산업단지의 폐수로 강물이 오염되었고, 강한 비가 내려 저렇게 거품이 되었다는 기사였는데 이것이 처음이 아니라 이미 예전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거품을 피해 달아나는 인간의 모습이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우리는 이미 환경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환경을 지배해보려고 모든 악행을 저지르면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교만이다. 느닷없이 왜 환경을 말하냐고? 우리에게 허울뿐인 '재활용'이라는 말의 포장을 이 책이 벗겨내고 있기 때문이다. '친환경'이라는 말에 우리가 얼마나 속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불순물은 질서를 방해한다. 일반적인 질서속에 설 자리가 없어 물리적, 상징적으로도 오염을 발생시킨다. 즉, 오염은 '불순'과 동의어다. 이는 확실한 '쇠퇴'를 의미하기 때문에 분리, 재조정, 정화 작업은 물론, 세계화 흐름속에서 폐기물을 '2차 원료'라고 상업적으로 재분류하는 언어적인 조작은 일시적일 뿐이다.(-42쪽) 산업화를 먼저 이룬 유럽이 근대화를 향해 이룩했다. 그리고 그들은 신나게 날아 올랐다. 너무나 많은 것을 만들어내다보니 멀쩡한 것도 쓰레기가 될 판이다. 그렇게 버려지는 것들이 하나 둘씩 쌓이기 시작하자 '쓰레기 무역'이라는 좋은 말로 포장해서 신생국이나 개발도상국에 팔아 넘겼다. "프랑스에도 이런 일이 있나?" "아뇨, 없는 것 같아요." "그럼 날 좀 프랑스로 데려가." (-60쪽) 이 책의 저자가 인터뷰했던 베트남의 쓰레기 마을에서 쓰레기를 분리하던 노인이 했다는 말이다. 저 말 한마디로 모든 설명은 필요없어진다. 영국이 세계 각지로 폐플라스틱과 알갱이 재료들을 수출하는 유일한 선진국은 아니다. 2008년에 프랑스는 아시아 여러 국가뿐만 아니라 유럽 인근의 재활용 천국 터키에 45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수출했고,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는 이탈리아산 쓰레기에 점령당했다. 서유럽부터 태평양까지 이어지는 쓰레기의 여정은 동서양의 무역 관계를 다시 그린다. 2017년에서 2018년으로 넘어갈 무렵, 중국은 더 이상 세계의 쓰레기통이 되기 싫다며 종이, 종이 상자, 플라스틱, 금속, 섬유 등 24종의 유해 물질 수입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중국은 실제로 미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유럽에서 오는 폐기물 거래의 중심 고리였다.(중략) 이 금지 조치는 쓰레기 국제 무역의 범위를 가시화시켜 경제적, 외교적 문제와 더불어 언론에 '위기'를 초래했다. 그때까지 이런 거래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영역인 동시에 국제 규제의 레이더망을 피해 왔기 때문이다.(-118쪽)

이 모든 것을 되돌리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열역학에서 말하는 엔트로피와 같은 것이다. 패자들은 모두 운하 근처에서 탄식만 할 뿐이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미래로 가는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퇴화에 대한 거론은 꺼리면서 그들이 가져온 발전과 공로만을 이야기하곤 한다.(-94쪽)

재활용 시스템의 모순과 불평등, 그리고 친환경이라는 거짓말.... 부제만 보고도 이 책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래서 어쩌라고? 할 지도 모른다. 모두가 급하게 뛰어가는데 나만 천천히 갈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 보여준 사진은 모든 것을 한마디로 정의한다. 이런대도? '쓰레기 마을'은 베트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 관한 다큐를 보았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바닥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들의 삶은 처참했다. 말이 '지구촌'이고 '지구는 하나'였을 뿐 힘이 없는 국가의 실체였다. "빙하가 녹고 있어요. 북극곰을 살려 주세요"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들에게 기부를 하면 좀 나아질까? 중요한 것은 지구를 살리기 위해 한사람이라도 플라스틱을 덜 사용하는데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지금 누리고 있는 편안함과 편리함을 조금은 포기해야 한다. 이미 정치적인 관념으로 굳어져가고 있는 환경오염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이들의 화학적 분쇄 방식은 생분해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히려 플라스틱 미세 입자와 오염 물질을 분산시켜 생태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그럼에도 산화해체성 플라스틱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특히 베트남에서는 이 봉투가 '친환경' 라벨을 붙이고 대형 마트의 계산대까지 배포되었다.(-113쪽) 베트남뿐일까? 뼈아픈 말이지만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쓰레기는 '재활용'이라는 말을 거쳐 다시 쓰레기로 태어날 뿐 그 '재활용'사업을 하는 기업가의 배만 불리워주고 있다는 말이 시선을 끈다. 재활용을 하기 위해 녹여낸 물질에 또다른 불순물이 섞이고 있다는 걸 누가 알까?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우매한 삶을 살고 있는지 한번 더 깨달아야만 했다. 또한 정치와 기업이 환경오염에 관한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외면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분리수거를 하며 '재활용'에 동참하는 듯 뿌듯해했고, 나름대로는 '친환경'적인 제품을 사려고 노력했던 시간이 부끄러웠다. '재활용'과 '친환경'이라는 말만으로 환경오염을 막지 못한다. 한시라도 빨리 저런 말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플라스틱 조각을 먹은 물고기가 우리의 밥상에 오른다는 말을 백만번한다해도 그것을 체감하기가 쉽지 않다. 오래전 어떤 영화를 통해 유행했던 말이 떠오른다. "뭣이 중헌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모두가 각성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비생각

일상의 경험과 풍경 속에서 우리 삶의 방식은 플라스틱 재활용의 발전과 그에 따른 영향에 타격을 받는다. 더구나 그 영향들은 처음에는 인지할 수 없지만 환경, 인간관계 그리고 사물과 존재의 관계에 깊이 주입되어 있다. 마치 극빈곤층이 주고 잡는, 쓰레기를 먹으면서도 생존력이 강한 물고기 틸라피아 같다.(-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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