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 삶의 완성으로서의 좋은 죽음을 말하는 죽음학 수업
박중철 지음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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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삶을 요약해 본다면 어릴 때는 학습에 대한 부담에 내몰려 정신적으로 힘들고, 어른이 되어서는 높은 노동시간에 시달리고, 노인이 되어서는 빈곤으로 내몰리는 삶이다. 그래서 한국은 세계 10위 경제대국임에도 불구하고 국민 삶의 만족도는 조사 대상 OECD 37개국 중 36위로 바닥에 위치하고 있다.(-49쪽)


'일요일의 병'이란 영화가 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여인이 엄마에게 자신의 죽음을 맡기는 영화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그런 죽음이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죽음이었기에 고통없이 '인간답게' 죽기를 소망했던 딸의 마음을 받아들였던 엄마의 그 숙연함이 오래도록 울림을 전해줄 그런 영화였다. 한국인에게 가장 좋은 죽음이란 첫째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하는 것, 둘째 고통없이 편안한 죽음, 셋째 가족과 주변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것, 넷째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누리다 죽는 것이라고 (-24쪽) 한다. 죽음에 대해 얼마나 환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말이다. 저 네가지 중에서 개인적으로 원하는 죽음이 딱 하나가 있다. 가족과 주변에 부담을 주지 않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것. 그러나 그걸 아는가? 한국 사회에서 노화나 질병에 의한 죽음, 즉 병사로 인정받지 못하면 곧바로 '사건'으로 취급되어 사망 경위에 대한 경찰 수사를 받아야 한다. (중략) 병원이 아닌 곳에서 죽게 되면 사망진단서 대신 사체검안서가 발부된다. 대개 사망 원인이 '외인사', 혹은 '기타 및 불상'으로 기재된다. 이때 장례 절차를 진행해서는 안되고 사망진단서 없이는 장례식장 이용도 애당초 불가능하다. 대신 관할 경찰서에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는 신고를 해야 한다.(-74쪽) 집에서 죽고 싶어도 집에서 죽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병원에서 죽으면 사망진단서 발급도 편하고 바로 병원 장례식장을 이용할 수 있어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형병원들이 저마다 장례식장을 화려하고 크게 운영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 모두는 '객사'를 해야만 죽음이 인정된다는 것인데 내 집에서 내가 죽어도 그것이 '사건'으로 처리되어 장례도 마음대로 치를 수 없는게 한국의 현실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종종 생명과 삶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어에서는 생명과 삶은 모두 'life'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엄밀히 말해 생명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목숨 상태를 말한다. '인간답다'는 것은 목숨과 삶 둘 중 어디에 방점이 찍히는 것일까? 달리 말하면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구분되는 것은 목숨 자체가 다르기 때문인가, 아니면 삶이 다르기 때문인가?(-159쪽) 지금까지 내 삶에서 참 잘했다,고 칭찬해 줄 만한 것중 하나가 친정엄마 돌아가실 때 연명치료를 거부한 거였다. 의사의 물음앞에서 우리 삼남매의 의견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부하겠습니다!' 였다. 힘든 삶을 사셨던 엄마였기에 마지막만큼은 편히 보내드리고 싶었다고. 몇 분후에 엄마는 숨을 거두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 삶에서 가장 비참하고 처참했던 삶의 모습은 엄마가 돌아가셨던 중환자실의 어떤 분이셨다. 인공호흡기를 한 것도 모자라 옆구리에 난 구멍을 통해 또하나의 관이 연결된 채 살아계셨던 그 분을 보면서 저것이 과연 저분이 원하던 마지막 모습일까 싶었다. 그 분의 자식들은 그것을 인간적인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아울러 죽음 역시도 인간답게 맞이해야 한다. 손가락 하나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으면서 숨만 쉬고 있다면 그것을 삶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요양병원 수가체계에서 기계호흡장치와 정맥 영양을 받는 혼수상태 환자는 가장 높은 '의료 최고도'로, 급식관을 통해 지속적인 인공영양을 받는 환자는 그다음 등급인 '의료 고도'로 책정되어 있다. 요양병원 입장에서는 적극적인 인공영양 시행은 더 높은 의료수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200쪽) 병원이 환자를 돈으로 본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이다. 내가 환자가 아니라 그저 '진료'를 돈으로 사는 하나의 '고객'일 뿐이라는 생각을 병원에 갈 때마다 하게 된다. 코로나에 확진되었을 때는 서럽기까지 했었다.(결국 언론에서도 의료수가를 두고 떠들어댔지만) 저들이 보는 것은 나의 '아픔'이 아니라 아픔의 농도에 따라 달라지는 '의료수가' 라는 꺼림직함이라니. 그렇게 억울하면 안아프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환자와 의료인 모두 임종 과정에서 겪게 될 고통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 다음으로 의료인들이 원치 않는 치료로는 심폐소생술, 기계호흡장치, 급식관을 통한 인공영양 등의 연명의료로 확인되었다.(-203쪽) 의사들이 임종 장소로 가장 선호했던 곳은 호스피스 기관이었다고 한다. 호스피스 시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생애 말기의 고통을 최대한 줄여주고,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러운 임종을 돕는 것이라 한다. 무슨 이런 개똥같은 경우가 있는가? 다른 사람의 죽음은 끝까지 존중해주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죽음은 존중받기를 바란다고? 먹는 것으로 장난치는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만든 것만 먹고 살게 하는 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생전에 엄마가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싫은 건 남도 싫어한다고. 남에게 무엇을 나누어 줄 때도 내가 좋은 것을 나누어 주라던.


기술주의에 젖은 현대 의학의 모습을 보면 더 이상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마지막은 없는 것 같다. 현대인들 모두가 자신이 언젠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부정하며 살아가는데 의사들이 죽음에 대해 친절할 리는 만무하다. 언제쯤 병원과 의료인들은 기술주의를 넘어 인간에 대한 이해와 배려라는 모호성을 자신의 자부심으로 끌어안을수 있게 될까? 이를 위해서는 병원과 의료인들의 변화를 요구하기 이전에, 우리 사회가 생존 경쟁에 몰두하느라 꽁꽁 감춰왔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삶의 공간에 드러내는 노력이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86쪽) 이 책의 저자는 현재 가정의학과 의사이자 호스피스 의사다. 이 책을 쓰게 된 이유가 들어가는 글에서 설명되어져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의 틀은 지금의 내게 의료현장에서 이전과 같은 실수와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 실천적 윤리와 용기가 되어주고 있다고. 부디 한국 사회에서 사라져 버린 죽음의 문화에 대한 공론을 촉발하고, 사회적 담론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고.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변화의 물결은 시작되었는데 어쩌면 우리 모두가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라는 틀에 갇힌 채. 늘 다니는 병원의 의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지금 시대는 오래 살고 싶어서 오래 사는 게 아니고 약이 우리를 오래 살게 만든다고. 인간적인 삶, 인간적인 죽음에 대해 사회여론이 형성되면 좋겠다. 이 지랄같은 자본주의가 그걸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겠지만 말이다. 생명과 삶은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저자의 말에 백퍼센트 공감한다. 아울러 저자에게 그치지 않을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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