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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미러 - 욕망에 관한 오마주

 

 

  일단, 전체적으로 재밌게 보았다. 여기서 전체적이다 함은 내가 본 시즌4의 딱 세 편 ‘USS Callister', 'Hang the DJ', 'Black Museum'을 말하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재밌었던 편은 ‘Hang the DJ' 그리고 ‘Black Museum'에서 첫 번째 에피소드이다. 하지만 아는 지인의 추천작이 ‘USS Callister'이기에, 일단 이 작품 위주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사실, 첫 장면에서 나는 꽤 실망했다. 아예 대놓고 스타트랙오마주를 했는데, 느낌이 무슨 70년대 화면 같기도 하고, 대사와 상황은 어찌나 유치한지, 그래서 속으로 이런 걸 왜 추천했지?’ 하면서 봤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반전이 있는 영화였다. ‘스타트랙의 오마주는 게임 속 가상현실이었다. 그것도 주인공이 DNA 염색체 복사를 통해 Infinity(불멸과 무한)를 구축해놓은 가상현실! 그렇다면 이 얼마나 대단한 세상이란 말인가? 누군가가 무한의 공간 속에서 불멸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행복한 것 아닐까?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인공 혼자만을 위한 세계이다. 때문에 그 게임 속 캐릭터로 복제된 클론들은 그 상황이 끔찍하기만 하다. 일단, 크게 두드러지게 나오진 않지만, 클론들에게 생식기가 존재하지 않는 설정이 있다. , 성욕이 제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여기서 어떤 창조가 나오겠는가? 욕망이 없는데 어떤 즐거움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절대자인 주인공의 말에 거역이라도 할 의도라도 비추면, 괴물이 되어 우주의 어떤 황무지별에 버려지기까지 한다. 한 마디로, 영원한 절망만 존재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여기에 여주인공이 어느 날 나타나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던 클론들에게 독재자인 주인공으로부터의 탈출을 격려하고, 나아가 방향까지 제시해준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업데이트 패치 기간에 게임 내 웜홀이 발생하는데, 그 속으로 들어가면 불멸이었던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질 희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클론들은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이미 자신들의 모든 DNA 염색체를 보관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그들은 죽어도 언제든지 다시 복제되어 게임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여주인공은 자신의 치부인 지우지 못한 누드 사진들을 이용하여 현실의 자신을 통해 주인공 집에 몰래 들어가 클론들의 모든 DNA 염색체들을 훔치도록 한다. 그리고 게임 내에서 적당하게 시간을 끌어, 주인공을 따돌리고 웜홀 진입에 성공한다. 드디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는데... 아니, 이 게 웬 걸? 그들은 죽지 않고 되살아나, 게임 속 진짜 USS Callister가 된다. 게다가 생식기까지 복원된 진짜 존재가 되어, 진짜 Infinity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마지막 장면의 다소 많은 의아함은 있지만, 영화이기에 일단 쿨하게 넘기고, 그냥 느낀 바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보고서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장자의 이야기 중 하나였다. 어느 노부부 하인과 욕심 많은 주인의 이야기인데, 이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꿈속에선 노부부가 주인이 되고, 욕심 많은 주인은 노부부의 하인이 되었다. 그래서 노부부는 늘 꿈속을 생각하며 살아서 현실 속에서도 행복했고, 반대로 욕심 많은 주인은 늘 꿈속에 대한 공포로 불안에 떨며 살아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장자는 과연 누가 행복한 것인지 우리에게 되묻는다. 이십대 초반에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건 당연히 늘 꿈속이라면 현실도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다는 경구에 대한 일종의 떨림이었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지금 내 필명이 몽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내가 몰랐던 것이 하나 있었다. 왜 같은 꿈을 꾸었는데 같이 행복하지 않고, 한 사람은 불행했단 말인가? 물론, 이것은 장자가 가리키는 달의 손가락을 보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장자의 이야기 속에도 분명 힌트가 있기는 하다. ‘욕심 많은이라는 형용사가 아마 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단서라면 좋은 단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굳이, 프로이드나 융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의 꿈이 얼마나 개인적 욕망으로 가득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꿈은 다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희망에 관한 말이기도 하고, 진짜 현실이 아닌 꿈에 관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떤 꿈이라도 욕망과 떨어져 별개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이 때문에 아마 이 영화에서도 생식기에 관한 부분이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주인공의 극대화된 욕망에 관해선 별도로 차치하고, 클론인 존재들의 죽음에 대한 욕망을 생각해본다면 왜 이 영화에서 생식기가 중요한지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내 개인적으로는 죽음의 경험 이후 욕망을 다룬 ‘Black Museum'의 첫 번째 에피소드도 꽤나 흥미로웠다. 물론, 여기에 너무나도 과장된 고통이라는 설정이 들어가서, 많은 반론의 소지가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 또한 죽음에 대한 극대화된 욕망으로 해석한다면 이야기의 구색이 대충 맞추어지지 않을까? 또 그래야만 ‘USS Callister’의 클론들이 부활하는 다소 억지스러운 마지막 장면이 조금은 상쇄되리라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진짜 Infinity는 아무 욕망도 존재하지 않는 죽음 그자체이거나, 혹은 죽음에 대한 욕망의 다른 이름이라고 내 개인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영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어야 진짜 나름의 의미와 맥락 있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설프게 불멸의 희망이란 이름으로 Infinity를 해석하면서 마무리해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P.S

 

  세 작품 모두 무언가의 오마주이네요. 'Hang the DJ'도 다큐멘터리 영화가 실제 존재하고, 'Black Museum'도 실제로 존재하는 범죄 박물관이라고 하네요. 자세한 건 Wikipedia를 검색해보면 나올 겁니다. 하지만 아쉬운 건 읽어도 큰 연관성은 찾을 수 없다는 사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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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 향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호마윤 에르사디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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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향기

 

 

그래 아마 이란 영화였을 거야.

제목이 체리향기이었던가?

여하튼 한 사내의 이야기였어.

짙은 콧수염을 달고 있는 남루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으려고 발버둥치는

그런데 마치 무슨 코믹영화처럼 감독은

그 사내의 죽음을 녹록히 허락지 않는 거야.

그렇게 실의에 빠져 허무해 보이던 사내가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들의 자질구레한 부탁들을

전혀 거절하지 못하더군.

그렇게 상황은 자꾸 이상하게 꼬여가고

마치 사내의 삶은 그 사소한 책임감들로 인해

오래도록 지속될 것처럼만 보였어.

그런데 사뭇 진지한 영화였기 때문이었을까?

끝내 사내는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서

아무 미련도 없이 홀로 관속으로 들어서더군.

대체 혼자서 관속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죽으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참을 그 비좁은 공간에서 누워있더군.

때마침 체리나뭇가지가 바람에 잘게 흔들리는

그런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이야.

그러더니 어느새 불현듯 사내가 관 속에서 일어서는 거야.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리고 다시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더군.

아마 사내는 바람에 잘게 흔들리는 체리나뭇가지 사이로

은은히 불어오는 상큼한 체리향기를 맡았던 것 같아.

그와 동시에 무언가 격렬한 생의 희망을 붙잡았겠지.

그러니까 제목이 체리향기 아니었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말이야.

그토록 긴 시간을 죽음을 위해 기꺼이 견뎌왔던 사내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죽음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

너무 허무하고 어처구니없지 않아?

체리향기가 대체 뭐라고?

그런데 말이야 난 체리향기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요즈음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면 자꾸 이상스레

눈알이 시큼거려 또 미친놈 마냥

가슴이 벌렁거리면서 아카시아향기와 당최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리움들이

마구 솟구쳐 오르는 거야.

하지만 포악하게 포대 한 자루에 한가득 담아

얼굴을 파묻고 마구 집어 삼키던 그 그리움들이란 건

누군가의 말처럼 사뭇 죽음과 닮아 있어야 하는 것

그런 것 아닐까?

그런데 난 왜 그 잔혹스런 죽음과도 닮은

그 찌릿한 그리움들 속으로

이렇게 살아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정녕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는

정녕 더 이상 내 것이고 싶어도 내 것일 수 없는

그 그리움들이 대체 뭐라고?

 

 

결국, 난 아카시아향기를 맡으며 이렇게 살아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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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의 이중생활 SE (2DISC) - 일반 킵케이스
이렌느 야곱 외,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 AltoDVD (알토미디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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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의 이중생활 -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도플갱어(Doppleganger=Double Goer), 분신, 또는 생령. 살아있는 사람의 또 다른 닮은꼴로서, 때에 따라 에고가 되기도 하고 도덕적 카운터파트로 표상되기도 한다. 정확히 일치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으나 당사자 아니면 알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만나는 자는 곧 죽는다! 독일의 민담분석에서 처음 사용된 개념이지만, 이와 유사한 모티브는 세계 어디서나 발견되고 있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언뜻 제목만 들었을 때는, 그리고 청순하기 그지없는 이렌느 야곱의 알몸이 슬며시 보이는 영화 스틸을 보아도, 또 영화의 소재가 도플갱어에 착안했다는 점만 들어보아도, 분명 나는 이 영화가 아주 야한 영화이거나, 아니면 인간 심리의 한 요소를 파고드는 스릴러물일 거라고 쉽게 단정지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감독이 키에슬로프스키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 순간 나는 '배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을 통해 이런 기대에 대한 배신을 철저히 맛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10분도 채 안 되어, 그 배신의 전모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전혀 무시되어버린 인과율, 도저히 내러티브를 잡을 수 없는 몽롱한 대사들과 배우들의 돌출적인 행동들, 표정들... 그런데도 가슴은 알 수 없는 슬픔 비슷한 감격들로 벅차올라, 영화 내내 울려 퍼졌던 단조의 애잔한 선율이 각인되어 버리는 기이한 현상... 그러하기에 맨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머리와 가슴이 극심하게 이중적으로 분리되어 버리는 현상에 도저히 그 무엇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단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란 영화에서 얻은 여운의 연장선상 정도로만 이해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 근래, 우연히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모든 영화 음악을 관장했던 쯔비그유 프라이즈너의 음악을 찾아 듣다가, 다시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보게 됨으로써, 나는 그 이전의 내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정리될 필요성과 함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때처럼 내 마음에 오래 남겨지기를 소망하게 되었다.

 

 

  마치, 어릴 적 사라졌지만 가장 소중했던 기억들의 한 부분인양 빛바랜 영상들... 영화는 처음 그런 영상 속에서 폴란드에서 태어난 한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치 당연한 귀결과도 같이, 어떤 전조와 예감들로 가득 찬 몽롱한 장면들과 대사들이 스쳐지나간다.

 

 "기다렸던 별이 왔다. 저 아래 뿌연 것, 이제 곧 크리스마스 축제가 시작될 거란다. 보이니? 보여줘? 저기 안개가 아닌 희미한 별빛들.."

 

 "첫 잎이다. 봄이 왔구나. 이제 나무는 잎사귀로 가득 찰 거란다. 솜털 같이 연한 잎맥들.."

 

 

  성장한 베로니카에겐 이제 사라져버린 어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영화는 그 서두를 이렇게 꺼내고 있다. 그런 다음, 다 자란 베로니카의 갑작스런 정사신과 함께 베로니카의 사랑과 희망들, 뭐 그런 것들에 대해 보여주기 시작한다.

 

 

  베로니카... 베로니카는 성악에 재능이 있지만,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처지이기 때문에 그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있는 조금은 불쌍한 처녀이다. 그러나 매우 착한 심성의 소유자로 아버지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있고, 또 자신을 끔찍이 생각해 주는 안텍이라는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기에 행복한, 이런 의미에선 다소 평범한 처녀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금은 먼 지방에 혼자 살고 있는 숙모의 건강이 안 좋아진 이유로 베로니카는 이 두 사람을 남겨두고서 떠나야만 될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히도 이제까지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던 그녀에게 있어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기회로 연결된다. 왜냐하면 베로니카는 친구가 일하고 있는 한 오페라 악단에 우연히 찾아갔다가, 어느 선생의 눈에 들게 되어, 테스트를 받은 후, 예외적으로 발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베로니카에게는 한 가지 지병이 있었다. 무엇이냐 하면 심장이 약하다는 사실이었는데, 호흡이 중요한 오페라의 소프라노에게 있어서 그것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베로니카는 그 사실을 숨기고서, 오페라 공연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이런 베로니카의 죽음이 예견이라도 된 듯, 우연히 관광을 와, 시위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베로니카의 도플갱어, 베로니크와의 대면을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베로니카는 자신의 영혼의 쌍생아 베로니크를 단 번에 알아보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견하게 되지만, 베로니크는 베로니카를 보지 못하고, 사진만 찍음으로써 그 죽음의 운명을 피해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베로니카가 자신이 사랑하던 아버지와 안텍 곁을 떠나면서 예정되어졌던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베로니카는 자신의 방에서 어떤 꿈이라도 꾼 듯, 갑작스레 놀란 모습으로 일어나서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자신과 늘 함께 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예감을 고백하고, 그러하기에 이 세상에선 자신이 외롭지 않다는 이야기를 유언과도 같이 남기고선, 여행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베로니카는 이미 아버지와 안텍의 곁을 떠나던 그 순간, 자신의 운명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자신에게 있어 오페라라는 것이 너무나도 위험함을 알고 있었지만, 과감하게 그 무대 위로 올라서기를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예정되어져 있었고, 영화 속에선 그 모든 예정의 클라이맥스로써 베로니카가 주연 소프라노로 노래하게 될 음악 콘서트무대를 설정하고 있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정중한 무대 위에선 지휘자의 지휘봉이 내려가고, 모든 악사들은 장중하면서도 슬픈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메조소프라노의 비정한 독주가 울려 퍼지고, 곧이어 너무나도 아름다운 처녀 베로니카의 천상의 소리가 꿈을 꾸듯 그에 화답하기 시작한다. 서서히 메조소프라노라는 무대 뒤로 멀어져 간다. 그리고선 이젠 베로니카만이 무대의 중앙에 남아, 천상을 꿰뚫고 올라서려는 듯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러나 희미해지는 목소리는 힘을 잃어가면서, 베로니카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는 계속되어지고, 지휘자는 더욱 거세게 베로니카에게 노래하도록 지휘봉을 휘두른다. 다 죽어 가는 한 마리 새에게 어떤 숨겨진 힘이 있었을까? 마지막 나래를 펴는 노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울려 퍼지지만, 결국 베로니카는 견디지 못하고서 그대로 쓰러져 버린다. 그렇게 모든 것은 예정된 대로 다 이루어진다.

 

 

  영화가 시작한 지 30분도 안되어, 주인공이 죽어버린다면, 이제 영화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베로니카가 부활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 본격적인 고스트 장르로 반전되는 것일까? 하지만 영화는 잔인하게도, 그대로 관속에 묻어지는 베로니카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다시는 베로니카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젠 갑작스레 프랑스로 넘어가, 그의 영혼의 쌍생아, 똑같은 외형에, 똑같은 습관들 그리고 똑같은 꿈을 가지고 있던 베로니크에게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베로니크... 처음, 베로니카를 잡을 때 그의 남자 친구와의 정사신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갑자기 영화는 베로니크의 정사 신을 잡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제 막 절정에 달아오른 모습을 비쳐준 후, 그 뒤에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에 견디기 힘들어하는 베로니크의 모습을 담아낸다. 같이 함께 있던 남자 친구는 영문도 모르고, 베로니크의 슬픔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는 방법조차 없기에 떠나버리고, 베로니크는 홀로 남겨져, 자신의 까닭 모를 슬픔의 원인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불현듯 다시 장면이 바뀌어, 베로니크는 아마 자신의 성악 지도 선생이라고 생각되는 한 노인에게 찾아가, 모든 것을 포기하겠노라고, 고백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제 전혀 새로운 베로니크의 사랑과 꿈에 대해 천천히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베로니크 역시 홀아버지를 끔찍이 사랑하며, 성악에 재능이 있는, 착하기 그지없는, 다만 베로니카와 달리 폴란드가 아닌 프랑스에 사는 평범한 처녀이다. 하지만 어떤 남자와의 정사 도중 갑작스레 느낀 커다란 상실감과 부재감은 베로니크 심경에 변화를 주어, 꿈꾸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어버리고, 이젠 조용히 조그만 학교에서 음악선생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운명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로니크는 무언가 정체 모를 존재에 대한 예감들을 통해 알렉산드로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베로니크는 알렉산드로를 전혀 모르고 있다. 단지, 그는 자신의 학교에서 우연히 인형극 공연을 한 사람일 뿐이다. 그렇지만 단 한번뿐이었던 우연한 그의 인형극은 베로니크 자신에게 무언가 알 수 없는 예감을 가지게 하였고, 그것은 인형극의 주인공이었던 알렉산드로에 대한 불확실한 사랑의 감정으로까지 번지게 된 것이었다.

 

 

  다시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는 온통 까맣고, 파리해 보이는 한 무용수 인형과 함께, 인형을 움직이고 있는 손만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어떤 대사도 없이 무용수 인형은 자신을 움직이는 손에 의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마치 날고 싶은 듯, 아름답고, 처연하게... 그런데 그만 무용수는 다리가 부러져 버렸는지,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되어버리고, 급기야 슬픔에 빠져 죽어버리게까지 된다. 인형극을 보던 모든 관객들은 슬픔에 빠져 버리고, 인형극은 마치 끝이라도 난 듯, 춤과 함께 어우러졌던 음악도 꺼져 버린다. 그런데 무용수 인형이 나왔던 조그만 상자 속에서 한 남자 인형이 나오더니, 죽은 무용수 인형에게 고이 잠들라고 담요를 덮어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그 담요 속에 완전히 가려져, 이제 영원히 잠든 줄만 알았던 무용수 인형이 날개를 달고, 나비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선 하늘 위를 훨훨 날며, 다시 춤을 추면서, 인형극은 끝을 맺는다.

 

 

  인형극 내내 인형을 조정하던 알렉산드로를 바라보았던 베로니크는 그때부터 알렉산드로와 수수께끼 같은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이 역시, 인형극과 비슷하여 조정하는 쪽은 알렉산드로가 되고, 베로니크는 마치 무용수 인형처럼 조정하는 알렉산드로를 따라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한 밤 중에 울려 퍼지는 갑작스런 전화, 그리고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저 끊어 버리는 남자의 거친 숨결... 갑작스레 배달되기 시작한 발신지가 적혀 있지 않은 소포들, 구두끈, 담배가 들어있지 않은 버지니아 담배 케이스, 어디인지 알 수도 없는 이상한 곳에 소리들이 녹음된 테이프... 알 수 없는 존재에게로부터 전해지는 이 수수께끼를 통해 베로니크는 조금씩 자신에게 상실되었던 존재감들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우편물의 대상자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예를 들면, 구두끈은 알렉산드로가 쓴 소설책과 연관이 되어 있다든지, 이상한 곳에 소리들이 녹음된 테이프는 지금 알렉산드로가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던지... 그리고 교묘하게도 동시에 그것은 폴란드에서 존재했던 자신의 영혼의 쌍생아 베로니카의 흔적들과 연관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러하기에 그러한 조그만 물건들에도 베로니크는 알 수 없는 영혼의 떨림을 느끼게 되어, 더욱 알렉산드로에게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냄으로써 베로니크는 운명과도 같은 알렉산드로와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영화는 전혀 다른 반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바로 무엇이냐 하면, 알렉산드로의 존재가 베로니크의 예상과 달리, 자신의 영혼의 안내인과 같은 신비스러운 존재가 아닌 그저 평범한 한 남자, 그것도 매우 속물인지도 모를, 그저 그런 남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제껏 알렉산드로가 베로니크에게 그러한 소포물을 보내고, 한밤에 갑작스런 전화를 걸고서 한 마디도 안한 행위들을 한 것은 자신의 소설 속에 일이 실제로 가능할까에 대한 실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즉, 한마디로 말해서, 알렉산드로는 베로니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설을 위한 실험대상으로써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사실을 안 베로니크는 충격을 먹고, 알렉산드로와 있던 자리를 그대로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에게서 도망을 친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그런 베로니크에게 갑작스레 사랑을 느꼈는지, 베로니크를 쫓아간다. 그리고 결국, 알렉산드로는 베로니크를 만나 사랑을 고백하고, 둘은 같이 동침하게까지 된다. 그리고서 이제 둘은 서로에 대해 알고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는데, 거기서 우연히 알렉산드로는 베로니크가 폴란드에 관광을 하러 갔을 때 찍은 사진들을 보다가, 베로니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로니크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상실감의 원인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영혼의 쌍생아 베로니카에 존재에 대해... 그리고 영화는 이상하게도 이 때문에 처절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베로니크를 달래는 알렉산드로와의 갑작스런 정사신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베로니카의 죽음의 순간, 크나큰 상실감을 맞이하여 정사를 중단하였던 베로니크의 지난 정사를 만회하기라도 하고 싶은 듯. 여하튼 그렇게 해서 베로니크와 알렉산드로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베로니카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베로니크는 알렉산드로의 무용수 인형이 하나가 아닌 둘임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알렉산드로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인형극이 격렬하기 때문에 여분으로 하나 더 만든 것이라고 하지만, 베로니크는 거기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슬픔을 느끼는 베로니크가 알렉산드로의 손에 이끌려 한 무용수 인형을 춤추게 하는 모습과 그 밑에 누워서 버려진 다른 무용수 인형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베로니크와 베로니카에 존재에 대해 어슴푸레 짐작하게 한 후, 알렉산드로가 쓰고 있는 소설의 내용을 베로니크의 읽어 주는 장면을 통해 베로니크와 베로니카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 설명 해준다.

 

 

  "1966년 11월 23일, 이 둘은 각기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 둘 다 검은색 고수머리에 고동색 눈을 가졌다. 두 살 때, 한 아이가 난로에 손을 데었고, 며칠 후 다른 한 아이가 손을 댈 뻔했다."

 

 

  영화의 마지막은 알렉산드로의 소설의 이 대사를 통해서 확실히 베로니카의 존재에 대해 알게된 베로니크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집 앞에 아직 봄을 맞지 못하고 죽어 있는 듯한 나무 밑동에 가만히 손을 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베로니카의 죽음의 순간 불렀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나는 이 영화의 내용이 이렇다는 둥 저렇다는 둥 이야기를 많이들은 편이었다. 영혼의 쌍생아 개념들, 그리고 키에슬로프스키가 이러한 개념을 통해 블루, 레드, 화이트 때처럼 유럽통합에 대한 풍자를 하였다는 둥, 진정한 자아 찾기에 관한 영화라는 둥, 기타 둥둥.. 하지만 오히려 이런 선입관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혀, 감성적이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영화의 이미지들에 대해서 의미에 집착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머리와 가슴을 분리시켜 놓는 기이한 현상만 일으키게 했다. 가령 예를 들면 구두끈에서 연결되는 베로니카와 베로니크의 연결고리에 대해 집착한다던가, 인형극의 의미에 대해 과대해석 한다던가... 하지만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게 됨으로써, 의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눈을 감아, 가만히 울려 퍼지는 영화 속에 아름다운 선율들을 들었을 때, 비로소 나는 이 영화가 가 닿고자 하는 지점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우리를 대신해 사라져 간 것들... 우리 몰래 우리를 지탱해 준 소리 없는 침묵의 존재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 '분신'에서 골랴드낀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분신에게 가정과 직장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삶을 빼앗기면서 파멸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공포들을 느끼고 있는 지,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비단, 그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자신의 또 다른 이중 존재라고 생각되어지는 영혼들에 대해 깊은 공포를 느껴왔다. 그러하기에 정신분석학에서 도플갱어라는 용어가 지니는 의미가 죽음을 의미하고, 망령 혹은 원혼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가깝게, 우리들의 공포 영화만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우리의 공포의 대상이 얼마나 우리를 닮아 있는가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던져보는 것은 왜 그 형체들이 그토록 우리 자신을 닮아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히치콕이나 다른 어떤 이들은 새와 개 등의 형상을 통해 우리 공포의 원형을 그려내기도 하긴 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새와 개 자체도 매우 의인화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늘 우리를 닮은 것들에 대해 깊은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것이다. 그것은 대체 왜일까?

 

 

  어떤 의미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죽어있는 것들 위에 서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생명이란 건 죽음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반드시 생명엔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만약 생명에게 죽음이 없다면 그건 이미 생명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원이라 감히 말 할 수도 없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이름 붙여보지 못한 미지일 뿐일 것이다. 즉, 그러하기에 우리는 늘 우리라는 존재감 밑에 깔려진 죽음이란 그림자를 떨쳐 낼 수가 없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왜 우리는 누군가의 혼령과 원혼을 보았다 하고, 그를 보고서 공포를 느끼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까닭도 없이 그 망령들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혹 우리는 거기서 앞으로 다가올 우리 자신의 죽음의 그림자 아니면, 자신의 생명을 위해 던져진 죽음의 의미를 대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하기에 그들이 자신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생명과 그 모든 것을 되찾고자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대체 우리를 위해 죽어간 것들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우리를 위협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위의 물음들을 떠안고 있다. 그런데 키에슬로프스키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달리 그러한 우리의 공포의 대상인 분신을 통해 파멸이 아닌 생명의 길로, 그리고 소통의 길로 가닿고자 몸부림친다. 아련한 영상의 이미지들, 고인 웅덩이를 밟으며 뛰어가는 베로니카의 모습, 한 사회가 몰락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마르크스 동상이 철거되어 운반되어지는 모습, 아직 가득 잎사귀를 이루지 못하고 뜯겨진 연한 잎맥의 여릿함들... 그리고 다시 자기도 모르게 베로니크를 위해 죽어간 베로니카 그 자신... 그의 다 못 이룬 성악가로써의 꿈, 다리가 부러진 무용수 인형의 하늘 위로까지 춤추고 싶은 그 강한 열망들...

 

 

  베로니크는 사실 영화 속에서 전혀 베로니카와 상관없이 알렉산드로에게로 이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어쩌면 그러하기에 이 영화는 매우 평범한 일상, 하지만 다소 우연이 남발하는 일상에 대해 그린 그런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아무것도 아닌 일상 속에서 베로니크는 자꾸 베로니카의 흔적들을 발견해 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사랑의 대상인 알렉산드로에게로 향해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와의 만남을 통해 그 대상의 존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서, 베로니크는 참을 수 없는 슬픔 가운데 알렉산드로와의 격렬한 정사를 나눔으로써 사랑을 완성하게 된다. 즉, 영화는 무언가 하나가 이루어짐에 있어, 잃어버리게 되거나 소외되어버리는 것들에 대해 줄곧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베로니크의 사랑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권리이다. 그것은 아무리 그 누가 자신을 대신해 죽어갔다 하더라도 쟁취해야할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당연함 가운데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나의 사랑을 위해 잃어버리게 되는 것들, 상실된 것들... 그런 것들에 대해 단 한 번도 떠올려볼 생각을 하질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네들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우리가 살아있고, 우리가 호흡하고, 입맞춤하는 이 것, 이것은 과연 우리만의 힘으로 스스로 얻어진 것이라 우린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존재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정말로 베로니카는 존재하는 것일까?

 

 

  봄을 맞이하기도 전 죽어버린 고목의 밑동에 가만히 손을 대어 보자. 가슴에 약동하는 호흡이 없다면, 양 볼을 그 마른 가지 끝에 부비며 울어도 보자. 그래도 떨어질 눈물 하나 없다면 온 몸으로 부둥켜안고서, 그 썩은 나무뿌리가 뽑히도록 서러워도 해보자. 어쩌면, 그렇다면 어쩌면, 그러한 존재들을 우리는 느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젠 그러한 존재들이 우리들의 공포가 아닌, 우리를 대신해 죽어간 사랑으로 느껴질 수 있을지도,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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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을 워낙 좋아하다보니..
와...와!^^ 그 때야 감독보다는 배우를 좋아한 셈인데..먼저 블루,레드, 화이트.
제가 고등학생때..부터 봤다.고 하면 이런 발칙..!할지도..모르겠어요.좀 더 영화보기가 쉬워진건 졸업후이지만 ..그 땐 친구방에 비디오를 볼수있는 작은 TV와 지금은 거의 쓸일 없어 저 역시 유물로 간직하고있는 비디오..가 생기고부터.. 잠 못자던 이 밤을 건너 다니며 영화를 흡수하던 시기...
저는 원치 않아도 일찍 독립인생이었으나..막 집을 떼어내고 민달팽이가되어..사회구성원이 되고자하던 외롬을 몹시 타던 친구때문에 그 녀석의 잠머리를 지켜 주느라..한 길 건너면 내 집..내 방을 두고 새벽이슬을 맞고 골목을 다니던 계집이었으니..덕분에 취향과 상관없이 많은 영화를 봤었노라고..
우린 이따금..그리워..서로 그러면서 과거를 추억하는데..ㅋ또 빠질 수없는게...옛 영화와..커피와..칵테일..등등..이라고..
베로니카의..는 블루 보다 한참 이전..영화.로 알고있다고. 블루 포스터 아래.위..어려운 발음으로 존재하던 그의 이름..크쥐시토프..는 대충 뭉게고 키에슬롭스키..라고 읽어 대며..라빠르망과..데미지와..줄리엣 비노쉬를 사이에 두고...아슬아슬하게 그를 읽어나가던..사회초년생시절까지...몽땅..
베로니카..가..불러들이는 시간의 증거들.!ㅎㅎㅎ 모처럼..옛 일기를 복기하듯..즐거웠네요..저의 이중 생활..속
영화보기가...

몽원 2015-01-14 15:56   좋아요 0 | URL

한 때 저도 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서 모두 찾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그건 저의 대학 초년 시절쯤... 군대를 제대하고 23~24살, 이 정도일 때쯤인 듯. ㅎㅎ 그러면서 마구 영화를 폭식하던 시기였던 거 같습니다. 소화도 안 되는데... 별별 이계에서 온 예술이란 장르의 영화들을 ㅎㅎ 지금은 집중력도 딸리고, 졸려서 보지도 못할 그런 영화들을요. ㅎㅎ 그래도 가끔은 그때가 그립습니다. 무언가 마구 폭식할 수 있었던, 그래서 게워내야 하는데 목구멍에 내내 걸려 고통스러웠던 그때가...
 
인생 - [초특가판]
장예모 감독, 강문 외 출연 / 기타 (DVD)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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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 역사를 도구화하는 방법 배우기

 

 

 

 

  ‘병아리가 자라면 닭이 되고, 닭이 자라면 양이 되고, 양이 자라면 소가 되고, 소가 자라면 그 다음엔 뭐가 되는 거죠?’

 

 

  붉은 수수밭, 귀주 이야기, 책상 서랍 속의 동화 등으로 이미 중국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자리 잡은 장예모 감독의 '인생'은 복잡다단했던 중국의 현대사 속에서 일반 서민들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속엔 조금은 다르지만 중국과 같이 같은 아시아로서 그러한 과정을 겪었던 우리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그 속에서, 모두는 아니겠지만, 역사라는 거대한 구조물의 억압 속에서도 삶에 대한 끝없는 긍정을 발견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9세기 말, 서구세력의 침략으로 주변 모든 국가에게 하늘과도 같던 중국대륙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20세기에 이르러 신해혁명으로 급전되어, 무려 8000년에 이르는 중국왕조의 역사에 종결을 고하게 되기까지 이른다. 우리의 주인공 ‘복귀’는 바로 그러한 시대 가운데 태어난 사람으로서, 영화 속에선 대대로 그 지역에서 행세하던 지주로서 첫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기존의 지주들이 몰락했던 것처럼, ‘복귀’ 또한 몰락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시대와 달리, 이제 중국이란 사회는 아직 감당키 어려운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신개념의 신시대이고, 그것은 누구든지 지주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조상들이 해왔던 대로 흥청망청 노름만 하던 ‘복귀’는 그러한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노름으로 집안을 파탄에 지경에 이르게 함으로써, 늙은 자신의 아버지를 화병으로 죽게 만들고, 늙은 어머니를 병들게 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부인을 떠나보내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인지, 하루아침에 변한 자신의 신세를 자각하고, (영화 속에서 ‘복귀’는 다시는 도박을 안 하겠다는 의미로 ‘부도’로 개명한다.) 새로운 사람이 된 ‘복귀’에게, 다시 그의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옴으로써, 이제 ‘복귀’는 ‘복귀’가 아닌 ‘부도’로서 새로운 삶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사고방식, 지주로서가 아닌 이제 일반 민중으로서, 그 무엇보다 자신의 가족이 소중하다는 의식을 심어놓게 된다. 그리고 다시, 지루했던 중일전쟁이 끝나고 난 1940년대 후반,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국공합작이 깨지면서, 내분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이 가운데 우리의 주인공 ‘부도(복귀)’ 또한 자연스럽게 엮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스운 것은 그가 어떤 사상이나 이념 등에 의해 어딘가에 선택을 하고, 투쟁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기 위해 그 속에서 선택되어졌다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자연스럽게 엮여버린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중일전쟁 직후, 지방이야 어떻든 간에, 중국을 좌지우지했던 것은 국민당이었다. 그러하기에 ‘부도’는 자연 힘없는 일반 서민으로서 국민당에 끌려가,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역사가 이미 우리에게 알려주듯이, 그 당시 무능했던 국민당은 그 처음 전선의 유리했던 국면과 함께 미국을 등에 업은 풍부했던 인적, 물적 자원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에게 패하게 된다. 그러면서 애초 자신의 처자식 걱정에만 몰두하고 전혀 전쟁에 관심이 없었던 ‘부도’ 또한 공산당의 포로가 되어, 자연스럽게 다시 공산당을 위해서 일하게 된다. 여하튼 이와 같은 과정 끝에, ‘부도’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공산당의 승리로 지주세력들이 사형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면서 과거 지주세력이었던 ‘부도’는 이에 공포에 질리지만, 공산당 정권 아래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법을 깨닫게 되고, 다시 철저히 사회에 순응해 나간다. 그런데 뜻밖에도 영화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그러한 공산당 정권 아래 사회도 살만한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예를 들면, 1950년대 모택동은 중국이 경제적으로 서구에 비해 낙후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경제발전을 위한 무리한 계획을 설정한다. 목표 달성을 위해 모택동은 일반 민중들의 노동력을 무리하게 착취하는데, 그 속에서도 일반서민들의 모습은 이제까지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삶의 갖은 즐거움들을 발견하고 찾아내는 것이다. 심지어, 1960년대 모택동의 거대한 이상의 일환이었던 문화혁명을 기점으로 시작된 모택동 숭배 속에서도 그들의 삶은 전혀 억압되어 있거나,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에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부도’의 딸의 혼인식 날, 모택동의 초상화 앞에서 모주석 어록을 들고 사진을 찍는 ‘부도’와 ‘가진(부인)’, 그리고 그의 딸과 사위의 즐거운 모습을 통해 이를 드러내고 있다. 다만, 1960년대 후반 이르러 급격해진 문화혁명의 혼돈으로 인한 사회상에 대해선 장예모는 은근히 풍자를 하고 있긴 하다. 왜냐하면 당시 문화혁명은 사회의 기존 체제의 전복이란 미명하에 모든 권위와 전통 그리고 낡은 것이라 여겨지는 모든 것을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말 못하는 ‘부도’의 딸이 임신하여 출산하던 날, 병원에는 오랜 경험으로 숙련된 늙은 의사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젊은 간호사들만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부도’의 딸의 생명을 앗아가게 만들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렇게 산모의 죽음으로 출산된 ‘부도’의 손자와 사위 그리고 그의 부인 ‘가진’이 함께 딸의 묘소를 찾은 후, 같이 소담하게 식사를 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데, 거기서 새 시대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손자는 ‘부도’에게 묻는다. 병아리가 크면 무엇이 되냐고? ‘부도’는 대답한다.

 

 

  '병아리가 자라면 닭이 되고, 닭이 자라면 양이 되고, 양이 자라면 소가 되고, 소가 자라면 네가 어른이 되지.'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너무나도 자연스럽지만 은근히 위트 있는 영화, 아니 어쩌면 거대한 이념들에 좌지우지되는 우리 젊음에 독설을 퍼붓는 영화...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그러한 시대 변화 속에 혼돈과 투쟁정신, 아니면 진보를 향한 끝없는 갈망들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이 영화 속에선 그러한 것들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너무나도 비굴해 보이는 ‘복귀’와 ‘가진’은 사실, 전혀 비굴하지도 그렇다고 밉살스러워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삶을 묵묵히 받아내며, 그 가운데 어른이 되고, 늙어갈 뿐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영화 속에서 공산주의니 혹은 민생주의니 왕조니 하는 것들은 그들에게 하나의 도구일 뿐, 삶 그 자체가 되어주질 못하고 있다. 물론, 닭보다는 양이 크고, 양보다는 소가 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크기의 변화일 뿐, 같은 종이 아니기에, 실질적인 변화는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그러하기에 양이면 어떻고, 소면 어떻겠는가? 중요한 건 모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삶을 살아내는 것이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역사란 것은 하나의 환경일 뿐, 우리의 중심이 되고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다가올 것이라 믿고 있는 새 우주 새 천년 시대에도 계속 될 것이라고 영화는 은근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진보를 믿고 죽어간 많은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우리의 모습이라고 공감하였다. 또, 진보를 향해 한없이 목말라하고 굶주려 있는 내가 이렇게 될 수 있기를, 이렇게 소담하게 어른이 되는 법들을 배워가기를, 우리 아버지들처럼 만큼만 살아지기를, 그럴 수 있기를, 지금 이 순간 잠시,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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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의 거짓말 - [할인행사]
피터 카소비츠 감독, 로빈 윌리암스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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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의 거짓말 - 희망의 아이러니에 관해

 

 

 

 

  어느날 히틀러가 점쟁이에게 물었다.

 

  "내가 언제 죽을 것 같나?"

 

   점쟁이 왈

 

  "유태인 경축일 날입니다."

  

  히틀러 화들짝 놀라

 

  "아니 왜 하필 유대인 경축일인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점쟁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의연한 태도로 말하길

 

  "당신이 죽는 날이 유태인 경축일 테니까..."

 

 

 

  살벌한 그 시기에 유대인들은 이런 사소한 유머와 때론 터무니없는 희망들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해 나갔다고 한다. 왜? 그렇게 도저히 희망이란 이름이 가당치도 않을 암담한 시대일수록 미약하게라도 붙잡고 늘어질 무언가가 필요했을 테니까...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은 이러한 베이스 아래 유대인 제한구역인 게토 (게토는 포로수용소를 들어가기 전 단계로 제한적인 최소하의 생활을 보장하는 장소임) 안에서의 유대인들의 살벌한 삶을 코믹하게 엮어나가고 있다.

 

 

  언제나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사건의 발단은 참 사소하고 지극히 우연한 돌발들로부터 시작된다. 먼저 화면엔 바람이 거세게 불고 도저히 잡힐 것처럼 보이지 않는 신문 한 장이 휘날리고 있다. 그리고 어떤 난세에도 전혀 튀어오를 것 같지 않은 평범한 소시민인 제이콥(로빈슨 윌리암스)은 그 신문을 부여잡으러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아마 아주 사소한 희망이라도 붙잡아보고 싶은 뜬금없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문제는 그런데 그 신문 쪼가리 하나가 더럽게도 잡히지가 않더라는 것이다. 아무리 쫓아가도 이리저리 도망치는데, 결국 시간은 통금시간(오후 8시)에 가까워지고, 그만 제한구역의 경계선까지 와버리는데, 신문이란 하나의 붕 뜬 희망에 팔려 거기까지 밀려와버린 제이콥은 그만 그것도 잊었는지, 독일군의 탐조등 아래 자신이 드러나질 때까지 정신이 없다. 결국, 이런 사소한 일로 제이콥은 게토 바깥에 위치한 독일 장교 초소까지 끌려가게 되고, 거기서 가볍다고 하기엔 좀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는, 게토 바깥에 위치한 장교 초소에서 장교의 장난스런 시간끌기로 인해 통금시간인 8시가 지났다는 사실인데, 통금시간이 지나 게토 안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못 돌아 갈 경우 사형을 당한다는 상황이다. 둘째는, 그럼에도 독일 장교와 독일군들은 아무 잘못 없는 제이콥에게 아무런 통행증도 없이 다시 게토 안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한 상황이다. 즉, 제이콥은 일종의 목숨을 건 게임에 말려들게 된 것이다. 왜냐면 게토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미 닫혔고, 그러하기에 들어가기 위해선 독일군 보초들과 탐조등을 피해야만이 무사히 자신의 집으로 귀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연유로 이제 제이콥은 위기의 상황에 봉착하게 되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위기엔 희망의 전조 또한 드리워지게 된다. 첫째는, 장교의 초소에서 그는 아주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전선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동안 아무런 소식조차 상상할 수 없던 절망에서 소련군이 자신의 게토 400km 근처에까지 와있다는 무언가 확실한 희망의 소식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희망의 전조로 그는 게토 안에 무사히 들어오는 과정에 포로수용소로 끌려 들어가다가 탈출해온 한 유대 소녀를 만나게 되는데, 어찌 보면 이는 자신에겐 커다란 부담이며 위험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는 아마 이는 앞에 첫 번째의 불확실한 희망보단 더욱 근거 있는 희망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껏 제이콥에겐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아내가 있었다고 하나 총살당하였기에 그는 누구도 의지하거나 바라볼 대상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한 이 소녀와의 만남으로 그는 이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살아남아야 하는 절실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사실 이럴 때 보면 인간은 참으로 人이 아니라 人間임을 알 수 있는 거 같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결과적으로 제이콥은 오랜 탈출기로 쌓은 소녀의 노하우에 힘입어 무사히 집으로 귀가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희망이란 근거 하에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희망이란 불안이나 절망 혹은 우울만큼 그 전염성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이건 되레, 엄청난 과장성을 띠고, 확대되어가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제이콥 혼자만의 희망이란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전염을 통해 확대되어져야 만이 희망의 온전한 힘이 발휘되어지고, 아울러 제이콥이란 한 개인에게도 그것이 해당되어지게 될 테니까... 물론 그러하기에 어쩌면, 희망이란 것은 거짓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 거짓이다! 그러나 거짓만으로 끝나는 것은 결코 희망이 아니다. 희망은 되레, 거짓에 관한 믿음이며 신념이다! 그러하기에 희망 안에선 거짓도 진실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오직 중요한 건 희망 그 자체이고 삶을 연장시키는 그 힘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제이콥은 어쩔 수 없이 모든 이들이 희망을 짊어지고서 거짓을 증거하는 예언자가 되어 버리게 된다. 당연히 그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다. 단지, 너무나 절망에 휩싸여 어떤 삶도 쉬 포기해 버리는 동료들을 보며, 어쩔 수 없이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희망에 대해 발설했을 뿐인 것을 희망이란 그 자체가 커지고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증거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사람들은 그런 막연한 희망이라도 무언가 잡혀지는 구체적인 근거들을 원하고 합리화시켜나가길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그러한 도구로 희망의 발설자인 제이콥은 너무나 적절하였다. 왜냐면 추상적 관념인 희망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고 잡혀지는 사람이니까. 일말의 책임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제이콥은 열심히 거짓말을 하게 된다. 소련군이 곧 진군해 들어올 것이라고. 그리고 곧 우리는 해방될 것이라고. 매일 밤 벌어졌던 자살행각은 이제 사라지고, 이제 유대인들은 사실 터무니없지만 엄청난 희망에 근거하여 무력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파워를 얻게 된다. 비밀 결사대가 조직이 되기까지 하고, 다들 포기했던 삶을 무언가 다른 방식으로 분주히 꾸려가기 시작한다. 물론 이런 희망이 거짓이며, 이런 분주함이 위험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 모두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마저 포기하기엔 그들의 삶의 기반은 너무나 빈약했고, 당연히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결국 모두는 희망을 선택했다. 그 대가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모두가 예감한 채. 그리고 역시 그 예감대로 아주 빨리 그 대가는 찾아왔다. 있지도 않은 라디오의 정체, 그동안 게토 안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제이콥의 거짓말에 관한 희망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제이콥에게 라디오가 있을 것이라 상상해 냈었다. 그리고 제이콥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굶주린 요구를 채워주기 위해 본인이 라디오를 가장해야만 했다. 이에 관한 독일군의 수사가 시작되었고, 제이콥은 독일군에게 순순히 잡혀 들어가게 된다. 모두의 엄청난 희망을 남겨두고서... 그리고 자신만을 의지하고 있는 한 소녀의 희망을 남겨두고서... 왜? 저항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그리고 왜 그토록 간단하게 잡혀 들어갈 수밖에 없던 것이었을까? 상황은 다시 맨 처음 상황과 비슷한 연장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제껏 신문이란 실상은 허공에 붕 뜬 언어들이 (언어는 언제나 사실이라는 통념이 있다) 가진 희망에 팔려 정신없이 쫓아가다 보니, 어느새 그는 다시금 독일군의 탐조등 아래 자신의 발가벗겨진 무력함이 폭로되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의 희망이 애초에 거짓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때가 온 것이다. 만일 그 희망이 진실이었다면? 그러나 영화는 애초에 모든 희망은 거짓이며, 그러하기에 한없이 무력한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희망이란 게 어이없고 간단한 것일까? 여기서 영화는 다시금 희망에 관한 커다란 반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무엇이냐면 희망 자체가 무력한 거짓이라도 희망에 관한 믿음과 신념은 진실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제이콥의 거짓말은 독일군에게 발각되었다. 그리고 모든 자신의 동포들 앞에서도 발각되었는지 모른다. 누구도 라디오를 본 적이 없으며, 동포들 앞에 끌려나온 제이콥은 거짓말쟁이라는 죄명으로 서있다. 분명, 모든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렇지만 제이콥은 끝까지 그 사실을 부인한다. 그리고 제이콥을 바라보던 유대인들의 얼굴도 역시 마찬가지다. 희망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삶의 출구도 없을지라도, 어떤 형태도 없는 막연한 희망이기에 무력하기 그지없을지라도, 희망은 언제까지나 존재해주어야만 하며, 희망 자체가 거짓일지라도, 그것만은 진실이어야만 한다. 그러하기에 제이콥은 자신의 거짓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처형을 당한다. 희망의 남겨진 조그만 몫을 모든 동포들에게 남긴 후,,, 이제 다시 무대는 맨 처음 상황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제이콥과 함께 제이콥의 희망은 죽었고, 그와 함께 라디오의 비밀도 사라졌으며, 이제 유대인들은 제한구역을 떠나 포로수용소로 모두가 끌려가는 마당이다. 물론, 제이콥은 이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라는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찌됐든 간에, 제이콥의 죽음과 함께 구체적인 희망의 근거는 사라지고,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막연한 희망에 관한 믿음만 남겨진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기적을 가져오는 것일까? 아니면, 희망과 믿음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오게 되는 필연을 우리는 희망과 믿음에 근거하여 기적이라 부르는 것일까?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 기차가 50km를 채 지나기도 전 약속했던 소련군이 도달하고, 영화는 제이콥의 희망이었던 소녀에게서 다시 제이콥의 희망을 그대로 전이시킴으로써 마치 제이콥의 죽음을 부활처럼 남기며, 막을 내린다. 즉, 제이콥의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이콥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로의 희망의 부활이며, 전이였음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그 긴 120분 동안 희망은 거짓일지라도 그 믿음은 진실이며 언제나 존재해야 만이 되는 것임을 제이콥의 거짓말을 통해, 그리고 마지막 소녀의 환상을 통해,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정말로 그 어떤 희망에 관한 가르침보다 근거 있고, 파워 있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의문을 던져보고 싶다. 마지막 희망의 결론이 어떤 기적과 소녀의 환상일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제이콥이 그리고 그 소녀 자체가 희망이었던 까닭은 아닐까? 영화 전반적으로 암시만 두었을 뿐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았기에 자세히 나타나진 않지만, 희망의 막연함을 구체화시키는 것이 바로 사람이고 우리 자신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누군가에 말대로 나는 지금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은근히 말해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이 희망 될 수 있었던 이유들은 구체적인 우리의 절망들이 그렇게 만든 것임을 한 번 생각해보고 싶다.

 

 

 만일, 세계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이 아니라 해방되어 축복받고 선택받은 유대인의 관점에서의 희망이라면, 이런 방식으로 희망이 말해 질 수 있었을까? 아마, 분명 다를 것이다. 어쩌면 상황에 따라 희망의 이런 거짓은 욕망으로 변모하여 가장 사람을 무섭게도 만들기 때문에... 즉, 이 모든 베이스에 허공에 붕 뜬 거짓만큼 절실한 우리의 절망이 숨겨져 있었음을 잠시 기억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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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rik SATIE:Gnossienne No.4
같이 듣고 싶은..^^

몽원 2015-01-13 18:36   좋아요 0 | URL
저도 가지고 있는 음원이기는 합니다.^^

[그장소] 2015-01-13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원님 글 덕에 오랫만에 에릭사티를 청해들었어요. 요즘은 유툽이 좋아서 찾아 걸지않아도 비교적 좋은 음질로 들을수있어서..좋긴 좋구나..( 이런 간사한..ㅎ) 했더랍니다.저.곡은 야곱의 사다리˝ 라는 영화때문에 알게되었어요.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죠..오래전에 본 기억이 나요.엔딩에 울리던 곡을 찾다.닿은 곡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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