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은 신의 부재 - 진정한 신앙에 대한 개인적 물음

 

 

  설마, SF 소설을 읽으면서 종교에 대한 내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재정리해 볼 시간을 가질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실상, 이 단편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목록 중에 거의 SF와 무관한 유일한 소설이라고 보아도 좋을 거 같다. , 제목부터 종교적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 정말 놀랐던 건, 종교적 냄새 차원을 떠나 진짜로 종교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끝까지 내 주관이 들어간 이야기이다. 한때 신학생이었지만 이제는 교회도 안 다니고, 신에 대해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 불가지론에 가까운, 거기에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종교 다원주의자이거나, 혹은 종교의 거대한 물음에 대한 담론을 다소 꺼리는 그러한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는 중요한 인물이 세 명 나온다. 한 명은 주인공은 닐 휘스크란 인물이고, 또 다른 인물은 그 반대 축에 속한 제니스란 인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소 중도적이거나 혹은 다소 평범하고 일반적인 입장의 이선이란 인물, 이 셋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이 소설은 천사 강림이라는 매우 신비적인 요소를 섞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사탄의 현시라든가, 지옥의 설정이 현실과 똑같다는 가정, 예를 들어 건물도 있고, 사람들도 평범하게 결혼하고 애 낳고 살고, 뭐 그런 가정, 그리고 천국으로 올라가는 영혼들에 대해 인간들이 볼 수 있다는 상황까지, 모두 다소간의 극단적인 신비한 설정들을 해놓았다. 그렇지만 읽다보면, 이 소설이 설정만 신비적일 뿐, 매우 현실적인 소설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러기위해선, 각 인물에 대해 조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일단, 주인공인 닐 휘스크는 다리에 선천적 기형을 가지고 태어났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이것을 신의 의지의 개입이라고 표현한다. 그것도 다소 징벌이거나 저주에 가까운. 하지만 주인공은 그러한 생각을 가져본 적도 별로 없고, 굳이 신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그냥 그것은 가지고 태어난 기형일 뿐 그것이 무슨 신과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천국? 이 글속에선 당연히 존재하고 있지만, 굳이 자신이 가고 싶다는 욕망을 별반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 사건을 통해 그는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천사강림이란 신비한 사건을 통해 그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된다. 하지만 왜? 천사강림이란 거룩하고 신비한 사건에서 아내가 죽는단 말인가? 이 글속에선 천사강림이 결코 거룩하고 아름답게만 그려져 있진 않다. 그것은 사실상 무척이나 잔혹한 사건이다. 천사라는 인간이 담을 수 없는 존재의 현시를 통해 누군가는 그 거룩한 빛에 눈이 멀게 되고, 누군가는 강림이 가져오는 강한 후폭풍에 차가 뒤집혀 죽고, 누군가는 깨어진 유리 파편에 맞아 죽게 된다. 그의 아내의 경우 마지막 케이스였다. 그런데 또 아이러니한 건 이 죽음들을 통해 그 누군가의 영혼들이 천국으로 가는지, 지옥으로 가는지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아내의 경우는 천국으로 갔다. 바로, 여기서 주인공의 딜레마가 생기게 된다. 그는 이제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천국을 가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없던 믿음이 어떻게 그냥 막 생겨날 수 있겠는가? 천사강림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나, 그 유족들 모임에 참여해 보아도, 그는 그 자신이 그들과 다른 대척점이 있다는 사실만 느낄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는 천국을 그리고 신을, 자신의 아내를 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할 뿐, 신 그 자체에 대해 혹은 천국에 대해 아무런 동경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가 가고 싶은 천국은 그저 자신의 아내 사라가 존재하는 천국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만약 사라가 지옥에 갔다면, 그는 아마도 서슴지 않고 지옥에 가기 위해 자살을 택했을 것이다. 이러던 차에 그는 자신이 속해 있던 그룹에 매우 유명한 설교자 제니스와 만나게 된다. 그녀 역시 태어날 때부터 주인공 닐 휘스크처럼 다리에 선천적 기형을 가지고 태어났다. 다만, 다소 달랐던 것은 그녀의 경우 부모님에 의해 선천적 기형을 축복과 긍지로 여기며 자라났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그녀는 그녀가 가진 결함에도 불구하고 늘 당당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녀 자신 또한 그러한 장애가 자신을 향한 신의 강한 메시지이며 축복이라 여겼기에, 설교자가 되어 수많은 동조자들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뜻밖에 사건이 벌어진다. 그녀 자신이 천사강림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때 없던 다리가 갑자기 생겨나게 된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상황에 이제까지 얻었던 확신이 다소 흔들린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신의 뜻을 알 수가 없는 까닭이다. 똑같이 천사강림을 경험했는데, 누군가는 유리 파편에 맞아 죽고, 누군가는 없던 다리가 생겨난다. 물론, 그냥 이것이 그녀에게 내린 축복이라고 단순히 그렇게 말하면 모두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까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본보기로써 존재했던 그녀 자신이, 더 이상 같은 입장이 아닌 상태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당신들도 어떤 시련을 극복하면 자신처럼 신이 축복을 줄 거라 어떻게 확신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솔직히 그 질문에 대해 자신이 천사강림 이후 다소간의 난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설교자의 불확실한 믿음을 누가 따라가겠는가? 주인공 닐은 분노한다. 제니스는 누가 보아도 믿을 수 없는 축복을 받았건만, 불평하고 있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대척점에 있는 두 인물과 다르게 이선이란 등장인물이 있다. 그의 경우 늘 천사강림을 통해 무언가 확실한 체험을 갖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에겐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에겐 무언가 특별한 소명이 있을 거라고, 늘 그렇게 믿고 살아왔지만, 어떤 눈에 보이는 징표도 없이, 아니 어떤 확실한 경험도 없이 어떻게 그가 그 소명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때문에 그는 평범한 삶을 택하게 된다. 도서관 사서가 되어 클레어란 여자와 결혼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는, 그런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는 늘 자신에게 나타날 운명의 징후를 대비해 줄곧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혹은 그냥 우연인지는 몰라도, 아주 멀리서지만 제니스에게 나타났던 천사강림의 여파로 생긴 지진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무언가 확실하지가 않았다. 1분간의 지축의 흔들림 속에 신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긴 했지만, 다른 경험자들과 달리 그에겐 어떤 축복도 저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소거법에 의해 천사강림 경험자들 속에서 불확실성을 느끼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뜻밖에 제니스란 이름을 그는 보게 된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세 사람이 엮어지는 지점을 이 소설에서는 성지순례라는 설정으로 풀고 있다. 그런데 이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성지순례와는 많이 다르다. 여기서의 성지순례는 순수하게 천사강림을 경험하기 위한 성지순례이다. 다시 말해서, 천사가 천국을 자주 오가는 장소가 성지이고, 그곳에 가서 무언가 확실한 징표를 얻기 위해 가는 순례가 성지순례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90%이상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나머지 10%는 기적적인 치유라는 체험의 가능성이긴 하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경우 어떻게 성지순례라는 결단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과정은 돌아 돌아갔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숱한 살인을 한 어떤 살인마가 사형 때 천국에 가는 일이 있었다. 그 사건을 통해 희생자 유족들은 분노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희대의 살인마가 분명 사형을 앞두고 엄청난 회개를 했을 거라는 가정을 했다. , 그 자신도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천국에 가서 사라를 만나게 될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거의 자살의 형태를 띤 성지순례이긴 하지만, 어차피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없는 그로선 해볼 수 있는 마지막 도박이었다. 반면에,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제니스는 자신에게 신이 내린 치유의 축복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어차피 더 이상 그녀 자신의 불확실성을 가지고 대중 앞에 설교자로 선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왜 신은 그녀에게 치유란 축복을 주어 그녀를 흔들리게 했단 말인가? 그녀로선 신의 뜻을 알 길이 도저히 없었다. 이에 그녀는 진정한 신의 뜻을 알기 위해 성지순례를 결심하게 된다. 마침 그녀와 함께 교류를 하던 이선도 적극 동참하여, 성지순례 장소로 둘은 함께한다. 그리고 우연히 주인공 닐과 조우하여, 같은 차를 타고, 천사강림의 순간을 동시에 맞이하게 된다. 각기 전혀 다른 형태로써. 우선, 제니스의 경우는 그 자리에서 천사의 찬란한 빛에 바로 눈이 멀게 된다. 그와 동시에 그 빛의 충만함으로 인해 더 이상 그 어떤 의심도 없는 황홀한 신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며, 축복이다. 다시 말해, 천국 그 자체이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 있던 주인공 닐은 역행 아닌 역행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또한 제니스와 같이 이루 말 할 수 없는 신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더 이상 사라가 필요치 않은 천국 그 자체의 황홀함을 맛본다. 그런데 그의 영혼은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택한 성지순례는 처음부터 자살의 의도성이 다분했던 까닭이다. 이선은 이 둘의 교차하는 운명을 목도하고, 그 자신의 소명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 둘에 대한 신의 선택이 너무나 극명했던 까닭이다. 제니스의 경우 천국 그 자체를 경험하게 되어, 더 이상 그 어떤 간증을 해도 의미가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천사강림을 목격하고 제니스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의 간증은 도저히 일반 사람들의 입장에선 이해 불가능한 영역이었던 선례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냥 행복하다고, 신의 사랑은 도저히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이렇게 막연하게 설명하는데, 어떻게 인간의 말과 경험으로 이해하겠는가? 다른 한편으로, 더한 경우인 주인공 닐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순간 똑같이 천국을 경험하면서, 신의 사랑을 느낀 그는 대체 왜 지옥으로 가야만 한단 말인가? 아무리 자살을 염두에 두고 간 성지순례가 할지라도, 똑같이 회개했는데 왜 희대의 살인마는 천국으로 가고, 그는 지옥으로 가게 된 것일까?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정의란 기준, 휴머니즘이란 기준에 입각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를 설파할 수 있는 사람은 목격자였던 이선밖에 없을 것이다. 끝으로, 이 소설은 지옥을 간 주인공을 통해 마지막으로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이제 주인공은 천국 그 자체를 경험한 사람이다. 더 이상 그의 아내와 함께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가 간 지옥은 신이 없다. 현실과 똑같이 건물들이 있고, 똑같이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지만, 영원히 그곳엔 신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알고 있다. 그가 영원한 신의 부재라는 그 절망 속에서도 영원히 신을 사랑할 것임을, 영원히 천국을 꿈꿀 것임을.

 

  이제 길게 늘어놓았던 이 소설에 대해 조금은 나름으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먼저, 제니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히, 중요한 부분인 마지막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대체 제니스가 느낀 신의 사랑이란 건 무엇이란 말인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신의 사랑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정말 이해하기 힘든 말이며,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조심스레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 까닭으로 고등학교 때 내 모든 삶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노래는 찬송가나 복음성가 아니면 듣지도 않았고, 겨우 고1 겨울방학 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주제에 매일 친구들한테 신의 사랑에 대해 늘어놓고, 전도하고, 그렇게 20명이 넘는 친구들을 교회에 데려오고, 결국 아무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 우리 집안에서 신학대를 가겠다고 가출까지 해서 승낙을 받아 나는 기어이 신학대를 갔다. 신에 대한 사랑 빼고는 다른 그 무엇도 보이지가 않았다. 도무지 가슴을 주체할 수 없고, 하루하루 행복해서, 주위 사람 모두가 나를 예수에 미친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는 왜 신학대에 가서 변하게 된 것일까? 지금 거의 무신론에 가까운 신념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 내 자신에게 그것보다 더 뜨거웠던 감정을 느껴본 적 있느냐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글쎄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그런 신을 포기하고 버렸느냐? 왜 심지어 신을 부정하느냐? 또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결국, 신학대를 가서 배운 너의 어설픈 지식들이 너를 병들게 하고, 너의 신앙을 앗아갔다고 누군가 나 대신 대답한다면, 나는 아마 그렇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성서를 분석하고 쪼개 읽기 시작하면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고, 거기에 신학과 철학을 배우면서 나도 모르게 시나브로 젖어들었으니까. 그 어떤 부인도 부정도 할 길이 없다. 다만 그럼에도 정리할 건 정리해보고 싶다. 아마도, 가장 처음으로 봉착한 문제는 진리냐 진실이냐는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제니스의 경험과 유사하다. 진리를 신봉하는 사람에게 진실의 잣대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 모든 의심은 시작된다. 그와 동시에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성서의 무오성이란 절대성에 대해 의구심 또한 수반된다. 왜냐하면 진실은 더 이상 신의 영역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엄격한 잣대인 까닭이다. 그런 이유로 처음부터 자기 자신의 검열을 시작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이제까지 자신에게 가장 잣대가 되었던 기준인 성서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왜 사복음서의 결들이 저마다 다른지, 왜 바울은 직접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도 않았는데 사도로써 불리는지, 하나하나 의구심이 든다. 그때 가장 내게 이해가 안 되었던 부분은 특히 사도 바울의 문제였다.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했던 제자들이 거의 순교를 하면서, 교회가 당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더 이상 살아 숨 쉬는 구원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다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로마라는 대제국이 가진 정신적 유산인 그리스 철학과의 피할 수 없는 논쟁이었다. 이때 바울이 등장했다. 예수쟁이들을 때려잡는데 선봉장이었던 그 자신이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빼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쓰레기일 뿐, 아무 가치도 없는 거라고, 설파하면서.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그 아무 것도 아닌 쓰레기에 불과한 그의 그리스 철학에 관한 지식들이 그 당시 로마인들과 싸우는 무기가 되었다. 사복음서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신약을 집필한 바울의 성서는 대충 봐도, 사복음서와 완전히 결이 다른 느낌을 파악할 수 있다. 논리적이고 치밀하게 그는 그리스도의 사상을 설법하고, 그 반대 이론에 대한 나름의 변증법을 펼친다. 신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바울이 그리스 철학이라는 맥락을 이용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도구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거의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그 모든 세상의 것들이 부차물이고, 쓰레기일 뿐이라는 사상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맥락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기 시작할 때, 굳건했던 신앙의 틈이 서서히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세상을 맥락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리고 그 맥락을 알았기에 바울이 사도로써 제 역할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성서 이외의 그 맥락들에 대해 어떻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여기서 누군가는 그럼 너도 바울처럼 그 맥락들을 수단으로써 잘 이용했으면 그만 아니냐 하고 되물을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랬다면 나는 분명 지금 목사를 하고 있거나, 아니더라도 최소한 교회는 다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 첫 시작이 진리인가, 진실인가의 문제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서 묻는 물음이다. 처음부터 진리의 입장에서 출발했다면, 아마 나는 그 선에서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의 기준에서 출발한 그 순간, 내겐 이미 진리가 가진 브레이크 기능은 어느 정도 상실해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 때문에 나는 성서도 진리가 아닌 맥락으로 읽기 시작했다. 어떤 부분이 신화화 되었는지, 그 신화화 과정을 통해 어떻게 성서란 큰 맥락에서 상징으로 읽히는지,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점점 진리와 멀어져갔다. 물론, 이 지점은 신학서적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나는 불트만의 성서의 비신화화 사상과 폴 틸리히의 성서에 관한 상징이론에 대해 일정부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거기에 그전까지 쓰레기라 치부했던 맥락들, 노자, 장자, 불교, 여타 다른 숱한 책들의 영향이 덧보태졌다. 그렇다면 이 상태에서 진리에 대해 남은 것은 무엇일까? 지금 생각해볼 때, 거의 없었다. 다만 진리가 주었던 엄청난 경험, 그 경험에 대한 추억의 실마리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방황하는 한 젊은이의 초상이 있었을 따름이다. 물론, 어떻게 거기까지 비약이 이를 수 있느냐 또 누군가 묻는다면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성서를 맥락으로 읽고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내게 있어서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이 세상과 별개로 떨어진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현실에 대한 혹은 각 개인의 지금 이 순간에 대한 구원으로 읽혔다. 그 여실한 예가, 그때까지 전혀 별개로 보던 지옥의 불과 성령의 불을 똑같은 불로 해석하면서, 왜 누군가는 같은 불에 지옥을 경험하고, 왜 또 누군가는 천국을 경험하는지 의구심을 품었고, 신의 그 진리에 대해 부인할 의지를 품게 되었다. 동시에,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포도나무 가지 비유에 대해서 조금은 역설적인 해석을 하게 되었다. 원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포도나무이고, 신자인 우리는 가지인데, 메마른 가지는 불살라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부분은 생명의 주체가 되는 포도나무 그 자체일 것이다. 아니면 메마른 가지가 불살라진다는 신앙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한 부분에 대해 초점을 맞출 것이다. 사실, 맥락상 그것이 옳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 아직도 부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상징으로 성서를 보는 순간 달라진다. 왜냐하면 상징은 기존의 의미를 새롭게 재해석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메마른 가지가 왜 불살라져야 하는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왜 불살라짐으로써 하나의 포도나무가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지 이유를 묻게 되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처럼, 하나의 메마른 가지가 잘려버린 그 이유로 십자가에서 하나의 거룩한 표징이 되어 마치 불살라진 것처럼, 나에게 잘린 가지는 역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에 대한 표징으로 읽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과한 자기 투영이거나 자기 투사를 시켰다. 내가 바로 그 잘린 가지라고. 물론, 이 맥락은 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혀 다른 의미로써, 잘린 가지 자체에 대한 애착을, 그렇게 잘려버릴 수밖에 없는 가지에 대한 연민을, 내 자신에게 투영시켰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린 가지로써 내 자신을 투영시킨 까닭으로, 나는 신앙을 부인하게 되었다. 물론, 신의 존재, 그런 거대 담론에 대해 완전히 포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무신론자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그러한 거대한 빛, 마주하면 그 나머지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어져버리는 그런 거대한 빛에 대해 나는 지금 부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내가 문학으로 돌아서고, 문학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런 거대한 빛보다 반딧불이 빛처럼 소소하고 마주할 수 있는 빛을 동경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탓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이 책을 통해 한 가지 내 스스로 반문을 하게 된 점은 있다. 왜 나는 이 글의 주인공처럼 끝까지 절망일지언정 신을 사랑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내 스스로 잘린 가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표징으로 해석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이라는 건 혹은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진정한 사랑이라는 건, 그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아무런 바람 없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서의 지옥의 불과 성령의 불을 똑같은 불로 해석했다면, 사실 지옥의 불이면 어떻고, 그것이 성령의 불이라면 또 어떻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다르게 역행한 어떤 존경했던 선배의 신앙 고백을 통해, 바울과 고백과 똑같은 신앙 고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그 모든 것은 쓰레기일 뿐이라는 고백을 통해, 그 절정인 상징인 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그 고백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낀 적이 있다. 나를 처음으로 시로써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준 선배였기에 충격이 더 했을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내 자신이 똑같이 선배와 그런 고백을 했었던 사람이기에 더 공포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이고,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사랑이란 걸 나는 알고 있던 이유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그것이 너무나 공포스럽다 말하고 있다. 심지어,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잔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신의 사랑은 그것이 어떤 신의 모습일지라도 나의 이런 공포심과 휴머니즘과는 별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런 진리일지라도 나는 그곳으로 결코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니, 그것이 정말 내 생에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가장 커다랗고 엄청난 기쁨과 행복이었을지라도, 그것이 내게 있어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다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이미 진실은 진리를 어느 순간 인간의 판단 영역에서 저 멀리 밀어내고, 인간의 진실이 지닌 얽히고설킨 실타래와 같은 모순으로 가득함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 모순이 인간 자체의 존재 기반이며 인간 자체를 대변하는 것으로 믿는 이상, 나는 모순 가득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에 얽매여 숨을 헐떡이면서 그렇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숨이 멈추길 기다리고 싶다. 어느 가을 밤 우연히 마주한 반딧불이 빛이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것처럼 그렇게, 내 눈 안에서 사라져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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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의 이해 - 오해의 이유를 찾아서

 

 

  어떤 글을 읽고 나서 내내 맺히는 경우가 있다. 그 글의 여운이나 강한 전율을 받을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더러는 무언가 다 게워내지 못한 찝찝함 같은 것을 느낀 경우에도 그렇다. 테드 창의 이해같은 경우가 그랬다. 어떤 의미인지, 무슨 이야기인지 대충 다 알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 맥락 하에서 토론도 해보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아직도 다 못한 이야기가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랬던 걸까? 먼저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테드 창의 이야기 전개 방식이 내게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테드 창의 소설은 SF이다. 그런데 동시에 SF가 아니다. 언어와 구성 소재는 모두 SF의 세계관을 차용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매우 철학적이고, 심지어 신학적이기까지 하다. 둘째는 테드 창의 이해속에 나온 미학과 윤리학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아마 이것은 소설 그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내 자신을 위한 정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내 아렸던 마지막 장면을 다시 재구성해봄으로써 무언가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해본다.

 

  소설의 초반부는 주인공의 치료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빙판 사이 얼음물에 빠져 거의 1시간 가까이 있으면서 주인공은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깨어나면 그것은 악몽이고, 병원 침상에 누워있고, 또 다시 얼음물 속에 잠긴 악몽을 꾸고, 다시 깨고. 그 과정 속에서 그는 그가 호르몬 K에 의해 손상된 뉴런이 복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시에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천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지점부터 발생하게 된다. 이 호르몬 K의 성공적 실험에 의해 피실험자들은 정부의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뇌의 손상이 심했던 사람일수록 뇌의 활용도의 수치는 올라갔다. 바로 주인공 그 자신의 경우처럼. 그러니 정부는 피실험자들을 이용하여 정부의 요원으로써 활용할 방안을 고심 중이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더 어떤 강제성을 띠게 된다. , 주인공은 이제 정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정부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천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손쉽게 그 모든 것을 예상하고 도망자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어차피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런 대의적인 정부의 문제들이 아니다. 그리고 자유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래서 그는 정부의 시선을 따돌린 채 주식 시장과 경매를 통해 소소한 벌이를 하면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물론, 그렇다고 정부가 포기할리는 결코 없다. 실제로 정부는 그를 유인하기 위해 그의 전 여자 친구를 범죄 방조죄로 체포했다. 하지만 그는 정부의 정보망에서 CIA 국장과 미국 상원의원의 스캔들 문제를 알아내 협박함으로써, 그의 전 여자 친구를 무죄 방면시켰다. 사실, 그에겐 그런 것들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천재가 되어버린 지금, 그에게 당면한 문제는 그가 가장 추구할 수 있는 천재다움, 다른 말로 표현해서 아름다움이다. 왜냐하면 자기 이외의 그 누구도 자신과 같은 경지에 이른 적도 없고, 이를 수도 없기에, 가장 자신다운 것, 그 때문에 오직 자신만이 추구할 수 있는 어떤 경지만이 그의 관심의 대상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책에선 게슈탈트라고 표현되어 있다. 부분으로써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의식의 흐름, 음표를 보고 음률과 가락을 떠올리고, 하나의 단어를 봄으로써 문장과 나아가 글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의식, 아마 자기완성의 극의를 저자는 이렇게 파악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글속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고, 뇌의 혁명적 변화를 통해 신체의 변화와 운동 과정을 이끌어내기까지 한다. 하지만 여기에 제동이 걸린다. 누군가 자신과 같은 존재가 있다. 그가 그에게 암시를 보낸다. 만나야 한다고.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의 친구가 아니다. 그의 적이다. 그것도 절대적인 적.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그 절대적인 적이 윤리학적 관점에서 전 인류를 구원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혼자서 미학을 추구하는 주인공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 책에선 보편 인류에서 벗어난 뛰어난 천재성, 그 자체가 바로 잠재적 위험으로 대두될 수 있다는 것을 주인공의 적은 가정하고 있다. 어차피 살아있는 한 두 인물의 조우는 필수불가결하다. 윤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주인공이 그의 재능을 썩히고 인류에 이바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윤리학적으로 보편을 추구하는 자에게 미학적 존재란 늘 걸림돌이 될 확률이 존재한다. 때문에 둘은 각자 익혀온 방식으로 서로 대화 후, 공존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번 씩 공격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안타까운 현상이 발생한다. 외부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주인공의 공격 패턴이란 독특하고 독창적이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윤리학이라는 보편적 관점을 기반에 둔 주인공의 적은 수용력이 폭넓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주인공은 그의 적이 걸어놓은 암시를 해독하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의 나락으로 향하는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적이 걸어놓은 암시는 이해이며, 주인공은 이해하고, 이해가 작용하는 수단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붕괴한다.

 

  사실, 처음 읽었을 때는 이 글이 왜 SF이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초반의 설정 빼고는 거의 철학적 내용에 가까웠고, 마지막 장면은 그 미학과 윤리학이라는 그 대척점을 표현해냈으니, 도저히 SF 소설로 읽히지 않았다. 물론, 설정에 관해 치열하게 파고들어서 허점을 찾아낸다면, 그런 게 SF라면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실제로 얼마 전 하반신 불구의 환자를 전기 치료를 통해 중추신경에 자극을 줌으로써, 보행기구에 의지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 더 이상 뉴런의 신경 중추돌기의 복구가 환상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 소설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가정, 뇌의 99%의 가까운 능력을 끌어내는 이야기는 별개이다. 그러나 이는 SF이니 얼마든지 너그럽게 가정으로 봐줄 수 있다고 내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여하튼 중요한 건, 그 소재가 어떻게 차용되었든, 이 소설은 과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학과 윤리학에 관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그것도 나름 잘 짜인 논리로 무장되어 있다. 미학이 가진 특징 중 하나인 창조성은 보편성과 대치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냐하면 보편은 모든 개성을 아울러 하나로 엮는 힘과 권력이지만, 창조는 그에 반하여 또 다른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개성인 까닭이다. , 한 마디로 이 글에서 말한 것처럼 전에 없던 게슈탈트이다. 그런데 반대로 윤리는 보편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왜 창조를 억누르는 힘과 권력이 되어야 하는지 이 글에 명약관화하게 보여주었다고 나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창조의 관점에서 언제까지 보편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상황을 보여주었다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세상과 소통하지 않은 채 창조 그 자체만을 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있다면, 그는 신일 것이다. , 미학을 추구하는 창조자는 필연적으로 보편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반대로 보편을 추구하는 입장에선 굳이 미학적 관점의 창조를 이해할 이유가 없다. 도리어 그것은 보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공산이 큰 까닭이다. 그러하기에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윤리를 추구하는 보편의 입장에선 늘 이해와 소통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다수의 개성을 하나로 엮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 순간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심지어 보편이 추구했던 이해와 소통마저 사라진 채, 하나의 권력만이, 오직 힘만이 남게 된다. 왜 늘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일까? 창조와 이해가 함께할 수 있는 자리는 없는 것일까? 오해할 수 있는 여지는 없는 것일까?

    

 

P.S 이십대 때 썼던 오해의 이유라는 자작시를 덧붙인다.

 

이해했다고 말했던 나의 모든 기억들을 부셔버린다

너를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차곡차곡 쌓여진 간격으로

마음껏 나래를 펴서 너를 자르고 붙이고 꿰매어 이제

너는 새롭게 태어난 의미들-너에게 결코 고백할 수 없어

오직 너는 나만의 부풀려진 모호한 꿈 덩어리처럼 내 것

영원히 살아서 지울 수 없는 어느 순간에 사라진 형이상학적

이미지, 아우라, 신비, 경이로운 상심

헝클어진 토사물처럼 난잡하여도 아름다웠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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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미러 - 욕망에 관한 오마주

 

 

  일단, 전체적으로 재밌게 보았다. 여기서 전체적이다 함은 내가 본 시즌4의 딱 세 편 ‘USS Callister', 'Hang the DJ', 'Black Museum'을 말하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재밌었던 편은 ‘Hang the DJ' 그리고 ‘Black Museum'에서 첫 번째 에피소드이다. 하지만 아는 지인의 추천작이 ‘USS Callister'이기에, 일단 이 작품 위주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사실, 첫 장면에서 나는 꽤 실망했다. 아예 대놓고 스타트랙오마주를 했는데, 느낌이 무슨 70년대 화면 같기도 하고, 대사와 상황은 어찌나 유치한지, 그래서 속으로 이런 걸 왜 추천했지?’ 하면서 봤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반전이 있는 영화였다. ‘스타트랙의 오마주는 게임 속 가상현실이었다. 그것도 주인공이 DNA 염색체 복사를 통해 Infinity(불멸과 무한)를 구축해놓은 가상현실! 그렇다면 이 얼마나 대단한 세상이란 말인가? 누군가가 무한의 공간 속에서 불멸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행복한 것 아닐까?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인공 혼자만을 위한 세계이다. 때문에 그 게임 속 캐릭터로 복제된 클론들은 그 상황이 끔찍하기만 하다. 일단, 크게 두드러지게 나오진 않지만, 클론들에게 생식기가 존재하지 않는 설정이 있다. , 성욕이 제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여기서 어떤 창조가 나오겠는가? 욕망이 없는데 어떤 즐거움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절대자인 주인공의 말에 거역이라도 할 의도라도 비추면, 괴물이 되어 우주의 어떤 황무지별에 버려지기까지 한다. 한 마디로, 영원한 절망만 존재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여기에 여주인공이 어느 날 나타나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던 클론들에게 독재자인 주인공으로부터의 탈출을 격려하고, 나아가 방향까지 제시해준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업데이트 패치 기간에 게임 내 웜홀이 발생하는데, 그 속으로 들어가면 불멸이었던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질 희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클론들은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이미 자신들의 모든 DNA 염색체를 보관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그들은 죽어도 언제든지 다시 복제되어 게임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여주인공은 자신의 치부인 지우지 못한 누드 사진들을 이용하여 현실의 자신을 통해 주인공 집에 몰래 들어가 클론들의 모든 DNA 염색체들을 훔치도록 한다. 그리고 게임 내에서 적당하게 시간을 끌어, 주인공을 따돌리고 웜홀 진입에 성공한다. 드디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는데... 아니, 이 게 웬 걸? 그들은 죽지 않고 되살아나, 게임 속 진짜 USS Callister가 된다. 게다가 생식기까지 복원된 진짜 존재가 되어, 진짜 Infinity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마지막 장면의 다소 많은 의아함은 있지만, 영화이기에 일단 쿨하게 넘기고, 그냥 느낀 바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보고서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장자의 이야기 중 하나였다. 어느 노부부 하인과 욕심 많은 주인의 이야기인데, 이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꿈속에선 노부부가 주인이 되고, 욕심 많은 주인은 노부부의 하인이 되었다. 그래서 노부부는 늘 꿈속을 생각하며 살아서 현실 속에서도 행복했고, 반대로 욕심 많은 주인은 늘 꿈속에 대한 공포로 불안에 떨며 살아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장자는 과연 누가 행복한 것인지 우리에게 되묻는다. 이십대 초반에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건 당연히 늘 꿈속이라면 현실도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다는 경구에 대한 일종의 떨림이었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지금 내 필명이 몽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내가 몰랐던 것이 하나 있었다. 왜 같은 꿈을 꾸었는데 같이 행복하지 않고, 한 사람은 불행했단 말인가? 물론, 이것은 장자가 가리키는 달의 손가락을 보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장자의 이야기 속에도 분명 힌트가 있기는 하다. ‘욕심 많은이라는 형용사가 아마 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단서라면 좋은 단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굳이, 프로이드나 융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의 꿈이 얼마나 개인적 욕망으로 가득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꿈은 다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희망에 관한 말이기도 하고, 진짜 현실이 아닌 꿈에 관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떤 꿈이라도 욕망과 떨어져 별개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이 때문에 아마 이 영화에서도 생식기에 관한 부분이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주인공의 극대화된 욕망에 관해선 별도로 차치하고, 클론인 존재들의 죽음에 대한 욕망을 생각해본다면 왜 이 영화에서 생식기가 중요한지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내 개인적으로는 죽음의 경험 이후 욕망을 다룬 ‘Black Museum'의 첫 번째 에피소드도 꽤나 흥미로웠다. 물론, 여기에 너무나도 과장된 고통이라는 설정이 들어가서, 많은 반론의 소지가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 또한 죽음에 대한 극대화된 욕망으로 해석한다면 이야기의 구색이 대충 맞추어지지 않을까? 또 그래야만 ‘USS Callister’의 클론들이 부활하는 다소 억지스러운 마지막 장면이 조금은 상쇄되리라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진짜 Infinity는 아무 욕망도 존재하지 않는 죽음 그자체이거나, 혹은 죽음에 대한 욕망의 다른 이름이라고 내 개인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영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어야 진짜 나름의 의미와 맥락 있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설프게 불멸의 희망이란 이름으로 Infinity를 해석하면서 마무리해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P.S

 

  세 작품 모두 무언가의 오마주이네요. 'Hang the DJ'도 다큐멘터리 영화가 실제 존재하고, 'Black Museum'도 실제로 존재하는 범죄 박물관이라고 하네요. 자세한 건 Wikipedia를 검색해보면 나올 겁니다. 하지만 아쉬운 건 읽어도 큰 연관성은 찾을 수 없다는 사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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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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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여인의 키스 거대한 어머니의 품에 관해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쯤 우연히 이 영화의 비디오 케이스를 본 기억이 난다. 무작정 집을 나와서 노가다 판을 전전하면서 하루하루를 살면서, 저녁이면 비디오방에서 에로 영화를 보곤 했었다. 그때 우연히 이 영화의 비디오 케이스도 봤던 걸로 기억한다. 아니면, 한참 영화광인 어떤 선배를 따라 영화를 볼 때, 본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어떤 여인이 거미줄 배경으로 가면을 쓴 채 있었던지, 정확한 그림이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무언가 조금 많이 야해 보였다. 그 때문인지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로 되어있어서, 내 기억 속에 거미 여인의 키스는 야한 영화? , 이런 식으로 이제까지 각인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심지어 얼마 전까지 이 영화가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는 것도 사실은 잘 몰랐다. 거기에 덧보태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라는 것조차도.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내 대학 때만해도 해외 문학이라는 게 접하는데 일정부분 한계가 있었다. 그저 유럽의 고전정도만 소개되었을 뿐, 전공자가 아닌 이상 제 3세계 문학은 거의 접할 수가 없었다. 가까운 일본조차 겨우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소개되어, 히트를 치기 시작했을 정도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래서 이번에 거미 여인의 키스를 읽으면서, 반드시 영화 또한 같이 보리라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결국 보지 못하고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다운을 받지 못한 건 아니다. 게을렀기 때문이 가장 큰 이유고, 또 다른 이유는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무언가 말하고 싶은 바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소설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서술방식이고, 두 번째는 내용의 구성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소설 내 동성애에 관한 9개의 긴 각주가 등장하고 있다. 첫 번째의 경우는 읽다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단 한 마디의 문학적 지문이나 해설도 없이,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영화 이야기를 해주는 서술방식을 취하다 보니, 매우 쉽게 읽히고, 문학적 서술방식이라기보다는 다소 연극적이고, 영화적 서술방식으로 느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내용의 구성방식 또한 첫 번째 서술방식에서 그 이유가 기인한다. 이 소설은 희곡처럼 총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거의 대부분이 6편의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각 이야기는 두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와 엇물려 나름의 복선과 상징의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표범 여인의 이야기의 경우는 거의 눈에 보일 정도로 주인공 몰리나의 현재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게릴라 청년의 관한 영화 이야기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발렌틴에 관한 이야기의 또 다른 변주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 마지막 기자와 여배우의 사랑 이야기는 몰리나와 발렌틴의 마지막 사랑에 관한 암시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끝으로, 이 소설 내 사용된 9개의 긴 각주에 대해선 다소 해석의 여지가 많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그저 동성애에 관한 객관적 각주를 통해 저자의 나름의 생각을 표명하고 싶었던 건 아닌지,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 소설을 읽고서 왜 내가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는지 말해보고 싶다. 읽자마자 처음으로 든 의문은 이 소설이 왜 표범 여인의 키스가 아니라 거미 여인의 키스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사실, 앞에서 이 소설에 등장한 영화 세 편 이야기를 했지만, 소설을 읽고 나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이야기는 첫 번째 영화였던 표범 여인의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이야기 자체도 서두에 등장하는데다 자극적이기까지 하여 기억에 꼭 박히기도 하였고, 너무 생생하게 이 글의 두 주인공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나머지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다소 중복이거나 쓸데없는 페이지 낭비라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지루한 감방 생활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생각도 했다. 더불어, 어찌됐든 점진적으로 발전되어가는 둘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영화 이야기가 크게 매개체가 된다는 점도 인지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마지막에 가서 생뚱맞게 거미 여인으로 몰리나가 상징이 되어버리는지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아예, 그럴 거면 처음부터 표범 여인이야기를 꺼내지를 말지, 거미 여인이란 말인가? 사실, 이 때문에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읽고서 바로 품평을 쓰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이 탓에 영화를 보면 혹 이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다. 그렇지만 여차저차 핑계로 내내 미뤘고, 그렇게 이 소설은 내 기억 속에서 별로 중요치 않게, 차츰차츰 잊혀졌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곳에서 이 소설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그것도 그동안 내게 다소간의 혐오대상으로 인식한 심리학책들을 읽으면서, 이 글의 거미 여인이 알게 모르게 어머니라는 여성성을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소간의 꿈을 해석하는 정형적 공식이 적용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내용을 떠올려보면 주인공 발렌틴에게 거세된 어머니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게 된다. 특히, 이 소설 내에서 이 부분에 대해 가장 도드라지게 나온 장면은 게릴라 영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속에서 상정된 부르주아 어머니와 발렌틴의 어머니는 일정부분 연장관계를 갖고 있다. 물론, 그 장면에서 발렌틴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어머니를 부정하려는 것처럼. 그러나 마지막쯤, 자신의 모든 존재를 몰리나에게 까발릴 때쯤, 발렌틴은 거세된 어머니 대신 자신의 옛 애인 마르타를 사랑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마르타는 한때 자신의 혁명동지였지만, 나중에 그 집단을 빠져나와 원래 그녀 자신이 속했던 부르주아 집단으로 되돌아갔던 사실을 시인한다. 그 때문에 그녀와 결국 결별하게 됐지만, 발렌틴 그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던 건 혁명동지로서의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위치, 다시 말해서 부르주아였던 어머니의 대리로써 사랑했을지도 모른다고 몰리나에게 토로하는 부분이 나온다. 결국, 이렇게 그는 어머니의 거세라는 애정의 결핍을 인정하게 되고, 마지막에 이르러선 몰리나를 통해 그 결핍을 충족하게 된다. 마치 거미 여인의 거미줄에 꼭꼭 옭아매져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벌레처럼,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젖무덤에 푹 빠져 영영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소설이 단순히 동성애 문제로 뜨거운 화제가 되고, 논란이 되는 건 조금 우스운 현상인 것 같다. 그건 아마 이 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한 다수가 논하거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사실, 이 소설의 이야기 중심은 순수한 사랑에 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혁명이 등장하고 있다. 물론, 반대급부인 혁명에 관해 이야기함에 있어선 다소 조심스러워 할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반대급부로 혁명에 초점을 맞춘 것은 이 소설의 배경이 혁명의 중심지인 남미라는 사실도 있겠지만, ‘혁명속에 거세된 애정에 관한 이야기를 아마 저자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애정을 통해 혁명의 시대를 살아간 남미의 젊은이들을 어루만져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도 느껴졌다. 왜냐하면 애정만이, 오직 순수한 애정만이, 어머니와도 같은 바다보다 넓은 애정만이, 지치고 쓰러진 그들을 품어주고 안아줄 수 있으리라 저자는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사랑이 너무나 잔혹할 만큼 거대하여 모든 혁명의 에너지마저 무기력하게 만들지라도, 그리고 성적 소수자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희생을 강요받는 어머니라는 대상을 상정하는 것일지라도, ‘혁명이란 거대한 조류 속에서 차마 불러보지 못한 어머니의 이름을 한 번은 불러보라고, 한 번쯤은 그 품을 기억해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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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여인 - 인터뷰 소설의 의의와 한계 ; 들뢰즈의 개념을 차용하여 해석하면서

 

 

  왼쪽 관자놀이 쪽이 지끈지끈거린다. 목구멍은 평소보다 약간 더 피운 담배 때문에 가래가 맺혀, 떠놓은 물을 자꾸 홀짝거리게 한다. , 사실 목구멍의 걸림은 내가 썩 그리 좋아하는 느낌은 아니지만, 관자놀이의 고통은 내게 있어선 특별히 살아있다는 자각을 일으키기에 그리 나쁜 기분만은 아니다. 오히려 무서운 건 의식하지 못하는 고통이고,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혀있는 온갖 망상들이라 나는 믿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들, 옳다 그르다란 관념들, 가족에 대한 환상들, 국가와 역사란 담론들 등등. 하지만 의식하고 있는 고통은 생생하다. 그리고 생생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다. , 자연스러움은 자유롭다는 말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물론, 마지막 이 논리들은 다소 불안정하다. 생생하다는 말이 자연스럽다에서 자유라는 개념으로 이전하기엔 불명확한 설명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혹은 너무 많은 설명들이 불필요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으로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생생하지 못한 것들, 무의식적인 공포들 혹은 그 무엇들은, 모두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이 그 무언가를 억압한다는 그 이유로. 이렇게 부자연스러움과 자유롭지 못함은 등가를 이룬다.

 

  시작부터 장광설을 늘어놓은 듯싶다. 그것도 어떤 문학적 뉘앙스나 분위기를 담아내기보다는 무언가 철학적인 사설들에 가까운 썰들을.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나는 골머리 아픈 들뢰즈의 글들을 한 뭉탱이 읽었다. 왜냐하면 이문열의 리투아니아 여인에 대한 품평을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주객이 전도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이 글을 이런 철학적 사유의 범주 아래 구분하여 평한다는 자체가 소설의 평과는 다른, 분명 이질적인 작업임에는 틀림없는 까닭일 게다. 그것도 거의 마지막 부분, 혜련과의 이별에서의 문화적 노마드라는 그 단 한 마디 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좀 오버기는 하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 달리 이 글을 이해할 길이 없어서, 조금 더 상세히 말하자면, 왜 굳이 이런 망작을 썼는지 이해할 방법이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이 글에 들뢰즈의 사상을 대입시킨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거의 마지막쯤 왔을 때 확연히 드러난 문화적 노마드란 어원 때문이었다. ‘문화적 노마드란 철학자인 질 들뢰즈와 정신분석자인 펠릭스 가타리가 공동작업을 한 책인 천 개의 고원에서 나온 말이다. 물론, 그 이전에 들뢰즈가 그의 대표저서 중 하나인 차이와 반복에서 노마드란 개념을 어느 정도 미리 잡아놓았다고 한다. 사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 두 책을 모두 다 제대로 읽지 못했다. ‘차이와 반복은 읽은 줄 알았는데, 자크 데리다의 다른 책과 혼동한 거 같고, ‘천 개의 고원은 예전에 불문 스터디를 할 때 어느 정도 읽기는 했는데, 중간에 모임 자체가 파토가 나면서, 자연스레 그 책 스터디도 중단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분명 천 개의 고원에서 나온 노마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 때문에 굳이 예전에 읽었던 질 들뢰즈의 논문들을 엮은 책들을 다시 들쳐보았다. , 그리고 그 결과는 아직도 이해불능이기는 하다. 그만큼 책들이 어렵고, 번역이 난삽하다. 아니, 체계 자체를 부정하면서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책의 개념이 담아낸 이야기가 줄곧 리투아니아 여인의 맥락과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에 줄기가 되는 인물은 딱 두 인물이다. 화자인 주인공과 혜련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중심추는 화자 자체보다 혜련 쪽에 더 가있다. 왜냐하면 화자는 혜련을 이해하기를 원하고, 그 이유로 끊임없이 대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거의 인터뷰와 가까운 형식으로, 혜련에게 화자는 끈질기게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혜련의 근원을 추적해간다. 인종적으로 외가인 리투아니아의 피와 친가인 한국의 피의 혼혈종이란 특수성과 더불어 환경적으로 미국이란 시민권을 가진 다국적 인간에 대한 어떤 동경과 의구심 혹은 호기심이 그 어떤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질문을 해도 그녀에게서는 그가 원한 답을 원할 수가 없다. 리투아니아의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대탈출을 시도한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 이야기에서도 그녀는 그녀 자신과 별 상관없다는 투이다. 아무리 화자가 민족적 정서를 얽어매려 해도 그녀 속에는 한때 그 모든 이민자들의 포용처였던 미국적 정서만 있을 뿐이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저 다민족적인 사회 속에서 누구나 가진 비극적 설화이거나 역사의 편린? 사실, 그의 할머니와 이모들의 이야기만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이산가족적 상봉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30년의 모진 세월을 돌아 돌아서 만난 모녀들의 불편한 이야기, 그 속엔 우리가 아는 그 어떤 짠함도 설움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온전히 미국적인 정서인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이혼 뒤 미국으로 돌아가 마치 미국인처럼 살 것처럼 결심하다가도, 주인공인 화자를 만나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불현듯 느끼고서는 다시 생기를 찾은 것처럼, 그녀는 늘 한국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늘 그녀에게 이질적인 생경함을 선물해준다. 그녀 자신이 먼저 그렇게 느끼기 앞서 타인들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다. 화자는 그것을 인종적 호기심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서구사회에 대한 열등의식으로 이해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히 그것이 아닌 하나의 민족주의라는 마술적 집단의식이 가진 배척정신으로 받아들인다. 그랬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이제 생뚱맞게 인도를 가로질러 세계 곳곳으로 유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정서가 그런 유랑자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화자에게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유랑자인 그녀가 추구하는 바가 각 세계의 민속음악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분절적이고, 또 동시에 서로가 서로와 맞닿아 있는 그런 바다와도 같은 세계, 굽이굽이 파도가 각자 다르게 치면서도 함께 존재하는 넓은 바다와도 같은, 우리의 작은 품으로 도저히 다 담을 수 없는 그런 세계로 그녀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화자는 그 세계와 그 정신에 대해 응원해준다. 그렇지만 글쎄, 그저 관망자일 뿐, 과연 그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을지, 화자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이다.

 

  이 글에서 또 다른 하나의 키워드는 가정과 페미니즘이다. 화자는 책 중반에 자신의 결혼생활과 혜련의 이혼 과정에 대해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역시 어떤 의미로 들뢰즈와 연관되어 있다. 들뢰즈는 프로이드가 만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부정하는 인물이다.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까닭으로 아버지와 원수라는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프로이드가 우리 인간 무의식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이끌어낸 중요한 이론이다. 인간은 자신을 지배하는 가부장인 아버지에 대한 배신을 늘 도모한다. 그 이유로 자신이 한 가정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가졌던 모든 것들에 대해 아들은 늘 적대시했던 만큼 동경해왔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가장 큰 재산은 어머니이다. 그 까닭으로 아들은 어머니의 다른 대리 표상으로 여자를 취한다. 이것이 인간의 기본 근저에 깔린 가정에 대한 욕구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인간의 욕망을 가정에 국한해서 설명하는 프로이드를 비판한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게 가정이란 소꿉놀이에 얽매여 있을 만큼 한정적이지 않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런데 프로이드는 인간의 욕망을 가정이란 울타리로 한정지음으로써 인간을 그 울타리 속에 억압해놓는다. 그 때문일까? 이 글의 화자 또한 가정은 이래야하지 않을까라는 자문을 늘 하고 있다. 어떤 동지와 함께 연극의 연장선처럼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은 이래야하고 부인은 이래야한다는 관념 하에 헤어 나올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은 반문한다. 너도 그 지긋지긋한 가정이란 울타리를 나에게 들이미느냐고? 나는 나 자체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없겠냐고? 그렇다면 그런 존재는 무엇이냐고 주인공은 묻는다. 이에 혜련이 보여준 답이 노마드이다.

 

  만약,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들, 가장 큰 욕구를 틀이나 체계와 같은 안정이라고 전제해보자. 아마, 가정도 이 틀과 체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이 최소한의 틀들이 다 무너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존속할 수 있을까? 물론, 들뢰즈가 이 모든 체계의 전복과 기본 안전망 구축에 대한 부정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 결코 한정적이지 않다는 측면에서 철학자로서 그는 한없이 욕망에 자유로운 인간의 기본적인 틀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 이유로 체계에 대한 집착이 아닌, 체계와 체계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렇게 수 천 개의 욕망이란 이름의 고원 사이를 자유롭게 다니며 존재하는 유목민의 정신을 그의 철학 세계에 도입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글속에서 화자는 이러한 들뢰즈의 유목민 정신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의 부인과의 결별은 일종의 페미니즘과의 반동이었다고 치자. 하지만 왜 거기서 한 번 더 깊이 들어가 혜련을 통해 들뢰즈의 노마디즘을 언급했음에도 혜련과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도 무슨 상간의 추억이니 하는 돼먹지 않은 소리나 하면서. 왜냐하면 애초에 그 자신이 바뀔 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까닭이다. 그 이유로 글속에서 혜련 또한 주인공이 바뀌지 않을 거라고, 여전히 자신과 함께 해도 또다시 가정이란 소꿉놀이를 원하게 될 거라고 언급하고 있다. , 이 글은 애초부터 자신이 잘 이해할 수 없는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에 대해 대화해보고자 한 시도인 것이다. 그 이유 때문이었을까? 이 글엔 그러한 시도로써의 의의와 가치는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첫째는, 정말 글 자체의 스토리가 빈약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소설이 관념적인 구도 하에 쓰였다고 하더라도, 소설은 이야기 자체에서 철학적 함의를 끌어내고, 그 함의를 변주하여 문학적 감수성으로 재창조해야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인터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물론, 애초에 내가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본 이유도 무시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문열의 화법에 너무 익숙해져 식상한 기분을 느끼기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스토리가 빈약해서는 소설적 의의를 찾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는, 애초에 형이상학적 견지 하에서 들뢰즈의 개념을 가져다 쓴 것이 다소 문제가 되었다고 본다. 들뢰즈 자체가 거의 모든 형이상학을 부정한다. 형이상학이 가져다 쓴 모든 권력적 용어들, 이데아, 우리말로 아주 변용해서 이상, 신이라는 관념, 국가, 가정 등등, 이 모든 체계들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어차피 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는 전제 하에 이런 개념을 혜련에게 반대급부로 주면서 병치시킨 건 무언가 아귀가 맞아보이질 않는다. 물론, 이런 설정 자체와 시도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그런 시도는 좋다고 본다. 하지만 시도라는 것은 변화의 가능성을 두고 하는 것이 시도이다. 변하지 않을 두 관념을 그저 보여주기 위해 병치시키는 건 누구도 시도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에 가서 들뢰즈 자신도 천 개의 고원에서 노마드의 개념에 대해 인터뷰할 때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쓰기 어려웠던 부분이 음악에 관련된 부분이라고 했는데, 그 부분을 그냥 거의 그대로 차용했을 뿐, 어떤 문학적 변주의 시도 자체도 하지 않고 있다. 거기다 내 입장에서 또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들뢰즈가 가장 거부했던 민족주의적 특성으로 혜련을 거의 소설 초반부터 특정 지으면서 노마드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귀결시키는 점이다. 물론, 작가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혜련의 입을 통해 그 부분을 지적을 하고는 있지만, 애초부터 귀결이 너무 작위적으로 확정되어 있음엔 다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이야기를 대충 정리해봐야겠다. 이 글을 앞에서 나는 감히 망작이라고 표현했다. 아마 거의 순수하게 내 입장에서였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내 아쉬운 건 이문열이란 우리 문단의 거장이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주저하는 건 아닌가하는 내 의구심 때문이다. 물론,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사상과 뿌리를 완전히 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글이라는 범주는, 아니 조금 좁게 소설이라는 장르는 끊임없이 자신의 사상과 뿌리를 잘라내 왔기에 존속해왔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변해도 되지 않을까? 아무리 이 시대의 거장일지라도. 조금 더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주를 시도해 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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