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23

 

  “저 요즘 바빠요.”라는 핑계는 아마도 자만에서 나오는 넋두리일 것이다. 그 핑계를 명함처럼 내밀며, 이러저러한 연유로 근래 들어 책 읽을 시간도 없었다는 것은, 더군다나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사람을 그릇에 비유한 고사(古事)가 매우 적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뭘 담든 제 무게보다 많이 나가서 흡사 ‘고봉’이 얹힌 밥그릇이 되어도 중량의 고통을 견디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나처럼 제 몸 안의 물이 조금만 찰랑거려도 “넘치겠다!”며 투덜대는 소인도 있다. 제련의 과정이라 생각하며 매일을 되도록 버텨가고 있지만 어떤 때에는 나의 역량이 한참 부족함을 깊게 채근한다. 틀리지 않는 직감이다.


  학기 중이다보니, 글은 많이 읽는다. 다독(多讀)인의 독서량에 버금가기야 하겠냐마는 적어도 쉬운 글은 안 읽으니, 이따금 독서를 통해 통증도 경험한다. 심오한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공을 초월하는 느낌도 든다. 이윽고 허무감이 찾아오고, 그것을 조원들과 토론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연이어 문을 두드린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던데, 학자들도 혀를 내두르는 종교와 철학적 문제들을 앞에 두고 있으면 용어들이 벌써 나에게 “굴종하라.”고 소리치는 듯하다. 조금 과한 표현이었지만 나의 것이 아닌 한 전공자의 넋두리를 옮긴 것이다. 비전공자인 나와 조원들은 근래 들어 부쩍 집중력이 떨어졌다.


  속으로 자주 생각한다. 이런 집중의 시간을 내가 좋아하는 미술사와 미학에게 투자한다면 나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논문을 섭렵했을 것이고, 벌써 큰 틀을 잡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오만이다. 좋아하는 것에는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라는 소인배의 생각이기도 하다. 상황이 사람을 이렇게도 비굴하게 만든다. 그런 까닭에, 예전에도 한 말이지만, 내가 존경하는 이가 최근 들어 바뀌었다. 아니, ‘이들’이라 해야 옳겠다.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데, 별 투정 없이 꿋꿋하게 해나가는 사람들. 이전까지의 나는 일상을 비범하게 보내고, 틀을 깨며,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인이라 여겨 거의 숭배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전자의 사람들이라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후자에게는 특별한 기회와 운도 따르고, 일반적으로 그럴 여건이 충분히 주어지기도 한다. 아니면 정말 뛰어난 인물인 경우일 것이다. 그들만 바라보던 시각이 나의 주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면, 어른들이 말하는 ‘어른’이 되어간다는 뜻이리라. 어른이라 불려도 무관한 나이인데도 여전히 들어야 할 철은 많고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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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오랜 만의 일탈이다. 해야 할 일들을 잠시 접어두고, 나름의 사치를 누리고 있다. 일상이 추슬러지는 기분이다. 환기도 시킬 겸, 잠시 임영방氏의 <중세미술과 도상>의 앞부분을 가볍게 읽어봤다. 호주 시드니에서 잠시 어학연수를 했던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주중에는 아침마다 breakfast를 먹었다. 빵과 잼, 그리고 우유나 커피.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먹긴 하나보다 생각했다. 시내에 나가 차이나타운을 지날라치면 그 매콤하고도 느끼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기도 했으니. 그러다 주말이 되면 김치와 김밥을 먹었다. 나에게 근래 들어 미술책은 ‘김치와 김밥’인 셈이 되었다. 읽어본 책들의 커버를 스윽 훑어보거나 괜히 손으로 만져보면 “많이 배우고 있어도 허한 머리”에 양분이 가득 차는 기분이다. 무슨 말인지, 이 글을 읽는 몇 안 되는 이들은 분명 그 기분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그런 책들, 곁에 몇 권씩 끼고 있을 테니까.

 

 

 

 

 

 

 

 

 

 

 

 

 

 

 

 

 


  간만에 이곳의 장바구니를 들여다봤다. 5권이 있기에, “예전에 무슨 책을 리스트에 올려놨었지?”, 궁금하여 마치 오래된 일기를 펼쳐보듯 봤는데, 아, 내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파농의 책이 두 권 있었다. 인종주의와 관련된 한 책을 읽고, 리뷰를 쓴 적이 있었다. 인문학 서적들이 대개 그렇듯 읽고 나도 명확하게 잡히는 바가 없는 상태로 써내려간 리뷰라 지금 읽으면 뭔 말인지 모르는 그런 글인데, 여하튼 그 책이 나름의 경각심을 줬고, 그간 벼르고 있던 파농 읽기에 도전하겠다는 요량으로 장바구니에 넣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름방학이면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미간을 찌푸리며, 한 장 한 장으로부터 분명 무거운 고통을 느끼겠지만 인문학의 기본정신에서 위배되는 회피는 하지 않으리라, 또한 여겨보며.

 

 

 

 

 


 

 

 

 

 

 

 

 

 

 

 

 

 

  종교 관련 강의를 두 개나 듣고 있는지라, 위의 두 책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 투쟁>과 <진화의 종말>도 아마 학기 초에 읽어보겠다고 장바구니에 넣어놨던 모양이다. 칼 세이건과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작년 말에 한 권씩 접해보고, 믿음과 관련된 두 권의 서적을 탐독한터라, ‘진화의 종말’이라는 제목은 특히 매력적이게 느껴진다. <잘 표현된 불행>은 한 유명 서평가의 인터넷 공간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의 독서수준이 워낙 높아 내가 추려낼 수 있는 책들의 수가 적은 것이 사실이나, 매번 귀감이 된다. 사실 ‘생각하는 삶’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음은 그렇지 않은 삶 속에서 항상 반성만 하는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을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투정도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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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5-24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어학연수를 갔어요? 탕기님을 얼른 루브르로 보내야 하는데.. 르네상스 화가들 얘기 예전에 제가 참 좋아했잖아요. 기억나요? 그걸로 우리 처음 만나게 됐었는데^^

잘 지내네요, 여전히 열심히 어려운 책 읽으려고 하고.. 봄학기 끝나가는데 그럼 좀 한가해지나요? 프란츠 파농 저거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탕기님 리뷰읽고 보고나서 나도 사려고 찜해뒀어요. 책이 다 옛날 거라서 낡아서 좀 그런 것 빼고.. 저한테도 탕기님이 귀감이 돼요!!!

학교생활 잘하고 학점도 잘 받고 얼른 서평도 내놔요^^

탕기 2012-05-26 20:20   좋아요 0 | URL
저도 르네상스 화가 이야기 블로그에 올릴 때가 가장 '신명'났었어요. 그럼요. 다 기억하죠.^^ 봄학기 끝나면 영어/미술/운동에만 올인할 생각이에요. 여름(계절)학기는 들을 과목이 없어서 패스했거든요. 아마 많은 미술책, 또 제가 읽고픈 파농, 인문학책도 꼼꼼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얼른 서평 내놓을 수 있도록(?) 열심히 책 읽어야겠네요.ㅎㅎ 잘 지내세요.^^
 

2012.03.19

 

  아침기온이 영하이다. 단단히 동여매고 기세 좋게 나섰으나, 9시에 예약된 치과치료가 나의 넋을 뺀다. 치과에 가면 뭔가에 잡아먹히는 기분이 든다. 기세고 뭐고, 다시 피곤해진다. 광화문행 버스 안에서 나는 등받이 위를 굴러다닌다. 주말 내내 나의 머리를 괴롭혔던 아감벤의 '게니우스'를 좀 더 독파해보겠노라 벼르고 가방에 넣어온 <세속화 예찬>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다행이도 옆 좌석에 앉은 한 여성분의 머리도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타인의 피곤을 목격하는 것이 적잖은 위로가 되는, 씁쓸한 미소의 아침이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보도로 내려간다. 아직은 춥다. 스마트폰 액정에는 분명 10시 15분이라 적혀 있는데도. 그대로 나는 K문고에 들어갔다. 한산하다. 네 권의 책을, 마치 장보러 마트에 간 사람처럼 들고 다니면서 여유를 맛본다. 이대로 있다간 수업 들어가기 싫어질 것 같아 부랴부랴 전철을 타고 신촌까지 간다. 그제야 따뜻해진다. 한 손 두둑하게 도서관으로 들어간다. 초등학생인 양 노트에 낙서해가며 강의 정리를 한 뒤, 아감벤을 편다. "게니우스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빈곤함을 질책하기 전, 오늘 구입한 책들은 집에 가서 꺼내보리라 가방에 종이봉투 채 곱게 넣는다. 이 책들이다.

 

 

 

 

 

 

 

 

 

 

 

 

 

 

 

 

  입대 전, 2월이었다. 창문에 내린 서리를 보고 쓴 시가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나도록 한 행도 쓴 적이 없다. 사춘기를 나름 '시의 노예'로 지냈었다. 배설하듯 그것을 써본 때가 있었기에 시는 각별하다. 한 손에 잡힐 정도로 아담한 시집 한 권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주변으로 빛이 영롱한 파장을 일으키며 퍼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올 봄 꽃 피는 날에는 애써 눌러왔던 시작(詩作)의 감성을 되찾아보리라 벼르는 중, 한 신문에 소개된 김선우氏의 시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를 읽었다. "뜨거운 심장을 구근으로 묻은 철골 크레인 / 세상 모든 종교의 구도행은 아마도 / 맨 끝 회랑에 이르러 우리가 서로의 신이 되는 길" 나는 바로 마음이 꽂혔다.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를 읽은 후로부터 정말 오랜 만에 느낀, 울컥 하는 감정이었다.

  오늘 아침 K문고로 '등교'한 까닭은 순전히 이 시집을 손에 잡아보기 위함이었다. 택배로 받는 것은 '물건'이라는 느낌이 강하니까. 진열된 것과 택배로 받는 것이 달라봤자 실제 얼마나 다르겠냐마는, 그래도 어느 것은 숨 쉬는 생명 같이 고이 모시고 싶어 하는 것이 독자의 생리가 아닌가 싶으니. 더 각별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첫 장의 첫 시의 첫 구절에서 나는 주저앉을 뻔 했다.

  "백수인 걸 부끄러워한 적 없어요."

  <바다풀 시집>이라는 시의 제 1행이다. 광화문에서 도서관까지, 마주 오는 사람을 보기 위해 잠시 고개를 든 것 빼곤 온통 정신이 이 시를 읽고 또 읽는데 빼앗겨 있었다. 시인이 되겠다며 컨베이어벨트처럼 시를 찍어내고, 하루에 몇 편이고 쓰면서도 마음공부는 게을리 했던 그 때가 떠올랐다. 나도 바다풀 공장이 있으면 취직하고 싶더라. "그만 손 씻을래."라며 펜을 툭 떨어뜨리는 저 시인의 마음이, 처음에는 아주 조금, 그 다음에는 조금씩 더 이해되면서, 아, 빠져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J코너의 '한국시' 진열대 사이에서 이 책 저 책 기웃기웃하시던, 연세 지긋한 한 할아버지의 빵모자가, 막 신촌 언덕을 넘어가는 중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올해는 정말 시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시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 읽는 사람으로. 시는 나를 갱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3년 전, 미학을 공부했던 무렵을 떠올리며, 나는 허버트 리드의 <예술의 의미>, 최근에 나온 오타베 다네히사의 <예술의 역설>, 그리고 미학도들의 교과서와 다름없다는 박이문氏의 <예술철학>을 김선우氏의 시집과 더불어 한 손 가득 들었다.

  내게 미술 공부의 척추는 미학이었다. 미술사 공부를 게을리 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미학의 주변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덕분에 좋아하는 화가(카라바조)가 생기긴 했어도 나는 미술을 둘러싼 예술의 시대별 미학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공부하며 인간 정신의 역사를 추적해보고 싶었다. 각종 근대미학이 현대미학의 파격으로부터 위기를 맞이하고, "말도 안 되는" 이론들이 신진 학문의 도움을 받았던, 모더니즘이 그리하여 내가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진 대목이기도 했다.

  학기 중에 이 책들을 다 읽는다는 것은 나의 지적 '게으름'을 고려해본다면 어려운 일이지만 미술 서적만큼은 곁에 두면 든든한 것이 언제라도 열어보고 마음 내키면 몇 장(章)이든 빠르게 읽을 수 있으니 좋다. 올해 여름 방학 중에는 마가레테 브룬스의 책 두 권(<눈의 지혜>와 <색의 수수께끼>), 래리 쉬너의 책 한 권(<예술의 탄생>), 허버트 리드의 것 한 권(<도상과 사상>)도 각각 재독한 뒤, 저 책들과 같이 긴 리뷰를 써볼 계획도 미리 짜본다.

 

 

 

 

 

 

 

 

 

 

 

 

 

 

 

 

 

 

  최근 <변강쇠가>의 발표 준비 때문에 도서관에서 대출 받은 책 두 권이 있다. 두 책 모두 '그로테스크'를 주제로 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를 읽을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것이라, 훗날 서점 마일리지가 두둑이 쌓이면 구입해 내 서재에 꽂아둘 생각이다. 발표 탓에 어쩔 수 없이 발췌독만 하고, 곧 반납해야 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이다. 혹 그로테스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읽을 만한 책이라는 생각에 이곳에 두 권을 소개해둔다.

  국내에 '그로테스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이론의 학자는 아무래도 바흐친이다. 하지만 볼프강 카이저도 못지않다. (필립 톰슨의 책도 있는데, 마땅한 번역본은 없는 듯하다.) 그의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는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를 꼼꼼하게 공부해본 이라면 분명 좋아할 만한 책이다. 그로테스크의 어원을 쫓는 것은 동류의 책들과 같아 비근한 작업이라 하겠으나, 이후 낭만주의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로테스크의 사례를 다루는 그의 솜씨가 대단하다.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미술사 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명한 그로테스크의 예를 설명하는 장들도 제각기 명료하며, 더불어 재미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미술과 연관된 부분만을 골라 읽었지만 연극과 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예들, 가령 카프카와 토마스 만, 앨런 포 등 대표 작가들의 설명도 많다.

  다른 하나는 몸문화연구소가 편찬한 <그로테스크의 몸>이라는 책이다.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는 책이라 전문적인 분위기는 있으나, 막상 관심을 갖고 읽어보면 그리 어려운 주제들은 아니다. 어렵다기보다는 '그로테스크'라는 특정 영역을 연구한 수많은 시도들이 반갑고, 때문에 호기심을 더욱 자아낸다고 해야 옳겠다. 개인적으로는 "판소리의 기괴 혹은 그로테스크(서유석氏)"를 발표 준비 상 정독했는데, 그 외에도 현대미술과 관련된 "여성적 숭고와 아브젝시옹(김주현氏)", 루저와 '재현된 몸'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몸인가, 그로테스크한 세계인가(최은주氏)"도 흥미롭게 읽었다. 단, 각주가 튼실하지 않은 것이 흠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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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7

 

  군생활 중에 나는 두 개의 문학상을  받았다. 규모는 그럴 싸 하나, ‘사회’에서 하던 것들과는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라 어디 내세울 건 못 되지만. 새로 온 대대장이 내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하루는 집무실로 나를 불러 자신의 아들도 막 입대했다며 20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해줬다. 요컨대 남은 군복무기간 동안 호연지기의 정신을 기르고 가라는 것이었다. 부대에서 동쪽을 보면 속초의 바다가 보이고, 반대편에는 외(外)설악의 장벽이 기암괴석을 자랑했다. 폐쇄적인 군생활이 익숙해져야 그런 것들이 보이기 마련이나, 나는 적절한 시기에 조언을 들은 경우였다. 그 무렵부터 연등(소등시간인 22시 이후부터 두 시간동안 제한된 인원에게 공부할 공간을 제공하는 것. 제대가 임박한 병사들에게 주로 주어지나, 보통 군·사단별로 자체적인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을 하게 된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거의 매달 책 소포를 받곤 했던 나는, 예컨대 <로스트 랭귀지>, <총, 균, 쇠>, 혹은 <세계문학의 천재들>과 같은 어려운 책은 거의 읽지 못했다. 마음을 다듬을 수 있는 책이 자연스럽게 손에 잡혔다. 장석주氏의 <느림과 비움>, 임현담氏의 <히말라야 있거나 혹은 없거나>는 마음을 배부르게 해준 고마운 책이었다. 치열한 지적논쟁의 기회는 대학공부 중에 얼마든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대학이, 연장자가, 혹은 사회가 나에게 제공할 수 없는 개인적인 사색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군대에서의 사색이라. 어불성설 같지만 해본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안다. 이런 독서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대대장의 ‘호연지기’처럼 담대해지는, 이런 책은 어떤 ‘정신적 약물’ 같은 것도 아니다. 그저 담백하게 “위로하는 책”이다. 고음을 내지르는 가수들의 노래가 아닌, 읊조림이다. 강한 타격이 아닌, “엄마 손은 약손”이다. 혹은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나를 위로하는 글들은 오히려 나를 가슴 아프게 한다. 내성이 생기면, 그 땐 견디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강해지진 않는다. 단지 촉촉한 눈시울을 만들어준다.
  “울 준비가 된 사람이 울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그래서 미술을 공부하려고 덤벼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임스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에서처럼 복합적으로 분석하진 않겠지만, 그래, 나도 도판연구를 한답시고 음악을 들으면서 꽤 많이 울었다.


  지금 읽는 책들에게 도타운 정을 주지 못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근래 읽은 <위도 10도>나, 지금 읽고 있는 <인종주의는 본성인가>, <핀치의 부리>,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 리뷰를 쓰기 위해 복기 중인 <눈의 지혜>, <의무론>, <아인슈타인과 피카소> 등은 지식의 나열과 결론도출, 논점제시의 패턴을 가지고 있다. 학문적 논픽션이다. 많이 알수록 감상에 도움이 된다는 (역으로 감상이 조장되기도 하나, 복잡한 문제이니 여기서 괜스레 얕게 거론해볼 문제는 아니다.) 것을 미술공부를 통해 알았기 때문일까. 때론 지적 권위에 기대거나, 추천에 속아 넘어가기도 하면서 여러 지식을 동냥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기에 책 읽는 내내 힘겹게 고민하는 모습을 잠시 떨어져 바라볼라치면 스스로가 애처롭기도 하다.


  콜드플레이, 라디오헤드, 후바스탱크, 더 프레이, 오아시스 등을 좋아하는 내게 친구 한 명이 해준 말이다. “록만 듣고 있으면 마음이 푸석푸석해지는 것 같아. 나는 발라드도 가끔씩 들어주는 것이 좋더라.” 음악‘잡식종’인 나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됐다. 굳이 비유하자면 책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한 저명한 독서가처럼 “소설은 읽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진 않으나, “이왕 읽으려면 오랜 시간 공들여 논쟁적 지식을 탐닉하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까닭에 픽션과 에세이에 눈길을 주는 때가 점점 줄어드는 듯하다. 독서편력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지만 편식이 몸에 좋지 않은 것과 꼭 닮은 이치이리라.


  논쟁적 지식과 그를 다룬 책은 자극적일 수밖에 없다. 지적 공부는 그런 자극에 연이어 노출되는 것이고. 역사와 시대를 이해하려는 자기와의 공정한 투쟁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두고자 야망을 가진, 소위 ‘지식인’들에게는 이런 말이 때때로 실없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따금 자극에서 벗어나는 것이 현명할 때가 있다. 좋은 자극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자기계발서나 멘토링북을 찾진 않는다. 상품용으로 인생과 지혜를 정리해놓은 책에는 도통 마음을 열기 싫다. 소소한 주제들로 엮인 에세이가 나에겐 제격이다.


  겉멋만 들어 빈 수레처럼 덜커덩 요란한 에세이가 아닌, 삶을 음미할 수 있는 책. 사유의 빈 공간이 허용되는 책. 내가 살지 않은, 살지 못할, 혹은 살 수 없는 삶들에 잠시 몸을 담가보고, 되도록 가장 낮은 자세로 겸손해질 수 있는 책. 자주 알라딘을 산책하지만 그런 책을 신간으로 만나보긴 힘든 듯하다. 저기 큰 서점들의 구석진 코너에 있는, 허름한 외장 탓에 견문의 망에도 걸려보지 못한 조그마한 어떤 책이 내가 찾는 그런 책일 수도 있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너도나도 읽는 인기만점의 책이 아니라, 운명이라 여길 만큼 우연히 발견한 어떤 작은 책 말이다.


  아, 나는 자유사상가이다. 우연이든, 운명이든 믿지 않는다. 수학적 확률이야말로 교교한 인망(人望)을 떠받치는 실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런 인연은 정말 교교하다. 책상 앞에 앉아 눈 돌리면 가장 먼저 보이는 (혹은 보는) 구석에 그런 책들이 몇 권 꽂혀 있다. 그들을 보면 나는 우연과 운명에 관한 어떤 ‘신학적 순리’의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책과 나의 관계를 수학이 아닌 종교적 조화로 생각해보는 일에 있어 나는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자력(磁力)이 너무 강해 도무지 떼어낼 수 없는.


  올해 두 번째로 묶어 사는 책들도 실은 ‘촉촉한 책’이 아니다. 내 안에 있을지 모르는 잠재적인 지성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 미학, 철학, 종교, 과학 등을 주로 접하며 나름의 계획을 실행 중에 있는데, 2012년의 계획을 위한 여덟 권의 책들을 사봤다.

 

 

 

 

 

 

 

 

 

 

 

 

 

 

 

 

 

 

 

 

 

 

 

 

 

 

 

 

 

 

 

#1. <미학 산책>은 제목 그대로 ‘산책’을 하고자 샀다. 어려운 논문들보다는 쉬울 것이고, 저자가 공들여 여러 시대의 미학을 간추려 놓았으니, 그동안 소홀했던 미학공부를 상기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꽤 근래의 일인데, 언젠가 미술블로그에서 잠시나마 현대미학을 다뤘을 때, 나는 “미학은 미술을 보는 눈이다. 미술사와는 다르다.”라는 새삼스러운 소개를 쓴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미술사와 ‘미술지식(말 그대로 미술과 관련된 잡다한 지식들이다. 연계되기 힘든 지식의 조각들이, 즉 각주 정도로 실릴 정도의 내용들이 이 시대에는 교양인의 필수조건처럼 회자된다. 나는 <지식의 미술관>의 리뷰에서 그 문제를 언급한 적이 있다.)’을 쉽게 얻을 수 있지만 미학의 문을 두드리기 힘든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전히 어렵다. 조금이나마 미학을 경험해본 입장에서는, 관심이 있다면 “맨 땅에 헤딩”해보기를 권하나, 미학의 지혜를 삶의 영역으로 끌어오기 힘든 사람들에게는 이런 교양서가 안성맞춤일 것이다. 재밌게 읽고, 다른 미학서들과 비교해 언젠가 리뷰로 꼭 다뤄보고 싶다.


#2. <다윈 지능>은 <핀치의 부리>를 읽고 있는 지금 그와 관련된 흥미로운 신간이라 골라봤다. 최재천氏의 책이라 더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리뷰나 추천글, 100자 평 등을 하나도 읽지 않았기에 “다윈을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시대적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를 지금 이 순간에도 심하게 궁금해 하는 중이다.


#3. <종교의 바깥에서 의미를 찾다>는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를 사놓은 이때에 “둘을 붙여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들어 구매한 책이다. 여덟 권 중 가장 마지막에 선택한 책이기도 하다. 몇 번 밝혔지만 나는 자유사상가이므로 신의 현존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처럼 신이 없음을 확고하게 주장할 정도는 아니다. 차라리 칼 세이건의 “의심해보라.”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다고 설명하는 편이 낫다. 이 책의 저자 앤드루 커노한은 무신론자들을 겨냥해 책을 썼다. 신을 믿진 않으나, 무신론자도 아닌 내가 이 책을 어떠한 방법으로 읽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예상하기 힘들다. 본성에 관한 탐구가 있다면 최근 천천히 곱씹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에도 닿아놓고 같이 읽는 책이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4. <인문학, 세상을 읽다>는 박민영氏의 책을 왕창 살까 생각하다 아무래도 책값이 만만치 않으니 한 권만 추리자고 하여 고른 책이다. 나는 그의 글이 부럽다. 문체를 탐낸다는 것이 아니다. 단단한 사유로부터 시작되는 글이 마치 발원지에서 바다까지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스럽기에 그 생각의 힘이 존경스럽다는 뜻이다. 궁할수록 기교를 부리는 법이다. 인문학과 철학을 다룬 책들 중 일부 저급한 것들에서는 쓸데없는 기교가 발견되기도 하니, 욕심 많은 젊음을 운영해야 하는 때일수록 이런 저자의 철옹성 같은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도 작법과 사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7회 우수 리뷰로 세 개의 글이 선정돼 적잖은 적립금을 받아놨는데, 그걸 방송개론과 작가론 책을 살 때 다 써버린 것이 못내 후회된다. 아니었으면 지금쯤 박민영氏의 여러 책에 내 지문을 찍어놨을 테니 말이다.


#5. 강신주氏의 책이 최근 인기라고 하지만 감히 읽어볼 용기를 내진 못했다. 동서양 지식의 균형을 맞춰가는 일은 퍽 어렵고,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지난 3년의 대부분을 서양의 지식을 얻고자 쓴 터라, 관중, 공자, 장자, 노자 등을 깊게 읽기에는 마음의 시간이 부족하다 느꼈다. 그래도 한 권을 접해봐야 견문이 넓어지리라 여겨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샀는데, 이것도 창홍의 <미학 산책>처럼 간추린 부류에 속한다. 읽다가 유독 마음 가는 철학이 있으면 나름 깊은 독서를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행여나 놓쳐버리는 양식이 있을까 경계하며 조심조심 읽어야겠다.


#6.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다 작년에 알게 된 이름들이다. 아마도 지젝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랭의 철학을 깊게 설명한 한 유명 블로거의 공간(가물가물한 기억에 그 블로그 이름이 ‘붉은 서재’였나 했을 것이다.)에서 며칠을 끙끙대며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그는 아마 철학도였을 것이다. 철학에 대한 동경이 내 머리 어딘가에 적어둔 이름들. 제대로 알고 있는 철학 하나 없는 나에게 저들의 책이 과연 얼마나 생소하게 다가올지, 아니면 의외의 깨달음이 있진 않을지, 온갖 잡상(雜像)들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그래도 용기는 나의 편이었더라. 기왕 지식으로 불태울 이번 학기 중에 왕복 3시간은 걸리는 등하교 버스 안에서, 가끔은 어둑어둑 해 저무는 황금빛 한강을 바라보기도 하며 머리 싸매고 읽겠노라 벼렸다. 결국 조르조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 알랭 바디우의 <비미학>,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샀다. 그 벽을 넘으면 무엇이 보일까. 또 다른 벽일 테지, 아니, 분명 또 다른 벽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서는 이런 점에서 좋다. 걸려 넘어진 허들이 있어도 110m를 달린 기록에 감점이 붙거나 하진 않으니. 지적 실험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이런 식으로라면 나는 지젝과 아렌트, 파농도 곧 읽게 되지 않을까. 알고 있는 것은 이름과 몇몇 용어들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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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2-08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안녕.

저는 오늘 국사공부를 너무 해서 머리가 지끈지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런데 이름 보니까 이 페이퍼가 더 어려워요. 이제 철학까지 섭렵하시고 대단해요, 독서량이. <위도 10도> 리뷰 잘 봤어요. 이제 <인종주의는 본성인가> 기대중^^ 글을 쓰려면 철학공부는 꼭 해야하는 것 같아요. 블로그에서 아는 의사 분이 철학 아카데미에 다니신대서 우와, 대단하다 했는데 요즘은 정말 이것저것 잘하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라 머리가 더 아파요ㅠㅠ

봄학기는 학교에 가는 거예요? 탕기님도 왕복 3시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탕기 2012-02-08 23:39   좋아요 0 | URL
이번 학기 열심히 다녀야죠. 책도 많이 읽고, 사유의 시간도 늘리고. 교양으로 러시아어나 독일어를 들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전공을 소홀히 하면 안 되니까, 졸업반 되면 배워볼 요량입니다.^^ 영어도 제대로 못 하면서 늘 바라는 건 많아서 큰일이에요.ㅎ 철학을 고리타분하게만 여기던 시기가 지나가는 듯하니, 저도 조심스럽게 '나의 글'을 쓸 때가 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이리님도 열심히 공부하시는 한 해 되시길.^^
 

2012.01.25

 

   가수들은 음반작업을 위해 똑같은 노래를 수 천 번이고 부를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훌륭한 프레젠테이션은 완벽주의자인 그의 피나는 노력이 낳은 결과물이라 했다. 운동선수들은 정확한 동작을 하고자 하루에도 같은 과정을 수 백 번 반복한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같은 문장을 매일 읽어 입에 붙여놓고, 또한 그 문장을 반복해서 들어 귀에 들여놓아야 한다. 반복은 향상을 위한 노력 중 하나이다. 반복에 익숙해져 어떤 행동에 대해 신뢰가 생기면 인간은 심지어 목숨을 거는 일에도 도전할 수 있다. 거칠게 표현해서, 반복은 삶의 보증수표이다.


  오늘 영어공부 겸 읽은 <뉴욕타임즈>의 한 예술관련 리뷰에도 ‘반복’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큰 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러했다. ‘캐롤 보겔’이라는 기자가 쓴 20일자 기사는 미국 화계의 거장 엘스워스 켈리를 다룬 리뷰였다. 그가 동년배의 팝아티스트들이나 미니멀리스트들과는 달리 추상화를 고집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인데, 향년 88세인 그의 회고전이 여러 곳에서 개최되고 있는 미국의 추세를 반영한 듯했다. 그런데 기사 중 엘스워스를 화단에 안착시킨 한 인사가 이 고령의 화가를 설명하는 대목이 내게 뜻밖의 인상을 줬다.

  “He’s the last artist to repeat himself,” Mr. Storr said. “But he always comes back to his basic vocabulary: surface, scale, color, image. And he always gets it as simple as he can.”


  최근 들어 ‘복기(復棋)’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까닭에 ‘repeat himself’는 ‘repeat myself’로 받아들여졌다. ‘basic vocabulary’도 내게는 중요한 개념이었다. 부모님과 선생님들로부터 거의 매일 들어왔던 말, “기초를 닦아라.”는 이런 때를 위해 교훈 삼아야 하는 것이리라. “타인에게서가 아닌 나 자신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복기의 원론은 내게 ‘실용’이라는 효과의 여부를 떠나 하나의 ‘젊은’ 철학이 되었다.


  이런 글을 쓰며, 생각해보건대 나는 나의 삶에 그다지 충실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무엇을 반복하여 잘하고 싶은가?”를 묻게 되었다. 새해도 되었고, 목표도 다시 바로 잡았으니 이런 새삼스러운 질문은 나를 건강하게 해준다. 반복하여 기술적으로 향상되어야 하는 부분에 나는 항상 ‘글쓰기’를 던져 넣는다. 같은 주제로 글을 쓴다고 해도 필사(筆寫)가 아니라면 매번 달라지는 것이 작문인지라, 어떤 글이 더 나은지를 판단하는데 있어 매양 힘들다. 글쓰기가 단순한 동작이 아님은 자명하다. 기분에 따라 문체도 달라지고, 다루고 싶지 않은 주제에 대해서 쓸라치면 문장의 자신감도 현저히 떨어진다. 비극적 사건을 다루는데 리드미컬한 구성이 적절하다 할 수도 없다. 따라서 내게 “글을 반복하여 잘하게 된다.”라는 논리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어떨까?


  주제 하나로 큰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문장을 한글문서로 타이핑하는 것이든, 필사하는 것이든 반복해서 써보는 것이다. 즉, “반복한다.”라는 범위를 좁혀보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필사하거나 암기하는 것은 예로부터 많은 문인들이 사랑하던 학습법이다. 좋은 씨앗이라도 질 좋은 토양에 심어야 잘 나는 법이라는 뜻이리라. 토양이 좋으면 나쁜 씨앗이라도 예쁜 꽃을 피우고, 왕왕 열매를 맺게끔 바로잡아줄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닐까. 그리하여 글을 쓰고자 한다면 돌아보고자 하는 것이 여럿 있게 되는데, 여기엔 필사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글을 곱씹어보는 것도 포함된다. 어쩌면 이것이 더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3년 간 꾸렸던 미술 블로그의 옛글들을 한글문서로 바꿔 몇 권의 책으로 보관하고자 얼마 전부터 작업을 하고 있다. 공부와 소통을 목적으로 쓴 글들이라, 정리와 1~2회의 퇴고 외에는 특별히 손 쓴 적이 없었다. 때문에 문서편집을 하며 되돌아보는 지금 그것들은 나를 무척 창피하게 만든다. 모르면 용감해진다고 하더라. 미술에 대해 잘 모를 때에는 마치 잘 아는 듯 흉내를 내고 싶기도 했었다. 겸손해져야 한다고 깨달은 후부터 글은 공부의 난이도만큼 갈수록 어려워졌고, 결국 내가 간직해야 하는 글들은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학교 초년생 무렵의, 제대 후 모두 지워버린 자폐적 글들보다는 알찬 것들이라 책으로 꾸며보고자 남겨뒀는데, 생각해보니 그것들은 하나같이 복기해봐야 하는 것들이었다.


  적절하지 않은 문장을 고치거나 틀린 전문용어를 바로잡는 것은 큰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적 수준이다. 2~3차의 퇴고를 꾸준히 한다면 이런 종류의 실수는 쉽게 예방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은 다른 영역에 있는 듯하다. 내가 복기 중 생각해보는 것은 글을 썼을 당시의 마음이다. 주제에 대해 잘 몰랐었을 무렵, 혹은 글에 너무 많은 힘이나 기교를 줄 정도로 열정적이었던 무렵을 상기해보는 것은, 더군다나 소심한 나 같은 이에게는 나름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아픈 만큼 큰 도움이 된다. 쓴 약이 몸에는 좋더라는 어르신들의 말씀에는 뺄 말이 하나도 없다. 부족한 것은 여전히 많지만 내가 예전의 글들보다 지금의 것들에 신뢰를 얹어놓는 까닭은 나날이 진행되는 복기이다.


  어제의 글보다는 오늘의 글이 더 나아야 한다. 특별히 글에 기교를 부리지 않으려는 나의 성향 탓일까. 나에게 글은 작문 당시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정해진 틀 없이 들쑥날쑥하고, 사변이 많은 것이 (나 스스로 봐도) 눈에 띠는 특징이다. 이 방법은 작문 전에 마음을 정갈히 하지 않으면 글이 배설 수준까지 추락한다는 큰 단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정돈된 마음으로는 어떤 글이든 “잘 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는 “마음을 잘 드러낼 수 있다.”와 같은 뜻이다. 따라서 나에게 ‘복기’란 나 스스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는가의 성찰과 다름없다. 글을 생각하는 것과 철학을 하는 것이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상처가 아물 때마다, 그리고 새로운 상처가 생길 때마다 나는 하나의 문장에 매달려 그 마음에까지 다다르는 긴 작업을 오랫동안 견뎌내야만 한다.


  새해만 같으라고 하더라. 의지가 나를 어디까지 밀고 갈지, 어디에서부터 내가 그 의지를 다시 밀고 가야할지는 연극이 진행되어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글과 영상으로써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새파란 학생이라, 용기를 가지라는 덕담을 나 자신에게 주워들어본다. 올해는 다시 복학하는 만큼 많은 일들이 나의 의지를 실험할 것이다. 그 첫 번째 일로 임진년의 서막을 함께 열어줄 다섯 권의 책을 샀다. 두꺼운 책이 두 권이나 있어 비싸게 주고 살 뻔했던 것을 반값 할인을 빌미로 샀다. ‘이달의 당선작’으로 얻은 알사탕(환전했더니 4만원이나 나왔다!)이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 까닭에 알차게 읽어주겠노라 벼르고도 있다. 이런 책들이다.

 

 

 

 

 

 

 

 

 

 

 

 

 

 

 

  니체는 “잘 모르지만 가까이 하고픈 철학자”이다. 철학에 입문조차 하지 않은 나에게 거창한 목표가 있다면 두꺼운 철학원서를 한 번은 읽어보는 것. 4년 만의 복학에 벌벌 떨던 나를 격려해주신 한 철학교수님의 도움이 몇 가지 동기 중 하나일 것이고, 그밖에 이진경氏, 박민영氏, 진중권氏, 버트런드 러셀, 우치다 타츠루 등의 책이 빈약한 나의 ‘철학적 지식’을 반성케 했다. 이번에는 이수영氏의 <명랑철학>을 통해 다시 한 번 철학에 대한 호기심을 살찌울 참으로 과감하게 철학책을 구해봤다.


  미술 블로그를 할 적의 일인데, 나에게 큰 격려를 준 이웃분 중 한 분이 내게 “꼭 반 룬과 같은 저자가 되어주세요.”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사실 그 때 나는 반 룬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터라, 그냥 “고맙습니다.”라는 답변만 할 수 있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매우 성공한 대중적 저자라는 평과 함께 그의 서술방식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상반된 평가까지 다양한 리뷰들이 있었다. 그 분의 격려를 허투루 듣지 않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비록 번역서라 할지라도 그의 책을 읽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책은 하나같이 비쌌다. 다행이도 이번 알라딘 메일에 4만원은 족히 넘는 고가의 책들을 반값 할인해준다는 정보가 있어 찾아보던 차에 반갑게 “지르게” 됐다. 예술사 전체를 아우르는 ‘큰 눈’을 배양한다는 목적 외에도 나에게는 “반 룬의 글이란 어떠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중요한 과제가 주어졌다. <반 룬의 예술사>. 고심하며 읽어봐야 할 책이다.


  피터 왓슨의 <생각의 역사 1>도 비슷한 이유로 샀다. 비싼 책이 반값 할인을 했고, 저자에 대한 평이 좋았다. 더불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저자 남경태氏가 역자이다. 1권을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2권도 사야겠다는 심보로 일단 ‘지름신’을 물려놓고 보니, 1권의 분량이 무려 1200페이지를 훌쩍 넘긴다. 막대한 분량을 다룰 수 있는 저자가 이 시대에 몇 명이나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더욱 기대가 되는 책이다. 저자가 취급한 정보들이 다양할수록 깊이는 얕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통설이고, 피터의 이 책도 그런 평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통시적인 ‘거대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저자들이 적어진 것이 문제라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지식의 미술관>을 리뷰할 때도 한 말이지만 이 시대에는 파편화된 지식이 너무 많지 않은가를 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도킨스와 세이건을 읽을 때, 그리고 대학교 철학 강의 중에 나는 ‘설계논증’이라는 것을 비교적 자세하게 접했다. 평소 종교적 창조론을 신뢰하지 않는 입장(이것이 종교에 대한 모든 회의라고는 할 수 없다.)이라, “설계논증은 그럴싸하게 들린다.”는 항간의 반응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진화론적 설명의 ‘목적’을 신에게 닿아놓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을 쓴 두 저자가 서론에서 말한 “이의제기에 변명할 방법을 보유”한 전형적인 종교의 수법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저급한 사상이라 여기는 선민사상을 낳은 종교의 모태가 진화론을 뒷받침할 수 있다는 논증 자체가 나에게 전혀 설득력 있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주제에 대한 고찰에 있어 나에게 남은 몇 가지 과제 중 하나는 설계논증에 대한 과학자들의 반박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는 근래 나온 책들 중 나의 호기심을 가장 많이 자극한 책 중 하나였다. 신간알림 메일로 얻게 된 논쟁적 책이라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최근 공들여 읽고 있는 <위도 10도>는 분명 종교적 분쟁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명백한 인종주의도 포함되어 있다. 예전부터 프란츠 파농을 읽고 싶었지만 “어렵거나 너무 충격적일 것 같다.”는 비근한 핑계로 밀어뒀었다. 파농을 읽기 전에 ‘예비학습’ 겸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를 읽어 이 첨예한 문제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느꼈다. 만약 내가 책을 잘못 골랐다고 느꼈다면 이 책 역시 나에게 너무 큰 충격을 줬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이 주제 자체가 자신을 다룬 그 어떤 책이든 충격을 무기로 장착하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해 벽두부터 나를 몰아세우는 기분이 든다. 어려운 만큼 피해가면 안 된다는 오기가 그리 만든 듯하다. 지나친 회의주의나 부정적 견해가 생기지 않도록 긍정적 예들도 곁들어 찾아가며 천천히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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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1-26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위도 10도>는 꼭 리뷰 써줘요. 그거 보고 싶었어요. 알게 된 것도 탕기님 서재에서지만.. 책 많이 구입했군요. 연휴 잘 보냈어요?

탕기 2012-01-27 11:19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아이리님.^^ 연휴 잘 보내셨죠? 당선작으로 모은 돈이 있어서 큰 부담없이 두꺼운 책도 사봤습니다. 연휴 끝나고, 학기 시작하기 전까지 뭔가 체계적으로 하려고 이런저런 목표를 세우고 조금씩 하고 있어요. 아, <위도 10도>도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한... 1/3 읽었어요. 다른 책도 같이 읽고 있어서 아마 다음달 초에야 리뷰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2012.01.13

 

 

 

 

 

사진출처 : visualreader.pbworks.com
photograph by Jennifer Zwick

 

 

  이 공간에 글을 올리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타인의 독후감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타인의 책 리뷰는 거의 읽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야겠다.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책’의 리뷰는 접하지 않는다. 나의 것이 아닌 시선을 빌려 책을 읽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고전이나 경전을 누군가가 자신의 사상에 맞게 소화한 다음 나름의 글을 부려 책으로 낸 것이면 기꺼이 사겠으나, 짤막한 독후감을 실은 책이면 손도 대지 않는다. 이따금 “저 사람들은 어떻게 책을 읽을까?”가 궁금해질 때도 있다. 저명한 이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건 다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참는다. 다른 건 몰라도 타인의 평이나 소문보다는 나의 경험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외골수라 불려도 괜찮다. 이런 습성이 나의 ‘공감력(共感力)’을 확장시켜주는 건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막말로 “얹혀살기 싫다.”는 고집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고집을 ‘원서 읽기’에서는 부릴 수가 없다. 외국에 대한 지식을 주식으로 삼고, 우리의 것을 주전부리로 삼은 못된 습관이 오래된 탓에 책장에 꽂힌 책들의 대부분이 외국원서의 번역본이다. 고집의 원칙대로라면 나는 원서를 읽어야 한다. 번역이 ‘기계적 옮기기’가 아니라는 것은 독서가들 사이에서는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사실이 아닌가. 역자의 역량에 따라 훌륭한 번역이 간간이 나온다. 이곳 알라딘에도 번역을 문제시 삼을 정도의 외국어 실력을 갖춘 애독자들이 꽤 많다. 그들의 글을 읽어보면, 실은 대부분 못 알아듣는 이야기이지만,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번역에 대한 평가가 좋은 책을 사자.” 권위 있는 출판사의 번역이라도 백이면 백 다 놓을 것이라 믿으면 엄하게 지갑만 팽(烹)하는 것이라는 속설이 진리라는 뜻이다. 새삼 번역의 중함을 알게 된 뒤부터는 마음에 들어도 서문 정도는 꼭 읽어보고 산다. 책값이면 하루 세 끼를 다 먹을 수 있는 때이다.


  책을 읽을 때는 또 어떠한가? 독서란, 비유컨대 “부딪히는 것”이다. 문장을 읽다가 막히는 구절도 더러 있고, 이해하지 못할 사상과 조우할 때도 있다. 실망도 참 많이 한다. 결말을 모른 채 본 영화가 다 보고 난 후에는 재미없어지는 것처럼, 책 역시 그러할 때가 있다. 요즘 출판사들은 워낙 부풀려 광고를 하기 때문에 책에 대한 기대는 적을수록 좋다는 험담도 오고 간다. 그렇게 힘들게 한 권을 다 읽어 놓으면 “내가 그것에 대해 과연 어떤 할 말이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읽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쓰는 것보다는 “읽은 것에 대해 쓰는 것”이 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것이 쉬운 것보다 반드시 나은 것도 아니다. 뭘 써야할지 모를 때에는 차라리 읽고 나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마음으로 어렴풋하게 글을 쓰고, 타인에게는 자신의 감상에 대해 공감해줄 것을 요구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리하여, 한샤오궁의 말처럼 우리가 평생 소장해야 하는 책은 드물게 만날 수밖에 없다. 독서란 이 모든 것들이 조화되었을 때, “아, 참 잘 읽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하나의 요리이다. 무엇 하나 빠지면 안 된다. 더욱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면 시쳇말로 “말짱꽝”이다.


  ‘창조적 독서’를 운운하는 요즘이다. 나는 독서에 비기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창조’라는 말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 같아 가끔 배알이 꼬인다. 사람들은 정해진 것을 좋아한다. 정해진 것이 공신력의 인정을 받으면 그것을 진리로 여기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정신과 사상에도 바코드가 찍혀 얼마 정도의 가치가 있으리라 평가되어야 그 쪽으로 조금이나마 움직일 채비를 한다. 하지만 대개 일상이란 일상 바깥의 삶을 기웃거리는 형국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들 배운 사람이라 자부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창조적일 수 있는 독서가 어렵다고 불평(독서는 원래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말이다!)하며,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을까?”와 같은 양적 문제에서부터 시작해 “어떻게 읽으면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온갖 공신력의 응원을 받고자 한다. 저명한 누군가가 ‘글 읽기’에 대한 주제로 책을 내면 “글 읽기에 대한 글 읽기”를 위해 기꺼이 돈을 주고 산다. 그것들 대부분이 비슷한 말을, 그 비슷한 말들 대부분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위안을 받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서의 양과 질은 언제나 첨예한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자신이 책을 너무 빨리 읽는다고 해서 소위 말하는 “깊은 독서”를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고, 책을 중구난방으로 읽어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것은 무엇이며, 자신은 남들보다 거북이처럼 책을 읽는 것 같아 늘 불안하다고 기우(杞憂)를 갖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독서는 책과 얼굴을 맞대는 행위이다. 타인의 눈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문장을 읽고, 아인슈타인이나 뉴턴의 뇌가 아닌 자신의 뇌로 그것을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그 독서하는 이의 마음은 자기 자신의 것이다. 너무 어려우면 쉬운 것을 찾으면 되고, 사상이 맞지 않으면 또 다시 골라 읽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우리는 독서의 ‘도(道)’가 있으리라 여긴다. 아니면 그렇게 여기도록 어떤 방식으로든 조정당하는 것이다.

 

  중학교 국어교사이신 어머니께서 이따금 교내 독후감 대회용이라며 아이들의 글을 가지고 오신다. 그 맘 때 나의 모습을 회상하며 하릴없이 그것들을 읽고 있노라면 글들이 하나같이 깊이도 얕고, 무엇보다도 턱없이 부족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따금 낭중지추처럼 눈에 띠는 글들을 만나면 반갑다. 하지만 그건 아이들 전체의 1%도 안 될 것이다. 그나마 발견한 글들 중 대부분도 다시 읽어보면 신선도가 떨어진다. 어머니의 말씀대로라면 학생들이 독서에 할애하는 시간은 턱없이 적다. 문제는 “얼마나 읽느냐?”가 아니다. 그들을 볼 때는 이미 “읽느냐, 안 읽느냐?”라는 수준으로 비판의 시각이 뚝 떨어진다.


  스페인 못지않게 책 안 읽는 대학생들이 많은 우리나라이다. 이런 세태의 책임을 어디인가로, 혹은 누군가에게 전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무책임한 행동이다. 문제는 개개인이 지닌 지적 성실성에 있다. 사람들은 요리조리 핑계를 잘 댄다. <믿음의 엔진>을 복기하는 자리에서도 거듭 밝혔지만 우리는 훌륭한 거짓말쟁이이다. 그리고 문제는 하나 더 있다. 우리가 문제의 방향을 애당초 잘못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즉 양적 문제에 지나치게 매달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단락을 통해 거칠게 적어 내려온 나의 주장은 결국 이것이다. 책을 “어떻게, 얼마만큼 읽어라.”라는 것은 논리 상 말이 안 되는 일률이다. 한 권의 책이 너무 좋아 몇 달이 걸려도 필사하며 되읽는 사람이 있다. 속독을 너무나도 잘해 한 달에 수 십 권의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독서 방식에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것을 문제시하는 것은 시중에 나온 수많은 책들의 다양성을 독자들이 무시하는 것과 진배없다. 책이 다양한 만큼 독자도 다양하며, 다양해야 정상이다. 다양성이란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조언과는 크게 상관없다. 조언들이 이따금 우리의 “더, 더, 더”라는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맹종하다보면 ‘주체성’이라는 크나큰 자존감이 상실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독서가 “읽어서 남 주는 행위”가 아닌 것은 자명하다. 어떤 글을 읽든, 어떻게 읽든, 얼마나 읽든 중요한 것은 독자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이다. 그렇다. 우리의 독서가 힘든 이유는 다중의 힘에 휘둘리는 얇은 귀, 그 속물근성 때문이다. 다른 것들 다 내려놓고, 책과 일대일로 정직하게 대면하는 습관만 기른다면, 그리고 독서의 어려움을 직시한다면 저 수많은 책들이 모두 자기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책은 '너의 책'이 아니다. '나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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