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0일




    그러나 왕은 친구가 될 수 없었다고 한다.


    다자이가 한 말이 아니다. 그는 「달려라 메로스(走れメロス)」를 덜컥 끝내버린다. 메로스와 세리눈티우스는 죽지 않았다. 왕은 둘을 살려줬고, 둘은 부둥켜안은 채 엉엉 울었다. 군중은 환호했다. 짧은 이야기는 깨끗이 끝났다.



*   *   *



    어디 보자, 남은 것들을 주섬주섬 챙기다 별로 든 것 없는 두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점심이나 먹어야지, 설이니까 가족과 만둣국을. 오후에는 미학을 읽었고, 밤에는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와 만났다. 그래서 추웠다. 이불을 덮고, 새벽에는 니체를 읽을까, 하다가 다시 다자이를 펼쳤다. 왜. 뭔가 결단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럴 순 없다. 내 주제에 무슨 칼날을 들이대려고. 하지만 손에 든 것이 없었다. 미련 탓에 다시 읽었다. 세 번을 읽었다. 네 바퀴 째가 되자, 창밖으로 목성이 비스듬한 직선인양 둥글게 지나갔고 ㅡ


    ㅡ 졸음이 몰려왔다. 내일은 니체를 읽어야지. 빈 주머니도 있는 법이야. 내가 언제부터 야무진 척을 했었나. 누웠다. 등으로 방바닥의 온기를 머금으며 늘어지며 늘어지다, 시의 교각이 기초공사도 없이 올라가는 것처럼, 늘 그러했듯, 나는 생각했다. 제 3자로 밀려나버린 왕의 모습이 순식간에 밀려들어왔다는 말이다.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겠나? 부탁이니 너희와 친구하고 싶다. 제발 들어주면 고맙겠다.”(다자이 오사무, 김욱송 옮김,「달려라 메로스」, 237쪽) 그리고 왕은 말이 없었다. 다자이는 왕을 침묵에 가두고 군중을 환호시킨다. 세리눈티우스가 메로스에게 말을 건다. 친구를 살리기 위해, 하지만 자신은 죽기 위해 맹렬히 달려온 메로스는 알몸이었다. 그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소설이 끝난다. 그리하여 왕은 둘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왕의 등 뒤에 조용히 서있었다. 환호하지 않았다. 군중아, 떠들어라. 그 환호를 틈타 왕의 얼굴을 보고 싶다. 중무장한 근위대가 곁에 있으니 쉽게 볼 수 없다. 이름을 불러볼까. 전하!, 하고 외치면 돌아봐줄까. 불을 켜고, 조용히 앉아 다시 읽었다. 글을 써내려갔다. 왕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핑계 삼아 이런 혼잣말을 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왕은 친구가 될 수 없었다고 한다.


    메로스와 세리눈티우스의 우정, 그 이야기는 어찌됐든 상관없다. 그럴 줄 알았다. 모를 독자가 어디 있나. 둘 중 하나가 죽고, 남은 하나가 왕을 죽이는 기상천외한 복수극이나, 뭐 둘 중 하나의 유령이 갑자기 소환되는 허무맹랑한 미스터리로 전락할 일은 없겠지. 『인간실격』의 다자이가 그런 파렴치한 작가일쏘냐. 눈총으로 읽으며 벼렸던 모든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고, 그래서 뭐든 주워가려고 했던 나, 이 독자의 주머니는 수확을 마친 보람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다 옳은 이야기. 아무런 결함도 없는 이야기. 이 매끈매끈함이 주는 현기증. 표면에 반사되는 밝은 빛의 거북함.


    어떻게든 틈을 찾아보자. 독자의 몫이란 그런 것이니까. 도대체 이 소설에서 빠져나갈 검은 구멍이 어디에 있는가. 이런 마음이 새벽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렇다. 너무나도 큰 균열이 있다. 누웠다 발견해서 깜짝 놀랐지만. 근묵자흑을 이런 자리에서 빌려보면, 어두울 때만 보이는 게 있는 법이기도 하니. 여하튼 갑작스런, 하지만 충분히 그럴싸했던 환호가 무지막지한 데시벨로 균열을 지워버렸던 것이다. 의심해본다. 왜 거기서 군중이 마치 짜고 친 한 동패처럼 우르르 소리를 몰아갔어야 했나. 왜 환호로 대답이 지워져야만 했는가. 의도했든 안 했든, 결과는 이미 나왔다. 지금으로부터 75년도 더 지난 옛날에. 다자이는 왕을 지워버렸다. 교묘한 작업이다. 그리스 이야기를 읽었거나 실러를 읽었거나 했으리라. 그렇다면 그 이야기의 전말도 훤히 알았을 것. 거대한 우정 속에서 지워진 한 장면. 소설에는 없다. 그것은 다자이가 할 말이 아니었을지도.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조용히 다른 장소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왕은 친구가 될 수 없었다고 한다.


    다시 앞으로. 왕의 폭정에 분노한 메로스가 왕을 죽이려다가 역으로 죽을 입장이 된다. 왕은 어이가 없다. 위엄 있게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네놈이 말이냐?”(218쪽)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돌연 고독을 아느냐고 묻는다. 대체 무슨 고독이 사람을 죽이는 일로 이어지는가. 그 고독을 사람을 불신하여 사람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통째로 번역해본다. 왕이 죽이려고 하는 건, 따라서 사람이 아니라 불신 그 자체다. 그 비열한 영토를 제거해야 고요해질 것이다. “나 역시 평화를 바라고 있다.”(218쪽) 침착한 어조와 한숨에 섞여 나온 이 말의 뜻은 그렇게 해석된다. 메로스가 비웃으니 폭군은 “입으로는 무슨 말인들 못 할까.”(219쪽)라고 외친다. 보고 싶다는 뜻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는 모습을. 하지만 끝까지 의심한다. 그래, 너 메로스와 네 녀석의 죽마고우라는 세리눈티우스의 목숨을 놓고 한 판의 실험을 해보자.


    이제 뒤로. 메로스는 세리눈티우스와 포옹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가 급박하게 여동생의 혼사를 치러주고는 죽음의 길에 오른다. 다리가 끊어진, 맹렬한 바다와 같은 강물을 건너고, 산적 셋을 만나 물리친다. 목이 말라 죽을 뻔했지만 다시 달린다. 달려라, 메로스. 의지가 꺾일 때마다 번뇌한다. 세리눈티우스, 내가 늦어버리면 자네는 나 대신 죽고, 그러면 나도 죽을 것이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사람들아, 나를 비웃어라.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여동생네와 함께 살 것이다. 땅도 있다. 그 부부가 이 몸을 내치진 않겠지. 하지만 메로스의 의지는 불굴이다. 질풍으로 달려 도착하고, 세리눈티우스를 살려낸다.


    왕은 어떠했을까. 상황을 보아하니, 이미 형장에는 명이 떨어진 후였다. 세리눈티우스는 목이 졸려 죽을 판이었다. 군중들은 동요했다. 살려줘라. 용서해야 한다. 그러나 왕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목소리는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살려줘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친구가 되고 싶다. 그는 “군중들 뒤에서 두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236쪽) 있었다. 권세의 거드름 따윈 없다. 그토록 바라던 신뢰의 증인을 살리고자 하는 건 그의 오래된 바람이었다. 그 반대의 일이 그를 폭군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 반대의 일이란 무엇이었나? 한 노인의 증언을 다시 듣는다. “그래, 처음에는 자기 여동생 남편을 죽이더니 그 다음에는 세자를 그리고 여동생과 그 여동생의 자식들을 죽였지. 그리고 황후도 죽였어. 그러고 나서 그 어질고 충성스러운 알렉스 님까지 말이야.”(217쪽)


    의심. 저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일방적인 닫음. 곁에 있는 이에게 가장 먼저 자물쇠를 걸어버리는 일. 폭군 디오니스는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이다. 누군가 고자질을 한 것일까? 아니면 거짓부렁을? 왕이시여, 실은 제가 은밀히 들은 바인데 말입니다… 신뢰의 벽에 균열을 내는 건 대단히 쉬운 일이다. 추호의 의심도 없다?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건 맹신이다. 사람을 맹신하지 않는 한, 우리는 버릇처럼 의심한다.


    디오니스는 병들었다. 믿지 않는 병이 그의 권세와 결합하여 연쇄적 죽음을 불러온다. 왕족 일가를 죽이고, 충신을 죽이고, 볼썽사나운 귀족들도 죽인다. 그는 죽음으로도 걷어낼 수 없는 의심의 백야 속에서 뜬눈으로 밝은 밤들을 지샜을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 거라는 의심이 아니었을까. 몸수색을 너무 쉽게 받아버린 메로스의 경우로 보건대, 그랬을 것이다. 권세와 권세가 겨루는 장에 대해서는 우리도 잘 아는 바이고. 덧붙이자면, 이 소설에는 디오니스가 백성을 죽였다는 기록은 한 군데도 없다. 그런데 백성 메로스가 와서 자신의 의심을 거둬줄 줄이야. 왕은 그리하여 매우 기뻐했지만 ㅡ


    그러나 왕은 친구가 될 수 없었다고 한다.


    둘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달려라 메로스」의 원판은 이렇다. 피타고라스학파인 다몬과 퓌티아스가 시라쿠스(고대 그리스어로는 수라쿠사이)를 찾았다. 당시 시라쿠스의 군주인 디오뉘시우스 1세는 폭군이었다. 정의의 퓌티아스가 이에 항거할 뜻을 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거사가 발각되어 사형이 언도됐다. 그는 타향에서 횡사할 운명을 달래기 위해 고향에 가서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했다. 왕은 거절했다. 하지만 다몬이 대신 잡혀있겠다고 나서자 허락했다. “네 벗이 오지 않으면 네 목숨을 빼앗겠다.” 퓌티아스는 고향에서 돌아오는 도중 해적에게 배와 함께 통째로 잡혔다가 바다에 내팽개쳐졌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로 살아서 제때 도착했다. 왕은 둘을 살려줬다. 실은 대단히 감동했다.


    그래서 간절하게 원했다.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겠나? 부탁이니 너희와 친구하고 싶다. 제발 들어주면 고맙겠다.”(다자이의 소설, 237쪽, 재인용) 그러나 거절당했다. 믿음을 확인한 그는 믿음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다몬과 퓌티아스, 아니, 메로스와 세리눈티우스의 한복판으로. 왕위는 무엇이고, 영토는 또 무엇이며, 그 모든 것의 위를 덮은 자신의 권세는 무엇이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성취한 바가 없다. 믿음은 확인했다. 그러나 거절당함으로써 그는 다시 의심의 공간 속에 방치된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아무런 친구도 없다. 머리를 조아리며 죽음의 판결을 기다리는 이들만이 남았다. 이 소설, 하나도 좋게 끝나지 않았다. 형장에 남겨진 왕이 스스로 목을 매는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죽을 수가 없다. 의심하는 나를 죽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끝까지 살아남는다. 메로스와 세리눈티우스도 잠시나마 그랬던 적이 있다. “다몬과 퓌티아스(Damon and Pythias) 같다”는, 우리 식대로 하면 막역지우(莫逆之友)를 뜻하는 관용어 안에서마저 불현듯 튀어나오는 게 의심이다.



*   *   *



    새벽이 지나간다. 왕의 뒷모습을 보고 일어나 지금껏 왕을 생각했다. 비슷한 처지가 아니었다면 애당초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았겠지. 나 역시 한 명의 군중에 지나지 않았을 것. 하지만 그렇다. 왕을 보게 되는 독자들이 있다. 독자의 몫을 찾으려는 이들. 소설의 빈틈을 찾아 그곳을 뚫고 나가려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이들이 있다. 넘어졌다는 고백을 하려니, 창피하다. 알몸으로 선 메로스만큼이나 얼굴이 붉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새벽. 목성도 이미 건너편 아파트 옥상 너머로 사라졌고, 오늘은 달도 없다. 불을 끄고 누우면, 다시 일어나면 사라질 부끄러움이다. 이제 그만 눕자. 나는 ㅡ


    ㅡ 낮과 함께 이 책의 우정으로 돌아왔다. 이제 해가 지려고 한다. 어딘가 시공의 틈이 있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의심의 가스를 환기시키는 것이 우리의 삶임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나는 오늘도, 그리하여 굳건하게 버텨왔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왕을 만나러 나는 이 형장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의심’이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을 거쳐왔으니,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는 다른 방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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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9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 이어 짧은 이야기 하나가 더 실려 있었다. 「직소(直訴)」라는 제목의 단편으로 ‘유다의 고백’이라 번역되기도 한다. 그렇다. 유다에 대한 이야기다. 제사장과 장로들 앞에서 예수를 팔아넘기는 유다의 독백이다. 정신 사납게 쏟아지는 발언을 듣고 있으면 그의 표정이 그려진다. 경멸한다. 화를 낸다. 운다. 분노한다. 단념한다. 자기 자신도 모르겠다는 표정. 다시 오열. 웃음. 뭐 이런 걸, 30냥 따위. 그래도 받아두며 나는 장사치라는. 그리고 하하하, 깜빡했는데 제 이름은 유다. ‘유다’라는 이름만 들어도 발작할 이들을 위해 굳이 이렇게 말하겠는데, 이건 영지주의니 ‘유다의 사랑’이니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이 나오긴 한다. 그러나 그 단어는 「직소」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기이한 형태의 집착이다. 아무도 그걸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부르는 순간 병자로 분류되겠지. 그리하여 진실은 오직 엇나간 채 모습을 드러낼 뿐이고. 들여다볼 일이다.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Vreme čuda)』가 떠올라 ‘힌놈의 죽음’ 부분을 다시 읽었다. 두 작품을 나란히 놓는 건 무리다. 길이도 길이겠거니와 일단 다자이의 작품은 유다의 독백만을 다루므로 별다른 사건이 없다. 고발의 현장 자체다. 보리슬라프의 작품이 훨씬 복잡하고 극적이다.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뽑아내는 자기 고뇌, 죽음을 두려워하는 예수를 닦달하면서 반드시 예언을 성취시켜야만 한다고 느끼는 자기 강박, 유다-예수-야훼의 삼위일체를 선언할 거라고까지 말하는 거대한 목적성, 하지만 결국 “성서의 말씀의 올가미”(보리슬라프 페키치, 이윤기 옮김, 『기적의 시대』, 346쪽)가 목을 죄는 두려움에 이르는. 자살로 위장된 죽음까지. 파문이 일겠지만 이걸 영화로 만든다면 관객은 유다의 고뇌에 압도당하는 착각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이런 생각도 가능한.


    하지만 두 작품은 비슷한 선상에 있다. 같진 않다. ‘힌놈의 죽음’은 보리슬라프가 『기적의 시대』 말미에 이르러 예수 대신 키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결국 예수의 죽음이 없으니 구원도 없다는 도발적인 해석에 이르는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유다는 자살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유다가 닦아놓은 예언의 길을 따라가는, 아니, 따라가는 것조차 겁을 내는 그 예언자는 이 소설 이전에 지니고 있던 모든 권위를 잃어버린다. 그래서 번역을 맡은 이윤기 씨도 말미에 보리슬라프의 작품을 옹호했다. 이단이 아니라고. 다자이도 그렇게 봐야 한다. 그가 개신교 신자였고 성경에 무척이나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 그리고 일본이라는 종교 환경을 고려해봤을 때, 물론 보리슬라프보다는 일부 독자들의 단죄에 일격을 받을 가능성은 낮겠지만.


    나름의 글로 유다의 고백을 다시 써봤다.



*   *   *



    나는 유다. 내가 아니었으면 저 무능한 제자들과 함께 어딘가에서 객사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대는 세상의 적이자, 나의 스승, 주인으로 나이는 같다. 뒷바라지를 열심히 해줬는데도 고맙다는 기색이 적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서운하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내가 이리저리 변통해서 꿔다가 해낸 것이 아니더냐. “마술의 조수 노릇”(다자이 오사무, 김춘미 옮김, 「직소」, 『인간실격』, 143쪽)을 그렇게나 해줬는데. 하지만 그자는 아름답고, 나는 그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따라다니는 일에 득이 없는 줄 알면서도 떠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제자들이 다 떨어져나가도 좋다. 아니, 그 편이 좋겠다. 늙은 나의 부모님이 살고 있는, 밭도 있는 나의 집에 가서 그대의 어머니 마리아와 셋이 안락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 그걸 꿈꿔왔다. 간절하게, 그대를 사랑하는 만큼. 천국이니 하느님이니 이스라엘의 왕이니, 이런 것들은 당초 믿지도 않았다. 거짓말쟁이. 하지만 아름다우니,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하지만 베다니의 시몬 네에서 한 짓은 무엇이었느냐. 마르타의 동생년, 그 마리아가 향유를 그대의 머리에서 발까지 붓는 무례를 범했음에도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발만 적신 걸로 되어 있다.) 오히려 두둔하다니. “추태의 극치”(다자이의 책, 149쪽), 그렇다, 그대는 베다니의 마리아를 사랑하는 것이었는가! 이 분노는 무엇인가. 나도 젊고 훌륭한 청년이다. 집 없고 돈 없는 제자 나부랭이들과는 다르다. 저년이, 마리아가 나한테서 그대를 빼앗아갔다. 아니, 그대가 내 여자를 뺏었다. 이 무슨 말인가. 모르겠다. 남은 것은 분노요, 또한 그대를 향한 사랑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그대의 모습은 참으로 초라했다. 길가에 있는 늙어빠진 당나귀에 올라탄 그대를 연민하면서, 나는 아름다울 때 내 손으로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꽃을 꺾어버리는 일처럼. 간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라! 신기하게도 군중들이 꼬여들었고, 저 우둔한 제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울었다. 나 역시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성전에서 노기를 부리며 불쌍한 장사치들을 쫓아낸 것은 무어냐. 허세다. 그대는 제사장들에게 잡혀 죽을 생각으로 자포자기한 것이다. 드디어 미쳤구나. 그러니 내가 한 장사꾼에게 제사장과 장로들이 그대를 죽이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를 팔아 남기는 것이야말로 나의 임무라 생각한 건 당연했다. 이 사랑의 행동을 이해해주지 못해도 상관없다. “나는 영원히 남의 미움을 사리라.”(다자이의 책, 155쪽) 그래도 상관없기에 이 사랑,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아, 최후의 만찬이 없었더라면. 후대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더라. 살과 피의 성스러운 이야기와,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칭송하더라.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그보다는 그대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불쌍한 장면이야말로 성스러운 것이었거늘. 단, 그건 모두가 깨끗하면 좋을 것이라며 나를, 정확히 이 유다를 겨냥한 한 마디 말로 내 속의 분노를 다시 끄집어내기 전까지의 일을 일컫는 것이다.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변을 쏟아내지 않아도 됐겠지. 그리고 그대는 마지막 식사를 조용히 하더니 빵 한 덩어리를 내 입에, “개나 고양이한테 던져주듯이 한 덩어리의 빵 조각을 내 입에 쑤셔 넣고”(다자이의 책, 160쪽)는 보란 듯이 제자들 앞에서 쪽팔림을 주었다.


    이자들 앞에서 굽실거리며 30냥을 받아들고는 나 자신을 장사치라고, 유다라고 뒤늦게 소개한다. 군병들이 추궁하는 대로 나는 게쎄마니로 간다. 마지막 입맞춤을 하러.



*   *   *



    아름다움을 향한 기이한 사랑. 집착이다. 꽃을 꺾듯이, 아름다운 것을 제 것으로 하지 못할 바에야 제 손으로 꺾어 죽이는 무서운 사랑이다. 유다는 애당초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다른 제자들처럼 회의와 번뇌를 오고 가는 존경 따윈 없었다. 그래서 저 단편적인 사랑이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보리슬라프의 유다가 성서와 예언에만 매달린 나머지 나중에 가서는 기어이 자신을 삼위일체의 한편에 끼어 넣는 지경에 이르는 반면, 다자이의 유다는 오로지 사랑이다. 삶의 중심에 예수를, 그 아름다움을 세워두고 속으로 혼자 찌르고 베는 칼날 같은 사랑이다. 예수가 그걸 눈치 챘을까? 그랬다면 언제? 발을 닦였을 때? 아니, 그걸 모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닌가? 반대로 그걸 유다만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제 사랑에 눈이 가려진 채, 모든 걸 자신의 식으로 해석하고 내뱉는 괴상한 고집이 독백의 주를 이루고 있으니까.


    다자이는 유다의 뒤늦은 자기소개 이후를 그리지 않는다. 게쎄마니로 가는 길에는 또 얼마나 떠들어댔을까. 군병들 중 하나가 유다의 방종을 두고 “자네, 입 좀 다물지. 지저귀는 새소리가 시끄럽다고 떠들더니, 자네가 딱 그 꼴이다.”라고 말했으리라. 그렇게 도착한 예언의 순간에 유다는 마지막 입맞춤을 하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보리슬라프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다자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유다의 이야기를 할 뿐. 이후 어떻게 되었겠는가, 유다는. 30냥을 바닥에 내팽개치면서 뒤늦은 후회를 했겠지. 오직 사랑할 뿐인 예수가 죽었으니, 이제 그에게는 무엇이 남았겠는가. 유다는 자살한다. 악마에 씌운 것도 아니고, 보리슬라프의 이야기 속에서처럼 제자들의 손에 이끌려 힌놈에서 자살로 위장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도 아니다. 그 스스로가 충분히, 집착의 선로에서 저 아찔한 높이의 절벽 아래로 빠르게 사라져갔으리라 추측해보는 건 무리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독백, 주절거림은 기이하리만치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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