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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일 수요일





    한때 문학을 꿈꿨던 나는 ‘죽지 않는 자’를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은인이 아니면 보여주지 않을 은밀함으로 습작 중인 한 소설이, 그 생각을 풀어내 담아두는 나의 상자다. 인류에게 저주를 새길 만한 위대한 텍스트는 도무지 될 수 없기에, 그 판도라를 조금만 열고 닫아보자면, 소설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죽음을 말해야 하는 시대에 저는 돌아옵니다. 그러니 저는 언제나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바로 옆에 있을 수도 있고, 앞뒤로 걸쳐 입은 의복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저를 거부할 순 있습니다. 매정하게 내치십시오. 주인에게 복종치 않은 종놈을 짚으로 만든 깔개로 돌돌 말아다 치듯이 혼쭐을 내도 좋습니다. 피어나는 먼지 속에서, 온 동네 구석구석을 찌르고 달아나는 비명 틈바구니에서, 한 눈 판 사이 사라지고 마는 성급한 노을의 한 모습처럼 없어지고 난 후일 테니.


    그의 이름은, 아니 ‘그’는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최초의 인간이며, 죽지 못하는 인간이다. 무엇보다도 비극의 인간이다. 육신이 썩고 장기가 문드러져 죽는다 해도, 단 하나의 망각 없이 새로운 육신의 조합에 옛 정신이 얹혀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수 세대에 걸쳐 존재하던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나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토한다. 한없이 기쁜 얼굴로. 망각은 그에게 선물이었다.


    내가, ‘그’의 창조자가 망각을 선물한 이유는, 백여 장을 써내려가는 내내 그가 단 한 번도 울거나 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내하기에는 너무 답답했다. 그래서 그에게 “잊으라.”고 간단히 명령했다. 망각을 알게 된 그는 처음으로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사귀며 행복을 만끽한다. (그리고 나는 약간은 오만하게, “그는 인간은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행복 속에 하루 종일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육신과 정신이 온전하게 결합된 최초의 체험을 했다.”고 썼다.) 그러던 하루는 어쩌면 자신도 결국 죽는 은총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다 잠든다.


    그리고 나는 지난 주 보르헤스의 한 단편에 사로잡혀 있었다. 단편집 『알렙』의 첫머리에 놓인 이 소설은, 이런 사연 까닭에 되도록 먼 훗날 읽으려고 아껴두고 있었으나, 바닥나버린 인내의 손으로 저주의 상자를 활짝 열어버렸던 것이다. 몇 번 읽었는지, 이제 와서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   *   *



    솔로몬 왈, “하늘 아래에 새로운 것 없도다.”

    플라톤이 “앎이란 전부 기억일 뿐”이라 생각했으므로,

    솔로몬은 이렇게 회답했다. “색다른 것들은 모두 망각에서 났을 뿐이니라.”


    Solomon saith: There is no new thing upon the earth.

    So that as Plato had an imagination, that all knowledge was but remembrance;

    so Solomon giveth his sentence, that all novelty is but obtivion.

                                               - FRANCIS BACON, Essays, LVⅢ (필자 번역)



    다섯 밤과 여섯 새벽을 거치며 거듭 읽은 보르헤스의 (그가 가장 공들인 작품 중 하나인) 단편 「죽지 않는 사람들(El inmortal)의 서두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있다. 인간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으며 기억을 잊기도 하므로, ‘새로운 것’이라는 건 애당초 없다는 말. 여기에는 꼬리가 물린 함정이 있다. obtivion. 망각이다. 인간은 한 번 잊으면 도대체 무엇을 잊은 것인지 모른다. 망각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죽지 않는 사람들」에는 거대한 역사와 망각이 담겨 있다. 그리하여 “남아 있는 것은 단지 <말들>뿐이다.”(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알렙』, 35쪽)


    3세기의 로마 군단장인 ‘마르코 플라미니오 루포’라 불린 남자가 있었다. 그가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에 발을 딛게 된 경위를 밝혀둬야겠다. “모래사장과 비슷한 빛깔을”(보르헤스, 황병하 옮김,『알렙』, 10쪽) 지닌 달 아래에서 마르코는 죽음의 순례자를 만나 신비한 도시의 정체를 듣는다. 고용한 용병들을 거느리고 길을 나섰지만, 한 줌의 주화들은 무수하고도 끔찍한 여정을 견딜 만한 힘을 그들에게 주지 못했다. 도망치거나 죽는 이들이 있었다. 마르코는 홀로 사막에 쓰러져 헛것을 보다 꿈을 꾼다.


    깨어나 돌아본 모든 풍경은 그저 불경스러울 따름이었다. 마르코는 전설 속 혈거인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무심한 모래사장에 누워 달과 해가 나의 불행한 운명을 가지고 도박을 하도록”(보르헤스의 책, 15쪽) 체념한 때도 있었으나, 야만의 마을을 탈출하려고 한다. 계획은 성공했다.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유의 사막, 그 무시무시한 땅을 건넜다. 자신을 따라온, 말도 못 하고 구부정할 뿐인 한 혈거인은 차라리 훌륭한 위로가 됐다. 이름 모를 우물 아래로 계단이 있기에 따라 내려가니, 복잡한 미로가 나왔다. 마르코는 그곳에서 기적적으로 길을 찾아 지상으로 올라갔고, 마침내 <죽지 않는 자들의 도시>에 도착했다.



*   *   *



    <요한묵시록>, 즉 아포킬륍시스(Apokalypsis)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성벽은 벽옥으로 되어 있고, 도성은 맑은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도성 성벽의 초석들은 온갖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첫째 초석은 벽옥, 둘째는 청옥, 셋째는 옥수, 넷째는 취옥, ∘다섯째는 마노, 여섯째는 홍옥, 일곱째는 감람석, 여덟째는 녹주석, 아홉째는 황옥, 열째는 녹옥수, 열한째는 자옥, 열두째는 자수정이었습니다. ∘열두 성문은 열두 진주로 되어 있는데, 각 성문이 진주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성의 거리는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요한묵시록, 21:18-21, 한국천주교주교회의 本)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를 공부할 무렵에 처음으로 깊이 들여다본, 감히 표현해보건대 ‘이 말도 안 되는’ 환상적인 도시는 아직도 머릿속 선반에 진열되어 있다.


    저건 (그리스도교 진영에서는 여전히 사도 요한일 것으로 믿고 있으나) 파트모스의 요한으로 추정되는 자가 묘사한 천상의 예루살렘이다. 초월의 도시다. 사람들은 그런 도시는 문자 그대로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르코도, 아니, 실은 보르헤스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죽지 않는 자들의 도시>를 앞에 두고 한때 로마의 군단을 이끈 그가 압도당한 이유는, 그리하여 “유례가 없는 어떤 피로감”(보르헤스의 책, 18쪽)을 느낀 이유는 지성의 공포가 몰려왔기 때문이다. 왜 머리로 무서워했던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세상을 하나의 도서관이라고 잠깐 비유해 상상해보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어야 하는 이 정신의 공간이, 하지만 <죽지 않는 자들의 도시>처럼 어느 곳에도 다다르지 않고 거꾸로 된 층계와 더 이상 갈 길이 없는 낭하로 이뤄져 있다고 마음으로 그려보라. 형용할 길 없는 기괴함과 막막함과… 차라리 ‘불가해(不可解)’라 불러보자. 마르코는 그 앞에서 “너무도 기괴스러워 동떨어진 사막의 한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것이 존재하고 영속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과거와 미래가 뒤섞이도록 만들고, 한편으로는 천체(天體)를 위태롭게 만든다.”(보르헤스의 책, 19쪽)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가 좇는 무한함이란 굉장함의 다름이 아니고, 그 굉장함이란 무의미의 다름이 아닌지도 모른다. 언젠가 보르헤스의 단편 「신의 글」의 복기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에게는 의미가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다. 그래서 그 단편의 사제도 혀 끝 벼랑에서 떨어질 ‘신의 글’을 내뱉지 않고 목으로 꿀꺽 삼켜버린다. 죽어가는 인간으로 남는다. 마르코 역시 <죽지 않는 자들의 도시>를 잊어버리기로 했고, 나중의 글에서 밝힌 바대로 결국 잊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막 빠져나온 그의 앞에는 예의 사막에서 졸졸 자신을 따라왔던 그 혈거인이 있었다.



*   *   *



    혈거인은 모래 위에 기호들을 썼다. 마르코는 해독하지 못했다. 문자란 한정된 모양의 반복 열거로 말을 드러내는 것. 하지만 혈거인의 기호에는 일련의 규칙이 없었다. 가련한 자 같으니라고.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오뒷세우스(율리시스)에, 혈거인을 오디세우스의 충직한 개 아르고스에 비유하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혈거인에게 “너는 아르고스다.”라고 그리스어로 가르쳐 봐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우리들의 지각 작용은 같으나 아르고스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조합하고, 그것들을 가지고 다른 대상물들을 축조하지 않나 생각했다.”(보르헤스의 책, 22쪽)


   그리하여 혈거인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던 어느 날, 뜨거운 사막에 한 줄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설에서 처음으로 내리는 비를 맞던 아르고스는 하늘을 향한 채 울부짖었다. 어쩌면 그에게 오뒷세우스란, 즉 신화 속 아르고스가 오뒷세우스를 20년이 넘도록 기다렸던 것처럼 (그리고 아르고스는 오뒷세우스의 발치에서 죽는다) 그 주인이란, 바로 비가 아니었을까. 육신을 깨우는 비가 아르고스의 입을 열었다.


    Argos, perro de Ulises. Este perro tirado en el estiércol. “율리시스의 수캐, 아르고스. 녀석은 똥 무더기에 엎드려 있소.(필자 번역, The Penguin Press에서 출간했으며, Andrew Hurley가 영어로 번역한 『Collected Ficctiones of Jorge Luis Borges』의 영문 참조.) 마르코는 <오뒷세이아>에 대해 아느냐고 그리스어로 거듭 추궁한다. 그러자 아르고스의 정체가 밝혀진다. Ya habrán pasado mil cien años desde que la inventé. “내 그걸 만든 지도 어느덧 천백 년이 흘렀구려.”(필자 번역) 그는 우리가 대개 ‘장님’이라고 알고 있는, 그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어 전설의 작가로 회자하곤 하는 호메로스였던 것이다.


    마르코는 모든 것을 알게 됐다. <죽지 않는 사람들>이란 바로 그 혈거인들이었으며, 그가 사막에서 본 모래 섞인 개천은 그토록 찾은 <불사의 강>, 그리고 마르코가 본 도시는 호메로스가 혈거인들을 부추겨 지은 패러디적 성격의 “모든 외재적 노고라는 게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 된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표적물”(보르헤스의 책, 25쪽)이었다. 여기서 보르헤스가‘패러디적 성격’이라 표현한 이유는 호메로스가 <일리아스>를 쓰고 난 후 그 패러디인 개구리와 생쥐의 전쟁, 즉 바트라코뮈오마키아(Batrachomyomachia)를 썼다는 전설 때문이다.



*   *   *



    호메로스가 혈거인들에게 도시를 짓게 했다는 구절까지는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아르고스가 호메로스임이 드러난 순간부터 전율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정신의 무릎을 치며 침묵 속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난리의 새벽이었다. 나는 아르고스가 언젠가 말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으리라. 도대체 그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보르헤스는 이제부터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르고스가 이 단편의 열쇠임을 짐짓 모르는 척 하며 읽어 내려갔지만, 설마 호메로스일 줄이야!


    하지만 그 날 내가 얼마나 놀라고 기뻐했는지, 또한 마음속으로 광란을 춤을 추며 얼마나 감탄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맺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무려 나흘이나 헤맸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튿날, 나는 호메로스와 작별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사막을 떠난 마르코의 뒷모습까지 확인했다. 일단 그걸 복기하며 나아가본다.


    마르코는 아르고스, 아니, 호메로스에게 혈거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배운다. 그녀/그들은 <죽지 않는 자>이므로, 우선 불사성(不死性)을 생각해봐야 한다. 인간을 제외하면 피조물의 대부분은 죽음을 모르니, 불사의 존재다. 말장난 같으나, 이는 인간이 죽음에 묶여 있음을 드러내는 역설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한가? 보르헤스는 마르코의 입을 빌려 크게 두 개의 죽음을 제시한다. 하나는 아브라함 계통의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죽음이다. 현세의 숭배 양식을 계단 삼은, 하늘로 난 길이다. 이 종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상벌을 규정해놓고 현세를 정의한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다른 단편에서도 종종 관심을 보였던 것처럼 불교와 힌두교의 ‘수레바퀴’를 언급하며 그것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말한다. “그 어떤 삶도 전체를 결정짓는 요인이 되지 못한다.”(보르헤스의 책, 26~27쪽) 회귀(回歸). 이것이 혈거인들이 지닌 하나의 교의였던 것이다. 그녀/그들이 터득한 건 냉소다.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것과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 그 중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선의 추종자는 곧 악의 추종자. 짝수는 홀수. 명석함은 우둔함으로. 대응의 깨달음이다. 서두에 새겨져 있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글귀는 이 자리에 들어앉는다. 나는 너무 단순한 이분법은 아닌가, 의심했다. 세상은 과연 메트로놈 같을까? 짝지어진 가치들로 점철되어 있을까? 이것은 어쩌면 무서운 생각이 아닐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의미가 아닌가? 1에서 1을 빼버리니, 손에 쥐어진 것은 0일 수밖에 없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텅 빈 공간. “이런 식으로 들여다보면 우리들의 모든 행동들은 정당성을 가지게 되지만 동시에 무심한 어떤 것들로 변하게 된다. 거기에는 도덕적이거나 지적인 우월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보르헤스의 책, 28쪽)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죽음 이후를 상상하며 느껴본 칠흑 같은 공포가 다시 찾아왔다. 어쩌면 단편 「신의 글」에서도 느껴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소설의 사제는 말을 내뱉지 않고 인간으로 남았다. 나는 안도했다. 하지만 <죽지 않는 자들>, 그것은 …… 왜 아르고스는, 왜 호메로스는 사막을 적시는 비를 온몸으로 반기며 울었던 것일까? 어째서 그는 완벽한 평정을 비를 맞으며 부쉈던 것일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애상적이고, 심각하고, 제례적인 것”(보르헤스의 책, 30쪽)을 좇는 자다. 이것이 우리의 의미다. 그러나 마르코는 호메로스와 작별하면서 단 하나의 인사도 없었다. 했더라도 호메로스는 받아주지 않았으리라. 완벽한 평정, 그 영(零)의 세계에 있으므로.



*   *   *



    셋째 날까지 나는 텅 빈 공간과 무의미를 생각했다. 곧 지워버릴 글들을 쓰고 곧 지워버렸다. 내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일 수도 있기에, 황급히 이 세상에서 떠나보냈다. 그러나 생각은 남는다. 공포의 잔영은 낮은 구름의 그림자처럼 거대하다. 나는 있는 힘껏 그림자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했다. 의미를 좇는 인간으로 남고자, 마르코처럼 사막에서 걸어 나오려고 했다. 그건 물론 물리적으로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죽는 자>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렇게 믿고 있으며, 세상 대부분이 동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지 않는 자>에 대해 알게 됐으니, 그림자에서 빠져나온 내 등에 이상한 무언가가 붙어있는 불쾌가 느껴졌다. 이따금 공포 영화를 보면, 저승으로 들어간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저승에 뛰어든 주인공(주로 퇴마사)이 실수로 이승이 아닌 존재를 끌고 나오는 허무맹랑한 레퍼토리가 있다. 그 날 밤, 돌연 그걸 떠올리고는 몸을 움츠렸다.


    낮이 되고 빛의 구원이 충만할 즈음, 나는 나머지 이야기를 읽었다. 마르코는 수많은 인생을 산다. 무인(武人)의 삶을 살았고, 신드바드의 이야기를 필사하기도 했으며, 중앙아시아 땅을 거닐기도 했다. 점성학에 정통한 사람이기도 했고, (이 부분은 의미하는 바가 큰데) <일리아스>의 구독을 신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1921년 10월 4일 에리트레아의 한 항구에 발을 디딜 때, 이름이 ‘조셉 카르타필루스’였다. 보르헤스가 소설 속 소설을 가장하여 원고 그대로 실었다던 마르코의 기상천외한 이야기, 그 이야기의 저자 카르타필루스 말이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호메로스는 마르코였으며, 마르코는 카르타필루스였다. 무인의 삶, 한편으로는 <일리아스>와 떨어질 수 없었던 삶이 하나로 뭉쳐진다. 카르타필루스는 항구에서 바로 그 오랜 옛날을 회고한다. “홍해를 마주하고 선 내게 아주 오래된 또 다른 옛 아침들이 떠올랐다. 내가 로마의 군단장이었고, 열병과 마술과 나태가 군인들을 삼켜버렸던 그 시절을 말이다.”(보르헤스의 책, 32쪽)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볼 수 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즉 카르타필루스가 적은 원고에 적혀 있는 이야기를 믿어도 되는 것일까? 보르헤스는 원고 그대로 옮겼다고 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고 복기해보면 한 가지 의심쩍은 게 있다. 그는 로마의 군단장이었던 마르코처럼 몇 생애에 걸쳐서는 무인의 삶을 살았고, 한편으로는 <일리아스>와 아주 가까운 인생도 여러 번 살았다. 그 책을 구독했었고, 또 다른 삶에서는 작품의 기원을 두고 논쟁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묻게 된다. 저 둘은 한 명이 아닌가? 왜 카르타필루스의 기억 속에는 서로 혼재된 것 같은 두 가지의 삶이, 마치 혈거인들이 깨달은 ‘대응’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어 있는 것인가?


    카르타필루스는 자신의 진술에 거짓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원고의 내용을 진실이라 주장하다. 바로 앞에서 우리가 가졌던 의심이 실은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일단 카르타필루스는 마르코 플라미니오 루포였다. 그건 소설의 흐름 상 얼마든 추적할 수 있다. 전개 자체에서 겉으로 드러난 바다. 하지만 여기서 카르타필루스는 자신이 호메로스였음을 알게 된다. 진실을 좇던 그는 이런 생각에 이르자 의미심장한 한 문장을 쓴다. “남아 있는 것은 단지 <말들>뿐이다.”(보르헤스의 책, 35쪽)



*   *   *



    그 ‘남아 있는 말들’이란 대체 무엇일까? 보르헤스는 가짜 후기를 소설 뒤에 덧붙이는 특유의 기법으로 그 말들을 “제자리를 잃고 불구가 된 말들, 다른 사람들의 말들”(보르헤스의 책, 37쪽)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간이 저자에게 남겨준 보잘 것 없는 적선”(보르헤스의 책, 같은 쪽)이다. 다시 말해 그 ‘말들’이란 호메로스와 마르코와 조셉 카르타필루스, 그리고 그 사이의 또 다른 삶을 지칭하는 타인의 말이었다. 즉, 그 사람들의 ‘이름’이다. 카르타필루스에게는 수많은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죽지 않는 자>인 그를 대변해줄 수가 없었다. 추측컨대, 그는 끊임없는 삶을 살았으므로 1929년 10월에 (혹은 공주가 한 여행객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때가 10월이니, 어쩌면 그보다 앞서 죽었을 수도 있겠는데) 죽은 후로도 또 다른 삶을 살았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다. 방법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렇게 이어지는 또 다른 그는 앞선 시대의 사람들, 예컨대 호메로스와 마르코와 카르타필루스의 삶에 대해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며, 군인의 삶을 살 수도 있고, 아니면 <일리아스>와 관련된 학자의 삶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무엇도 새로운 것이 없는, 보르헤스가 말했던 그 ‘수레바퀴’가 돌고 돈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야만 우리는 이 단편에 담긴 최대의 미스터리 하나를 풀 수 있다. 마르코가 호메로스를 만났다는 그 미스터리를. 둘은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같은 사람인지 몰랐다. 심지어 마르코는 호메로스를 두고 ‘아르고스’라 불렀다. 소설 속 깨달음은 카르타필루스가 먼 훗날 알게 된 것이며, 따라서 회귀의 깨달음은 이 소설의 연대 상 가장 나중에 일어난 것이다. 보르헤스가 담은 원고가 그 깨달음의 증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카르타필루스가 자신의 글에서 “나는 다시 모든 인간과 똑같은 존재가 되었다.”(보르헤스의 책, 33쪽)라든지, “간단히 말해 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다, 즉 나는 죽을 것이다.”(보르헤스의 책, 35~36쪽)라고 말한 까닭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원고를 읽을 독자들에게 “나는 당신이고, 당신은 나다.”라는 하나의 거대한 일체성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신과 나를 모두 합쳐 0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카르타필루스의 이야기를 믿는 건 어렵다. 나는 믿지 않는다. 이 소설이 가짜가 아니라고 해도. 불가능한 믿음이다. 삶의 의미를 판돈으로 걸어야 하는 도박에 나를 맡길 정도로, 나는 무모하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다. 하지만 마르코가 찾았던 그 기괴한,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의 혼돈, 이빨과 내장들과 머리통이 서로를 증오하면서 우글거리고 뒤엉켜 (아마) 서로가 비슷한 형상”(보르헤스의 책, 19쪽)의 도시가 존재한다면? 그리하여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평정의 상태가 도래한다면? 그런 순간이 오게 된다면 어떨까? 죽음을 겪어보지 못한 인간 개인에게는 이런 두려움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내가 두려움을 갖게 된 건, 세상을 나에게 기울여야만 의미의 물이 고여 내 입으로 흘러들어온다는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리하여 나는 0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0을 잊을 수는 없다. 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0은 존재한다. 모든 망각되는 것들 중 유일하게.




참고 : 보르헤스는 마르코의 이야기가 조셉 카르타필루스의 영어로 된 원고에 실려 있다고 설정했다. 따라서 황병하는 이 설정에 따라 「죽지 않는 사람들」에 나온 호메로스는 ‘호머(Homer)’로, 일리아스는 ‘일리어드(Iliad)’로, 그리고 오뒷세이아는 ‘오디세이(Odyssey)’로 표기한 것 같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스페인어 원문을 보면 호메로스는 Homero, 일리아스는 La Ilíada, 오뒷세우스는 La Odisea로 표기되어 있다. 영어권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원전 역자들의 영향으로 위와 같은 단어들을 그리스어 발음을 따라 읽는다. 나는 그에 준하고자 위의 글에서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라고 표기했다. y 발음을 'ㅟ'가 아닌 'ㅣ'로 표기하는 선례들이 많으나, 나는 대학 시절 장영란 교수에게 배운 표기를 따라 전자의 'ㅟ'로 표기한다. 물론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법 용례에는 'ㅣ'로 표기하라고 되어 있다. (표기법에 무수한 오류가 있음을 굳이 지적하진 않겠다. 한 번 굳어진 표기법은 국민 정서 상 거의 바뀌지 않는다. 또한 표기법 수정이란 수백 억 원은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굉장히 많은 재정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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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3-06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듣기로는, 보르헤스도 한때 `쇼펜하우어`에 완전히 심취해서 그의 주저인『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또 읽었다고 알고 있는데, 탕기 님의 언급(그는 자신의 원고를 읽을 독자들에게 “나는 당신이고, 당신은 나다.”라는 하나의 거대한 일체성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에서도 `보르헤스가 쇼펜하우어로부터 받은 영향`을 직감하게 됩니다.(제가 쇼펜하우어의 책 속에서 만났던 가장 인상적인 구절 또한 `탓 트왐 아시(Tat twam asi)`였답니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마르코의 이야기가 조셉 카르타필루스의 영어로 된 원고에 실려 있다고 설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보르헤스 또한 스페인어로 쓰여진 위대한 소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느낌도 드는군요. 왜냐하면 세르반테스 또한 돈키호테 이야기의 원작자는 아랍인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꾸며가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오늘 문득 그 대목들이 궁금하여 다시 한번 『돈키호테』의 서문 등을 펼쳐봤는데, 역시나 세르반테스의 이야기 전달 방식은 그저 경이롭기만 하단 생각이 다시금 듭니다.

* * *

어느 날 톨레도의 알카나 시장에 나갔더니 한 소년이 비단 장수에게 잡기장이며 낡은 서류 뭉치들을 팔기 위해 나와 있었다. 나라는 사람은 길바닥에 있는 찢어진 종이라도 읽는 천성을 지닌 인간인지라 그 소년이 팔겠다고 하는 잡기장 한 권을 집어 들어 보았는데 거기에는 아랍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아랍 글자인 것은 알겠는데 읽을 수는 없어서 근처에 에스파냐어를 아는 무어인이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더 훌륭하고 더 오래된 다른 언어를 해독해 줄 사람이라 해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운좋게도 한 사나이를 찾아내 그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고 잡기장을 넘겨주었다. 그는 책 중간을 펼쳐 보더니 잠깐 읽다가 웃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물었더니 이 책의 여백에 쓴 주석이 그렇다고 했다. 내가 그것을 좀 읽어 달라고 하자 그는 여전히 웃으면서 읽어 주었다.

「내가 말한 주석은 이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자주 언급되고 있는 이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여자는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이는 솜씨만큼은 라만차를 통들어 어느 여자보다도 뛰어났다고 한다.>」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이름을 듣자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이 잡기장에 돈키호테 이야기가 적혀 있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빨리 첫 부분을 읽어 보라고 독촉했다. 그는 시키는 대로 즉석에서 아랍 말을 에스파냐 말로 번역해 읽어 주었다. <아라비아의 역사가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쓴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이야기.> 이 책의 제목이 내 귀에 와 닿았을 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감추느라고 무진 애를 써야 했다. ······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Ⅰ』, 제2부, <9장>

탕기 2016-03-06 21:29   좋아요 0 | URL
다른 책을 읽기 시작해서 보르헤스의 이 단편의 잔영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Oren 님의 댓글로 다시 그 새벽의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군요. Tat Twam Asi 였군요. 쇼펜하우어와 보르헤스가 만나는 지점은 Oren님과 저와 같은 동양 문화권의 전통을 낯설어하지 않는 이들에게 보다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보르헤스를 읽을 때는 완전히 빠져서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었군요. 쇼펜하우어와 불교와 일체성과. Oren 님의 말씀을 읽고 보니 더욱 서명해집니다. 어쩌면 저는 `바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하는 것도 같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그 생각에 이르면 마음이 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부끄러워지는 것이, 저는 세르반테스를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놓긴 했죠. (제 모니터 오른쪽에 보르헤스 전집과 나란히 꽂혀 있거든요.) 신곡도 사놓고, 도스토옙스키도 읽어야 하고, 소세키도... 제가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문학을 전공했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창피함 때문입니다. 위안 삼아 세르반테스 관련 다큐 한 편은 봤습니다만... 보르헤스와 세르반테스의 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합니다. 이탈로 칼비노의 환상적 분위기나 보르헤스의 압축력(?) 강한 단편들에 사로 잡혀 있어서, 취향이려니 하지만... 문학의 보고라고 하는 대작들은 독자로서 읽어봐야 하겠지요. 그런 이름들은 희미하지만 무겁습니다.

세르반테스의 영향이라고 하셔서 생각난 건데, 사실 보르헤스는 전집『알렙』의 여러 단편에서 세르반테스와 같은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후기>라고 소설 뒤에 덧붙여서 마치 자신이 진짜 누군가에게 비평을 받아 그걸 반박하는 `척`하기도 하고, 끝까지 픽션이 아닌 척 하죠. 저는 그게 너무 좋았습니다.^^ 보르헤스의 방대한 지식 여부를 떠나서, 한 번 들어가면 어려워도 끝까지 추적하게 만드는 매력이라고 할까요. 세르반테스도 그런 것 같으니, 인용해주신 구절에서 느낀 흥미를 믿고 올해 안으로 『돈키호테』 완독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완독 후 글을 쓰게 되면 Oren 님께 정말 감사드려야 하겠군요. ^^

oren 2016-03-07 00:13   좋아요 0 | URL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으시려거든 이왕이면 안영옥 교수님이 번역한 `열린책들` 판본으로 읽어보시길 바랄께요. 그리고 저도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는지라, `보르헤스가 세르반테스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처지는 못됩니다만, 왠지 그 둘 사이에는 남다른 유대관계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위대한 소설이 아닐까 싶은데, 사람들에게 그 기사의 이야기가 너무나 익히 알려지는 바람에 오히려 `독자들`을 끌어들이는데 크나큰 손해를 본 작품이 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봅니다. 어쨌거나, 그의 이야기 전개 솜씨는 다른 어떤 작가에게서도 일찌기 찾아보기 어려운 `비범함`이 가득하고, 이야기 자체가 품은 `해학`과 `심오함` 또한 여느 작품에서는 결코 찾기 힘든 `놀라운 경지`를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숱한 철학자들의 책 속에서 이 소설을 `비범하도록 놀라운 소설`이라고 극찬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었던가를 탕기 님께서도 조만간 꼭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탕기 2016-03-07 11:30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저는 시공사에서 나온 박철 씨의 번역본을 가지고 있는데, `열린책들` 판본을 사야겠습니다. (이미 장바구니에 넣어놨습니다.) 보르헤스 전집을 읽어보면 역자인 황병하 씨께서 각주로 세르반테스의 영향에 대해서 참조해주신 부분들이 꽤 됩니다. `보르헤스 사전`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인데, 그걸 읽어보면 보르헤스가 어느 작가와 시대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번역본 추천 감사드립니다! 하늘이 뿌옇긴 하지만,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

oren 2016-03-07 11:59   좋아요 0 | URL
저도 1권은 시공사 판본으로 읽었는데 `번역`이 좀 애매한 부분이 있더라구요. 그리고 2권은 제가 읽을 당시만 하더라도 시공사 판본으로는 번역된 게 없었지요. 그러다가 마침 열린책들 판본이 `완역`되어 나온 덕분에 그걸로 1권과 2권을 쭈욱~ 읽을 수 있었답니다. ☞ http://blog.aladin.co.kr/oren/7319354

탕기 2016-03-07 12:40   좋아요 1 | URL
비교해주신 같은 구절 둘을 비교해보니 확실히 `열린책들` 판본의 문장들이 훨씬 읽기 쉽군요. 번역본 선택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인 것 같습니다. 외람되지만, 링크해주신 글의 다른 부분들은 읽지 않았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ㅎㅎ 그래도 <`돈키호테만큼 나이를 먹도록` 여태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책망하지 마시라. 어디 그런 유명한 책들이 한둘이던가.>라고 적으신 술회에서는 적잖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이제부터 읽으면 되는 것이겠죠. 또 읽어야 할 책들은 정말 많고요.^^
 


2016년 2월 22일 월요일





    이것 참 곤란하다. 시간을 유기물로 느껴서는 곤란하다. 시간을 유기물로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만질 수 있는 하나의 덩어리로 여긴다거나, 혹은 그보다 더 심한 경우로는 불명확하게나마 그것을 볼 수 있는 무언가로 생각한다는 것인데, 그 누가 이를 착각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와서 나는 그런 착각에 대해 말하고 싶진 않다. 내가 보르헤스적 글쓰기로 실천하고 싶은 것은 (생각하고 싶은 것은) 예의 것들에서 빗나가는 하나의 상상을 통해 모든 것으로 연결되는 현상의 체험이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 나는 어디까지나 ‘상상’이라고 말했다. 현실로 말하자면 이건 그저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 시작해 여기로 돌아오는 일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빗겨나가는 것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시간은 기억들을 묽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자이르에 대한 기억만큼은 도리어 가중시킨다.”(보르헤스, 황병하 옮김,『알렙』, 160쪽)는 것이다. 보르헤스가 “El tiempo, que atenúa los recuerdos, agrava el del Zahir.”라고 한 말이다. 여태 <자이르>에 비유됐던 모든 것들, 보르헤스가 역사의 앞을 좇으며 제시한 모든 물건들, 어쩌면 저주일 수도 있는 것들은 무언가에 굶주린 인간 자체를 상징한다. 소유 강박과 중독. 그리고 종교로까지 뻗어나가는. 지구의 다른 말은 <자이르>다. 보르헤스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 우리에게 물었다.


    나의 <자이르>는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그의 단편 「자이르(El Zahir)」는 읽는 이 모두에게 자신의 <자이르>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하지만 그 <자이르>가 어떤 사물, 대상, 혹은 관념인지, 그건 중요한 건 아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자이르>라는 것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과연 주화 뒤에 있는 하느님을 발견했을까? 놀라운 단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자이르가 이 소설에서 연결된다.


*   *   *



    그렇다면 <자이르>란 대체 무엇인가? 나는 황병하 씨의 번역으로 서너 번 고쳐 읽고도 도무지 갈증을 참지 못해 (스페인어는 단어들을 빼면 도무지 읽지 못하므로) 영문판을 찾아 읽었다. 보르헤스는 1961년 『Antología Personal』이라는 제목으로 에세이, 시, 문학비평 등을 담아 모음집으로 냈다. 여섯 해가 지난 1967년, 미국의 Grove Press에서는 『A Personal Anthology』라는 영어 제목으로 이를 번역 출간했다. 편집과 서문은 앤소니 케리건(Anthony Kerrigan)이 맡았다. 내가 황병하 씨의 번역과 비교해서 읽은 건 그 책에 실린 「The Zahir」이다. 영어로 읽어본 <자이르>의 뜻 다음과 같다.


    beings or things which possess the terrible virtue of being unforgettable, and whose image finally drives people mad. 황병하 씨의 번역은 이렇다. “결코 망각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속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의 형상을 본 사람을 미쳐버리게 만드는 어떤 존재, 또는 사물을 뜻하는 무엇”(보르헤스의 책, 157쪽)


    보르헤스는 그런 <자이르>를 6월 7일 새벽에 손에 넣게 된다. 그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에서 <자이르>가 어떤 운명적 속성을 지닌 무언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우리는 당연히 하게 된다. 그 계기는 보르헤스가 마음에 두었던 ‘떼오델리나 비야르’라는 한 여인의 죽음이다. 그는 보르헤스다운 문장들로 비교적 상세하게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주변 풍경과 자신의 심정을 적어나간다. 그리하여 우리가 느끼게 되는 그의 상실감. 운명이 여기에 달라붙었던 것일까? 떼오델리나는 보르헤스가 <자이르>를 손에 넣은 바로 전 날 목숨을 끊었으며, 그 사건은 보르헤스가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까지 만들었다”(보르헤스의 책, 148쪽)고 술회했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이를 감안하고 이후의 행적을 살펴봐야 한다.


    보르헤스는 커다란 슬픔에 잠겨 새벽 2시 즈음 한 구멍가게에 들러 술을 마신다. 이는 그가 말한 것처럼 다분히 모순적이다. 모순어법, oxymoron이다. 슬픔을 물리기 위한 “천박함”과 “용이함”으로 버틴다. 하지만 그 모순 속에서 <자이르>가 그에게 다가왔다. 불분명하다. 그가 찾은 것인지, 아니면 그를 찾은 것인지. 소설을 고쳐 읽는 내내 생각했지만, (독자들마다 분명 다를 것인데) 나는 아무래도 전자의 이해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보르헤스는 슬픔에 대한 보상을 속으로 깊이 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주인이 그 은화를 건네주는 순간부터 그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역사 속의 수많은 은화이니 금화이니 하는 것들을 생각해낸다. 박식이 그를 저주로 이끈 것이리라 해도 될 만큼. 그의 열거에서 느껴지는 피로감. 심지어 보르헤스는 자신이 주화가 되는 신화 속 꿈을 꾼다. 이 정도면 충분히 돌아버린 것이리라.



*   *   *



    도무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보르헤스는 <자이르>를 버릴 결심을 한다. 아주 철저한 계획으로 “그것이 행사하는 악마적 영향”(보르헤스의 책, 152쪽)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잘 모르는 거리까지 간 다음에 <자이르>를 내고 술 한 잔을 산다. 그리고 그곳의 거리 이름이나 주소 따위를 전혀 보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아니면 금단 현상 같은 것이 있었는지, 보르헤스는 그 달 말까지 단편 하나에 매진한다. 그는 그걸 시답지 않은 작업이라 불렀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것이 하필 니벨룽들의 보물이니, 우리는 보르헤스의 실패를 읽을 수밖에 없다. 결국 그는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는다. 그리고 율리우스 바를라흐의 『자이르에 얽힌 사건에 관한 기록』이라는 책을 찾아 <자이르>를 연구한다. 물론 세상에 없는 작가와 책이다.


    여기서 앞서 영문으로 인용했던 <자이르>의 속성이 드러나며, 그것은 뒤이어 묘사되는 환상적인 어떤 호랑이에 비유된다. 그 호랑이라는 것은, 즉 <자이르>라는 것은 <자이르>의 성질을 갖는 세상 모든 물건을 의미하지만 우리에게 <자이르>는 이 세상 단 하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요컨대, “단지 한 가지만이 사람들을 매혹”(보르헤스의 책, 158쪽)시킨다. 그것은 사물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 있으며, 관념일 수도 있다. 이 매혹은 심각한 경우 사람들을 돌아버리게 한다. 보르헤스는 떼오델리나의 여동생인 (책에서는 ‘훌리따’라고도 나오고 나중에는 ‘훌리아’라고도 언급되는) 훌리아 아바스깔 여사가 “주화에 대한 공포에”(보르헤스의 책, 160쪽) 시달리다가 요양원에 갇힌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10월이 돼서야 알게 된다. 자신도 그렇게 되리라는 공포가 엄습한다.


    그리하여 보르헤스는 깨닫는다. 서두에서 인용했던 구절이다. “시간은 기억들을 묽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자이르에 대한 기억만큼은 도리어 가중시킨다.”(보르헤스의 책, 재인용) 생각건대, 그렇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짙어지는 <자이르>에 대한 집착의 농도에서 우리는 뭘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그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일 뿐인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보르헤스가 깨달은 건 사물이나 대상, 혹은 관념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이 아니다. 좁아지는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왜 그가 하필이면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구를 언급했을까. 보르헤스가 언급한 알프레드의 시는 영국의 빅토리안 시대 조각가 조지 와트가 만든 알프레드 기념상에도 적혀 있는 짧은 작품이다. 원문은 이렇다.


    Flower in the crannied wall,

    I pluck you out of the crannies,

    I hold you here, root and all, in my hand,

    Little flower—but if I could understand

    What you are, root and all, and all in all,

    I should know what God and man is.


    알기 쉬운 말로 이 세계의 오묘함을, 작은 것 하나에서 세상 전체와 우주의 몸통으로 뻗어나가는 그 “인과론적 연쇄”(보르헤스의 책, 161쪽)를 노래한 알프레드의 위대한 정신. 보르헤스는 그걸 알게 된 것이다. 아무리 감내하기 힘든 <자이르>라고 할지라도, 그리하여 보르헤스가 마치 미래의 자신이 눈이 멀게 될 것이라는 걸 암시하는 구절로 온전치 못한 노년을 기약할지라도, 그는 <자이르>를 통해 세상을 보며, <자이르>만을 보게 될 것이었다. 이 위대한 아르헨티나의 시인은 정말 그렇게 했다. 대가의 반차는 바로 <자이르>를 꿈꾸는 자들의 것이다. 부단히 단순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문자 그대로 단순해지는 것일까? 누구도 그렇게 말하진 못하리라.


    Cuando todos los hombres de la tierra piensen, día y noche, en el Zahir, ¿cuál será un sueño y cuál una realdad, la tierra o el Zahir? 황병하 씨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밤낮으로 자이르를 생각하고 있다면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일까, 지구 아니면 자이르?”(보르헤스의 책, 162쪽) 지구의 절반을 꿈이라고, 그리고 나머지 절반을 현실이라고 해보자. 이 거친 상정, 역사적 소행이라고도 할 만한 이 상정에서 우리는 <자이르>라는 것의 위치를 알게 됐다. 보르헤스의 도움으로 우리는 꿈을 꾼다. 그 주화의 뒷면에서 무엇을 발견할지는 각자의 몫이며, 그 작업이야말로 독자인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나의 <자이르>는 무엇인가? 다시 묻는다. 보르헤스는 그 뒤에 하느님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두 가지 사물이 동시에 존재하도록 허용치 않는”(보르헤스의 책, 158쪽) ‘무한히 자비로운 하느님(el Todomisericordioso)’의 불가해를. 보르헤스의 구체(球體) 시야의 한가운데 <자이르>가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역시 그러하다. <자이르>를 갖지 않은 사람은 없다. 반면, 그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자이르>를 무시하여 도망가려는 이들이 세상에는 더욱 많다. 그리하여 가뭄 중의 콩처럼 대가들이 발아하는 것이며, 예술이 때때로 우리들에게서 멀리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자이르> 앞에 서라. 새벽의 거리를 걸어라. 이 무시무시한 말에 대한 환상적 단편의 하나. 보르헤스의 위대함은 언제나 그랬듯이 이런 선언들에서 노트르담의 종소리처럼 사방의 도시로 울려 퍼진다. 이 도시 어딘가에 당신의 <자이르>가 있다. 이 소문에 당신은 밤잠을 설친다. 영락없는 독자다. 그 불면증이 나는 반갑다. 대체로 이런 글은 새벽의 어둠을 따라 출렁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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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2-22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여태껏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자이르>에 대한 얘기가 알 듯 모를 듯 그저 알쏭달쏭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 테니슨의 저 유명한 시가 등장한다니 갑자기 <자이르>에 급관심이 생기기도 하는군요. 저도 예전에 언젠가 글 한편 쓰면서 테니슨의 시를 짧게 인용한 적이 있었는데, 탕기 님의 이 글을 읽으니 왜 갑자기 생뚱맞게도 `죽지 못해 안달했던` 쿠마에의 무녀 시뷜라가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봄이 그리 멀지 않아서 그럴까요?

* * *

한번은 쿠마에 무녀가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어.
˝죽고 싶어˝

- T.S.엘리엇,『황무지』

* * *

얼마나 지루한 일인가! 멈춘다는 것, 끝낸다는 것, 광을 내지 않아
녹 슬어 버린다는 것, 사용해서 빛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 앨프리드 테니슨,『율리시스』

탕기 2016-02-22 19:0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Oren님의 느낌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l Zahir는 저주의 굴레를 쓴 영원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을까요? 죽기 전까지를 `영원`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자이르>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그렇게 본다면 저는 Oren님께서 받으신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시빌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저는 정말이지 아폴론에게, 손 안에 든 모래알과 같은 수명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을 겁니다. 모래처럼 부서지고 목소리만 남을 바에야...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오만일 수도 있겠군요.

내일은 눈이 내린다지만 Oren님 말씀처럼 봄이 오고 있습니다. `apothanein thelo.`라는 말의 뜻이 엇갈리며 새싹의 세상을 예비할 거고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수록 참으로 많은 말들이 떠오릅니다. 그런 듯 합니다. 봄이 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
 

2016년 2월 19일 금요일




    나는 이런 일이 내 곁에서 일어났거나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확언하지는 못한다. 명백한 사실은 내가 그런 일을 본 적이 없다는 것뿐이다. 그걸 근거 삼아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다. 더군다나 자신도 모르게 뭔가를 조금씩 잊다가 머릿속에서 아주 지워버리기도 하고, 평생 기억해내지 못한 어느 장면이 최후의 순간에 떠오른다고도 하니, 사람의 일은 모를 일이다. 보르헤스의 단편 「또 다른 죽음(La otra muerte)」은 망각에 대한 이야기다. 한 남자에 대한 두 개의 기억, 그 중 하나가 사라지면서 그 남자는 단 하나의 기억 속에 남게 된다.


    보르헤스는 과연 그 과정을 어떻게 기술했을까? 그를 따라가면서도 나는 기억이 지워지진 않았는지 누차 확인해야만 했다. 근래 읽은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다. 수일에 걸쳐 새벽마다 고쳐 읽었고, 나는 미궁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아리아드네를 불러 책을 덮는 일은, 하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고 토로할 수밖에 없다.



*    *    *



    “나는 안개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인간의 섬이 되어 바다의 꿈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존재의 과잉을 실은 한 척의 배가 되어, 모든 사물의 표면을 항해할 것이다.”(페르난두 페소아, 배수아 옮김,『불안의 서』, 168쪽)


    하지만 모든 것이 처음부터 안개처럼 보였던 것은 아니다. 착각이라 할지라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는 오히려 어떤 특정한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자신감으로 일단 사물과 사건, 혹은 대상의 표면에 붙어서 한동안 그 의미를 빨아먹고 산다. 그것이 표면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가 아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모름’이라는 기이한 현상은 자신이 비춰진 거울 앞에서 눈 가리지 않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무수한 앎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실은 무수한 망각 속에 산다. 그걸 추적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보르헤스는 미스터리 같은 한 편의 짧은 이야기에서 그 일을 해내려고 시도한다. 그의 추적을 에피소드 별로 따라가자면 다음과 같다.



*    *    *



    친구 가논에게서 한 장의 편지가 온다. 보르헤스의 부탁이었던 모양인데, 랄프 왈도 에머슨의 시 「과거」의 스페인어 번역본을 보내주겠다는 내용이 우선 실려 있었고, (이게 실로 중요한 내용인데) 뻬드로 다미안이 폐울혈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뒤를 이었다. 1904년 지방 호족인 아빠리시오 사라비아의 혁명군에 참여해 마소예르 전투에서 활약했다던 이 노인은 극심한 가슴 통증과 가빠지는 숨을 어찌하지 못해 죽은 것이었다. 참전 이듬해 엔뜨레 리오스의 시골로 송환되어 막일꾼으로 수 십 년을 산 그였다. 보르헤스도 1942년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무지하기 그지없는 매우 과묵한 사람”(보르헤스, 황병하 옮김,『알렙』, 102쪽)으로 기억되는 남자. 보르헤스는 그를 기억할 수 있는 한 장의 사진마저 잃어버리며, 나중에 가서는 뻬드로를 기억해내려고 하다가 엉뚱하게도 이탈리아의 한 오페라 가수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한다.


    마소예르 전투에 관한 환상적인 이야기로 작품을 구상 중이었던 보르헤스는 에미르 모네갈의 주선으로 디오니시오 따바레스 대령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대령이 기억하는 뻬드로 다미안은 전쟁에서 겁을 먹은 남자였다. 그렇다면 그가 “매우 과묵한” 사람이었던 건 겸손한 성품 때문이 아니라 전쟁에서 겁쟁이였던 자신을 끝끝내 부끄러워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이야기는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다시 한 번 대령을 찾은 보르헤스는 그때 마침 대령의 집에 있던 후안 아마로 박사를 만났다. 그도 뻬드로 다미안에 대한 기억을 지닌 남자. 그러나 그의 기억은 대령의 것과 정반대다. 뻬드로는 1904년 마소예르 전투에서 용감히 선봉에 섰다가 총탄을 맞고 말에서 떨어진 뒤 발굽에 치여 죽었다. 아니, 발굽에 치이기도 전에 이미 목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러자 대령도 그 이야기를 듣다가 어리둥절해하며 자신의 기억이 가물가물함을 시인했다. 단편에 등장하는 첫 번째 망각의 시작이다. 한동안 궁금증에 목이 탔을 보르헤스에게 4월의 어느 날 대령의 편지가 날아온다. 아마로 박사가 증언했던 뻬드로 다미안을 그가 기억해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로써 대령의 망각은 완성됐다. 보르헤스는 직접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두 명의 뻬드로 다미안, 그 미스터리. 그러나 헛수고였다. 뻬드로가 오랜 세월 일했던 괄레과이추의 한 목장을 들를 일이 있었던 그는 다미안의 임종을 지킨 목장지기 디에고 아바로아를 찾으려고 했으나,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뒤에서 알아보겠지만 이는 죽음을 가장한 세 번째 망각이었다. 기억을 가진 자의 죽음.



*    *    *



    보르헤스는 두 가지 추측을 한다. 우선 첫 번째 추측으로 두 뻬드로 다미안을 상정하는 것이다. 1946년 경 죽은 겁쟁이 뻬드로 다미안과 1904년 마소예르에서 죽은 뻬드로 다미안. 하지만 이런 추측은 추측이라고 할 것도 못 되는 것이, 왜 대령이 둘 중 한 명의 뻬드로를 망각한 것인지 도무지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추측은 보르헤스의 여자 친구인 울리케 폰 쿨만의 것으로, 다분히 환상적이다. 1904년 마소예르 전투에서 전사한 다미안이 신에게 간청했더니 신이 과거의 영상을 바꿔줬다. (신조차 과거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는 것이, 보르헤스가 밝혔던 것처럼 무수히 많은 사건들을 교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비효과’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겠다.) 신의 도움으로 뻬드로는 그림자처럼 고향으로 돌아가 엔뜨레 리오스에서 조용히 농장 일을 하며 죽음을 기다렸다.


    울리케의 이야기에서 보르헤스는 하나의 상상에 이르게 된다. 두 가지 역사적 사실에서 도움을 받는다. 하나는 단테의 『신곡』 천국편 제 21편의 124~125행의 구절(Poca vita mortal m'era rimasa / quando fui chiesto e tratto a quel cappello)이며, 다른 하나는 ‘삐에르 다미아니’라는 11세기 신학자의 주장이다. “한 번 일어났던 일을 없었던 걸로 만들 수 있다.”(보르헤스의 책, 110쪽)고 주장한 삐에르 다미아니는 『신곡』 천국편에서 단테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한 ‘피에트로 다미아노’이다. 저 구절에 앞선 121행부터 피에트로는 자신이 현세와는 달리 성모의 궁전에서는 ‘원죄를 갖고 있는 피에트로(e Pietro Peccator)’라 불릴 뿐이라고 단테에게 토로한다. 물론 이 구절을 떠올린 보르헤스가 전쟁에서 남자답지 못하게 겁을 먹는 행동을 피에트로의 ‘원죄’에 빗댔을 리는 없다. 그가 단테의 시구에서 본 건 바로 ‘두 명의 사람’이라는 콘셉트였을 것이다.


    이런 상상에 이른 보르헤스는 단편의 말미에서 드디어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1904년 마소예르에서 겁쟁이 뻬드로 다미안이 죽었다. 시골로 송환된 것이 아니라 따바레스 대령이 기억한 것처럼 겁쟁이의 모습으로 참전했다가 (따바레스 대령이 결국 잊어버린 것이 바로 이 부분인데) 죽었다. 하지만 뻬드로는 수치심을 만회하고자 신에게 삶을 바쳤고, 울리케의 이야기처럼 엔뜨로 리오스로 돌아갔다. “만일 운명이 나를 다른 전쟁으로 데려가면 그에 값하는 행동을 보여줄 것이다.”(보르헤스의 책, 111쪽) 이런 결심으로 임종까지 조용히 살았다. 그리고 임종과 함께 전쟁터로 돌아가서 장렬하고도 용감하게 전사한다. 그리하여 아마로 박사의 기억을 따바레스 대령이 마침내 떠올린 것처럼, 뻬드로는 1904년 마소예르 전투에서 용감하게 죽은 이로 기억된 것이다. 후자가 보르헤스가 말하는 두 번째 역사, 즉 실제이며, 뻬드로가 1946년 경 가논의 편지에서처럼 엔뜨레 리오스에서 폐울혈로 죽은 것은 사라져버린 첫 번째 역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역사의 말살은 어떻게 진행된 것인가? 즉, 신의 장난 같은 이 환상적인 일은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성립될 수 있었는가? 우선 단편에서 언급된 것처럼 보르헤스는 대령이 아마로 박사의 기억을 듣고는 가물가물하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박사의 기억을 떠올렸다는 대령의 편지를 받는다. 이것이 첫 번째 망각이다. 그리고 두 번째 망각은 자신에게 뻬드로 다미안의 부고를 전한 가논 그 자신에게서 일어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명한 서점인 미첼에서 보르헤스는 그와 다시 만나게 되는데, 가논은 (편지에서와는 달리) 자신은 에머슨의 영시를 스페인어로 굳이 번역할 필요를 못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충격적인 말이 이어진다. 보르헤스가 묻자, 가논은 뻬드로 다미안이 누구냐고 반문한다. 두 번째 망각이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주변 인물들이 둘 중 한 명의 뻬드로를 잊기 시작했다는 걸 분명히 확인했다. 그리고 목장지기인 디에고 아바로아를 찾지만 그는 이미 죽어 있다. 문제는 그가 언제 죽었는지 단편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편의상 이걸 ‘세 번째 망각’이라 불러보자. 뻬드로 다미안 주변 인물들의 망각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보르헤스를 제외한 그 누구도 자신이 망각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망각의 망각이다. 이로써 신은 두 번째 역사를 완성했다.



*    *    *



    하지만? 하지만 보르헤스가 남아 있는데? 그는 망각한 이들을 추적하여 드디어 신의 비밀을 풀어냈다. 그리고 이 단편을 남겼으니 어쩌면 신조차도 망각의 힘으로 그를 정복하지 못한 셈이다. 신이 보르헤스를 무시하지 않았다면 그도 진즉에 따바레스 대령처럼 한 가지 기억을 잊어버리거나, 가논처럼 아예 ‘뻬드로’라는 이름 자체를 잊어버리거나, 혹은 최악의 경우 디에고 아바로아처럼 죽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무사한 듯하다. 망각이 하나의 전투이고 하나의 칼날이라면, 그는 기적적으로 아무런 상처 없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 영예로운 군인이 된 것이다. 기억하는 자. 하지만 과연 그럴까?


    보르헤스가 무사하다는 생각을 뒤집어버릴 의심은 “나는 내가 과연 줄기차게 진실을 기록했는가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는다.”(보르헤스의 책, 112쪽)라는 구절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은 단편의 저 앞에서부터 이미 시작됐다. 나도 그걸 여느 독자들처럼 단편을 다 읽고 나서야, 심지어 나흘에 걸쳐 여러 번 읽고 나서야 알게 됐지만, 신의 비밀은 보르헤스가 무심코 흘려버려서 나중에는 아예 착각하고만 한 가지 행동에서 그 위력을 드러냈다. 그가 사진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말이다. 보르헤스는 그를 본 적이 있다. 심지어 그가 어떤 분위기의 사람인지도 기억한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이탈리아의 유명 오페라 가수의 얼굴로 착각해버리기도 한다. 대령에게서 발견된 망각의 조짐이, 마소예르 전투를 소재로 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그리하여 한 노인의 기이한 죽음을 추적했던 보르헤스 자신에게서도 발견된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이상하다. 그가 울리케의 도움을 받았다가 갑자기 떠올린 단테의 시구에는 피에트로 다미아노(삐에르 다미아니)의 말이 실려 있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보르헤스가 추적했던 한 노인의 이름은 ‘뻬드로 다미안’이다. 피에트로 다미아노를 스페인어로 바꾸면 그 이름이 된다. 그러자 보르헤스는 뒤늦게 토로한다. “뻬드로 다미안은 뻬드로 다미안으로 불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그리고 내가 그 이름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나중에 가서 삐에르 다미아니의 논거가 그의 얘기를 구상케 해주었다고 믿기 위해서 그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보르헤스의 책, 112쪽)


    이 구절의 비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길이 없다. 그가 가논의 편지를 받아 정말 뻬드로를 추적하여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인지, 아니면 혼자 도서관에, 혹은 미첼과 같은 유명한 대도시의 서점에 틀어박혀 단테를 읽다가 피에트로 다미아노의 말에서부터 이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인지, 보르헤스조차도 모른다.


    애당초 이 소설이 시작하기 전부터 보르헤스는 헷갈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른 죽음」은 신이 만든 세 번째 역사를 말한다. 나는 이 사실이 무서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르헤스의 상상력에 혀를 내둘렀다고 해야 한다.) 이 세 번째 역사는 말살 당한 첫 번째 역사와는, 그리고 소설에서는 사실이라고 언급됐다가 뒤늦게 아닐 수도 있다고 철회된 두 번째 역사와는 또 다른 차원에 있다. 바로 소설 자체의 성립 여부다. 아, 이건 신의 장난일까? 이 소설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다른 차원, 즉 다른 역사를 계속 상정하는 일뿐이다. 이런 놀이에서 우리가 신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신을 죽이는 건, 애당초 이 놀이의 룰에 없기 때문이다.





p.s 인명 표기 오타가 있다. 처음에는 목장지기의 이름을 ‘아바르꼬’라고 잘못 음역했다가 나중에 ‘아바로아’라고 제대로 표기한 것, ‘따바레스’ 대령을 뒤에 가서는 ‘따발레스’ 대령이라고 쓴 것이 있다. 원문과 대비하여 그 음역의 오타를 밝혀놓는다.


① 108쪽 디에고 아바르꼬 → 디에고 아바로아

원문 : Quise interrogar al puestero Diego Abaroa, que lo vio morir; éste había fallecido antes del invierno.


② 112쪽 디오니시오 따발레스 대령 → 디오니시오 따바레스 대령

원문 : En el coronel Dionisio Tabares se cumplieron las diversas etapas: al principio recordó que Damián obró como un cobarde; luego, lo olvidó totalmente; luego, recordó su impetuosa mue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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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8일 목요일




    신학논쟁과 이단 단죄의 역사를 들여다볼 계기는 많았다. 어트리뷰트를 알아야 하는 까닭에 미술사를 접하는 동안 나는 화형과 책형 등 온갖 고문으로 죽어간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했고, 한 교수에게 영화 <아고라(Ágora)>를 추천받아 사상의 악행이 눈앞에서 한동안 아른거리기도 했다. 핏빛줄기가 우기의 계곡처럼 흘러내렸다. 그런 꿈을 꾼 적도 있다. 사막에서 벌거벗긴 채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끌려 다니다가 두 발목이 잘리고는 태양 아래 내던져버린 한 남자. 나는 그 곁을 떠나지 못하는 군중의 하나였다.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단언한다. 사상은 위대하다. 수많은 칼을 지닌 한 신이 생각난다.


    보르헤스의 「신학자들(Los teólogos)」은 고발하는 자와 처형당하는 자의 이야기다. 논쟁의 주제는 신이다. 거의 확정적인 교리로 믿음을 강요당하는, 혹은 이미지로 광고되는 신앙에 흡수되는 이들은 그 시대를 상상하지 못한다. 차라리 그 역사 앞에 이지적 판단으로 일관하려는, 나와 같은 냉담자의 손에 더욱 쓸모 있는 도구가 쥐어졌다고 하겠다. 혼돈의 시대였다. 교부(敎父)가 성립됐다는 건, 그만큼 잘려나간 가지들이 많다는 뜻이다. 교부가 성립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것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죽어야 하는 시대였다. 그리하여 「신학자들」과 같은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성화와 기록이 남긴 사례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   *   *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시』 제 12권이 흉노족의 침입에도 불타지 않고 후세에 전해진다. 그리하여 플라톤의 가르침이 세상을 흔든다. 그는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감을 설파했다. 대관절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그런 말을 적었을까? 그는 교부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가 남긴 플라톤의 말에 사람들이 휘말린 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교묘하게도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려는 말이 아닌, 플라톤이 했다고 알려진 말만 빼서 읽어버린 것이다. 보르헤스는 그걸 압축해놓았다. 잠깐 풀어보자.


    황병하 씨가 ‘신의 도시’라고 번역한 책은 ‘신국(神國)’이라는 단어로 더욱 유명하다. De Civitate Dei. 총 스물두 권으로, 전자 10권은 지상의 나라에 대한 설파를, 후자 12권은 신의 나라[天國]에 대한 설파를 담고 있다. 바야흐로 고트가 로마를 함락했다. 그녀/그들에게 세상은 뒤집어진 채로 썩어가기 시작하는 듯 보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시대를 논증하고자 글을 썼다. 당시 만연했던 윤회 숭배도 그의 겨냥을 받았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사상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누누이 플라톤을 위대한 철학자라고 평가하는 구절 속에서도 비판을 받는다. 번역해본다. 라틴어로 된 『De Civitate Dei』의 영어 번역본을 참고했다.


    “예컨대 ‘아카데미’라 불린 아테네의 학당에서 철학자 플라톤이 가르쳤듯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하지만 분명한 간격이 있는데) 똑같은 플라톤과 학파, 그리고 똑같은 제자들이 존재하며, 그러므로 또한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들이 무수한 순환 동안 반복된다는 것처럼 주장한다. 말하건대, 나는 우리가 그러한 말을 믿게 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원죄를 위하여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으셨다. 죽음은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며[로마서 6장 9절], 우리는 부활 이후 영원토록 주님의 곁에 있으리니[데살로니가 전서 4장 16절], 우리가 지금 말하는 그분, 성스런 시편에 나와 있듯이, 오, 주님, 저희를 보호하사 저희를 이런 생각들로부터 지켜주소서. 그리하여 나는 아래와 같은 결론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윤회의 길이 사악한 까닭은 그자들이 그 철학자들이 상상해낸 윤회를 방편 삼아 돌고 도는 생을 살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교리가 돌고 도는 길이기 때문이다.”

[라틴 원전] sicut isto saeculo Plato philosophus in urbe Atheniensi et in ea schola, quae Academia dicta est, discipulos docuit, ita per innumerabilia retro saecula multum quidem prolixis interuallis, sed tamen.certis, et idem Plato et eadem ciuitas et eadem schola idemque discipuli repetiti et per innumerabilia deinde saecula repetendi sint. Absit, inquam, ut nos ista credamus. Semel enim Christus mortuus est pro peccatis nostris; surgens autem a mortuis iam non moritur, et mors ei ultra non dominabitur, et nos post resurrectionem semper cum Domino erimus, cui modo dicimus, quod sacer admonet psalmus: Tu, Domine, seruabis nos et custodies nos a generatione hac et in aeternum. Satis autem istis existimo conuenire quod sequitur: In circuitu impii ambulabunt; non quia per circulos, quos opinantur, eorum uita est recursura, sed quia modo talis est erroris eorum uia, id est falsa doctrina.


    보르헤스의 작품에 나오는 무변교도(환상교도)들은 여기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하지만 분명한 간격이 있는데) 똑같은 플라톤과 학파, 그리고 똑같은 제자들이 존재하며, 그러므로 또한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들이 무수한 순환 동안 반복된다.”는 구절만을 차용하여 역사의 순환을 믿었다. 바퀴는 윤회의 상징이었고, 일부 과격한 이들은 뱀까지 숭배했다. 뱀은 당시 하느님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징이었다. 따라서 아낄레아의 보좌 주교인 소설 속 아우렐리아노는 이들의 논리에 공박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 경쟁자가 등장한다.



*   *   *



    후안 데 빠노니아. 이름부터 당시 있을 수 없는, 가공된 자다. 그는 아우렐리아노의 철저한 미움을 받는다. 즉 후안의 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우렐리아노는 그를 억지스런 강변이나 설파하는 정도의 인물로 생각했지만 어떻게든 그를 능가하고 싶다. 어쩌면 그에게 무변교도들의 득세는 자신의 우위를 증명해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리라. 결국 아우렐리아노는 후안 데 빠노니아보다 앞서 이교를 공박하기로 한다. 그렇게 반박문을 적기 위해 쏟아 부은 노력은 무려 9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그자와는 다르게 써야 한다. 놈은 뭐라고 말하더라? 그래, 그 녀석은 늘 자신이 예지자인 척 굴었지. 고결한 분위기. 민중들은 놈의 그런 분위기를 좋아했다. 속아 넘어간 것이지. 미련한 것들. 내가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이 보좌 주교인 나의 몫이다. 그리하여 아우렐리아노는 삼단논법, 모독적 언사, 동음반복, (nego, autem, nequaquam 따위의) 부정어법, 이교도(그리스) 설화의 예시, 오리게네스와 키케로, 플타크(플루타르코스)의 인용 등으로 반박문을 채워나갔다.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그는 만족했다. 하지만 10일 째 되는 날, 후안 데 빠노니아가 보낸 반박문 사본을 읽은 아우렐리아노는 조소 속에서 또 한 번의 열등감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글이었지만 훨씬 쉬웠다. 어떻게 해야 하나? 굴욕감 속에서 그는 수정하지 않은 반박문을 공의회로 보냈고, 후안 데 빠노니아가 공박의 담당자로 임명되었으며, 이 공박으로 무변교 교주라 알려진 에우포르부스가 화형을 당했다. 이 화형식은 아우렐리아노의 철저한 패배와 다름없었다.


    이후 둘은 같은 입장에 서있는 전쟁을 계속했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안주의를 공격할 때도 그랬고, 지구가 사각형이라고 주장하는 코스마스의 이론에 옹호할 때도 그랬다. 이윽고 아우렐리아노에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코스마스의 지형학 이론에서 불거진 이단으로, 보르헤스는 여러 이름들을 알려주나 당시에는 대체로 아우렐리아노가 붙인 ‘어릿광대교’로 불린 집단이었다. 이 집단의 득세가 기회였다. 이번에야말로 후안 데 빠노니아를 이길 반박문을 쓰겠다.


     어릿광대교는 금욕주의를 표방한 영지주의의 일파이지만 보르헤스의 소설에 ‘영지주의’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이들은 오리게네스처럼 불구가 되는 (고환을 자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심지어 눈으로부터 느껴지는 온갖 욕정에서 해방되고자 눈을 뽑기도 했다.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Vreme čuda)』에도 ‘바르티마에우스’라는 자가 이런 말을 한다. 그는 맹인이었으나 예수의 기적으로 눈을 얻은 자다. “그런데 이렇게 눈을 얻고 나니 사랑을 잃는구나!”(보리슬라프 페키치, 이윤기 옮김,『기적의 시대』, 128쪽) 이런 금욕주의가 방종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둘은 양면의 관계인가. 살인, 남색, 근친상간, 수간 등을 일삼고 모든 신을 모독했으며, 이상한 경전을 획책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앞서 처단 당한 무변교도들의 영향을 받아 성서의 구절들을 교묘하게 편집하기도 했으며, 보르헤스가 ‘프로테우스적인 사람들’이라고 한 그녀/그들은 악을 통한 정화를 추구했다. “악한 자가 되지 않는 것은 사탄적인 교만”(보르헤스의 책, 59쪽)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왜 이것이 가능한가?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실재는 천국에 있고 현실에 있는 것은 또 다른 ‘같은 사람’이라는 사상을, 즉 ‘이중적 존재’를 주장하는 사상을 추종하기 때문이다. 한쪽은 금욕주의, 다른 한쪽은 방종. 그야말로 혼란이다. “영지주의 집단들은 기독교 가르침의 일부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중략) 영지주의자들의 윤리적 태도는 매우 다양했는데, 한편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금욕주의적인다가도 다른 한편에서는 완전히 방종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폴 존슨, 김주한 옮김, 『기독교의 역사』, 98쪽)



*   *   *



    이를 폭로하기로 한 아우렐리아노는 또 한 번 열성적으로 고서들을 탐독하면서 인용할 만한 문구들을 골라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똑같은 것은 두 개가 있을 수 없다’는 문제에 이르러서 무슨 이교적 문장을 보태어야 하는지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말을 적어놓고는 훌륭한 논박이 세워져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그 인용된 문장이 다름 아닌 후안 데 빠노니아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그 순간 아우렐리아노는 무수한 번민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문장을 빼면 자신의 표현은 쓸모가 없어진다. 표절 시비는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킬 것이 분명하다. 결국 아우렐리아노는 “금세기의 박학한 한 신사가 과실이라기보다는 경솔함으로 인해 이미 언급”(보르헤스의 책, 61쪽)된 것이라는 문구로 무마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는 범죄가 아닌가! 명백히 후안 데 빠노니아의 그 문장이 들어간 책 제목 자체가 『환상교의 불합리』, 즉 무변교의 교리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였다. 아우렐리아노, 그는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후안은 어릿광대교의 속임수에 넘어간 한 대장장이의 끔찍한 범죄로 분노에 빠진 재판관들 앞에서 자신의 명제를 철회할 수 없음을 끝까지 고집했다. 무엇이 재판의 ‘핀트’였는지를 그 박학했던 이조차 알지 못했다. 전말을 알았더라면 그는 무변교의 전염병적 이단에 빠지는 일은 죽어도 할 수 없다고 강변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걸 몰랐기에 결국 죽었다. 죽을 때까지 지킨 무엇이 있었다. 그렇게 후안 데 빠노니아의 고집은 사흘이나 꺾일 줄 몰랐다. 그는 화형 당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아우렐리아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후안 데 빠노니아의 얼굴을 본다. 하지만 “그는 그 얼굴이 다른 누군가의 얼굴인 듯한 생각이 들었다.”(보르헤스의 책, 63쪽)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랴. 쾌유의 감정마저 들었다. 이후의 삶은 마치 자신의 죄를 덜어내려고 하듯 국경과 외지 따위를 전전하며 수행적 삶으로 일관했지만 그럼에도 후안 데 빠노니아를 고발했던 그 범죄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도무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보르헤스는 그가 루사디르에서 “시대 착오적”(64쪽) 설교를 했다고 썼는데, 그것이 바로 변론의 일환이었을까? 그러던 아우렐리아노도 불 속에서 죽었다. 히베르니아(아일랜드)의 한 오두막에서 번갯불에 탄 나무들 속에 갇혀 죽은 것이다. 후안 데 빠노니아의 화형.



*    *    *



    보르헤스는 은유로 소설을 닫을 수밖에 없었노라 고백한다. 그것은 우리가 확인할 길이 없는 화형 이후의 대화, 술회, 혹은 고해 등이 이 소설 뒤에 매달려 있는 까닭이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더군다나 ‘천국’이라는 곳에 대해서는 글로 아무리 써봤자 알 수 없는 까닭이다. 작가는 말한다. 아니, 후안 데 빠노니아와 아우렐리아노가 왜 같은 뜨거움 속에서 죽었는지, 왜 아우렐리아노가 화형 당하는 후안의 얼굴에서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본 것인지, 그리고 여태 언급했던 무변교도의 윤회, 그리고 어릿광대교의 한 인간을 이루고 있는 두 존재가 무슨 의미였는지 말한다.


    두 사람이 천국에 들어갔다고 가정하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정통교도와 이단자, 증오하는 자와 증오를 받는 자, 고발자와 희생자는 한 인간을 이루고 있다. 아우렐리아노는 죽은 후 그걸 깨달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에서 말한 그 부활 이후의 순간, 즉 ‘주님’의 곁에 앉게 되는 순간, 모든 벽은 허물어지고 수많은 논쟁은 무의미해지며, 화형이 남긴 잿가루의 쌉싸래한 맛만이 남게 된다는 것을. 보르헤스가 보기에 세상은 여러 종파들이 들끓던 4~5세기의 그곳과 별로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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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6일 화요일




    보르헤스의 감옥에 갇혀 나흘을 보내고, 나는 계시라도 받은 듯 재규어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계시라니… 불똥이 손등에 튀기라도 한 것처럼, 기름 위로 옮겨 붙는 불의 속도로 수십 장을 써내려가다 마침표의 끝을 잡아 휴지통으로 밀어 넣었다. (아래의 바탕체 글은 그 휴지통에서 발견된 화석 문자의 파편들을 해독한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무수한 글들 사이로 감옥의 재규어도 목숨을 다해 사라졌다. 보르헤스의「신의 글(원제 : La escritura del dios)」은 재규어가 갇혀 있던 감옥의 다른 쪽 편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늙은 남자, ‘치나깐’이라는 이름의 피라미드 마술사가 쏟아내는 근원적 비밀에 관한 짧은 이야기다.


    나, 재규어는 감옥에 있다. 원주민들은 뻬드로 데 알바라도에게 제물을 바쳐 그의 노여움을 피할 생각으로 내게 떼거지로 덤벼들었다. 돌로 된 감옥은 깊다. 재단된 돌들로 보건대, 이건 분명 사람들이 만든 것이지만 언제 파내려가고 쌓아 올린 것인지를 내가 알 길은 없다. 그건 2등분된 이 감옥 다른 쪽에서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를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 늙은 남자도 마찬가지다.


    꼬르테스의 부하인 알바라도가 사원을 파괴하고 치나깐을 잡아 감옥에 가둔다. 이 사제(마술사)는 한 마리의 재규어와 함께 거대한 반구(半球) 안에 갇혀 늙어간다. 시간을 보내야 하는 단순함과의 사투, 그것을 위해 치나깐은 수많은 것들을 기억해내다가 문득 신이 지었다고 알려진 “마술적인 문장 하나”(보르헤스, 황병하 옮김,『알렙』, 165쪽)에 집중한다. 그는 사제였으니. 그리하여 변하지 않은 것이 이 세상에 무엇이 있는가를 떠올리다가 반대편 감옥에 있는 재규어를 바라본다. 재규어의 무늬를.


    왜 치나깐은 재규어를 신의 징표라고 생각한 것일까. 과연 재규어의 무늬가, 보기에도 현기증 나는 그 경이로운 무늬가 “변천과 패망을 겪고” “노쇠해”가는 개별적인 것들보다 영원한 것인가. 그럴 순 없다. 나는 재규어의 목소리를 빌려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재규어들은 반짝이는 물건이나 예리한 날 따위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사납게 사냥감을 덮치되, 예의 신성한 대지의 일자를 향한 흠숭은 변치 않는다. 나 또한 죽을 것이고, 이 비밀의 가죽은 다른 누군가의 동맥 속을 맹렬히 흐르는 숨결이 될 것을, 나는 안다. 인간만이 모르고 있다. 치나깐은 미쳐버린 것이 아닐까. 영원을 빙자한 재규어들의 교미와 출산과 그 무한한 생산의 그물망에 신이 메시지를 새겨 넣었다니… “재규어들의 살아 있는 껍질”에 신의 문장이 있다니… 치나깐은 감옥에서 몇 해를 살았는가. 알 수 없다. 보르헤스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사제는 신의 글에 사로잡혀 있다. 무엇이 그를 미궁으로 몰아넣었을까. 물론 감옥에 있는 처지가 문자 그대로 그를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는 사제였다. 신의 뜻을 좇는 이. “재규어라는 구체적인 수수께끼보다 신이 쓴 문장의 본질적인 수수께끼가 나로 하여금 더욱 안달이 나도록 만들었다.”(보르헤스, 167쪽) 그 문장이 명백하고도 즉각적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치나깐의 믿음에는 조바심이 가득하다. 그렇다. 이 노인은 오랜 시간 감옥에 있었고, 곧 죽을 것이다. 머지않아 사라짐, 그것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죽음일 것이다. 감옥의 비현실 속에서 무너지고, 그는 꿈을 꾼다.


    저 늙은이도 젊은 시절, 즉 생기가 돌고 피가 끓어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먹잇감이었던 시절에는 밤마다 고함을 치며 울었다. 하지만 언제나 나의 인내보다 훨씬 빨리 지쳐 쓰러졌고, 낮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낮과 밤을 구별할 줄 모르는 자였다. 인간은 어둠 속에 있으면 가장 중요한 것부터 잃고, 종내에는 모든 걸 잃어버린다. 나는 저 불쌍한 동물이 허덕이며 지쳐가는 모습을 보고 아주 오래 전 저자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치나깐은 모래들에게 질식당하는, 모래들이 입을 무너뜨리는 꿈을 꾸다가 깨어난다. 그 꿈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너는 깨어나기도 전에 질식해서 죽을 것이다. “모래의 숫자처럼 꿈 또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보르헤스의 글, 168쪽) 하지만 사제는 깬다. 치나깐은 현실에 감사한다. 처음 감옥에 들어왔을 때 저주와 분노를 퍼부었던 그 모든 것에 감사한다. 그것은 生에 대한 감사인가? 그럴 것이다. 죽음을 머금은 꿈에서 깨어남과 함께 다시 태어난, 치나깐의 새로운 삶에 대한 감사일 것이다. 지독한 악몽에서 벗어나 새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합일이었다. 역자 황병하 씨는 보르헤스가 불교의 입을 빌려 치나깐의 꿈과 깨달음을 소설에 재현해냈다고 풀어썼다. 동감한다. 헤세의『싯다르타』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깨달음은 시공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곳에 동시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깨달음. 그 우주의 구성 방식을 알아 느끼게 되는 기쁨이 이후 몰려온다.


    그 순간 치나깐은 그토록 들여다봤던 재규어의 무늬 속 신의 글을 읽어낸다. 그것은 무작위로 된 40음절, 14개의 단어다. 전지전능의 길로 갈 수 있는 암호다. 여태 그것을 읽어낸 이는 치나깐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그는 무시무시한 힘을 갖게 되었다. 석조 감옥을 무너뜨려 늘 어둠뿐이던 그에게 낮을 선사할 수 있는 힘, 무병장수와 불로장생의 힘, 재규어가 알바라도를 죽일 수 있는 힘, 피라미드와 제국의 재건을 가능케 하는 힘, 스페인으로부터 아스테카 제국의 영토를 되찾는 힘… 그러나 그것이 과연 신의 글이 치나깐에게 허락한 힘이 될 수 있을까? “신들의 뒤에 있는 얼굴 없는 신”(보르헤스의 글, 170쪽)을 봤다는 치나깐이, 그리하여 합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치나깐이 깨달음 뒤에 쏟아내고 있는 건 온통 복수와 해방, 그리고 되돌림에 대한 것뿐이다. 그는 아직도 감옥의 궁륭 안에 있다. 깨달음이 그를 새 사람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실패의 꿈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실패한다. 치나깐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감옥 안에 갇혀, 아니, 인간의 육신 안에 갇혀 진리의 말을 내뱉지 못한다. “우주의 타오르는 구조들을 보았던 사람”(보르헤스의 글, 171쪽)이라고 해도 그 말을 읊는 순간 예전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완전한 자가 된다. 그런 것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진리의 사람. 그녀/그를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무도 아닌 그런 존재”인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치나깐은 말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의미는 미련을 낳는다. 미련이 결국 더욱 커져서 의미가 그 밑에 깔린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감옥’이라고 부른다면, 그 감옥에서 우리는 미련의 대기를 마시고 내뱉으며 산다. 깨달음은 원형 천장의 뚜껑을 열고 나가는 일. 우리는 나가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버릇처럼 말하고는 하지만 정말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일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은 그저 사람이고 싶은 존재일 뿐인 것은 아닐까.


    치나깐은 궁륭에 갇혀 있다. 이 감옥, 실은 언어로 되어 있는 감옥이다. 말만 뱉으면 나갈 수 있으며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물리적으로 속박하지 않으나, 우리가 탈출하려고 하지 않는 감옥이다. 그걸 ‘신의 말’이라 부른다.


    “이 최초의 언어는 지상의 모든 소리들 위에 궁륭을 만들었고, 자연 전체의 모든 목소리들이 그 안에 함께 모였다. 지상에서 솟아오르는 모든 것이 하늘의 궁륭에 수용되듯이, 지상의 모든 음성들은 언어라는 그 한 하늘에 수용되었다. 모든 음성들이 그 언어의 하늘 속으로 들어가서 그 일부가 되었고, 따라서 그 하늘 안에서는 어떠한 음성도 이해되었다.”(막스 피카르트, 최승자 시인 옮김,『침묵의 세계』, 63쪽)


    피카르트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지만, 이 말을 치나깐이 갇힌 감옥에 가져다대면 근사한 비극이 완성된다. 40음절 14개의 단어로 된 “억눌림과 광대함의 느낌”(보르헤스의 글, 163쪽)은 인간의 삶이며, 그 비극 안에서만 인간은 의미가 있다. 깨달음은 의미망을 벗어나는 일이다. 신의 글은 아무 의미도 없다. 철저하게 인간이고 싶다면 우리는 언젠가 치나깐과 같은 고민과 그 끝에서 만나는 기나긴 침묵을 끌어안게 된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사자(死者)가 된다. 하늘은 높다. 어디까지고 언어가 그 안을 채운다. 치나깐이 내뱉지 않은 말은 어디에라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쉽게 볼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은 차라리 비극 중 다행이다. 보르헤스는 그걸 알려준다. 신의 글을 아는 자는 끝내 침묵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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