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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12.12.30

 

 

 

  강의를 마치며 교수는 우리에게 어디 가서 자랑하고 다녀도 좋을 것이라 했다. 한 차례 태풍처럼 불었던 인기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 책의 모든 내용을 꼼꼼하게 따져가며 정독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는 농담을 한 것이리라. 우리가 정말 어디 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온 사례들과 윤리이론의 근거들을 자랑 삼아 말하고 다닌다고 하자. 누가 들어줄까. 한 교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는 정의를 몰라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제목에 목말라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의롭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정의를 막연하게 갈구하고 있다.”


  나는 강의실 뒤편에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정의롭고자 하지 않는다, 라. 나는 어떠한가? 알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정의’는 추구해야 하는 미덕이다. 하지만 정의는 권력이 되지 못한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우리를 움직일 만한 행동 기제도 되기 힘들다. 정의로운 권력은 없다. 지난 『정치와 진리』의 리뷰에서도 말했지만, 정치는 그 속성이 윤리·도덕과는 다르다. 인수위와 관련된 지난 KBS 다큐멘터리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왔다. 쓸 만 한 사람 참 많은 줄 알았는데, 정작 자리에 앉히려고 보니까 마땅한 사람이 없더라는 토로였다.

 

 

*    *    *

 

 

  『정의란 무엇인가』는 미국에서 왜 공동체주의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지를 밝혀주는, 의도된 논리적 구조물이다. 샌델이 여러 철학자들의 위치를 배치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글을 잘 구성하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주요 논객들이 『무엇이 정의인가』에서 이미 논했었다.


  샌델이 충돌시키는 주요 이론들을 열거해놓고, 그것들이 어떻게 대결하는지 구도만 살펴보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공동체주의가 왜 도출될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된다. 성실한 독자들이라면 자신의 - 평소 이를 고민한다면- 윤리적 위치에 따라 각 이론들의 지점에 멈춰 서서 굳이 공동체주의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샌델의 말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끝까지 가게 될 것이다. 읽는 것과 수긍하는 것이 동시에 행해진다.


  먼저 나오는 것은 공리주의이다. 벤담의 것과 밀의 것이 다르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샌델은 이 두 공리주의의 대가들을 하나로 모아 반박한다. 마치 불도저처럼 도덕을 과학의 영역으로 밀어붙이는 벤담의 이론에는 성긴 부분들이 많다. 그 안에서는 정의를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공리주의가 현대철학과 윤리학에 있어 경제학의 도움을 받아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는 것은 강조해야 할 것 같다. ‘효용’이라는 가치는 우리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도덕과 윤리 앞에서 어떤 신비로운 감상에 빠져 있을 때마다,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효용이다.


  샌델은 공리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세 개의 이론을 연달아 제시하며, 그 내용은 3~6강, 거의 1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을 꽉 채운다. 그 이론들의 대표 격인 이들에는 로버트 노직, 임마누엘 칸트, 그리고 존 롤스가 있다. (책 순서와는 달리 교수는 칸트, 노직, 롤스 순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칸트가 공리주의의 반발로 ‘권리’, ‘존중’, ‘자유’의 개념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노직이 공리주의를 비판하며 주장한 것은 결과가 아닌 진행과정(process)을 밝혀야 정의의 문제를 따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노직의 위치는 공리주의와 존 롤스 사이에서 동시에 충돌할 수 있는 자유지상주의의 정점이다. 자유지상주의란 쉽게 말해 “내가 내 것을 처분할 권리가 있는데, 누가 감히 그 권리를 침해하려고 하는가?”라는, 결코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은 ‘권리’ 논쟁으로 귀결되는 이론이다.


  우리는 “부자들의 돈을 조금만 떼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사회가 더 여유로워지지 않을까?”라고 넋두리를 하곤 한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를 이해하면 이런 넋두리는 하나의 범죄로 취급될 만하다. 1970~80년대 우리나라에 급속도로 수입되기 시작한 이 이론은 경제발전과 함께 자연스럽게 옮겨왔는데, 아마 대다수의 경제·경영학도들은 자유지상주의적 사고에 익숙할 법도 하다. 강의 중에도 자유지상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 심지어 - 전부가 경영을 전공 중인 학부생들이었다.


  그들이 부자의 돈을 재분배하는 것, 소위 ‘부의 재분배’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슨 권리로 나의 돈을 빼앗는가?”라는 거의 확정적인 반박이다. 공리주의자라면 결과적으로 사회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결과가 행복으로 딱 떨어질 수 있느냐를 문제 삼으면 공리주의는 다시 측정의 문제에 빠지게 된다. 오히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부의 재분배’를 반대하며 내놓는 ‘권리’의 논거가 훨씬 단단해 보인다.


  세계적 갑부인 프랑스의 베르나르 아르노 현 루이뷔통 회장은 올랑드 대통령의 75% 부유세 정책 때문에 벨기에 국적을 취득하겠다고 해서 논란의 중심에 오른 적이 있었다. 연간 14억 원, 즉 100만 유로 이상을 버는 부자들에게 증세하는 정책은 프랑스 좌파의 핵심정책 중 하나였다. 그러나 여야를 막론한 비난을 받은 쪽은 올랑드 대통령이었다. 물론 좌파 언론인 <리베라시옹> 등에서는 “꺼져, 부자 멍충아!”라는 식의 원색적 문구로 베르나르 회장 측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런 공격은 국민배우 드 파르디유도 받을 만 했다. (오늘 우리나라 언론들은 일제히 75% 부유 증세가 프랑스 헌재로부터 결국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았다는 보도를 냈다. 올랑드 대통령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국가가 국민들에게 아버지처럼 행동하는 것, 입법, 소득의 재분배 같은 것들을 반대한다. 재미있는 것은 자유지상주의가 개인의 인권을 다루는 분야에서는 오히려 복지국가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지상주의의 스팩트럼은 매우 넓으나, 한 가지 가치, 즉 ‘개인’이라는 가치는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한다. 노직의 말이다.


  “개인들은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세상에는 어느 인간이나 집단도 이 권리들에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이 권리들은 매우 강력하고 광범위한 것으로……”
  (Individuals have rights, and there are things no person or group may do to them (without violating their rights). So strong and far-reaching are these rights that ……)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칸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가 그의 구미에 적당하게 요약되어 있으나, 사실 1785년에 작성된 이 텍스트의 개념들은 상당히 어렵다. 특히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 칸트의 것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간극도 있는데, 예를 들어 샌델이 중요시한 ‘자유’가 있다. 우리는 ‘자유’라 쓰고 개인의 위대한 권리인 것처럼, 그리하여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때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정도로 오용하곤 한다. 학생인권조례 이후 교사들이 학생들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중시한다. 그러나 나의 자유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나의 자유는 축소되어 타인의 권리와 조화될 필요가 있다. 일부 학생들이 문제가 된 건, 그들이 저 조화를 전혀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반면, 칸트는 자유를 ‘자율(自律)’이라 쓰고 우리에게 인간이기 때문에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의무들을 던져놓는다. 이러한 의무들은 칸트의 그 유명한 ‘순수이성’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갖고 있는 것이다. 칸트의 도덕이 감동적인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한 느낌을 주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절대적 의무 때문이다.


  칸트는 보편적 인권으로 ‘권리’, ‘존중’, 그리고 ‘자유’를 수면 위로 끌어낸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이러한 인권이 굳건하게 유지되어야 할 절대적 이유로 앞서 말한 인간의 이성을 꼽았다. 이렇게 하다 보니 결과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와는 전혀 다른 이론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칸트는 공리주의보다 훨씬 따뜻하다.


  칸트는 인간이 선의지(Guter Wille)를 가졌다고 했다. 모든 자질들 중에서도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선의지는 그 수많은 자질들을 올바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지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용’을 제시했던 것과 패턴이 유사하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나왔다. 선의지는 “보석과 같이 그 자체만으로도, 그 자신 안에 온전한 가진 어떤 것으로 빛날 터이다.” 중요한 것은 오직 동기이다. 이 동기를 갖고, 내가 한 행동을 모든 사람들에게 권할 수 있다면, 그것이 유일한 준칙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칸트의 윤리가 지켜질 수 있는가를 묻는 자리에서 샌델은 확신을 하지 않는다. 그 예로 클린턴의 성추문 사건을 드는데, 칸트에 따르면 정직하게 사람을 속이는 일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칸트는 윤리에 있어 정말 중요한 개념들을 제시했고,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윤리 관념을 끌어내 종교의 윤리를 전복시키는데 역사적인 역할을 했으나, 샌델에 따르면 칸트의 것은 우리가 따르기에, 소위 ‘2%’ 부족한 정의를 제시할 뿐이다.


  이윽고 롤스이다. 샌델은 롤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를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에둘러 비판하거나 하진 않는다. 롤스의 『정의론』은 자유지상주의와 첨예하게 맞선다. 우선 롤스는 ‘공정한 정의’라는 개념을 통해 애당초 합의하고자 한 여러 사람들 모두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줘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 사실이란 그들이 어떤 합의를 하게 되면 향후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놓일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즉, A를 고르면 너는 훗날 멋진 의사가 될 것이다, 라든가, B를 고르면 평생 거지로 살 것이다, 와 같은 사실이다. 이것들에 대해 ‘무지의 베일’을 쓰게 되면 우리는 합의를 함에 있어 어떤 것들을 구체적으로 논하고자 할까? (샌델은 더 나아가 ‘계약’이라는 것 자체도 도덕적 한계를 갖는다고 반박한다. 합의가 의무를 발동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의의 제 1원칙이다. 어떻게든 우리가 시작을 평등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한 네티즌의 재미있는 댓글이 있다. 얼마 전, 위대한 축구 선수 메시의 아이가 태어나 화제가 되었다. 그러자 누리꾼들은 온갖 종류의 댓글을 달았다. 그 중 하나는 이렇다. “메시의 아들 : 아빠,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난감을 갖고 싶어요!” 그러자 메시가 얼마 후 하는 말이 “아들아!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난감 가게를 사왔단다.” 산타클로스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꿈만 같을 것이다. 메시의 아이는 사회적으로 출발하는 선상이 중하류층의 아이들과 판이하다. 누리꾼들은 메시가 서 있는 곳을 일컬어 이른바 ‘신계(神界)’라 한다.


  롤스가 이걸 몰랐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차등원칙’을 마련했고, 이것이 바로 그의 『정의론』의 골자가 된다. 롤스는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리라는” 조건 하에, 즉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기대되는 선에서는 불평등을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불평등은 롤스가 ‘도덕적으로 우연(morally contingent)’한 것들이라 지적한 출생, 재능, 집안, 교육 수준 등을 의미한다. 샌델이 공리주의, 칸트주의, 정의론 중 가장 호의적으로 서술한 것이 바로 롤스의 것이다.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함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거대한 이론들과 첨예한 문제들을 살펴가다 보면 독자들은 여전히 저들 이론이 해결하지 못한 무언가가 갈증을 유발한다는 것을 눈치 챌 것이다. 때문에 샌델은 서서히 그의 입장, 즉 공동체주의로 가는 길목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이다. 그에 앞서 샌델은 소수집단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을 통해 ‘영예’, 『정의란 무엇인가』의 역자 이창신은 ‘영광’이라 오역한 ‘honour’의 문제를 짚고 넘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의 목적(purpose, telos)에는 필연적으로 영예가 주어진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그의 정치철학은 호소력을 잃었으나,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 국가[폴리스]가 좋은 품성을 지닌 시민을 양성하고, 그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해 능력구현의 기회를 가지며, 그러한 폴리스를 운영하기 적합한 사람들을 선정하고, 그들에게 합당한 영예를 준다면, 그것이 또 하나의 교육적 효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주장이다. 폴리스는 덕[(virtue)이 있는 시민들을 길러내고, 그들을 통해 운영된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덕 윤리학’이라 한다. (그가 말하는 ‘덕’은 능력에 있어서의 훌륭함이다. 도덕의 ‘덕’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여기서 샌델이 강조하고자 한 것은 능동적인 참여와 교육이다.


  샌델은 곧바로 ‘충직의 딜레마’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넘어간다. 여기서 샌델이 독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던지는 질문이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국가가 과거의 사건에 대해 사죄해야 하는가?” 쉽게 말해 집단책임, 즉 collective responsibility의 문제이다. 과연 나에게는 얼마만큼의 도덕적 몫(moral stakes)이 있는가?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나는 내가 자발적인 합의, 동의, 약속 등을 통해 초래한 것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그건 my owe이다. 때문에 개인이 국가에 앞선다고 주장한 로크식 생각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최근 이러한 ‘도덕적 개인주의’ 때문에 말이 많다. “내가 안 했는데, 왜 나한테 책임을 물어?”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그래도……”


  샌델이 우리에게서 유도한 생각도 바로 이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뭔가 책임을 져야 할 것만 같다. 사실 그의 공동체주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다지 생소한 윤리이론이 아니다. 우리는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주체임을 강조하면서도 그것 이외의 ‘플러스알파’가 우리를 규정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가족으로부터는 가족애를, 종교로부터는 신념을, 그리고 역사로부터는 애국심과 동질감을 얻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나’ 이외의 정체성을 심어준다. 이를 ‘부담을 감수하는 자아’라는 의미로 ‘encumbered selves’라 부른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밀고 끌어준다는 말은 상식이고, 여기에 편승하지 않으면 무능력한 사람인 것처럼 취급되는 것이 이 사회의 오랜 병폐임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한편으로 이런 문화는 보편적인 권리를 부정하고, 지나치게 소규모의 권리만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냐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샌델은 공동체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보편의 권리를 동시에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하나의 이론을 끌어온다. 그와 같은 계열에 서 있는 매킨타이어의 ‘서사적 인간(storytelling beings)’이다.


  매킨타이어에게 ‘서사’, 즉 스토리란 우리가 삶을 살며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단순한 드라마의 스토리가 아니라, 목적과 방향을 갖고 순간마다 해석하는 것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의 스토리가 있다면 그가 보기에 그보다 더 큰 공동체의 스토리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실재한다. ‘나’가 사회에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정의는 홀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공동체의 스토리와 나의 스토리를 조화시킬 의무가 있다. 때문에 매킨타이어는 개인주의를 “도덕적으로 천박”한 이론이라고 비난한다.


  우리에게는 의무가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앞서 칸트가 ‘자율’이라 말한 의무가 주어진다. 이익을 위한 행동의 조건인 합의 때문에 짊어지는 의무도 있다. 여기까지가 자유주의의 보호 하에 있는 의무이다. 하지만 공동체주의는 여기서 의무 하나를 우리에게 더 부여한다. 바로 ‘연대의 의무’이다. 자발적 의무처럼 조건적이긴 하지만 굳이 합의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의무. 그것은 우리가 누군가의 아들, 딸이고,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이며, 어딘가에 소속된 직장인이고, 어느 나라의 국민이며, 또한 어느 민족의 후손이기 때문에 부여된다. 그것은 소속된 것들에 대한 충직이고, 또한 책임이다. (그러면서도 샌델은 위의 충직과 보편적 도덕법칙이 충돌할 수 있는 상황들을 예로 든다. 과연 충직과 애국심 등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미국이 왜 샌델을 주목하는가에 대해 언급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다소 식상한 이야기로 비춰질 수 있는 내용이 세계적 이슈가 된 이유를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오랜 기간 공공철학을 통해 중립의 정치를 해왔다. 1960~70년대가 정점에 이른 시기였고, 대표적으로 JFK가 그 시대를 상징했다. 그는 당선 후, 자신이 가톨릭 신자인 것과 정책 결정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며 정교분리를 선언한다.


  그러나 레이건 시대인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기독교 보수단체 측에서 “정부가 신념을 개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해 민주당 측에서는 공적인 담론에서 후퇴하며 “개입하면 안 된다.”라는 원칙적 반박을 되풀이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정교분리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표면적으로나마 채택하고 있는 원칙이고, 그 역사는 거의 백 년이 넘는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정교분리가 타당하긴 하나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국가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오바마가 이를 알아차리고, 그의 정권 후기에 이르러서는 태도를 바꿔 이런 말을 했다. 정치적으로 매우 훌륭한 레토릭이라는 찬사를 받은 구절이다.


  “They want a sense of purpose, a narrative arc to their lives ……”


  ‘narrative arc’는 보통 ‘서사적 궤적’이라 해석된다. 매킨타이어의 용어이다. 그들은 어딘가 자신들이 향하고 있다는, 그 목적의 실질적인 촉감을 원한다. 그들의 삶에 큰 서사적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원한다는 뜻이다. 미국인들은 정부가 일정부분은 답을 제시해줬으면 하고 바란다. 롤스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신념을 언급하지 말자는 쪽이었으나, 현재 오바마는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결정하기에 앞서 본질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자는, 즉 공동선에 대해 함께 논해보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샌델이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임팩트는 ‘10강. 정의와 공동선’의 동성혼 허용 논쟁에 있다. 대법원장인 마가렛 마셜의 판결문은 자유주의 입장에서 출발해서 공동체주의 입장으로 마무리되는데, 샌델이 이 판결문의 사례를 책의 후반부에 배치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샌델은 어떤 결정의 옳고 그르고의 문제는 다른 문제이며, 그보다는 어떤 결정이 있기 전의 사회적 현안에 대해 우리가 반드시 결정지향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가렛은 동성혼 논쟁에서 중립적 입장을 충분히 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결론을 내렸다. 더 나아가 마가렛은 동성애도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금지하는 것은 이성애가 동성애보다 낫다는 destructive stereotype을 공인하는 셈이라는 입장까지 취한다.

 

 

*   *   *

 


  『정의란 무엇인가』의 공동체주의가 우리에게 어필하는 바는, 적극적으로 사회문제를 논하는 참여적 정신으로 우리의 공동선(common good)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훌륭한 시민이 되라는 일종의 윤리적 테제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는 좌우 대립을 제외하면 그 어느 나라 못지않은 국가적 결속감이 대단한 민족이다. ‘한민족’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여전히 끓어오르게 만들고,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타국의 움직임이 있으면 냉정하면서도 뜨겁게 행동할 줄 안다.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가 이곳에서 폭발적 관심을 받은 것은 왜일까? 나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결속의 손실이 체감되고 있기 때문이며, 새로운 방식의 결속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은 샌델의 열풍이 대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후속 논쟁들만 드문드문 오가고 있으나, 나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나라가 ‘정의’에, 그리고 ‘공동체’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우리는 또 한 번 곪아버린 어딘가를 긁으며, 위의 논쟁들을 되짚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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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31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31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림과 눈물 -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제임스 엘킨스 지음, 정지인 옮김 / 아트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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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8

 

 

 

  나는 탄은(灘隱) 이정(李霆)의 <풍죽도(風竹圖)>를 보고 눈물을 흘린 사람을 알고 있다. 그녀는 “희망보다는 절망이란 감정을 몇 번씩 되풀이 하다 보니 자신감은 자신감대로 점점 잃어가고 있었고 이대로 가다간 자존감마저 잃게 되는 건 아닌가 상당히 불안해하던 때 유난히 눈에 들어오던” 작품이었다면서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는 것이 너무나도 내 마음과 같구나.”고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그림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몇몇 더 알고 있다. 한 분은 치과에서 본 토마스 맥나이트(Thomas McKnight)의 그림을 보고 난 후 “그림의 야릇한 분위기에 홀리는 바람에 치료 도중에도 그림 생각을 하느라 치과치료의 공포가 싹 가셨다.”고 했다. 다른 한 분은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면서 “사람의 언어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사물의 언어를 이해하는 순간 눈가가 떨려오면서 눈물이 차올랐다.”고 고백했다.


  현재 왕성하게 미술서적을 내는 한 작가는 “세잔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흐르는 하염없는 눈물,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지만, 후일 나는 우연히 내가 흘린 그 눈물이, 바로 그의 그림에 가득한 푸른 대기의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 전체를 고고히 흐르는 그 푸름은 음울하게  그림 속 사물들끼리 교감하게 하고, 급기야 화면을 박차고 나와 멍하니 서 있는 나의 온 몸에 즉각적인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소리 없이 당해보긴 처음이어서, 그래서 울었던 모양이다.”라고 했다.


  위의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 아니다. <탕기의 아틀리에>라는 미술 블로그를 꾸려가면서 왕래하던 이웃 블로거들의 메일 내용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1년 반이 조금 넘도록 그분들과 글을 통해 알아가던 중 나는 다른 사람들이 미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고, 메일을 통해 일종의 간소한 설문조사 같은 걸 한 적이 있다.


  독일에서 활동 중인 화가,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판화가, 유명 미술 블로그의 작가들, 창작의 고통에 대해 고백한 화가, 열렬한 미술 애호가, 평범한 직장인, 브라질에서 일하는 디자이너, 미술에 관심 있는 대학생, 나에게 많은 자극이 되어준 미술사 대학원생 등. (조금 안타까운 것은 나와 연이 닿았던 분들 중 꾸준히 소통했던 남성분은 단 네 분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문화 콘텐츠 부흥의 일등공신은 2~40대 여성이라는 속설이 인터넷에서도 확인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림과 눈물』의 저자 제임스 엘킨스만큼은 아니겠으나, 나 역시 그림과 감정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거리, 혹은 언어화되기 힘든 세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는 엘킨스가 무엇을 지적하고자 했는지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미술을 본격적으로 알아가기 시작한 첫 대면은 미학과 했었고, 수 십 권의 미술책을 읽고, 논문을 공부했다. 인터넷으로 도판을 찾아 분석하고, 이면지에 낙서하듯 메모한 것들을 컴퓨터에 옮겨 적었다.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면서도, 아니 공부를 할수록 나는 불면증을 느낄 정도로 어떤 강박관념, 혹은 핸디캡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꼈는데, 그건 바로 “나는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였다. 그림그리기를 아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보고 배우는 것, 어쩌면 미술의 몸 전체를 둘러싼 주변부와 미술의 핵심을 함께 공부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창작, 때론 ‘창조’라고 부르고 싶은 제작 과정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가졌던 것은 미술을 학문으로 접하면서 서서히 감정이 메말라가고 있는 것 같은 막연한 통증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엘킨스의 책을 리뷰하기 전에 먼저 - 그도 책에서 재차 언급했지만 - 상기시켜야 하는 것은 미술이 사람들에게 유통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유명한 석학들의 대부분은 대중이 훌륭한 ‘문화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을 강조한 모든 학자들의 장려가 바로 이런 것에 닿아 있다고 봐도 사실 크게 어긋난 판단은 아니다. 미술로 범위를 좁혀 말해보면, 미술관에 가서 애인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은 인터넷으로 먼저 작품 정보를 검색해보라는 우스갯소리도 바로 ‘올바른 문화 소비’의 비근한 예일 것이다.


  언젠가 나는 『보기 배우기』의 저자 마테오 마랑고니가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선과 색채 등 기본적인 지식부터 알아야 한다.”고 한 주장을 이곳에서 짧게 언급한 적이 있다. 초보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작품을 보기 위해 미술관에 간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는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부터 낸시 랭의 속옷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총망라되는 모든 예술의 산물들 앞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해석의 어려움’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난해함 때문에 미술의 지식으로부터 세례를 받고자 하는 경향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문제가 되며, 바로 이 시점에서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애당초 작품을 접할 때 아무런 감흥 없이 넘겨짚으려는 사람들의 태도인데, 그들은 마랑고니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비난하는 부류에도 속하고, 엘킨스가 비판하려는 부류에도 속하게 된다. 즉, 예술을 대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림 앞에서의 집중력 부족, 이것은 분명 무척 흥미로운 문제이다. 사람들은 으레 무엇에도 비할 데 없이 야심차고, 눈부실 정도로 경건하며, 기이할 정도의 집착이 엿보이는, 예술가의 경이로운 성취물에 빈정거리는 말투로 몇 마디 평을 던지고 지나쳐버리곤 한다.”


  나는 이러한 경향이 왜 등장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다가, 별로 특별한 것 없는 두 개의 원인을 찾아냈다. 하나는 모더니즘의 영향이다. 모더니즘은 건조하다. 외형적으로 풍부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이성적 내면으로 끌어당기거나 감성적 외면으로 밀어내버린다. 쉽게 말해서 머리로 이해해야만 감정적으로 폭발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뒤샹의 하얀 ‘분수’를 보고 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의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워홀은 재미있기까지 하다. 그들의 의미는 역사적이다.


  다른 원인은 전시공간의 문제인데, 이는 한 작가의 메일에서 얻은 결론이다. 그녀는 미켈란젤로를 무척 좋아했다. 직접 보러 다닌 적도 많고, 여러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들은 읽기 쉬워 많은 인기를 얻었다. 나는 한창 카라바조를 공부할 때에 그녀에게 부러운 눈치로 “로마와 피렌체에는 꼭 가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녀의 답변은 의외였다.


  내가 평소 갖고 있는 불만은 태생적인 것이었다. 유럽에 있는 학생들은 하루만 시간을 내면 파리의 루브르든, 영국의 테이트든, 로마의 바티칸이든, 마드리드의 프라도든 마음대로 다니면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인데, 그들과 나 사이의 차이에 나의 사소한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직접 보러 다니는 것도 사실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다. 관광객들 사이에서 작품을 보는 것은 산만하기까지 하다. 도판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온전한 감상이란 있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갖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면 한 가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감상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 ‘그림과 눈물’은 그저 개인적인 경험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엘킨스는 1장부터 12장까지 나눠진 ‘눈물의 사례’들이 각각 교집합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6, 7장은 구체적 사례가 아니다.) 또한 그는 이 사례들이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뉘어 있는데, 하나는 작품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운 것[질식]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작품이 너무 멀게 느껴져서 운 것[진공]이다.


  엘킨스는 말라버린 이 시대의 눈물을 복원시키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말라버린 눈물을 교양 있는 것처럼 여기게 만든 시대적 문화에 대한 비판이 그 첫 번째이다. 이렇게 하면서 그는 눈물이 ‘비평화’되기 어려운 위치에 있고, 그로 인해 감상이 비평의 영역으로부터 독립해 온전한 모습을 갖춰갈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남긴다. 엘킨스는 눈물을 이야기하기 할 때, 가장 먼저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비평을 통해 해석될 수 없다. 따라서 작품은 그 자체로 있고, 사람들이 다양하게 반응하는 방식들은 대체로 객관적으로 밝혀질 수 없게 되며, 따라서 비평은 감상의 본질을 건드릴 수 없는 것이 된다. (그 점에서 ‘독자 반응 비평’이라는 문학적 영역의 탐구가 미진한 것도 이해가 될 것이다.)


  “눈물은 나를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 수도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그랬는지도 모른다. 모든 눈물이 깊은 감정적 혼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대부분의 눈물은 우리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감상은 집중을 요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작품을 대할 때 갖게 되는 다양한 정신의 통로들이 종잡을 수 없는 방식으로 뒤틀린다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때문에 감상은 “뭔가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확실한 징조”가 느껴지는 순간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어쩌면 두려워할 수도 있는 행위가 된다. 그런 까닭에 나는 작품을 뚫어져라 멍하니 쳐다보는 것과 그것을 분석하려고 쳐다보는 것 중 어느 쪽이 훨씬 안정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하기에 용이한가를 잘 알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이다. “날것의 반응”보다는 ‘분석’이 더 평온한 상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엘킨스의 책을 접할 때 한 가지 공유해야 하는 유의점은 그가 서양 사람이며, 그가 언급한 사례들 중 대다수는 서양화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종교화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동양화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것은 그의 한계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으나, 미술책이 모든 미술의 영역을 다룰 수는 없는 것이니, 동양의 너그러운 독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동양적 미감(美感)을 발휘해 앞서 내가 언급했던 ‘탄은 이정의 예’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엘킨스가 9, 10장에서 언급한 종교와 감정에 대해서도 우리나라의 서구화된 독자들은 큰 이질감을 갖진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 별도의 장에서 엘킨스가 독자들에게 건네주는 몇 가지 ‘팁’은 생각보다 유용하다. 감상의 정도(正道)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태도에 관한 조언일 뿐이지만 엘킨스가 말한 것처럼 ‘실질적 제안’이니 혹 관심 있는 독자라면 마음에 새겨두는 것이 어떨까 싶다.


  미술을 공부하면서 내가 읽었던, 또한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사실은 마테오 마랑고니의 책에 있는 이 구절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연극과 연주회를 좋아한다. 누구나 그가 느끼고 보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며, 또 그렇게 해서 그것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미술관에 가지 않는다. 거기에서 그들은 엉뚱한 소리를 하지 않으려 하고, 무지한 세계에 당혹해하기 때문이다. 혹은 거기에 간다고 하더라도 과시욕 때문이거나, 관례에 따라 가거나 무언가를 배우러 가는 것이지, 즐거워서인 경우는 분명 드물다.”


  엘킨스도 비슷한 말을 한다. 미술사학자 로즈머리 멀케이의 인용문이다.


  “어쩌면 그림은 단순히 다른 예술보다 약한 것이 아닐지, 그래서 음악이나 시나 건축이나 영화가 그러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엘킨스가 ‘명석’하면서도 ‘불편’한 지적에 대해 굳이 언급하고 넘어간 까닭을 나는 알 것 같다. 그는 확신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끝내 모르겠다며 책을 끝낸다. 눈물의 비밀은 결국 비밀로 남게 되었고, 신비로운 감상보다는 분석 가능한 ‘문자들로 이뤄진 작품’에 더 쉽게 다가갈 수밖에 없음을 시인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엘킨스가 남긴 가장 마지막 말은 반전의 여지를 남겨둔다. 이 책이 여타 미술 서적들과 구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랑 없는 삶이 살아가기 더 쉽다는 것만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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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12-29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기 저도 있었죠! 탕기님 방학은 알차게 잘 보내고 있어요? ^^

탕기 2012-12-29 11:08   좋아요 0 | URL
조금씩 책 읽는 속도랑 분량을 늘려가고 있어요 :)
제가 시동이 좀 늦게 걸리는 편이라.ㅎㅎ
방학 때에는 소설 좀 많이 읽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인문학책을 붙잡고 있네요.ㅠㅠ

2012-12-31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31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12.12.21

 

 

  많은 것들은 지나가고, 아주 적은 것들만 남는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어른들이 보기에 나는 아직 새파랗겠지만 어느덧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읊조릴 대열에 합류할 때가 가까워졌다. ‘즈음’이란 자신이 의존하는 명사의 앞뒤로 어떤 기간의 여백을 의미하는 것이니, 어쩌면 나는 이미 합류했는지도 모르겠다.


  연말이니까 시쳇말로 ‘센치’한 마음이 되어 서재 이곳저곳을 바라보면 유독 나를 붙잡아두는 책들이 있다. 몇 권 안 된다. 아주 적은 것들만 남는다고 했으니까. 하나씩 꺼내 옛 손자국들, 틈에 껴 있던 머리카락, 뭘 먹으며 읽었는지 군데군데 번져 있는 연한 붉은 자국들을 본다. 손 많이 탄 꾀죄죄한 책들. 읽는다는 것에 대한 동경.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리라, 생각한다.


  최근 읽고 있는 책들 중에서도 5년, 10년, 20년이 지난 어느 날들에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각각 있을 것이다. 그 나이나, 그 무렵의 생각에 맞는 책이 오래 간다고 하니, 몇 권 짐작되긴 한다. 5년으로 끊어봤을 때, 내가 책과 함께 한 시간이라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5년은 고등학생 무렵부터 군입대 전까지이다. 그 때는 ‘글’이라면 거의 환장을 했을 때이다. 그 5년에 있어 나에게 가장 기억되는 책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를 꺼내 보여줄 것이다.

 

 

*   *   *

 

 

  어린 마음으로 처음 접한 『좀머 씨 이야기』는 나에게 세 가지로 기억된다. 하나는 ‘장 자크 상페’. 나는 지난 해 동생과 함께 ‘장 자크 상페’전에 다녀왔다. 나와 동생은 지독히도 상페를 사랑한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당시 교과서에 문학 소년으로 등장했던 ‘만득이’를 별명으로 얻었고, 몇몇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 함께 글에 대해 막연한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그 중 한 여학생이 나와 공유했던 키워드가 바로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장 자크 상페’였다. 인생에 대한 심각한 토론을 기대하긴 물론 어려웠으나, 그 무렵이란 막연함이 막연함을 위로하던 때였으니, 우리는 『좀머 씨 이야기』로부터 실로 큰 위안을 받았다.


  다른 두 가지는 모두 이 ‘위안’과 관련된 것이다. 그 중 첫 번째 위안은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좀머 씨의 외침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일말의 회의나 ‘밀폐감’ 같은 것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누구라도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대개는 부모나 가족, 혹은 알 수 없는 저 사회에게 던지고자 하는 마음으로 좀머 씨의 외침을 내뱉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모른다. 인간이 본래 그런 존재인지, 아니면 사회의 특성이 그런 것인지, 여러 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저 ‘인문적 외침’은 그래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이 된다. 때문에 우린 대개 저런 질문을 잊거나, 하지 않는다. 힘들다고 하면서도 저마다 잘 살 것이라고 믿으니까 말이다.


  처음에 나와 그녀는 좀머 씨의 외침이 파트리크 쥐스킨트 자신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라는데 동의했다. 책날개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고, 해설에도 그런 말이 있었으니, 정확하진 않으나 둘 중 한 명이 그걸 보고, 아니면 둘 다 그걸 보고 그냥 뭔가 알아냈다는 정도로 나눈 토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저 말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누구에게나. ‘exit’이라는 단어를 찾아 필사적으로 뛰던 때였다. 그것이 ‘exist’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두 번째 위안은 쥐스킨트가 작품 이곳저곳에 심어 놓은 위트와 유년의 기억이었다. 카롤리나 퀵켈만과의 어린 사랑 - 마음에 드는 여자 친구를 위해 뭔가 한참 준비하고 밤새 뒤척였으나 정작 그녀가 바빠 나의 모든 준비가 공으로 돌아갔을 때의 그 느낌이란! - 이야기, 자전거를 처음 타게 된 이야기, ‘미세스 풍켈’에게 피아노를 배웠던 그 ‘코딱지’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주변 사람들이, 심지어는 카롤리나 퀵켈만까지 애도할 것이라는 헛된 ‘자살’에 대한 생각,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이후의 이야기. 나는 소설의 ‘나’와 연결될 수 있는 나의 경험이라면 모조리 떠올려가면서 반추해보곤 했다. 10년은 더 된 옛날의 독일에서 한 괴짜 작가가 쓴 유년의 기억이 나의 것과 닮았다는 것에도 새삼 놀라면서.

 

  고등학생이면, 사실 좀머 씨의 행동과 이후 행방에 대해서 내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하나의 로맨티시즘이라 여길 법도 했고, 그건 생각이 부족한 사람들이 으레 문학의 결론에 가져다붙이는 그런 꼬리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좀머 씨’라는 사람에 처음으로 집중하게 된 건, 아마 제대 후였을 것이다. 소설 『향수』가 영화화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을 때, 나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그것을 다시 읽었는데 그 참에 『좀머 씨 이야기』도 꺼내든 것이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정의내리길 좋아한다. 적어도 그/그녀에 대해 파악했다고 믿어야만 타인과의 안정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정상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때론 너무 안이하다는 것이 문제다. 소설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도 마음대로 좀머 씨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그런데 정작 그가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 것인지? 그러한 끝없는 방랑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가 그렇게 잰 걸음으로 하루에 열둘, 열넷 혹은 열여섯 시간까지 근방을 헤매고 다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와 경마장에 다녀올 때, 갑작스레 우박이 섞인 큰 비가 내린다. 둘은 차 안에서 현기증 나는 바깥을 바라보며 부디 차 지붕이 부서지지 않기를 바란다. 바로 그 때, 도로 위에 좀머 씨가 있었다. 그는 굳이 태워주겠다며 “이러다 죽겠어요!”라고 외치는 아버지에게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소리친다. 이를 두고 아버지는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 날 가족들의 대화에서는 ‘밀폐 공포증’이라는 어려운 말까지 나온다.


  ‘나’는 잠자리에 들어 그 광경과 ‘밀폐 공포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다 뒤척인다. 나는 좀머 씨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하지만 가장 비극적인 묘사를 그 뒤척임 속에서 찾아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빗속에 있으면서도 호수의 물을 다 들이킬 수 있을 것 같은 갈증을 느끼는 표정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저 ‘갈증’이라는 단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갈증’은 보통 ‘욕망’이라는 단어와 자주 어울린다. 좋은 의미로는 열렬한 추구의 모습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결핍의 상황을 뜻할 것이다. 다시 읽은 좀머 씨에서 나는 저 둘이 고통스러운 형상으로 뒤틀려 있는 모습을 봤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은 ‘나’가 숲에서 그의 기이한 행동을 보고 자살을 포기하며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까짓 코딱지 때문에 자살을 하다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던 내가 불과 몇 분 전에 일생 동안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을 보지 않았던가!”


  조금 멀리 떨어져서, 어떤 종류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무언가를 미친 듯이 하는, 때문에 다른 일에 대해서는 신경도 안 쓰고,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는 사람의 모습에는 어딘가 감동스러운 면이 있다. 죽음으로부터의 도망, 갈증, 사위(四圍)에 적이 있는 듯 주변을 살피는 긴장. 사실 좀머 씨의 행동이 유별나게 기이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충분히 이해되는 건, 그리하여 우리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된 후 더욱 이 작품에 애착을 갖게 되는 건, 우리도 좀머 씨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라고 말한다면야 굳이 “당신은 좀머 씨에요.”라고까지 우길 건 없는데, 잠시 생각해보자면 장자(莊子)가 말하는 ‘좌치(坐馳)’의 삶을 우리는 좀머 씨와 우리의 모습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좌치’는 참 재미있는 개념이다. 앉아서 내달린다는 거다. 몸은 앉았는데, 마음은 항상 쫓긴다. 그런 삶을 살기에, 그런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점에 가서 소위 ‘힐링책’을 사들고, 그 1~2만원의 책을 보험처럼 끌어안고 다니는 것을, 우리는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책은 좀머 씨의 지팡이가 아닐까.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절규하며 이렇게 외치는 사람에게 나는 과연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과연 나라면 ‘나’처럼 호수로 들어가려는 좀머 씨를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오랜 뒤에 다시 읽은 『좀머 씨 이야기』는 저런 종류의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남겨놨고, 그 어떤 위로나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도 상기시키지 않았다.


  역자(譯者)는 “지극히 순수한 동심으로 쓰여진 아름다운 책”이라 했으나, 나는 이 얇은 책을 덮고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나의 외침인 것도 같고, 누군가의 외침인 것도 같고, 우리들의 잃어버린 외침인 것도 같아서였으나, 그것 말고도 좀머 씨가 걸어 들어간 호수처럼 깊은 어떤 곳에 가라앉은 외침이 생각나서 그랬던 것 같다. 그는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끝내 살아서 깊은 호수의 밑바닥을 5km나 걸어서 건너갔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그는 호수 속에서도 외쳤을 것이다. 뱃사공이 그 때 마침 호수 위에 있었다면 그것을 봤을지도. 나는 그의 행방을 계속 수소문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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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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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6

※ 수요일에 우리 학교에서 김애란 작가 초청강연을 한다. 이번 학기, 나는 김경수 교수님의 현대소설론을 듣고 있는데, 이 리뷰는 초청강연을 위해 미리 읽고 제출할 간단한 레포트 글이다.

 

 

1. 너의 여름은 어떠니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 미영이 팔뚝에 남긴, 혹은 그녀의 팔뚝에 남겨진 상흔과 병만의 사막 이야기는 나에게 추억과 현실에 대한 상징으로 다가왔다. 나도 미영처럼 누군가의 팔뚝을 잡았을 것이고, 악력의 세기가 때론 지나친 집착 탓에 상대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셌을 것이다. 그 힘의 흔적과 상처로부터 아픈 추억이 새겨지게 되었을 것이다. 사막은 바로 그러한 현실이지 않을까. 비가 갑자기 쏟아지면, 대책 없이 당하게 된다는 그곳. 추억은 “고개 좀 들어, 미영아. 고개 좀 들어, 제발.(pg.37)”처럼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예기치 않게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사막에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미영의 눈물은 그런 까닭에 의미가 있다. 만약 선배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아무런 고통의 자각도 없었더라면 미영은 병만의 장례식에 가서 소설의 마지막에서처럼 울 수 없었을 것이다.

 

 

 

 

2. 벌레들

 

  장미빌라에 이사해온 뒤 아내가 가졌던 한동안의 행복한 나날들이 남편의 첫 외박, “해충의 우두머리(pg.73)”라 묘사된 애벌레, 그리고 온갖 날카로운 소음들로부터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그간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였던 임신이 “성공적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pg.81)”는 출산 때문에 수포로 돌아갈 참이다.


  “신성하고 아름답게(pg.54)” 바람 따라 흔들린다고 묘사된 나무가 굴착기의 맹공으로 쓰러질 때, 아내는 산통을 느꼈다. 우연히 동시에 일어난 일은 아닐 것이다. A구역으로 떨어진 “손에 안 맞는 결혼반지를 넣어둔 파란색 벨뱃 상자(pg.74)”를 줍기 위해 내려갔을 때, 아내는 나무의 뚫린 밑둥에서 쏟아져 나오는 벌레들에 놀란다. “자궁이 적출된 여자처럼 헤프게 다리를 벌리고(pg.79)” 있는 것 같은 광경 바로 옆에서 아내는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출산을 시도한다. “살려주세요(pg.80).”라는 아내의 비명은 굴착기가 자신의 몸을 찍어 내릴 때 나무가 지르고자 했던 외마디가 아니었을까.


  한편, 결혼반지가 손에 맞지 않았다는 구절로부터 소설의 이후를 상상해볼 수 있지도 않을까 생각했다. 불투명한 출산의 여부, 외박하는 남편이 혹시 외도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보는 아내의 육감, 그리고 불쾌한 환경 등이 비극을 심화시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3. 물속 골리앗

 

  언제 단수될 지 알 수 없어 꾸려놨던 ‘물봉투’들을 터뜨리는 어머니의 모습으로부터 나는 자신이 쌓아둔 희망들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상다반사의 이야기들을 떠올려봤다. 「물속 골리앗」에는 죽음으로부터 탈출하고자 애쓰는 모습들이 절박하게 묘사되어 있다.


  끝없이 내리는 비는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온갖 재앙들이 무상(無想)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뜻하는 듯하다. “폭우 속, 사물들은 흐려졌고 그럴수록 기이한 생기를 띠었다.(pg.87)”는 구절에서처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과 규모를 지닌 역경 앞에서는 명확한 판단을 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벌레들」에서처럼 「물속 골리앗」의 나무도 인세(人世)에 비춰 본 상징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답게 번식하고 나무답게 죽는 것(pg.86)”이야말로 나무가 지닌 생의 의지인 것처럼 인간의 것 역시 그러하다. 소년은 나무답게 죽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 인간의 경우도 그렇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답게 죽는 것이란 소년이 처해 있는, 흡사 재난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무지막지한 재앙 앞에서 처참하게 물에 불어 식어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과 ‘살아남는다는 것’ 사이의 미묘한 어감 차이가 「벌레들」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김애란은 절박한 소년의 이야기로 풀어내며 후자가 바로 현실일 수밖에 없는 비극으로부터 일말의 희망을 끌어내려고 한 것 같다. 아버지가 즐겨하던 체조가 ‘나’에게는 물 밖의 추위를 견디기 위한 몸부림으로 이어지는 것도 바람에 흔들리던 나무의 일정한 하나의 방향처럼 살아남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에는, 소설 상에서는 어렵다. 그런 삶에 나의 경험을 비춰보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4.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흔히 ‘루저(loser)’라 불리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감동받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의 앞부분을 읽다가 ‘용대’의 처지를 알게 됐을 때 내가 갑작스레 이면지에 적은 질문이었다. 친척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그의 상황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해될 법한 것이다. “이 새끼가 하다 하다 별 지랄을 다 한다(pg.136)”며 용대의 뺨을 날린 형의 행동도 그러하다. 그렇게 비난받던 용대의 삶을 후비고 들어온 임명화의 의미는, 때문에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용대가 하는 일이 택시기사라는 것도 의미가 있다. 운전대를 잡고 그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인데, 그 중에는 “반짝이는 동전(pg.144)”처럼 값어치 있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감동적인 노래는 끝내 그것의 정체를 몰라야 더 좋은 것으로 남는다고 한 여자의 말이 용대에게는 임명화의 기억과 대응된 것이다. ‘지훈’에게는 잘 살아있다고 둘러댔지만 이미 죽은 아내에 대해서 용대는 끝내 죄스런 울음을 터뜨린다.


  위암에 걸린 줄 진짜 모르고 시집온 거냐고, “뒤지려면 혼자 뒤지지 누구 인생을 조지려고 그러냐.(pg.163)” ‘쌍년’이라 윽박지른 그의 진심은 그녀를 살리려는 간곡함이었겠지만 마음 한 켠에는 욕이 담겨져 있었고, 그것이 지금껏 살아왔던 그의 성격 탓에 마구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아내 나라의 말을 배우며 스스로 나아지고 있다고 여긴 그에게 아내의 죽음은 어쩌면 극복할 수 없는 비극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여기서 멉니까?”라는 마지막 음성으로부터 어렴풋하게나마 추측된다.


  우리가 무언가에 올라타고 - 택시이든 버스이든 지하철이든 케이블카이든 상관없는 모든 탈 것들 - 어딘가로 향하고자 하는 목적 지향적인 삶은 비극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고, 때론 비극 없는 도착지가 여기서부터 얼마나 먼지도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5. 하루의 축


  “어째서 이렇게 한 가족의 단란이 시시하게 망가지는가(pg.196)”라는 과거의 질문에 대한 답을 ‘기옥 씨’는 끝내 찾지 못했다. 외동아들 ‘영웅’에게 이어놨던 단 하나의 끈도 이미 망가진 가족의 단란을 상징하는 아들의 편지, 사식 좀 보내달라는 짧은 편지로부터 끊어질 듯 위태롭게 대롱거렸다. 일방적인 아들의 훼손이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뭐 흘릴까(pg.192).”


  기옥 씨의 이 궁금증을 비롯해서 그녀가 내내 공항에서 보는 ‘버리는 것’, ‘흘려진 것’, ‘배출한 것(싼 것)’, ‘헤어지는 것’ 등이 선명하게 드러내는 의미는 우리의 삶에 여기저기난 생채기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 다만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든 가려서 타인의 눈에는 띠지 않게끔 처신하는 것뿐이리라, 생각한다.


  혹 처신이, 아니 ‘자기방어’가 순탄치 않는 날이면 파트장 앞에 탈모를 ‘노출’한 기옥 씨와 같은 입장에 되고 말 것이다. 무심코 훼손당한 삶의 여러 면들이 「벌레들」에서 아내를 놀라게 한 큰 애벌레처럼 고개를 벌떡 든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무서운 걸 보기라도 한 듯(pg.201)” 뒷걸음치게 될 것이다.

 

 

 

 

6. 큐티클

 

  「큐티클」의 ‘나’는 나에게 중심이 서 있지 않은 인물로 비춰졌다. 그건 곧 나 역시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그녀의 조심스러운 행동들마다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생산력에 맞춰 가고 있다는 안도감이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를, “유행과 문법(pg.213)”에 따르면 안색이 얼마나 맑아지고, 심지어는 아직 20대인데도 어제보다 오늘의 얼굴이 더 펴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불안 그 자체이다. 누군가의 잘 묶여진 신발끈을 보면 나의 신발 매무새도 한 번 고쳐봐야 할 것 같은 일상적인 비교와 그로부터 말미암는 불안. ‘자기관리’라는 항목에 체크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일종의 ‘태만죄(怠慢罪)’가 성립될 것 같은 불안이다.


  이렇게 나의 어딘가를 관리한다는 것은 그걸 보여주고 싶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일상의 또 다른 비극은, 보여주고 싶은 것보다 보여주기 싫은 것이 타인에게 기억된다는 것에 있다. 소위 작품 속 ‘겨땀’의 창피함처럼. 그리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 깨져버린다는 비극도 있다. 때문에 손톱이라는 조그마한 곳에 들어가는 시간이나 노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어떤 큰 것, 혹 ‘궁극적인 것’이라 표현할 수 있는 삶의 어떤 것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데, 일상은 배꼽을 배보다 크게 만들곤 한다. 크고 작은 것 사이의 맥락이 뒤집혀버린 일상은 하릴없는 말이나 하고, 맥주나 마시고, 엉덩이를 털며 일어서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힘들 것이다.

 

 

 

 

7. 호텔 니약 따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이 의외로 죽이 잘 맞는다. 신중과 배짱. 20대의 불안한 삶을 서로에게 기대어 왔던 것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상대방이 충족시켜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위안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내 몫을 살아줄 수는 없는 일이다. 마지막 걸음은 혼자 걸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때문에 은지와 서윤이 처한 상황은 이렇다. “세상이 조금 만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어느 날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시시한 인간이 돼 있던 거다.(pg.251)

 

  「하루의 축」에 등장했던 공항에서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한 건 「호텔 니약 따」에서였다. (혹 기옥 씨가 은지를 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든지 출발은 산뜻하고, 그 기분은 한동안 이어진다. 「벌레들」에서처럼, 하지만 그 행복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불협화음이 생기고, 여러 사건들이 두 사람의 사이에 개입된다. 전 세계 청춘들의 성지(聖地)라 흔히 불리는 카오산 로드에서 서윤과 은지는 끝내 틀어지게 된다. 이등변삼각형의 한 변이 순간 기형적으로 늘어나면서 도형 자체가 깨져버릴 것 같이 소설은 끝이 난다. 먼 타국에서의 비극은 막연한 고립감마저 불러일으킨다.

 

 

 

 

8. 서른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pg.293~294)


  「서른」에서 발신자인 ‘나’가 ‘면목동 학원의 아이들’에게 가졌던 마음,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겨우 내가 되겠지.(pg.297)”라는 구절을 앞에 두고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아직 자라지 않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고 가는 버스의 TV에서 우연찮게 얼마 전부터 나는 청출어람(靑出於藍)과 비슷한 의미의 사자성어를 반복적으로 보게 됐다. 후배가 나보다 미래에는 나아질 수도 있으니 존경하듯 대하라는 뜻이었는데, 막상 사자성어의 정체가 생각나진 않는다. 여하튼 나는 그것을 떠올리며 ‘나’의 푸념을 “너는 자라 나보다 큰 사람이 되겠지……더 멋있어지겠지.”라고 바꾸고 나만 모든 것이 잘 안 되가는 중이라는 근거 없는 불안함을 보채봤다.


  남자친구의 속임수에 빠진 다단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끌어들인 ‘혜미’가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고백은 열심히는 산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런 사람(pg.316)”이 되는 이 시대 청춘들이 털어놓을 수 있는 고백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만일 언니가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아마 제가 혜미가 있는 병원에 찾아갔다는 뜻일 거예요.(pg.318)” 다행이도 ‘나’는 모든 것을 감당하기 위한 일말의 시작으로 ‘혜미’를 찾아간 듯하다. 그러나 이미 식물인간이 된 ‘혜미’에게서 ‘나’가 들을 수 있는 것이란 어떤 종류의 용서가, 혹은 복수심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청춘의 한 자화상이 ‘나’의 삶의 중앙에 버티고 ‘나’의 시선을 붙잡아두는 무서운 대면의 순간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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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5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5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목.도둑맞은 가난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1
박완서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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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9

 

  유종호는 <나목>을 일컬어 "청춘의 책"이라고 했다.

 

  ‘청춘(靑春)’하면 나는 한 가지 떠오르는 심상이 있다. 맛있는 차(茶)를 만들기 위해 아버지께서 펄펄 끓는 물에 대추를 몇 알 던져 넣으시고, 내가 그것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장면. 대추는 유리냄비를 빠져나갈 듯 말 듯, 엄청난 열기들로부터 추진력을 받아 수 십 번이고 뛰어오른다. 하지만 대추는 결코 냄비를 탈출하지 못한다. 불과 같은 청춘의 열정은 혁명을 이룩하지 못한 채, 철이 들어버린다.


  많은 평론가들이 <나목>을 '성장소설'로 분류하고, <나목>은 우리나라 여성작가가 쓴 거의 최초의 '여성성장소설'이라는 기념비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故 박완서의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 아니었다. 레포트를 쓰기 위해 두 세 번 고쳐 읽고, 마지막 장인 17장을 뜯어보고 다시 봐도, 나는 어린 가지가 서로 몸을 부대끼며 바람 속에 추워하듯 11월 중순 지금의 바람에 내던져진 나의 나신(裸身)을 생각해냈다. 별 볼 일 없는. 나는 발달한다. 수많은 것들이 덧붙여진다. 그러나 발전하진 않는다. 과연 나는 성장하는 것일까. 인격은 도야하고, 목표는 성취되고 있는 것일까.


  빈둥거리다가도 불현듯 책을 붙잡고 새벽을 보내던 중 나는 "그래, 나는 발전하고 있어."라고 으레 자부한다. 하지만 포만감은 오래 가지 않는다. 자부심과 병렬된 상실감에 무릎을 꿇는 것은 정말이지 비참한 일이다.


  예쁘고, 잘 생기고, 아름답고, 멋진 청춘들의 사이에서 나는 이경처럼 나 혼자만 아무런 계획 없이 캠퍼스를 거닐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목> 속으로 들어가 하나의 문장이 되어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책 옆면에 새겨져 활짝 웃고 있는 미소를 바라보며 고인에게 묻고 싶었다. 회색빛 공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나목>을 꼼꼼하게 되새기고자 레포트의 글을 옮겼다. 지금까지 쓴 리뷰 중 가장 길 것이다.

 

 

 

*    *    *

 

 

# 공허,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

  이경이 좋아하는 일이란 이런 것이었다.
  “언제 보아도 싫지 않은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의 회사하고 매력적인 상품들, 그 풍요한 상품들을 후광처럼 등지고 서서 저녁 화장에 여념이 없는 세일즈 걸들. 나는 이런 것들을 바라보기를 즐겼다.(pg.11)”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것들에게 매료되는 것은 청춘의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속이 비어 있는지 들여다보기도 전에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이경처럼 불만족스러운 주변 환경에 놓인 처지라면 더욱 그러하다.
  “나는 그런 곳에서 좀 더 멀리 있고 싶었다. 적어도 대구나 부산쯤, 전쟁에서 멀고 집집마다 불빛이 있고 거리마다 사람이 넘치는 곳에 있고 싶었다.(pg.12)”
  저속한 농(弄)이나 불평을 쏟아내기 일쑤인 네 명의 환쟁이들, 혹은 상스러운 최만길보다 이경의 삶을 근원 모를 어두운 곳에서부터 잡아 붙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이다. 어머니와 이경의 사이에서는 으레 부녀(婦女) 사이에 오고갈 다정다감한 대화를 찾아볼 수가 없다. 혹 부자지간이라면 이런 광경이 잦을 수는 있을 것이다. 평소 별 의미 없는 말들로 서로 머쓱해하는 ‘아버지-아들’ 관계는 이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래도 남자들의 정이 오고 가는 무언(無言)의 과정은 있다. 말이 적을 뿐이다.
  반면, 이경과 어머니 사이에는 창백한 허무가 가득 차 있다. “짜증”, “왈칵왈칵 치미는 혐오감”, “어머니가 싫고 미웠다.(pg.14)” 등의 고백들은 이경이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회색 풍경을 직접적으로 상기시킨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떼어낼 수 없는 현재의 어둠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이경은 하루의 대부분을 일터인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보낼 것이고, 수많은 지아이(GI)들을 만날 것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상품들’과 ‘세일즈걸들’도 원한다면 하루 종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돌아온 집은 어머니의 공간이다. 원치 않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한 이경의 묘사는 섬뜩하리만치 어둡고 무섭다.
  “그 속에서 사랑하고픈 마음이 얼마나 세차게 꿈틀대고 있는지를. 그러나 도대체 누구를 덩달아, 누구를, 무엇을 좋아할 수 있을 것인가?(pg.16)”
  검은 홀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 같은 아찔한 공포와 혐오가 이경의 청춘을 가로 막고 있으므로 그녀는 사랑하고 싶어도 누구라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체증을 느끼게 된다. 그런 이경에게 옥희도가 나타난 소설 속 사건은 청춘의 한 단면이 갑자기 부각되기 시작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 옥희도, 황태수

  이경이 옥희도를 만났을 무렵, 이경의 심정은 복잡했다.
  “잠시 그와 나의 눈길이 마주쳤다. 내가 먼저 섬뜩해져서 눈을 피했다. 아주 황량한 풍경의 일각 같은 것이 그의 눈 속에 깊이 잠겨 있는 것 같아서였다.(pg.22)”
  그녀는 옥희도와 마주친 첫 눈길에서 그의 상태에 대해 정확한 단서들을 포착한다. 네 명의 환쟁이들이 퇴근하고 남은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갈 적에는 “훈훈한 친근감”을 느끼기도 한다. 단순한 호감 이상의 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사이를 보며 나는 얼마 후 한 편의 애잔한 러브스토리가 진행될 것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아직까지는 일방적인 관심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쌍방에 관심이 오고 갔다고 하더라도 관심의 정도는 이경의 것이 옥희도의 것을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옥희도는 의자에 앉아 묵묵히 초상화를 그리듯 자신에게 내려앉은 모든 상황과 그로 인한 고독을 인내하고 있다. 주어진 것들에게서 그저 탈출하고자 안달이 나 있는 쪽은 이경이다.
  “춥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랑을 할지도 모른다.(pg.25)”
  늦은 밤, 미군병사와 한 여자가 함께 걸어가는 광경을 보고, 이경은 사랑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환경 탓에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큰 상심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춥다.”는 것은 크리스마스와 설을 전후한 엄동의 그 추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는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무렵이었으므로 평화를 믿지 않게 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추위’가 이경의 곁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폭탄이 굉음을 내며 또 한 채의 집을 날려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바로 지금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려고 한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미련한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런 그녀를 흔드는 인물이 바로 황태수이다. 그는 중키에 평범한 얼굴을 가졌다. 이경은 곧바로 황태수의 외모를 주시한다. 별반 특별할 것 없는 외모를 묘사하는 그 부분은 이경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흥미롭게도 이경은 옥희도의 외모를 묘사한 적이 없다. 옥희도에게서 그녀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상심이다. 그녀가 황태수의 외모를 먼저 본 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근거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그에게서는 상심을 발견하지 못해 어떤 공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든지, 혹은 아래서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던 첫 만남의 구도 때문이라든지. 하지만 그녀에게 두 남자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주지할 만한 사실이다.

 

# 이경의 집착

  황태수는 이경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첫 데이트 장소인 유토피아에서 둘이 구석자리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네 명의 별 볼 일 없는 환쟁이들 사이에서 옥희도만을 생각하며, “나는 문득 옥희도 씨만은 다른 환쟁이들과 조금이라도 달랐으면 하고 바랐다.(pg.40)”고 말하는 그녀처럼 황태수도 난장판인 파티장에서 그녀를 끌고 나와 “너는 딴 여자들과는 좀 달라야 돼(pg.77).”라며 이경에게 자신의 여자가 되어줄 것을 요구한다.
  이로 인해 이경이 당초 황태수에게 갖고 있었던 친숙한 느낌은 사라져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 느낌을 붙잡아두기 위해 쓸모없는 말을 하는 쪽은 역시 이경이다. 평범한 저 남자로부터도 이경은 별안간 어떤 위안을 받고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황태수는 옥희도와 함께 이경의 일상을 버티는 튼튼한 기둥이 되는데, 그 형국은 기이하다. 황태수는 이경을 받쳐주고, 이경은 옥희도에게 기대어 있다.
  옥희도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경의 일방적인 이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연이은 결근에 불안해한다. “선생님이 좋아요. 괜찮겠죠?(pg.63)”라는 질문에 서슴없이 괜찮다고 대답한 옥희도로부터 사랑의 확증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서이다. 옥희도에게서 “침팬지의 고독(pg.66)”을 목도하는 것과 그가 자신을 사랑할까에 대한 그녀 스스로의 질문은 서로를 부정하며 얽혀 있다.
  때문에 옥희도가 결근했을 때, 그녀는 황태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라고 질문하지 않고 “혹시 여기를 그만두시려는 거 아닐까요?(pg.71)”라고 묻는다. 불안증은 문병을 가서도 계속 된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심화되었다고 해야 옳다. 옥희도의 아내가 예상 외로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호감을 갖는 자신의 ‘착함’에 화가 나고, 옥희도의 아내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옥희도를 바가지 긁을 위인이 되지 못함에 또 한 번 화가 난다. 자신의 무릎에서 사과를 먹던 옥희도의 아이를 내던지다시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장면이 이경의 감정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더 화가 나는 까닭은 옥희도와 그의 아내가 그녀를 아이처럼 취급했기 때문이다.
  옥희도에 대한 이와 같은 이경의 과도한 집착 반대편에는 황태수의 사려가 있다. 그는 이경에게 거의 모든 신경을 쓰면서 그녀가 한 말, 옷매무새, 머리스타일 등을 기억한다. 보통 이 정도라면 여자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사려일 것이다. 속으로 조바심을 느꼈을 것이지만 황태수는 이경이 농담으로 흘려들을 수 있는 “사과를 사근사근 먹는 볼이 붉은 사내애를 갖고 싶지 않아?”나 “그야 경아와 날 반반쯤 닮았겠지.(pg.82)”라는 말로 미래에 대한 계획을 넌지시 흘려놓는다.
  이경은 지금의 삶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그녀의 주변에는 저속한 말로 농을 주고받는 환쟁이들이 있다. 그들 무리로부터 자신이 분리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은 이미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인식에 대한 확신은 옥희도의 등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황태수도 환쟁이의 무리와 같은 부류는 아니었다. 따라서 옥희도 뿐만 아니라 그도 이경에게는 흥미로운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외모였다. 아니면 옥희도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그녀가 공감했던 상심이 부재했다는 것이 문제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경이 벗어나고자 하는 삶은 저속한 세계가 아니라 허(虛)의 세계이다. 환쟁이들의 육담과 거리낌 없는 발화들로부터 연상되는 저 하급의 세계는 청소부 아줌마들, 그리고 난장판이나 다름없는 파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좁은 견해를 가지고 세상에 대해 판단하고 욕을 하는, 그러한 걸쭉한 분위기에는 진씨가 이경을 울린 줄 알고 “맥없이 착해지는” 환쟁이들의 정도 담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지만 어쩌면 그러한 세계야말로 이경에게는 어머니의 회색빛과 완벽하게 대조되는 ‘인간냄새’ 나는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조차도 황태수는 이경을 분리시킨다. 두 번의 연이은 탈출을 생각지 못했던 것인지, 이경은 ‘불륜’이라는 비도덕적이고 비상식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옥희도를 사랑하려고 한다.

 

# 색, 변화

  철이 드는 것은 교활해지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우리가 흔히 주고받을 때 들을 수 있는 이 말의 함의는 수많은 역경들과 의미들 앞에서 물 흐르듯 대처하라는 뜻이리라. 반면 청춘은 장벽이 다가오면 부딪히고, 왜곡된 의미들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기일 것이다. 남성독자인 내가 여성화자인 이경의 심정, 특히 옥희도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으려는 놀라운 고집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착각을 한 것은 ‘청춘의 공통분모’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래가 두렵기는 하지만 적어도 조금이나마 이곳에 변화를 주고 이 몸과 주변에 색과 생기를 불어넣었으면 하는 바람이 당장의 역경보다 더욱 가까이에 있다.
  색과 생기가 없다면 역경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경에게는 ‘어둠’이 바로 그 역경을 상징하는 것일 텐데, 황태수의 애무를 받으면서도 바깥세상의 어둠의 알맞은 농도를 가늠하고 있는 모습이 이경의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한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경을 딛기 위해 이경이 시도해본 것은 많다. 기타를 부수려고 어머니와 몸싸움을 벌였던 것이나, 황태수와의 데이트를 위해 설빔을 차려입는 장면 등이 그렇다. 특히 나는 후자를 인상 깊게 봤다.
  화려한 것, 다홍치마, 색동저고리. 색에 대한 갈구가 그녀에게 하나의 환상을 만든다. 사실 나는 이경이 환상 속에서 환하게 웃는 아버지를 되살려내는 장면을 다소 의외라는 듯 읽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장면에서 옥희도가 나와야하는 순서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거울 속에서 화사한 옷태를 뽐내던 이경은 2년 전의 그녀였다. 기타를 부수며 작별하고자 했던 과거보다 더 먼 과거의 존재.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었기에 결핍된 희망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으로부터 받은 상흔, 그리고 ‘살벌한 거리;에서 그녀가 알게 된 지금에의 집착대로라면 화려한 옷은 옥희도에게 이어놓아야 할 탈출 욕구의 물증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옥희도의 색은 회색이었다. 상심의 색. 때문에 이경이 설빔을 입고 나가 만난 사람은 황태수였다.
  기타를 부수는 것도, 설빔을 입는 것도 실패하고, 또한 청소도 실패한다.
  “엄마. 우린 아직 살아 있어요. 살아 있는 건 변화하게 마련 아녜요. 우리도 최소한 살아 있다는 증거로라도 무슨 변화가 좀 있어얄 게 아녜요?(pg.98)”
  휴일을 맞이해 집안을 청소하다가 이경은 ‘불로장생의 심벌’들을 닦는다. 어쩌면 불로장생(不老長生)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희망일 것이다. “조상들의 꿈을 아무리 공들여 닦아도 내 꿈이 달래지지는 않았다.(pg.99)”는 이경의 심정은 그녀가 단순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 근시안

  소설 중반부에 나오는 미숙과 이경의 대화는 이경이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미국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상담을 받으러 찾아온 미숙에게 이경은 ‘잡종’이라는 단어로 큰 충격을 준다. 물론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이었으나, 미숙은 그 단어를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접는 일종의 ‘터닝포인트’로 삼는다. 그런데 미숙이 이경에게 돌아와 한 말은 이렇다.
  “미국 가는 것 말구 또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이를테면 결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한 거죠. 애기를 낳으려면 치러야 할 과정이랄까, 그런 걸 그 피 에프 씨와 갖는다는 상상조차 소름끼쳐요.(pg.125)”
  미래에 관한 계획으로 말하자면 그 인식의 수준은 미숙이 이경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경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결혼’이라는 단어를 애써 머리에서 지우려고 한 까닭일 수도 있겠다. 이 단어가 자신의 마음에 입성하는 것을 허락하는 순간 이경이 생각해야 하는 건 ‘옥희도와의 결혼’이기 때문이다. 침팬지 인형 앞에서, 이경이 느끼기에 오랜만에 만난 옥희도와의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그저 옥희도와 함께 있는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곤두세운다.

 

# 일그러지는 욕망

  옥희도가 아닌 다른 선택으로 현재의 어둠, 즉 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 큰아버지의 방문도 있었고, 말이(末伊)의 편지도 있었으며, 결정적으로는 진이 오빠의 방문도 있었다. 그가 와서 이경에게 하고자 한 말의 핵심은 어머니로부터 “자유로워져라.(pg.140)”였다. ‘화안한’이라는 표현에 이경이 혹하기도 한다. 순간 그녀는 “빛과 기쁨이 있는 생활에의 갈망(pg.141)”을 느끼게 된다. 학업도 이을 수 있을 것이고, 원하는 것이라면 뭐라도 더 배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미워하고 김칫국을 마셔야 하는 일(pg.141)”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 또한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부산으로 가려고 하지 못한다. 진이 오빠에게 속으로 욕을 해봐도 “미치지 않을 자신(pg.145)” 또한 없다.
  지우고 싶은 멍에가 새 출발을 저지하는 비가역적 관계에 대해, 나의 경험으로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잊고픈 기억이 자주 생각나는 때는 있지만 그것이 이경에게서 찾을 수 있는 극도의 불안으로 이어진 때를 나는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나는 그녀가 부산으로 가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어머니에 대한 미운 정을 꼽기도 했고, 옥희도를 혹 생각하는 건 아닌가를 의심도 해봤다. 모로 봐도 “지독한 한발(旱魃)의 땅(pg.126)”이라 표현한 이곳에서 이경은 얼어붙은 채 서 있는 것 같았다. 합리적 판단이 중지되고, 그로부터 말미암을 행동 역시 차단되어 있는 상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판단은 단순한 호오(好惡)로 정해지기 마련이다. 상징적으로 미숙과 다이아나 김의 대조를 들 수 있다. 미숙에게는 친절하게 대하지만 다이아나 김에 대한 소문에 는 “낯가죽 두꺼운 쌍년(pg.153)”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사나운 감정으로 대응한다. 미숙이 질겁할 정도의 이 표현은 사실 소설 속에 나열된 이경의 심정 중 가장 선정적이면서도 노골적인 부정에 속한다.
  한편으로는 안에 갇혀버린 채 세상을 판단하기도 한다. “나만 빼놓고 저희들끼리는 다 알고 있을 게다.(pg.155)”라며 오직 자신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다고 선언해버린다. 얼마나 확신이 없냐면 침팬지 앞에 가는 것이 좋겠는지, 그조차도 모를 정도이다. 결정되지 않는 판단에 지쳤을 때, 이경이 선택한 건 황태수와의 저녁식사이다. 그 선택의 이유가 일차적이다.
  “상대가 반드시 태수여야 할 필요가 별로 없는 그냥 남성이라는 신비한 성(性)이 불의에 나를 유인하고, 나는 부득이 그와의 접촉에 황홀하게 애착했다.(pg.159)”
  그녀는 고민에서 벗어나 육체적인 감각으로 이내 돌아와 버린다. 그러나 선택의 결과는 소설의 후반부 전체를 지배할 단 하나의 사건으로 그녀를 빠뜨려버린다. 황태수의 형수에게 ‘동서’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옥희도 생각을 한다. 앞선 일은 그저 “부연 회색의 일부분(pg.167)”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반쪽의 사랑

  부적절한 관계에 빠진 채 미래에 대한 계획을 망각하고 있는 이경에게 옥희도의 분명한 발언이 바로 다음 장(章)인 제 11장에서 쏟아지는 것은 전개 상 우연이 아니다. 이경은 옥희도에게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처음 쓴다. 그러나 옥희도로부터 돌아오는 말은 그녀가 바라는 말이 결코 아니었다.
  “어울리는 사이라는 건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보다 몇 배나 더 축복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해.(pg.170)”
  자신은 철부지가 아니고, 이경 나이 또래의 딸도 있으므로 그녀와의 사랑은 파멸의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이 옥희도에게 있다. 따라서 그녀를 사랑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냉혹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그러한 수준의 아픔이 이경에게는 부재한다. “염려 말고 저를 사랑하고 가지세요. 어차피 저에겐 긴 미래가 없을 테니까요.(pg.172)” 바로 전쟁 때문이다.
  이어지는 이경의 생각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과 긴장을 야기하게 된다.
  “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 지독한 반쪽의 슬픔과 허기증에서 어떻게 하나가 되는 환희와 포만을 얻는 것일까(pg.173)”를 생각하는 장면을 읽으며 나는 그것이 옥희도와의 반쪽짜리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생각했으나, 두 번째 독서에서는 저 안타까운 사랑이 다름 아닌 어머니와 이경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반쪽의 사랑은 환희와 포만을 얻을 수 없으므로 한쪽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이상 자신 역시 그 존재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입될 ‘존재’가 옥희도일 수는 없다. 맹목적 집착은 아직 식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존재’가 바로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이어지는 이경의 생각들이 그 근거가 된다.
  “어떡하면 가끔 엄마의 딸이 되기를 고만둘 수 있을까고.(pg.173)”
  그리하여 이경은 의치를 끼네 마네의 문제로 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다 문득 정돈된 장롱에서 어머니의 절대적인 허와 마주하게 된다. 모든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장롱처럼 어머니도 ‘허’ 그 자체이다. 고가에 자신 혼자만 살고 있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생각(pg.176)”이 든다.
  타인과 소통하고픈 생각에 진이 오빠에게 편지를 쓰게 되는데, 편지가 하고픈 말은 여러 가지이지만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어머니는 정상이다. 둘째, 혼란스러운 건 나다. 셋째, 나는 죽고 싶으면서도 살고 싶은 모순된 바람을 갖고 있다.

 

# 선홍빛 과거

  옥희도는 잠시 이경의 곁을 떠나있게 된다.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면서 그림을 그릴 말미를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이경에게 다가온 존재는 옥희도와는 달리 이경에게 육체적 일탈의 욕망을 일깨워주는 ‘죠오’라는 지 아이이다. 그는 “높은 담장 작은 창 속의 신비(pg.196)”라는 표현으로 이경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담장을 넘어 창을 들여다보면 신비는 깨지게 될 것이다. 나는 레비나스가 미래를 여성의 신비성으로 설명했다는 것을 얼핏 생각해냈다. 그리고 이경이 죠오에게 정복당하고야 말 것이라는 불안도 이어졌다.
  나의 불안은 그녀가 죠오를 어떤 의미로 이용하려고 했는지 알게 된 후에 더욱 커졌다. 어머니와의 화해를 위해 이경은 빈대떡을 사가지고 돌아가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허로 딸과 마주한다. 결국 이경이 선택한 것은 죠오를 고가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어머니가 어떻게든 반응하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죠오는 오지 않았고, 이경은 옥희도를 ‘간조오 날’을 핑계로 찾아가게 된다. 그녀는 단 하루도 그녀를 무의미한 세계 속에 놔두려고 하지 않았고, 그녀의 인내심 없는 생각과 행동들은 독자들에게 청춘의 어지러운 이미지를 그대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옥희도의 집에 찾아가 이경이 보게 되는 것은 고목(枯木) 그림이다. 이경은 자신이 서 있는 땅과 비유하며 그 나무가 ‘한발(旱魃)’에 고사했다고 여긴다.
  “왜 그런 잔인한 한발이 고사시킨 고목을 나는 그의 캔버스에서 보았을까?(pg.206)”
  그림 앞에서 당혹감을 느낀 이경은 옥희도의 아내에게, 정상적인 마음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될 간섭을 쏟아내며 그녀도 당혹감을 느끼게 만든다. “넌, 도대체 뭐니?(pg.209)”라는 아내의 질문에 이경은 “내가 뭔지 몰라서 물어요?”라며 자신이 옥희도를 사랑하는 사람임을 선명하게 밝혀놓는다. 그럼에도 아내는 옥희도가 불륜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 속에 정말 모른다며 역정을 낸다.
  옥희도의 아내는 그녀가 가진 특유의 이해심과 사려로 이 상황들을 자신만의 평온한 마음속에 용해시킬 것이 분명했다. 결핍은 오히려 이경에게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명백한 현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나는 지 아이의 기갈을 도울 수는 있어도 옥희도 씨의 기갈을 도울 수는 도저히 없음을 서글프게 깨닫는다.(pg.210)”
  이러한 깨달음은 다이아나 김을 만나 그녀를 속으로 실컷 욕해놓고, 막상 죠오를 찾아가게 되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깨달음으로도 이어진다.
  “나는 그를 통해 수많은 군더더기의 나를 벗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나를 찢고, 때로는 내 뒤에 숨고 내 뜻과는 상관없이 제 나름으로 요변하는 여러 개의 나를 벗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죠오의 도움으로 나는 그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는 틀림없이 진짜 나를 보여줄 것이다. 그를 통해 나는 내 영육(靈肉)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pg.217)”
  이경은 속으로 자신의 행동이 다이아나 김과 결정적으로 다른 까닭은 그 ‘엽전’은 돈이면 다 되는 사람인 반면 자신은 사랑과 새로운 삶, 적나라한 나를 발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항변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녀의 행동은 다이아나 김의 것과, 즉 창부의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우연히도 죠오와의 관계에 앞서 이경은 붉은 침대시트로부터 과거를 기억해낸다. 사루비아의 역겨운 선홍빛 과거.

 

# 살고 싶다, 혹은 죽고 싶다.

  “여태껏 우리 식구만 유독 안온과 만복을 누렸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 견딜 수 없었다.(pg.233)”라는 구절은 하나의 복선과도 같다. 큰아버지 가족보다 아낀다는 까닭에 욱이와 혁이 오빠에게 더 은밀한 숨을 곳인 행랑채를 내주도록 한 이경의 보챔이 결과적으로는 끔찍한 참사로 이어졌다. “나 때문이었을까?(pg.258)”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자책했다. 그리고 이 자책은 어머니의 단 한 마디 넋두리를 곡해하게 만든다.
  “어쩌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들들은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놓으셨노.(pg.243)”
  어머니는 분명 남아(男兒)를 선호하던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저 넋두리는 이경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녀에게 두 아들의 처참한 비명횡사는 극복하기 힘든 이미지로 매우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을 생각할 때에는 상대적으로 이경은 뒷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이경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이경이 가끔 던져보곤 했던 어머니와의 좋은 기억으로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한 마디의 넋두리가 이경과 어머니 사이의 관계를 순식간에 벌려놓았고, 정서적 거리는 물리적 거리로 확인되었다. 어머니는 신열이 있거나 주로 혼수상태에 있었지만 빨리 회복한 이경은 마당의 은행나무 밑에서 “살고 싶다.”는 의지를 “죽고 싶다.”라는 막연한 감정 사이로 키워갔다.
  “Don't break me.”
  이 외마디의 외침은 분명 은행나무 밑에서 그녀가 키워왔던 의지로부터 세차게 뻗어 나온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찾아간 곳은 옥희도의 집이었고, 집 앞에서 부른 건 옥희도가 아니라 “아주머니(pg.249)”였다. 자신에게 “죽고 싶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은 애석하게도 어머니였기 때문에 말라비틀어진 고목, 그녀가 옥희도의 그림 속에서 봤던 그 고목으로 상징될 수 있을 어머니가 아닌 풍만한 옥희도의 아내에게 기대고 싶어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잠을 청하며 옥희도와 아내 사이를 질투하는 그녀의 모습은 예전보다 한결 얌전해졌다. 격렬한 감정은 꿈속으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간밤의 휴식으로 이경의 질투는 예전의 날 선 모양으로 형태를 갖춰갔다.
  “신세 많이 졌어요. 꼭 갚고야 말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pg.257)”
  옥희도의 아내에 대한 질투는 다이아나 김에 대한 혐오로 곧장 이어졌다. 자신에게 더 관대해진 탓이다. 그녀는 질투와 혐오를 수단으로 하여 자신의 절박한 상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해보려고 한다.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고, 옥희도의 아내에게는 질투를, 그리고 다이아나 김에게는 혐오의 시선을 보내는 것. 이러한 노력 속에는 옥희도와의 사랑을 위해 윤리를 하나의 훼방요소로 보는 삐딱한 인식이 흘러넘친다.
  “언닌 화냥년만도 훨씬 못하군요.(pg.262)”
  그러나 현실은 그저 그러한 것만도 못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우리[柵]속에 갇힌 원숭이”로 본다. 그 ‘우리[柵]’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앞선 사건들로부터 충분히 밝혀져 있다. 만약 그녀가 질투와 혐오를 통해 그 우리를 깨보려고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독자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할 것이다.

 

# 식어간다는 것

  바로 그 무렵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바로 그 무렵’이란 그녀가 질투와 혐오로 또 다른 말이나 행동을 함직한 때이다. 황태수의 형수, 즉 사돈댁이 상(喪)을 도맡아 처리하고, 이경은 맥없이 이 상황들을 지켜보고 있다. 사건은 옥희도의 아내가 위로하러 왔을 때 비로소 터진다. 호곡을 위한 엉뚱한 생각으로 문상 온 사람을 충분히 속일 수 있으리라 예상한 이경은 “거짓말이에요.”, “나 같은 걸 기다릴 게 뭐예요? 후후후……(pg.281)”라며 자신이 그동안 어머니와 상당히 단절되어 있었다는 것을 애써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경의 엉뚱한 생각을 가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진실이라 믿게 된다. 이경의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인데, 더 이상 역정을 낼 기운도 없이 그녀는 포기한다.
  “아무렴 그렇구말구. 가엾은 것!(pg.281)”
  이경이 가장 듣기 싫어하던 종류의 연민으로부터 그녀는 또 한 번 공격을 받게 된다. 그렇게 그녀는 “완전히 타의로 또 하나의 내(pg.282)”가 되는데, 이 과정은 그녀가 사회에 녹아드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비극적인 것과 다름없다. 소설 속의 상황은 이경이 황태수와 결혼하기 바로 직전의 분위기에 이르게 되고, 일은 사돈댁의 부산한 움직임 탓에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만 같아 보였다.
  이경도 속도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황태수와 옥희도를 한 자리에서 만나 둘 중 한 사람의 일을 처리해야만 될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삼자대면의 긴장에서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간 건 옥희도였다. 그에게는 이경이 아니라도 돌아갈 곳이 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네.(pg.289)” 그리고 자신이 이경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던 이유를 밝힌다. 여기서 이경과 옥희도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옥희도가 화가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던 그 날들을 “회색빛 절망(pg.290)”이라 표현한 것이다. 그곳에서 색채를 갈구했고, 그러한 갈구는 이경이 알록달록한 설빔을 입고 거울 앞에 선 장면과 정확히 대응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부도덕할 수밖에 없는 갈구였다. 이 점에서 옥희도와 이경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자네에게 이런 책망을 듣기 전에 경아와의 사이가 끝나 있어야 하는 건데……(pg.291)”
  이경은 옥희도에 대한 집착을 포기할 줄 몰랐다. 옥희도는 그것이 이경을 더 옭아매고 있었다고 판단했고, 마지막에는 홀로 서서 용감한 고아가 되라고 조언한다. 어떻게 보면 옥희도의 비겁함을 책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림으로 곧 안정을 찾게 될 것이었고, 곁에는 늘 그렇듯 가족이 있을 것이었다. 이경에게서 색채에의 갈구를 발견했으나 그것이 부도덕한 일임을 알았을 때, 그는 언제라도 이경을 떨쳐낼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겁함이라는 것은 이경에게도 씌워져 있는 죄목이다. 그녀는 옥희도의 아내에게 호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감을 혐오로 바꿔 옥희도를 독차지하고 싶어 했으니. 혹 이경이 속마음으로는 황태수로의 회귀를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실제 그녀가 황태수에게 돌아가 첫 관계를 맺은 것을 보면 말이다.

 

# 청춘, 여행

  나는 17장의 해석에 집중하면서 이 소설을 도저히 성장소설로는 읽지 못하겠다는 나의 원색적인 직관에 힘을 보태고자 했다. 부산에 있는 친척이나 ‘사돈댁’의 시선에서야 어엿한 사회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결말이겠지만 이경의 청춘은 적어도 그녀의 입장으로 보자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실패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자주 상기된다.
  “남편 태수가 미처 소유하지도 상처내지도 못한 또 하나의 나. 나의 체온이 끝내 데울 수 없었던 또 하나의 나.(pg.297)”
  그 ‘나’라는 것은 이경 스스로도 어떻게 해보지 못했던 청춘의 그 날카로운 집착과 왜곡된 열정, 그로 인해 때론 선명하게도 보였을 비도덕적인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상식적 궤도로 이끄는 황태수로부터 이질감을 느끼곤 하는 이경은 어떻게 해서라도 남편에게 편한 아내가 되고자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말뿐인 감정일 수도 있다. 남편의 의지에 따라 집을 다 뜯어고쳤지만 은행나무만은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해체되지 않은 한 모퉁이가 내 은밀한 곳에 남겨진 것이다.(pg.300)”
  옥희도의 유작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하는 남편을 비꼬며 “당신이 생각해 낼 만한 천박한 추측이군.”이라든지, “당신 따위가 알 게 뭐예요.(pg.300)”라는 속마음을 감추는 그녀에게 상식의 세계는 여전히 청춘의 실패가 낳은 불완전한 연장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모정보다도 갈망이 앞서고 있고, 가족을 앞에 두고도 은행잎에서 훈향을 찾고자 더듬거리는 모습도 그러하다. 유작전에 도착해 나목(裸木)을 보는 장면에서는 자신이 과거에 한 여인이었음을 새삼 되새김질한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곁을 잠깐 스쳐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대하며 그 옆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을 뿐임을 깨닫는다.(pg.304)”
  남편은 그런 서성거림에서 자신을 구한 존재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낯설다. 그녀의 눈에는 늦가을의 바람 속에 흔들리는 어린 나무들이 “서로의 거리를 조금도 좁히지(pg.306)” 못하는 청춘의 존재들로 비춰진다.
  그녀는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모든 존재들이란 서로에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전쟁이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 후부터 그녀가 겪은 인간관계라는 것은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선명한 거리이고, 그녀가 억지로라도 좁혀보려고 했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적어도 열정적이지 못한 ‘아내’로의 삶을 반추해보건대 이경은 “오랜 여행(pg.304)”을 막연하게나마 동경하고 있진 않았을까. 중년의 황태수가 낯선 것처럼 중년의 자신도 그녀는 그렇게 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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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0 1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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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2 2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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