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니야.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무서운 거지." 엄마는 바닥을 기어가면서 생각했다고 한다. 넘어가야 하는 순간이 온 거라고. (19쪽)

엄마가 자신의 몸을 드러내 보이는 걸 태평스럽게 승낙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더 불쾌하게 했다. 엄마가 평생 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금지 사항이나 지시 사항을 벗어던졌다는 점에 있어서는 엄마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벗어던진 결과 엄마의 몸은 한낱 몸뚱이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해 버렸고, 그 결과 시체와 다를 바 없어져 버린 셈이었다. 마구 만지고 마음대로 다루는 전문가들의 손길에 내맡겨진, 의지할 데라곤 하나 없는 가련한 몸뚱이. 거기에서 생명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관성적인 상태로만 연장되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엄마를 살아있는 존재로 여겨 왔던 나는 언젠가, 그것도 얼마 안 가서 곧 엄마가 죽는 걸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게 있어서 엄마의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시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었다. (26쪽)

내게는 권리가 있다. 우리를 짜증나게 했던 이 말은 사실 엄마에게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걸 증명해 보이는 말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엄마의 욕망이 그 자체로는 인정받지 못해 왔다는 걸 보여 주는 말인 셈이었다. (53쪽)

자기 생각을 스스로 반박해 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주 많은 걸 얻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살았던 것이다.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참아 내기 위해 엄마는 온 힘을 쏟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엄마는 유년 시절 내내 규범과 금기라는 갑옷을 두른 채 몸과 마음, 정신을 억압당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끈으로 옭아매도록 교육받았다. 그런 엄마의 내면에는 끓어오르는 피와 불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인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뒤틀리고 훼손된 끝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58쪽)

평소 같았으면 자기가 없을 때 남이 집에 들어오는 걸 참지 못했을 것이다. 병으로 인해 엄마를 둘러싸고 있던 편견과 오만의 껍질이 깨어져 버린 것이었다. 아마도 이제는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리라. 체념이나 희생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가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회복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일에 전적으로 몰두하면서 마침내 엄마는 원망의 감정에서 벗어났다. (83쪽)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말했다. "부모는 자식을 이해 못 하는 법이지. 하지만 자식도 부모를 이해 못 하기는 매한가지란다......" (97-98쪽)

죽음을 삶과 통합하려는 건, 그리고 합리적인 영역에 속하지 않은 일에 직면해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려는 건 모두 소용없는 짓이다. 각자가 나름대로 혼란스러운 감정을 풀어 나가야 한다. 나는 유언을 남기고자 하는 모든 이의 심정을 이해한다. 또한 그 어떤 유언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의 심정 역시 이해한다. (142-143쪽)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
이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는, 잊힌 여인에 불과했던 엄마가 한 명의 주체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146쪽)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잡순 거죠." 이 말은 노인들을 슬프게 하고, 또 그들을 유배된 것과 다를바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그런데 자기가 죽을 나이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략) 사람이 죽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도, 살 만큼 살았기 때문도, 또 늙었기 때문도 아니다. 사람은 무언가로 인해 죽는다. (중략)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152-15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른 딸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0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착하다‘는 단어에 걸려 넘어지고, 당신, 그리고 부모님과 연결하여 그 의미를 풀어보려 애씁니다. 이 단어의 의미가 번쩍이자마자 나의 위치가 일순간에 바뀌었으니까요. 부모님과 나 사이에 이제는 당신이 있어요. 보이지 않지만 사랑스러운 당신이. 나는 당신에게 자리를 만어어주기 위해 멀찌감치 밀려났습니다. 당신이 영원한 빛에 둘러싸여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동안 난 그늘로 떠밀려갔지요. 무남독녀라 누구와도 비교당하지 않고 살던 내가 비교의 대상이 된 거예요. 현실은 서로 배척하는 단어들이 만들어냅니다. 더/덜, 또는/그리고, 전/후,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삶이나 죽음 같은 단어들에 의해. (22-23쪽)

그렇다. 나는 믿는다.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니라는 걸. 그리고 내 안에는 세상이 묵과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나는 당신이 죽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죽은 것은 내가 글을 쓰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39쪽)

언제라도. 심지어 어른이 되고, 내가 엄마가 되었을 때조차도 나는 왜 당신에 대해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을까? (중략) 우리는 허구를 마치 실제인 양 지탱해나갔습니다. (중략) 아이들은 비밀을 간직한 채,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 것과 함께 살아가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렇답니다. 침묵은 그들과 나,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비밀이 나를 지켜주었어요. 가족 중에서 죽은 아이들을 숭배해야 하는 부담을 피하게 해주었으니까요. 그건 살아 있는 자들에게 알 수 없는 비참한 마음을 안겨주어요. 내가 분노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그 당사자였으니까요. (51-55쪽)

이 편지를 시작하기 전에는 무심코 당신을 떠올려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평온하던 마음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글을 쓰면 쓸수록 마치 꿈을 꾸듯 이끼만 잔뜩 돋은 인적 없는 습지에서 걸음을 내딛는 듯하고, 단어들의 틈새를 헤치고 나아가 불분명한 것들로 가득 찬 공간을 넘어가야 할 것만 같아요. 내겐 당신을 위한 언어도, 당신에게 말해야 할 언어도 없으며, 부정적인 방식을 통해 지속적인 비존재 상태로 있는 당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감정과 정서의 언어 바깥에 있는 당신은 비언어입니다. (60-61쪽)

‘당신‘은 덫입니다. 숨 막히게 하는 무언가를 가진채, 역겨운 슬픔의 냄새를 풍기며 당신에 대한 가상의 친밀감을 만들어내요. 나를 비난하려 가까이 다가오죠.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고 믿게 하며, 당신의 죽음을 우위로 두어 내 존재 전부를 깎아내리려 합니다. 내가 그렇게 여기는 까닭은,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엄밀하게 저울질하여 만든 나에 대한 인식을 당신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완성할 수 있다는 유혹 때문이에요. (71쪽)

며칠 수 투생 휴가가 돌아오면 언제나처럼 산소에 갈 생각이에요. 이번에는 당신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까요?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네야 할 필요가 있을지, 이 편지를 썼다는 게 부끄러울지 자랑스러울지, 편지를 쓰고 싶었던 욕구가 정말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 나는 당신의 죽음이 내게 준 삶을, 이번에는 내 차례가 되어 당신에게 돌려주며 가상의 빚을 털어내길 원했던 것 같아요. 아니면 당신과 당신의 그림자로부터 떠나기 위해 당신을 되살리고 다시 죽게 한 걸 수도 있고요. 당신에게서 벗어나려고. 죽은 자들의 오래 지속되는 삶에 대항애 투쟁하려고. (8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부제가 썩는 나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514
최승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굴한 놈
그렇게까지 비굴하게 굴더니
굴비가 된 놈
아직도 입이 살아 있는 놈
강연까지 하고 다니는

-굴비가 강연을 한다

쥐뿔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그러나 우리는 쥐뿔들에게 상처받는다
(중략)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상처받고
피 흘리다 보면 어느덧 노인
노인은 지하철을
공짜로 탄다

-우리는 쥐뿔들에게 상처받는다 중에서

고개를 들면
거울이 따귀 때리는 아침

-절망은 제 얼굴을 안 보려고 술에 머리를 쳐박는다

겨울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보다 길다
늑골에 냉기를 내뿜은 은산철벽들
빈 골짜기에 휘몰아치는 눈보라
긴 겨울 겨우살이는
겨우겨우 추위를 견디고 있다

-겨울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보다 길다 중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 왕이 그렇게 외쳐대도
헛소리의 메아리처럼 들릴 뿐
우리는 죽은 뒤에야
솔로몬 왕의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생애 중에서

공동체의 이기심도
있다고 본다
공동체의 이기심 속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이기심도
있다고 본다
펭귄들의 포옹이
어색한 것은
팔이 짧고
배가 너무 나왔기 때문이다
세상도 팔이 짧고
배가 너무 나왔다
나도 그렇다
남극 눈보라 속에
손을 잡지 않는 펭귄 공동체가 있다
저마다 홀로 서는
펭귄 공동체
뿔뿔이 흩어진 채 모여 사는 펭귄 공동체

-손을 잡지 않는 펭귄 공동체

하루로 가는 길은
하루를 지나야 하는 법
어제에서 오늘로 오기까지
나는 스물네 시간을 살아야 했다
1분만 안 살아도 끝장나는 인생

-하루로 가는 길 중에서

서울에는 사막이 없다
황사 마스크를 쓴 낙타들처럼
사람들은 좀 무서운 모양으로 걸어 다닌다
공허는 얼마나 미세한가
틈만 나면 내 안으로 흘러든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흙먼지들이
낙타 해골의 구멍들과 틈새로 흘러들듯이
공허는 그렇다
흘러들어 뼈들과 속삭인다
뼈들은 부서지지 않고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모래로 부서지지 않는

돌들의 절벽처럼
돌들의 사원처럼
뼈들은 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미세먼지 주의보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는 참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참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서로 역할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불공평한 일이다. 참지 않는 사람들은 늘 안 참고, 참는 사람들은 늘 참는다. 참지 않는 사람들은 못 참겠다고 말하면서 안 참는다. 그들에게는 늘 ‘참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참는 사람들은 그냥 참는다. (77쪽)

소설에서 음악이 흐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노래는 거기 그대로 있는데 삶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랑은 식고 재능은 사라지고 희망은 흩어진다. 삶의 그런 균열들 사이로 음악이 흐를 때, 변함없는 음악은 변함 많은 인생을 더욱 아프게 한다. (153쪽)

"예술은 현실의 재현"이라는 유서 깊은 논의에서 ‘재현‘이란 현상의 복사가 아니라 본질의 장악이다. 남길 것과 지울 것을 선택하는 지성이 필요한 일이다. 또 독자에게 고통을 전이시켜야 한다. 세상이 고통스럽다고, 고통스럽게 말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인지의 충격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226쪽)

어떤 시깅의 사회적 발언을 지지하는 것과 어떤 시인이 특정한 내용을 쓰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후자는 어떤 문화적 폭력의 은밀한 시작일 뿐이다. (285쪽)

내 결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 결여가 더는 고통이 아닌 생. 그런 생을 살 수 있게 된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는 않을까. (33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1
아니 에르노 지음, 김선희 옮김 / 열림원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 어머니는 오로지 자신의 욕구밖에 모른다. (중략) 이젠 더 이상 어머니의 기억상실증에 화가 나지 않는다. 강한 타성에 젖어 무감각해져간다. (10-11쪽)

이분은 나의 어머니이긴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녀 자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6쪽)

내가 어머니에게 드릴 수 있는 사랑이란 이 이상 더는 충족시켜드릴 수 없는 한계에 달한 사랑이었다. (어린 시절엔 그토록이나 어머니를 사랑했건만.) 나는 내 자신이 A에게 요구했던 사랑을 생각해보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내게서 멀어지기만 하는 사랑을. (36-37쪽)

어머니는 바로 내 미래의 노년기 모습이었다. 어머니이 다리 살갗은 결마다 주름살이 잡혀 있고, 이제 막 머리를 짧게 잘라주어 쭈글쭈글한 목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차츰차츰 노쇠해가는 어머니의 몸. 나의 내면 깊은 곳에도 이같은 육체적인 피폐가 다가오고 있는 듯한 위협을 느꼈다. (42-43쪽)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어머니가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을 저지른다는 점이다. (53쪽)

처음으로 나는 내가 어머니와 함께 있지 않은 시간 동안 어머니가 이곳 병원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실제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중략) 하여간 죄책감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는 건 생명이 멈추어버린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의 삶이 고통과 죄책감으로 소멸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어머니‘는 곧 ‘나‘임을 실감한다. 나는 어머니가 글로 쓴 마지막 문장을 생각해본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57-58쪽)

나는 대체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어머니 곁에 있을 뿐, 그게 전부다. 내 곁엔 항상 어머니의 목소리가 있고 모든 것이 그 목소리 안에 응집되어 있다. 죽음이란 다른 모든 것을 초월해서 볼 때 목소리의 부재를 의미한다. (115쪽)

다른 어떤 고통들보다도 바로 이런 어머니의 몸짓, 그리고 허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또 다른 온갖 몸짓을 보고 있을 때가 가장 견디기 힘들다. (14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