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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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별을 보면 아픔이 느껴진다. 알퐁스 도데가 노래한 반짝반짝 빛나고 예쁜 별이 왜 내게는 아픔으로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읽으면서도 그토록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가 왜 그렇게 슬펐던 이유도 모를 일이지만, 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을 노래하다가 갑자기 설움에 북받힌 이유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별은 내 가슴에 말하지 못하는 슬픔처럼 자리잡아 있었다.

 

모든 별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일제히 빛을 내뿜는 순간 아빠가 다른 우주로 갔다.

정훈은 이후 죽음이란 빛으로 태어나 빛으로 죽는 것이라 생각한다.

영원한 빛은 곧 죽음.

그렇게 1984년 열다섯이던 정훈은 고아가 되었다.

의식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깨어난 정훈은 '애국지사'라 불리우며 '원더보이'라는 공식명칭이 붙는다.

이후 모든 별들의 빛을 받아서인지 정훈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지금은 곁에 없지만 다른 우주에서 여전히 과일을 팔고 있을 아빠를 위해 정훈은 하늘의 별을 세곤 한다.

 

그러면 아빠가 우주의 비밀을 말해준다.

"순리대로 사는 게 바로 이 우주의 비밀이지."

"산은 더욱 산이 되어야만 하고 물은 더욱 물이 되어야만 한다.그게 우주의 비밀이야" 라고...

 

원더보이는 이렇게 가슴속에 아버지를 품고 우주의 비밀을 깨닫는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복학생 선재 형, 남장 여자 강토 형,해직 기자 출신의 재진 아저씨, 구구절절한 사연의 무공아저씨, 이들 모두의 고통을 느끼는 정훈은 그들의 고통을 흡수하면서 자란다. 타인의 고통이 스며들어 자신의 일부가 되었을 때 정훈은 '이해'라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 또한 타인의 이해는 더 나아가 전 우주에 대한 이해로 확장되어 간다. 처음 정훈이 아버지의 죽음을 우주의 양자론으로 받아들여 또 다른 우주에 아버지가 살고 있다고 믿는 것처럼, 아버지를 다른 우주에서 만날 수 있다고 희망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경계지어진 것들에서 벗어나 범우주적인 시각으로서 자아를 바라보게 한다. 그것은 정훈을 통해 고통과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안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자아를 바라볼 때, 지구의 수억만명 중의 하나인 존재이지만 그 수억만명중의 한 인연으로 만난 소중함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특별함을 부여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 슬픔으로 다가왔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별을 바라보며 언제나 떠올랐던 슬픔의 실체를 나는 정훈을 통해 비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그 별은 현실에 일어나는 타인의 고통들을 외면하고 있는 '나'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별을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은 이유는 원더보이의 마지막 말 때문이다.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믿고 싶어져서 이다.

 

우주에 그토록 별이 많다면, 우리의 밤은 왜 이다지도 어두울까요?

그건 우리가 지구라는 외로운 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천문학자들은 우리 은하에 어림잡아 3천억 개의 별들이 있다고 추정합니다. 이중에서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알려진 별은 현재로서는 지구뿐입니다. 그래서 지구는 고독합니다. 이 고독은 3천억분의 1의 고독입니다. 그 별들 중에서 생명체가 존재하는 별이 하나라도 더 있다면, 이 고독은 반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그때 지구의 밤은 지금보다 두 배는 밝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구 하나 뿐입니다. 아무리 별이 많다고 해도 지구가 3천억분의 1만큼 고독한 한에는 지구의 밤은 여전히 어두울 것입니다.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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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성장시키는 독서법 - 책에게 질문을 던지는 소통의 책 읽기 노하우
채석용 지음 / 소울메이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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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란 무엇일까? 책은 왜 읽는 걸까? 가끔 내 자신에게도 하는 질문이다. 근 몇 년간을 하루도 책에서 손을 놓지 않은 거 보면 적어도 독서광 정도에 속하긴 하는 것 같다. 책읽기는 처음 서울에서 낙향하였을 때 심심하여 읽게 되었던 것을 시작하여 아직도 멈추지 못하고 있는 행위이다. 무료하여 읽었던 것에서 더 나아가 블로그에 책을 읽은 소감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독서 패턴이 정해지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재미있는, 오락성이 강한 책만 선택하여 읽었다. 친구도 없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없는 시골생활의 적적함을 책으로라도 달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나를 성장시키는 독서법>의 부제는 “책에게 질문을 던지는 소통의 책 읽기 노하우”이다. 과거 재미있는 책만 읽던 내게 무척 도움이 되었던 것이 바로 소통이었다. 이웃과의 소통은 그만큼 책 읽는 것만큼 소중하다. 독서에 대해서 누군가와 토론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인 것 같다. 그리고 소통을 통해 바른 독서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박사인 저자가 강조하는 독서법 또한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독서법이라고 한다. 책읽기와 글쓰기 , 말하기가 모두 어우러져 독서할 수 있을 때 책이 주는 독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바른 독서법이 된다.

 

일례로 “책 읽는 사람이 제일 싫어“ 라는 말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다. 불과 몇 년 전에 나도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과 인격수양이 같은(=)의미가 되면 더욱 좋겠지만, 독서가 인격수양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기만적이고 이기적이며 앞뒤가 꽉 막힌 폐쇄적인 인간을 만들 수 있는, 독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예를 스탈린과 히틀러를 예로 들고 있는데 희대의 학살자인 그들이 지독한 독서광이라는 사실을 보아도 독서가 주는 폐단이 어림짐작이 된다. 이것은 지식이라는 것이 자기방어의 논리를 제공해주는 수단으로 충분히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책을 한권도 읽지 않아도 주옥같은 곡을 작사했던 김태원의 경우를 보면 책과 감성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책은 많이 읽어도 독재자가 될 수 있고,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아도 시인이 될 수 있다. 히틀러가 지적한 대로 책은 도구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따라서 책은 혼자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낀 점을 타인들과 나누고 공감하며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어야 건강하고 오래 살듯이 많은 사람과 책에 대해 생각을 나눠야 마음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네르바 사건을 통해 독서가 독이 된 예를 말해주는데 미네르바의 폐단은 상호 소통을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얕은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글쓰기를 했기 때문에 발생한 예라고 한다. 한마디로 자신을 과시하고 과장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또한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은 책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상의 활동이어야 하며 완전한 몰입과 완전한 분노만이 진정한 독서이다. 책을 책꽂이에 꽂아두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것, 혹은 거쳐가는 것, 때로는 영혼을 손상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읽기와 말하기, 글쓰기, 삼박자의 소통을 해야한다고 한다.

 

저자가 말해주는 독서법은 아주 좋은 충고이자 조언들이 많다. 책읽기가 습관처럼 굳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도움이 많이 되어줄 책이다. 중간에 저자는 무엇이든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과감한 도전을 감행하고 소통하라고 한다. 소통하지 않은 채 하는 독서는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하는 미로에 헤어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한다. 소통하지 않은 채 책을 읽으면 책은 오히려 독이 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 아마도 이 부분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역사책 읽는 법과 철학책 읽는 법에 대한 것도 참고해볼 만한 부분이다. 책읽기에는 왕도가 없다. 그러나 책 읽기에 대한 철학박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면 책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은 배가 될 것 같다. 책읽기의 진정한 재미와 마음을 성장시키는 비밀이 들어있는 책이다.

 

과거 선인들의 독서는 인격수양이 목적에 있었다. 퇴계 이황은

오로지 학문에 있어서는 뜻을 겸손하게 하라. 시종을 한결같이 학문에 힘쓰면 덕이 자기 도 모르게 닦아진다.” 라고 했으며,

다산 정약용은 “네 삶의 모든 부분을 공부의 과정과 일치시켜라. 세상 모든 일이 공부 아닌 것이 없다.” 라고 했다. 독서 할 때마다 늘 바라보는 글귀이다. 독서에 대한 막연함보다는 목적을 가지고 책을 읽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 읽는 것은 작가와 대결하는 것, 혹은 연애하는 것이다. 연애나 싸움을 할 각오로 책을 읽으면 재미나고 줄기차게 읽을 수 있다.

☆책만 잔뜩 모아놓고 읽지 않는 수집가가 되는 것은, 진정한 독서가가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피해야할 사항이다.

☆-책에서 건진 책-

강신주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김용옥의 책은 반드시 읽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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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의 역사 - 근대 영국사회와 생산, 언어, 정치
이영석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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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생산은 우리에게 이제는 익숙해진 말이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축적체제'를 일컬어 ‘포디즘’ 이라 하는데 이런 포디즘 체제는 18세기 말 영국에서 처음 나타난 공장제도(factory system)라는 대량생산체제의 확산을 통해 가능해졌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공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공장의 역사>는 공장이라는 창을 통해 사회를 이해하는 작업이다. 최초의 산업화를 경험한 영국의 사례를 통해 공장의 구조 및 변화의 역사를 재구성하며 공장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체제를 대상으로 삼았다.

 

 

1부에 <전前 시대의 유산>은 중세 후기 생산의 근간을 이루었던 도시의 수공업자 조합이었던 길드제도guild system 를 살펴보는데 길드제도가 쇠퇴를 배경으로 원산업화가 전개되었기 때문에 저자는 농촌공업과 도시수공업의 관계를 탐색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2부 <산업혁명과 공장의 원형>에서는 영국 산업혁명의 주도산업인 면공업 분야를 중심으로 기계와 공장제도의 전개과정을 개괄한다. 여기서 저자는 기계와 공장이라는 말의 기원과 의미변화를 통해 공장의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는 추적한다. 여기서 '기계 machine'이라는 말은 숙련이 필요 없는 단순한 작업에 쓰이는 도구를 가르켰는데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자신의 손을 가진 장치’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19세기 담론에서 주목할 것은 공장생산의 대안으로 소생산자의 출현이다. 대량생산을 비판하는 지식인들과 충돌하며 장인생산이라는 소규모 생산단위의 등장했으나, 19세기의 역사는 장인생산의 꿈과 사회이론이 산업주의 즉 사회의 욕구에 패배하였음을 보여준다. 이후 대량생산으로 대세가 기울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3부 <무거운 근대성과 공장제도> 19세기 중엽 영국은 다른 나라의 산업화에 힘입어 더욱더 경제적인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산업화과정에 나타난 경제 불황은 세계경제의 통합, 교통혁명, 제조업 성장 및 투자가속화에 따른 것으로 교통혁명으로 유럽의 선진적인 나라들이 유럽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낮은 비용으로 식량과 원료를 들여오게 되면서 전반적으로 저물가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저물가현상은 특히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산업국가의 농업을 황폐화시켰다. 그리고 이 저물가현상은 값싼 식량과 원료에서 비롯되었기는 하지만, 기술혁신에 따른 생산비 절감이 직접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대불황기에 새로운 기술혁신은 중공업, 특히 기계, 제강, 화학, 전기, 자동차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20세기에 들어와 전쟁과 전투적 노동운동 등으로 사회혼란을 겪어온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복지국가 모델을 뒤따랐다. 복지국가 이미지는 실제로 대공장과 노동자, 둘 사이의 타협과 동거양식을 사회 전체로 확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자본과 노동의 경쟁과 타협을 전제로 한 노사관계 또한 근대성의 한 표현이라고 한다면, 대공장 안에서 이룩된 사용자와 노동자의 새로운 동거양식은 ‘무거운 근대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는 거대한 대공장들이 사회를 지배한 시대다. 포디즘은 20세기 자본주의, 즉 '무거운 근대성'을 상징하는 용어다. 무거운 근대성이란 자본과 노동을 하나로 결합해 상호의존성을 강화시켰다. 자본가와 노동자들은 ,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병약하거나,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결합되어 있었다. 공장은 노동자 공동의 거주지였다. 노동법, 담합구조, 국가의 복지제도 등은 모두 이 동거양식과 관련된다.

 

4부 <탈공장의 시대> 영국 제조업이 쇠퇴를 통해 2차 산업에서 3차 산업으로 급속한 중심이동을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는 탈공장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징후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 전과 달리 거대기업들이 감량화, 경량화등을 통해 생조직의 유연화를 모색하는 한편, 전 세계에 걸친 분업체계를 통해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지식산업과 정보통신혁명같은 이 시대의 새로운 추세와 결합되어 전개된다.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가 생산의 3요소라 부르는 토지, 노동, 자본이 생산 또는 자본축적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이면서 그와 동시에 역사성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여기에서 현대 경제학이 직면한 위기가 오늘날의 생산의 부의 축적 메커니즘을 종래의 패러다임으로 분석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고 한다. 이른바 탈공장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오늘 날 경제활동 일반에서 갈수록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생산의 3요소가 아닌 지식과 정보이다. 지식과 정보는 계측불가능하고 수치로 환원될 수 없기에 생산의 3요소로 치부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의 중요성은 디지털혁명과 함께 증폭되어 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의 고민이다. 이제 생산의 주체는 기계이고, 인간은 그 보조적인 지위로 떨어진 셈이다. 포디즘에 의한 대량 생산은 곧 에너지, 자원의 고갈과 대량의 산업폐기물을 가져왔고, 또 대량 소비는 생활폐기물의 엄청난 증가로 이어져 결국 에너지 및 생태환경의 위기가 자본주의 핵심적 위기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우리에게 직면한 위기는 포스트포디즘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하고 있다. 탈공장의 시대, 앞으로 어떤 변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기에 공장이라는 창을 통해 사회경제를 바라보게 하는 <공장의 역사>는 불투명한 자본주의의 미래에 무척이나 시의적절한 책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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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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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양날의 검이다. 국가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서 사회를 통제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의 자유를 막강한 권력체이다. 이 서슬 퍼런 '국가'라는 검을 누가 이용하느냐에 따라 민중들의 삶은 큰 굴곡과 변화를 겪어왔다 -국가의 거짓말 中에서-

 

 

요즘 들어 국가에 대한 책을 유난히 많이 접하게 된다. 박노자 교수의 책은 처음 읽어보는데다가 생소한 이야기들로 인해 당혹감이 드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국가를 생각할 때 국가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된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것 같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최고의 선善을 이루는 것이 국가가 가지고 있는 명제지만, 플라톤이 " 이상국가란 철학자들이 국가를 통치하지 않는 한, 혹은 통치자들이 철학을 공부해 국가를 다스리지 않는 한 실현되기 어려운 것일세." 라고 했듯이 국가는 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된다. 아니, 역사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국가는 계급사회 권력관계의 중심이고, 생살여탈권은 그 권력관계의 핵심이다. 촛불을 든 국민들에게 물대포를 쏘아대고, 평화롭게 시위하는 국민들을 강경 진압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본질이 아닌가? 촛불은 '재협상.' '고시 철회.' '민영화 철회 및 공공성 강화' 등의 의제를 통해 국가에게 제 역할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제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 국가의 본질이다. 따라서 촛불이 진짜 승리하기 위해선 국가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여기서 저자는 국가가 '합리적 조절자'라는 것은 환상일 뿐이고, 지배계급의 '사무총국' 성격을 띤다고 한다. 매우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역사적으로 소수의 기득권층이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국가'라는 정치권력을 사용할 때마다 항상 '거짓말'이 존재해 왔다. 막스 베버의 유명한 정의대로 근대국가란 폭력의 합법적 독점자이고 , 국내에서 그 합법적 독점자는 바로 경찰조직이다. 과거 용산참사만 보더라도 한국의 지배계급이 사회적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 하려는지 우리에게 직설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최근 제주의 해군기지 또한 국가의 폭력성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해군이 민간인을 폭행하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여도 국가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경제불황으로 인해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들어서인지 과거처럼 촛불시위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과거 실미도의 비극이나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을 다 알면서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수많은 한국인이 있다는 것을 보아도 우리는 자본주의에 깊숙이 물들어 이제는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고 있지 못한 지경에 다다른지도 모르겠다.

 

 

 

과거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동시에 두 개의 전쟁을 진행하던 미국정부는 '정의로운 전쟁' 운운하며 전쟁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저자는 이 '정의로운 전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다. 라고 한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의 성장은 전쟁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나아가 자본주의 국가로 구성되는 국제 패권 체제는 늘 대규모 전쟁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책에서 가장 의아했던 부분이 있다. 근대의 전쟁은 종교를 하나의 정신적 도구로 보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종교 권력'과 동의어로 자리 잡고 있으며 한국의 시민이 모두 같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고 한다. 1950년 이승만을 비롯한 열성 개신교가 권력을 독점해 기독교가 '국교 아닌 국교'의 면모를 띈 상황에서 기독교가 대한민국의 유일사상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결국 한국 교회의 기적적 성장 요인으로 작용하여  바로 반공의 기독교화와 기독교의 반공화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이런 기독교의 사상이 뿌리깊이 인식되어 있는 한국인들에게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심 없이 '국민 통합'이 가능할 것인지 의문으로 남는다고 한다.

 

 

이 책은 이렇게 국가의 실체와 국가폭력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국가의 폭력이 미화되고 합리화되어 정작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 실체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진정한 변혁만이 전쟁의 종식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쯤 인식하게 될까? 다소 불편한 진실일지도 모르지만, 과거 무의식적으로 인식되던 것들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한 책이다. 국가를 바로 보는 시선, 바로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라는 사실이 확실히 각인되어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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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게임 헝거 게임 시리즈 1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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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핑크빛 유토피아를 희망하지만 인간의 욕망을 바탕으로 미래를 점쳐보면 안타까운 미래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본주의의와 수반되어지는 물질만능주의라는 모토가 깨어지지 않는 한 미래의 소득불평등에 의한 불행은 자명한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존재하였던 절대군주의 시대는 갔지만 ,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 경제적 부를 가지고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는 경제권력이 세계를 지배하고 하고 있다. 그럼 다시 독재국가가 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 그런 상상력을 바탕으로 탄생한 독재국가를 이 책 <헝거게임>에서는 '판엠'이라고 한다.

 

 

판엠의 중심부에는 '캐피톨'이라는 이름의 수도가 있고, 모든 부가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주변에 있는 구역의 주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야생짐승과 다름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주인공 캣니스는 12구역에 산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생활능력을 상실한 어머니와 나이 어린 동생을 먹여살려야 하는 소녀가장이다. 12구역에 배급되는 음식을 받지 못할 때는 사냥으로 먹을 것을 구해야 했기에 다른 소녀보다는 빼빼하지만, 오랜 수렵생활로 민첩함과 남다른 지구력을 자랑한다. 판엠에서는 해마다 12개 구역에서 각기 두명을 추첨하여 뽑아 '헝거 게임'을 진행하는데 단 한명의 생존자가 남을 때까지 경기는 계속된다. 어찌보면 <베틀로얄>과 비슷한 내용이지만, 배틀로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배틀로얄>은 3일간 무인도에서 친구들끼리 실제로 서로를 죽이는 서바이벌 게임을 벌여 최후의 생존자만이 살아 돌아갈 수 있는 내용의 영화로 개봉 당시 극단적인 설정과 청소년들의 잔인한 살해 장면 때문에 학부모단체, 시민단체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쳐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었다. 그러나 <헝거 게임>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속성들을 면밀하게 파헤치며 십대 소년 소녀가 서로 죽이는 모토는 같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욕망을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질적인 차이점을 보인다.

 

 

"헝거 게임'의 추첨에 동생 프림이 불리자, 놀란 캣니스. 어린 프림을 차마 헝거 게임에 보낼 수 없었던 캣니스는 프림대신 자원하게 된다. 헝거 게임은 판엠의 시민들이 광분하는 프로그램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게임을 생중계하여 보여준다. 따라서 헝거 게임에 참여하는 참여자들은 대중 스타 못지 않은 치장을 하고 , 스폰서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헝거게임은 게임의 의미만이 아니라 대중 오락게임 같은 인식으로 판엠의 국민들 모두가 즐기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국민들은 헝거 게임의 승자를 예측하기도 하고 스토리를 부여하여 광분하기도 하고 출연자들의 외모에 관심을 갖기도 하는데, 출연진들은 거의 대중스타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다. 가난한 구역의 아이들이 난생 처음 호강아닌 호강을 해보는 것이다. 며칠 뒤에는 서로 죽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캣니스는 게임에서 죽을 자신들에게 열광하는 시민들의 열기가 자못 못마땅하지만, 게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 엄마와 동생 프림,둘만 생각하면 캣니스는 꼭 살아남아야 한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난, 그들 때문에 변하고 싶지 않아. 내가 아닌 다른 어떤 괴물로 날 바꿔 놓는 그런 거 말이야."

 

 

이렇게 이 소설은 소득불균형이 가져온 미래사회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판엠에서의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과는 달리 12구역에서 캣니스의 삶은 당장에 먹을 것이 없어 쓰레기통을 뒤지고 그래도 먹을 것을 찾지 못해 토끼를 잡아먹어야 하는 삶이다. 부가 지배하는 세상과 가난에 익숙해져 있는 세상은 서로 공존할 수 없다.지배와 복종만이 있는 세계이다. 지배계급의 잔인함은 복종하는 이들, 즉 가난한 이들 속에서 십대 소년 소녀를 차출하여 서로 죽이게 한다. 이와 같은 설정은 인류사에서 지배계급의 잔인성에 대한 모습이다. 인간의 사회적 욕망이 얼마나 잔인성을 띠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경종을 울리기도 한다. <헝거 게임>은 이렇게 잔혹하고 독단적인 어른들에 의해 가없이 희생되는 약한 아이들의 모습에서 사회적으로 강자와 약자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사회의 모습을 유토피아로 만들 것인지, 디스토피아로 만들 것인지 선택하는 것은 바로 어른들의 몫이다. 따라서 이 책은 가학적인 오락과 TV프로그램에 중독되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경고를 보낸다. 총 3부작으로 되어있는 <헝거 게임>의 후속편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최근 영화로도 개봉되었다고 하니, 아니 볼 수 없을 것 같다.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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