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세살.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 쯤 되는 나이.
커피.
커피를 처음 맛보았다. 커피를 매우 좋아하시던 아빠께서 직접 타셔서는 내가 공부하는 책상 위에 놓아주셨다. 참 좋았다. 맛도 좋고, 냄새도 좋고, 기분도 좋고. 이 세상엔 배부르기 위해서만이 아닌, 기분 좋아지라고 먹는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영어 숙제.
중학교 입학 전 겨울방학부터 영어라는 것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요즘이야 유치원에서부터 영어교육이 시작된다지만, '그 시절'은 그렇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부터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므로, 입학하기 전 겨울 방학때 알파벳 익히고, 간단한 문장 읽기, 쓰기 익히고 가는 것이 보통. 대문자, 소문자, 인쇄체, 필기체... 재미있었다. 중학교 1학년 영어교과서 테입을 틀고 따라 읽으며 동생들 앞에서 으쓱했었다. 펜에 잉크를 찍어 쓰는 펜글씨도 처음 써보았다. 만년필은 훨씬 후에나~
라디오.
중학교 입학하면 으례히 받게 되는 선물이 우리집에서는 라디오였다. 책상 위에 올려놓고 들을 수 있는 자그마한 라디오. 나는 이 때부터 라디오를 거의 끼고 살았다. 책상에 앉으면 벌써 라디오부터 켜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까지 계속 라디오의 음악을 들었다. 방송국에 엽서도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 모 방송국에서 하는 예쁜 엽서전에도 여러번 응모했었다. 뽑힌 적은 한번도 없지만 그래도 좋았다.
진로에 대해 생각하다.
처음으로 나는 나중에 대학갈 때 무슨 과에 갈까 생각해보다았더랬다. 고심 고심 끝에 세개의 후보 과를 선정했었다; 교육학과, 사회학과, 영문학과. 엄마께 얘기했더니, 별로 탐탁해하지 않으시는 눈치. 착한아이 컴플렉스의 전형이었던 나는, 다시 생각해봐야 하나 보다 생각했다. 결국 나는 이 세 과중 어느 과에도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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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나의 그 시절을 떠올려보는 이유는, 지금 막 '열 세살, 수아' 라는 영화를 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열 세살 수아 역에 이 세영, 수아 엄마 역에 추 상미, 김 희정 감독의 영화인데, 다소 밋밋하게 전개되는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봤다. 열 세살, 현실이 모조리 마음에 안 드는 나이. 발은 땅을 딛고 있음에도 마음엔 다른 세상을 품고 사는 나이. 그것이 현실과 부대끼며 겪는 이른바 성장통. 그것을 지켜 보고, 보듬어 안아야 하는 부모의 마음.
노란 버스를 타고 들판을 달리는 마지막 장면이 한동안 어른거릴 것 같다. 한줄기 눈물을 흘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 수아의 눈에 들어오는, 식당으로 개조한 낡은 버스 유리창을 열심히 닦고 있는 엄마. 거기서 영화는 끝나고 바로 출연 배우 이름이 스크린에 나타난다.
책을 읽을 때나, 영화를 볼 때나, 나는 지금도 그 사람을 이해하는 열쇠는 열 몇 살 하는 시기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