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젝, 비판적 독해
이언 파커 외 지음, 배성민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1월
평점 :
지젝을 이루는 지성적 원천을 뽑아보면 헤겔, 라캉, 마르크스, 이 세가지를 들고는 한다. 다시 말해 독일관념론,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라는 근대적이고 진보적인 성취를 통합하고 있는 대표적 사상가로 통하며, 그의 저술은 활발하게 인용되고 다양한 분야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젝, 비판적 독해」 는 철학자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으며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는 지젝에 대해 8명의 학자가 비평하고 마지막으로 지젝이 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젝, 비판적 독해
이언 파커, 토드 맥고원, 브루노 보스틸스, 조슈아 러메이,
에이드리언 존스턴, 베리나 앤더맷 콘리, 에릭 포크트, 자밀 카더, 슬라보예 지젝 지음
2021년 11월
글항아리
'당대의 가장 위험한 철학자' 라는 평을 받기도 하는 지젝은 저작들이 체계성이 뚜렷하지 않으며 관점 또한 자주 바뀐다고 지적받기도 한다. 책의 초반에서는 지젝을 탄생시킨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며 지젝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지젝은 자신의 조국의 혼동스러운 상황을 겪으면서 성장했고, 그러한 환경은 지젝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1949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난 지젝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95년, 영화 비평서인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를 통해서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의 저자 이현우에 따르면 당시는 "주변의 영화를 하던 사람들이 모두 이 책을 권해주던" 시기였고, 지젝은 '문화 이론의 엘비스', 'MTV 철학자'란 별명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1부의 이언 파커의 소개에 이어 2부에서 토드 맥고원과 브루노 보스틸스, 조슈아 러메이가 지젝의 비판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을 이해하는 토대를 제시하면서 지젝의 세 가지 지성적 원천을 차례로 다룬다. 3부에서는 에이드리언 존스턴과 베리나 앤더맷 콘리, 에릭 포크트, 자밀 카더가 지젝의 저작에서 등장하는 도발적 주장을 조명한다. 양자역학과 미디어 연구, 생태학적 연구, 탈식민주의 연구가 그것이다. "비판적 문화 이론을 전파하는 탁월한 공작원인 슬라보예 지젝은 오늘날 자본주의 아래서 벌어지는 온갖 문화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건드리고 있다."(p205) 지젝의 저작이 포괄하는 궤적과 응용되는 다양한 영역을 쫓다보면 그의 사상의 왜 혁신적인지, 왜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는지를 느끼게 된다. 나는 6장. 베리나 앤더맷 콘리의 「지젝은 에코 시크」 편을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생태학과 해방하는 주체' 로 시작하여, '공포와 테러', '종말 대 종말론' 등에 관한 지젝의 저작들을 소환하고 평가한다.
지젝은 묻는다. 세계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붕괴가 일어날까? 붕괴가 일어난다는 것이 지젝의 대답이다. 자본주의에는 지젝이 말한 네 가지 적대 antagonism, 즉 역기능적 연결 지점이 네 개 있다. 1) 생태학 자체 2) 지식소유권을 포함한 사적 소유와 물과 천연자원 같은 필수자원 3) 기술과학의 새로운 발전이 함의하는 사회 윤리적 의미, 무엇보다 유전공학의 의미(...) 4)세계 전역에서 새로운 차별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 네 개의 적대는 자본주의 체계가 원만하게 기능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계는 네 개의 적대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 p207, 6장. 지젝은 에코 시크 - 베리나 앤더맷 콘리
앞에서 제기된 주요 주제와 우려에 대해 마지막 4부에서 지젝이 직접 넌지시 대답한다. 특히 헤겔의 이론을 중심으로 하며 전개해나가고 있기에 지젝에 대한 탐구 외에 (그가 말하는) 헤겔에 대한 탐구를 함께 해나가게 된다. 「지젝, 비판적 독해」 를 읽으며 지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과 라캉 또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혹자는 지젝을 헤겔과 라캉의 아바타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헤겔이 절묘하게 분석한 부분에 주목하라. 가난은 물질의 빈곤만을 뜻하지 않으며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한, 주관적 처지를 뜻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공적 부조나 사적 자선으로 빈자를 돕는 것은 한계가 있다. 빈자는 자기 생활을 스스로 돌보는 즐거움을 빼앗긴 채 살아간다. 더구나 주체가 자신을 규정하는 정체성과 자신이 받는 인정을 궁극적으로 기성의 질서인 사회에서 찾는다고 강조할 때, 헤겔이 주체의 자유는 보편적 윤리 질서가 합리적이어야만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할 때, 그의 주장에는 분명하게 진술되지 않았지만 정반대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즉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자는 반란을 일으킬 권리를 갖는다는것이다. 예를 들어 한 무리가 사회 구조상 권리를 박탈당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긴다면, (바로 그런 상태 때문에) 그들은 사회질서를 지켜야 하는 의무에서도 벗어난다. 이 질서는 더는 그들의 윤리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 p317, 9장. 왕과 천민, 섹스 그리고 전쟁 - 슬라보예 지젝
사회에 빚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사회에 대한 어떤 의무도 질 필요가 없다는 헤겔의 "천민"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온 지젝은 이 논점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 또한 함께 가져와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는 '합리적' 사회 전체의 '비합리적' 요소, 즉 '자기 몫이 없는 부분' 을 표시한다. '사회 전체는 구조상 프롤레타리아라는 요소를 생산하면서도 사회 전체를 정의하는 기본 권리를 프롤레타리아에게는 허락하지 않는다.' (p318) 라며 왕과 천민에 대하여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지젝 입문자로서 그의 사상의 원천 및 영향들을 함께 이해해보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그의 사상이 인문학과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어 즐거웠다. 저자들의 '지젝은 어디로 가는가' 란 질문에 대해 나 또한 궁금하게 여기며, 앞으로 지젝의 행보를 더욱 관심있게 지켜보게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