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 - 이브 생로랑 삽화 및 필사 수록본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이브 생로랑 그림, 방미경 옮김 / 북레시피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담 보바리」 가 발간된 1850년대 무렵의 프랑스 사회는 이혼을 허용하지 않았던 만큼 불륜이 만연했다고 한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이 책이 발간된 후 대중적인 도덕률을 위반한다는 이유( 또는 '간통을 미화한 혐의', 혹은 '작품의 일부가 선정적이고 음란하다는 이유' 등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 로 기소되기도 했다. 「마담 보바리」 는 실제로 있었던 일(들라마르 부인 자살사건)을 취재해 5년간에 걸쳐 완성한 '사실소설'의 전형적인 걸작이기도 하다.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으로 이미 책장에 꽂혀있지만, 플로베르 탄생 200주년 기념판이라는 '특별판' 의 매력이 가득한 이브 생로랑의 삽화가 수록된 책을 다시 펼친다. 패션디자이너인 이브 생로랑( 내게는 어릴 적부터 입생로랑으로 각인된 ) 의 삽화가 포함되어 있다니 더욱 궁금해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마담 보바리

Madame Bovary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이브 생로랑 그림

북레시피

 

 

3부로 구성된 「마담 보바리」 는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란 엠마가 성실한 시골의사와의 결혼 후에 조금씩 느껴가는 환멸, 이후 사랑을 꿈꾸며 벌이는 다른 남자와의 밀회, 그리고 그녀의 파멸 과정을 다룬다. '결혼이라는 일상에 안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상을 바랐던' 여성이라고도 불리는 마담 보바리. 제목에서부터 그녀는 마담 보바리, 즉 보바리 부인이라는 것에 문득 눈이 간다. 행복하고 낭만이 가득한 결혼생활을 꿈꿨던 ( 보바리 부인이기 이전 ) 엠마란 이름의 주인공은 권태롭고 지루한 일상과 책 속에서 읽었던 이상의 괴리를 견디지 못한다. 

 

결혼하기 전에 그녀는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생겨야 할 행복이 찾아오지 않으니 그녀는 자기가 잘못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엠마는 책에서 그렇게나 아름다워 보였던 지극한 행복, 열정, 도취 같은 말들이 삶에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려 애썼다. 

 

- p95

 

 

 

'자기 심장에 부싯돌을 살짝 문질러보아도 불티 하나 일어나지 않는' 것을 깨닫고 만다. 반면 남편인 샤를은 이 결혼이 행복하고 만족스럽기만 하다. 이 간극은 엠마를 더욱 불행하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사실 원하는 이상과 비교해서 보는 현실은 불만 그 자체일 수 밖에 없다. 그건 엠마 뿐만 아니라 우리도 일상에서 종종 겪곤 하는 일이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다르기에 조금이라도 이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나쁘다고만 할 수 있던가. 때로는 그 차이가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하지 않던가. 순수했던 시절의 엠마가 바랐던 것을 그저 '몽상'이고, '쓸데없는 욕망'이라고만 부를 수 있을까. 

 

 

샤를의 아이를 출산하는 동안 엠마는 아들을 낳기를 바란다. "여자는 계속 금지에 부딪힌다. 무력하고도 유순한 여자는 연약한 몸과 법률의 속박에 직면해 있다. 여자의 의지는 모자에 줄로 연결된 베일처럼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펄럭인다. 언제나 욕망에 끌리면서, 적절하게 행동해야 하는 관습에 붙들린다."(p159)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녀가 꿈꾸던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돌진은 이미 결혼한 여성이었기에 '불륜'으로 읽혀버리게도 되지만, '사실주의 문학' 의 대가인 플로베르의 심리묘사를 따라가다보면 그녀가 비정상적으로 음탕하거나 탐욕스럽다기보다는 낭만적인 것에 대한 동경이 너무 강했던, 그리고 오히려 욕망의 실현을 위해 저돌적으로 용감했던 여인으로도 읽힌다. 용감했으나 욕망의 렌즈를 통해 현실을 계속 왜곡해서 보는 것이 더욱 안쓰러운 여인. 그녀는 현실이 자신이 꿈꾸던 세상과 같지 않자 그것은 진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문득 엠마가 욕망의 렌즈로 현실을 굴절시켜서 보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다른 기회들이 주어졌다면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야기의 중간 중간에 삽화가 수록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펼친 책은, 앞 부분에 이브 생로랑의 필사와 함께 삽화가 먼저 등장하는 구성이었다. 해설을 읽어보니 1951년, 열다섯살의 소년이 1부 전체와 2부 첫 부분을 필사하고 삽화를 그려놓은 필사본의 모습을 수록해놓았다. 1부와 2부를 읽어가며 앞쪽에 나왔던 장면들이 어떤 이야기를 묘사한 것인지 추측해보는 재미 또한 얻는다. 열다섯살이 그려낸 엠마의 드레스의 모습은 아름답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이브 생로랑이 앞으로 창조해 낼 스타일의 시작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책의 후반부에 정리되어 있기도 하다. 이브 생로랑이 직접 장면을 적어놓지는 않았기에 후대의 사후조사에 의한 연결이다. 

 

플로베르는 '자연은 의미심장한 현상을 일으키나 그 의미를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런 자연과 같은 소설을 쓰고자 했다. 엠마가 함께 달아나자고 하자 부담을 느껴 모습을 감춰버리는 첫 연인 로돌프부터, 지방 소도시의 약사, 엠마를 파산과 종말로 몰아넣는 상인 등 소설에는 엠마 외에도 엠마를 둘러싼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담긴다. 플로베르는 인간을 정밀하게, 또 종종 냉소적이면서도 되도록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플라토닉 러브로 시작했던 레옹과 헤어진 후, 로돌프를 통해 일탈을 경험한 엠마는 재회한 레옹과 더욱 과감한 만남을 가진다. 그러나 그 만남에서도 엠마는 '불륜의 사랑 속에서 시시하고 단조로운 결혼의 모든 것을 다시 발견'(p405) 한다. 그런 행복의 저속함이 치욕스러워도 '하루하루 더 악착같이 거기에 목을 맨 채, 너무 커다란 행복을 원함으로써 그 행복을 전부 고갈시키고'(p405) 있었다. 

 

그녀는 행복하지도 않았고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삶은 대채 왜 충만하게 채워질 수 없는 것일까? 삶이 무엇엔가 기대는 순간 그것은 왜 바로 썩어버리는 것일까? ...... 그러나 만약 어딘가에 아주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 열정이 넘치는 동시에 아주 세련된 용맹한 성격, 하늘을 향해 청동 리라로 애절한 축혼가를 울리는 천사 같은 모습을 한 시인의 마음이 있다면, 그녀라고 왜 찾아내지 못할 것인가? 아, 무슨 가당치도 않을 일! 게다가 찾으려 애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거짓이었다! 모든 미소는 권태의 하품을, 모든 기쁨은 저주를, 모든 쾌락은 혐오를 감추고 있으며, 가장 근사한 입맞춤도 오직 더 강렬한 쾌락에 대한 실현 불가능한 욕망만을 입술 위에 남길 뿐이었다. 

 

- p337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던 엠마는 결국 경제적 파산과 불륜에 대한 수치심으로 독약을 먹는다. 그녀로 인해 남편과 그녀의 딸 또한 불행해지고 마는 과정이 건조하게 표현된다. 그녀의 공허함을 채우려는 갈망은 결국 비극을 부르고 말았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꿈꾸고 상상 속을 달리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욕망에 이끌리는 존재, 소설 작품 속에 살기를 꿈꾸는 돈키호테의 기질' 의 성향을 '보바리슴'이라고 부른다. 감정적으로, 사회적으로 불만족스러워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리질환을 뜻하기도 한다. 문득 그녀의 왜곡된 욕망과 채워지지 않는 정신적 결핍의 모습은,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며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엠마가 소설 속에서 찾던 이상은 이제 우리에게는 각종 미디어와 SNS를 통해 다가오는 여러 모습들로 치환된다. '욕망의 렌즈'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렇게 오랫동안 못 갈 줄 몰랐습니다 - 신예희의 여행 타령 에세이
신예희 지음 / 비에이블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는 순간 모두 고개를 끄덕일 제목이다. 이른바 ‘코시국’ 이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다. 오늘은 프로젝트 동료의 자녀가 확진 판정을 받아 일하다가 검사하러 갔고, 내 아이가 다니던 학원의 옆 반 선생님도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요새는 밀접접촉자가 아니면 PCR 검사대신 자가진단키트를 준다고 한다. 검사를 받으러 갔더니 줄이 너무 길어서 오히려 검사를 받으려고 기다리다가 감염될 걱정을 해야할 판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못 갈 줄 몰랐습니다. 

신예희의 여행 타령 에세이

비에이블

 

 

‘여행’ 이라는 2글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컥울컥 버글버글 끓다 못해 콧구멍에서 허연 김이 나오는 것’ 같다는 저자는 일기라도 써보기로 한다. 막상 쓰기 시작하니 그 두글자 만으로도 할 말이 너무 많았던 것. 속에 담겨있던 그 이야기들이 꺼내어지고 책으로 나와 독자들 앞으로까지 왔다.

 

여러가지 여행지에서의 에피소드는 ‘낯선 곳에서는 사소하지 않은 용기가 생긴다‘ 라는 제목의 1장에 담긴다. 저자의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배낭을 쌌던 여행 이야기는 내 이야기도 했다. ( 라떼는 말이야…? ) 뭘 가져가고 뭘 놓고 가야하는지로 시작되는 고민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지만, 반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대충 넘어갈 수도 있다. 판단이 서지 않을 땐 둘 중 하나다. 그냥 싹 다 가져가는 것과 떨레떨레 몸만 가는 것. 보통은 첫 번째 방법으로 시작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중한 교훈을 얻은 후( 내 허리, 내 어깨, 내 멘탈) 슬슬 두 번째로 옮겨간다. 고생 없이 요령만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그당시의 배낭여행 트렌드는 2리터짜리 생수를 짊어지고 다니고, 제일 싼 바게트를 사서 뜯어먹고 다니고,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분위기 좋은 카페 한 번을 못 갔던 여행이었다. 저자의 말처럼 ‘쫄쫄 굶으며 고생해야 진정한 대한의 청년이며 그렇지 않으면 겉멋 들고 골이 빈 젊은 애라는 분위기’( p37) 가 있었다는 말에 절절히 공감한다. 내 배낭여행 또한 그랬기에. ( 또, 라떼는 말이야.. )

 

이런 1장은 여행을 기록하는 법에 관한 소회로 마무리된다. 언젠가는 휘발될 지 모르는 기억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저자는 여행 한 번에 노트 한 권씩 완성한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여행의 매 순간을 낭만적으로 즐겁게 기록한 것 같은데, 사실 꼬박꼬박 노트를 채워가는 건 생각보다 더 귀찮고 고되다. ‘(p108)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건 예전의 방식이고 지금은 노트 대신 노트북을 쓴다고. 생각해보면 무거운 카메라 대신 휴대폰 카메라를 쓰게 되었고, 로밍이나 포켓 와이파이 대신 여행지의 심 카드를 사서 끼우게 되었다는 변화. 정말 그렇다. 눈치채고 있지 않았는데 글로 마주하니 실감이 난다.

 

2장. ‘그곳이 어디든, 난 내 삶을 잘 살고 싶다.’ 또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는 우리들을 함께 격려하는 듯 하다.

 

‘살면서, 일하면서, 여행하면서, 그동안 직접 겪은 일과 보고 들은 일들이 쌓여 우리들 각자의 인사이트가 된다.’ (p186) 라는 저자는 이러니, 여행지에서 친구를 사귀는 건 역시 어렵다고 고백한다. ( 나도 그렇다. 책을 읽으며 나도 그래.. 를 몇 번을 말하는 건지. ) ‘여행의 로망은 현지인 친구 만들기 아니냐고 묻는다면, 로망이란 실현되기 어려워야 제맛이라고 대답하겠다’(p187) 라는 문장에 공감의 웃음이 터진다. 이런 위트있는 문장들이 더욱 읽는 재미를 준다.

 

 

어느 여행자의 흘러가는 세월에 대한 이야기 또한 공감 투성이의 문장이 가득하다. 여행지에서 에너지로 가득한 듯한 예전 사진을 보면, 역시 노는 게 최고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는 저자. 인간은 놀아야 얼굴이 활짝 핀다며. ( 끄덕끄덕 ) ‘여행이란 돈을 쓰는 거지 돈을 버는 게 아니다. 아주 그냥 작정하고 길에 돈을 뿌리고 다니는데 얼굴이 피는 건 당연하다’ (p189) 여행에서 몸을 훨씬 더 많이 움직이는 것도 얼굴이 반짝이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릴 적엔 아프고 피곤한 게 별로 겁나지 않았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저 몰라서 그랬던 것 같다. 마치, 뒷일 따위 생각 않고 온 힘을 다해 놀다가 한순간에 방전되어 아무 데서나 꼻아떨어지는 아이 같았다. 하지만 이제 뒷일을 너무 잘 아니 절대 그럴 수 없다.


- p191



내 속의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오십견으로 ( 네, 오십이 아닌데 오십견이 온 지 오래입니다. 손목, 어깨병은 직업병일지도..) 버티고 버티다가 큰 맘 먹고 도수치료를 받으러 갔던 데, 너무 아파서 의도치 않은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프로젝트 사이클 상 야근 릴레이가 필요한 시기인데, 몸이 따라주지 않고 아파 신경 쓰이던 요즘이라 더욱 눈에 들어온 문장이었을지도. 자연스럽게 이제 꿈꾸는 여행은 좀 더 여유롭고, 평화로운 여행이 된다. 문득 체력이 있을 때 마음껏 여행을 다녀와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이 떠오른달까.

 

먼 훗날엔 이 시기가 어떻게 기억되고 기록될까? 알 수 없다. 그저 당장의 허들이 높아만 보이고, 눈앞의 터널이 길게만 느껴진다.


- 에필로그 중에서

 

저자가 소환한 여행의 기억들은 읽는 이의 저마다의 기억들을 소환한다.이 긴 터널에서 문득 기분이 좋아지는 빛을 조금이나마 발견한 기분이다. 우울에만 잠겨있지 말고 즐거운 것들을 떠올리며 마음관리를 해야하는 시기, 가고 싶은 곳을 떠올려보며 기대를 품어보는 것도 ‘버티는’ 힘이 되는 듯 하다.

 

우리 모두 그리운 장소에서, 

꿈꾸던 장소에서, 곧 다시 만나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젝, 비판적 독해
이언 파커 외 지음, 배성민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젝을 이루는 지성적 원천을 뽑아보면 헤겔, 라캉, 마르크스, 이 세가지를 들고는 한다.  다시 말해 독일관념론,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라는 근대적이고 진보적인 성취를 통합하고 있는 대표적 사상가로 통하며, 그의 저술은 활발하게 인용되고 다양한 분야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젝, 비판적 독해」 는 철학자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으며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는 지젝에 대해 8명의 학자가 비평하고 마지막으로 지젝이 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젝, 비판적 독해

이언 파커, 토드 맥고원, 브루노 보스틸스, 조슈아 러메이, 

에이드리언 존스턴, 베리나 앤더맷 콘리, 에릭 포크트, 자밀 카더, 슬라보예 지젝 지음

2021년 11월

글항아리


'당대의 가장 위험한 철학자' 라는 평을 받기도 하는 지젝은 저작들이 체계성이 뚜렷하지 않으며 관점 또한 자주 바뀐다고 지적받기도 한다. 책의 초반에서는 지젝을 탄생시킨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며 지젝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지젝은 자신의 조국의 혼동스러운 상황을 겪으면서 성장했고, 그러한 환경은 지젝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1949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난 지젝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95년, 영화 비평서인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를 통해서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의 저자 이현우에 따르면 당시는 "주변의 영화를 하던 사람들이 모두 이 책을 권해주던" 시기였고, 지젝은 '문화 이론의 엘비스', 'MTV 철학자'란 별명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1부의 이언 파커의 소개에 이어 2부에서 토드 맥고원과 브루노 보스틸스, 조슈아 러메이가 지젝의 비판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을 이해하는 토대를 제시하면서 지젝의 세 가지 지성적 원천을 차례로 다룬다. 3부에서는 에이드리언 존스턴과 베리나 앤더맷 콘리, 에릭 포크트, 자밀 카더가 지젝의 저작에서 등장하는 도발적 주장을 조명한다. 양자역학과 미디어 연구, 생태학적 연구, 탈식민주의 연구가 그것이다. "비판적 문화 이론을 전파하는 탁월한 공작원인 슬라보예 지젝은 오늘날 자본주의 아래서 벌어지는 온갖 문화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건드리고 있다."(p205) 지젝의 저작이 포괄하는 궤적과 응용되는 다양한 영역을 쫓다보면 그의 사상의 왜 혁신적인지, 왜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는지를 느끼게 된다. 나는 6장. 베리나 앤더맷 콘리의 「지젝은 에코 시크」 편을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생태학과 해방하는 주체' 로 시작하여, '공포와 테러', '종말 대 종말론' 등에 관한 지젝의 저작들을 소환하고 평가한다.  


지젝은 묻는다. 세계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붕괴가 일어날까? 붕괴가 일어난다는 것이 지젝의 대답이다. 자본주의에는 지젝이 말한 네 가지 적대 antagonism, 즉 역기능적 연결 지점이 네 개 있다. 1) 생태학 자체 2) 지식소유권을 포함한 사적 소유와 물과 천연자원 같은 필수자원 3) 기술과학의 새로운 발전이 함의하는 사회 윤리적 의미, 무엇보다 유전공학의 의미(...) 4)세계 전역에서 새로운 차별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 네 개의 적대는 자본주의 체계가 원만하게 기능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계는 네 개의 적대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 p207, 6장. 지젝은 에코 시크 - 베리나 앤더맷 콘리



앞에서 제기된 주요 주제와 우려에 대해 마지막 4부에서 지젝이 직접 넌지시 대답한다. 특히 헤겔의 이론을 중심으로 하며 전개해나가고 있기에 지젝에 대한 탐구 외에 (그가 말하는) 헤겔에 대한 탐구를 함께 해나가게 된다. 「지젝, 비판적 독해」 를 읽으며 지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과 라캉 또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혹자는 지젝을 헤겔과 라캉의 아바타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헤겔이 절묘하게 분석한 부분에 주목하라. 가난은 물질의 빈곤만을 뜻하지 않으며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한, 주관적 처지를 뜻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공적 부조나 사적 자선으로 빈자를 돕는 것은 한계가 있다. 빈자는 자기 생활을 스스로 돌보는 즐거움을 빼앗긴 채 살아간다. 더구나 주체가 자신을 규정하는 정체성과 자신이 받는 인정을 궁극적으로 기성의 질서인 사회에서 찾는다고 강조할 때, 헤겔이 주체의 자유는 보편적 윤리 질서가 합리적이어야만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할 때, 그의 주장에는 분명하게 진술되지 않았지만 정반대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즉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자는 반란을 일으킬 권리를 갖는다는것이다. 예를 들어 한 무리가 사회 구조상 권리를 박탈당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긴다면, (바로 그런 상태 때문에) 그들은 사회질서를 지켜야 하는 의무에서도 벗어난다. 이 질서는 더는 그들의 윤리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 p317, 9장. 왕과 천민, 섹스 그리고 전쟁 - 슬라보예 지젝


사회에 빚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사회에 대한 어떤 의무도 질 필요가 없다는 헤겔의 "천민"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온 지젝은 이 논점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 또한 함께 가져와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는 '합리적' 사회 전체의 '비합리적' 요소, 즉 '자기 몫이 없는 부분' 을 표시한다. '사회 전체는 구조상 프롤레타리아라는 요소를 생산하면서도 사회 전체를 정의하는 기본 권리를 프롤레타리아에게는 허락하지 않는다.' (p318) 라며 왕과 천민에 대하여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지젝 입문자로서 그의 사상의 원천 및 영향들을 함께 이해해보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그의 사상이 인문학과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어 즐거웠다. 저자들의 '지젝은 어디로 가는가' 란 질문에 대해 나 또한 궁금하게 여기며, 앞으로 지젝의 행보를 더욱 관심있게 지켜보게 될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 저을 때 물 들어왔으면 좋겠다
샴마 지음 / 팩토리나인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스타에서 일상의 크고 작은 생각과 고민, 수다를 담아 수많은 또래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던 샴마, 전작 「야, 걱정하지 마, 우리가 뭐 우주를 만들 것도 아니고」 를 냈던 시기의 대학생에서 이제 20대 후반의 취준생이 되어 돌아왔다. 이른바 '샴마스러움' 을 이해하는 팬들에게 더욱 반가울 신작이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진지한 생각에서부터 일상의 반짝이는 순간들이 '20대 여자사람'의 시선으로 잘 포착되어 있는 인스타감성툰이자 일러스트에세이다. 




노 저을 때 물 들어왔으면 좋겠다

샴마

팩토리나인



명랑만화 같으면서도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분위기의 흑백 일러스트는 특유의 손글씨와 어우러지며, 때로는 따끔한 충고를,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스스로의 다짐을 담아낸다. 


기억을 잘 못해, 잊고 싶지 않은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샴마는 온라인 작가소개에서 스스로가 인정했듯이 MBTI 신봉자다. 덕분에 MBTI를 소재로 한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있다. 'MBTI 논문이라도 쓸 기세'(p129) 다. ( 한때 혈액형에 관한 툰들이 인기를 얻었던 것처럼 요즘은 MBTI 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려나..  )


대화를 시작하면 ‘기승전MBTI’가 될 만큼 MBTI를 맹신하지만 그냥 모든 건 ‘사바사(사람 바이 사람)’라며 편한 사람이랑 있으면 행복하고, 행복한 사람이랑 있으면 편하다고 말하는 사람


에피소드의 제목은 페이지에 세로로 표기되어 있다. <ENF- 사이에 껴서 고생하는 ISTJ> 란 에피소드를 보자. 샴마는 ISTJ 유형이다. 작가의 ISTJ 는 '다소 내향적이지만 틀에 짜여진 사회에서 주어진 임무를 철저하게 완수하려 노력하며 규칙을 잘 준수하는 유형, 겉으로 튀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고 용의단정하며 정돈된 스타일' 이란다. 세 친구들과의 관계는 종종 MBTI 유형으로 번역되어 기록되어 있다. 



 

MBTI 를 소재로 한 에피소드들


간단하게라도 MBTI 지표의 특징을 이해하고 지나가면 그녀의 에세이들이 더욱 맛깔스럽게 다가온다. 20대 샴마의 또래 독자들은 매우 잘 알고 있는 소재겠지만, ENTP 와 ENTJ 사이를 오가는 나는 세번째의 'F' 의 의미가 떠오르지 않아서 찾아보게 된다. 


마치 '나같은' 느낌을 주는 일반인의 평범한 일상의 한 조각들이다. 그렇기에 샴마의 이야기는 더욱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해왔다. 20대 청춘의 이야기임에도 나와 같은 40대 독자들의 공감 또한 불러오는 에피소드들도 많다. 사진(찍히기를) 좋아하는 나는 인생샷 국룰 에피소드를 찍어 친구들에게 톡을 보냈다. ( 앞으로 이렇게 좀 찍어다오. )


인생샷 국룰


사진 어떻게 찍히든 관심없고 걍 남이 대충 찍은 내 일상인데 그냥 친구가 찍어준거라 올린다 싶은 사진처럼 찍어줘. 이쁘게.




인생샷 국룰 - (정말 그렇다)


"가끔은 아주 아무 생각없이 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아. 의미 찾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해보는 거야. 거창하고 대단한 의미 없어도 돼. 괜찮아 " , " 다들 나아갈때 나만 멈춰있다는 걸 발견했을 때 느껴지는 불안함, 근데 그걸 벗어나려면 어쨌든 나도 힘을 내서 나아가야겠지" 등 치열한 삶의 기록들은 개인적인 경험을 떠나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냐면 .... 


지난 시간 동안 조-금 더 컸다라고 이야기하는 샴마는 사랑을 덜 의심하고, 사람을 더 믿어보려고 한다고 했다. 아직 '평생 성장통' 청춘이지만 제 앞의 일들을 꾸준히 해내면서 물이 들어와 훅,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도 말한다. "물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노 한 번 못 저어볼 것 같아서 일단 젓고 있으면 좋은 때 물이 들어올 거라 믿으며 하루하루 알차게 보내려" 하던 나날들의 기록이 담긴 「노 저을 때 물 들어왔으면 좋겠다」를 읽으며, 1장의 제목처럼 '그거 뭔지 알아, 나도 그런 적 있어' 란 생각을 계속 떠올리는 하루다.


계속 젓다보면

어느 날 타이밍이 맞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곤하개 11
홍끼 지음 / 비아북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명을 책임진다는 건 너무 무거운 일' 이라고 운을 떼는 작가의 말에 매우 공감한다. 스스로 반려동물을 키우기에는 자신이 없는 나이기에 '랜선집사' 로 만족하고 있다. 자칭 '멍냥집사'인 홍끼의 웹툰 「노곤하개」 시리즈를 애독하면서.



노곤하개 파이널 시즌 11

구들 셋, 냥이 셋, 그리고 집사

우리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홍끼 글, 그림

비아북



좌충우돌 초보 집사인 홍끼가 3멍 3냥을 책임지는 일상을 그려낸 이 웹툰은 '노곤노곤 멍냥집사의 극한 일상' 을 그려내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초보 집사였던 작가는 이제 프로 집사로 거듭났다. 이번 권에서는 파이널 시즌이기에 그동안의 여정을 간단하게 되돌아보는 에피소드들을 포함한다. 


반려동물과 함께하며 겪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포착한 이야기들은 재미있다. 직접 겪었던 작가는 심장이 여러 번 내려앉고, 힘들고 지치는 사건 투성이일테지만 랜선으로 지켜보는 독자는 웃음이 난다. 마음놓고 웃을 수 있는 것은 그 사건들을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이 따스할 뿐더러, 반려동물들을 향한 사랑이 잘 느껴지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명랑만화 풍의 코믹한 일러스트가 적재적소에서 등장하며 이야기를 더욱 살려주고 있기도 하다. 이야기를 서술하는 작가의 멘트 또한 위트가 넘친다. 작가의 시선으로 그려진 3멍 3냥( 재구, 흥구, 말랑구, 매미, 줍줍, 욘두 ) 의 모습 또한 사랑스럽고, "집사가 힘든가 보개", "얼른 집에 가시개", "이거 깨부수면 집사가 힘들겠다냐" 식으로 종에 따라 어미를 맞춘 그들의 속마음 또한 더욱 사랑스럽다. 3멍 3냥들은 에피소드의 끝에 실물 사진으로 등장한다. 




「노곤하개」, 말랑구라는 강아지편, p41


일상의 에피소드 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들을 위한 정보 또한 등장한다. 관련된 에피소드의 뒤에는 필요한 정보들이 학습만화 마냥 별도의 코너를 두어 정리되어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들을 위한 유용한 팁이다. 작가가 초보집사에서 프로집사로 거듭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지 않은가. ( 프로의 스멜~ ) 



 


「노곤하개」, 고양이의 양치질편, p87



「노곤하개」, 고양이의 양치질편, p93


20컷으로 펼쳐지는 에피소드들도 재미있었지만, 이번 권에서는 여러 짤막한 이야기들이 모여있는 쇼트들이 더욱 재미있었다. 노곤하개냥 쇼트(1) 편의 재구의 방귀 에피소드에 나오는 이 컷을 보다가 퇴근 지하철에서 현실 웃음이 터져 난처하기도 했다는.



「노곤하개」, 노곤하개냥 쇼트(1)편-[1] 재구의 방귀, p69


[홍끼의 코멘터리] 코너에서는 「노곤하개」 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정리되어 있다. 소재를 포착하고, 스토리의 흐름을 정하고 콘티를 쓰는 과정 등을 보며 20컷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를 느끼게 된다. 파이널 시즌이라는 것이 매우 아쉽지만, 또 다른 이야기로 작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기를!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만큼 작았던 구들은 큰 멍멍이가 되었고, 애정은 쌓이고 쌓여서 1년째에는 1년을 더한 애정이, 지금에 와서는 8년만큼의 기억을 더한 애정이 있습니다. 앞으로 같이 보내게 될 시간은 또 더 큰 애정을 만들어주겠지요. 힘들고 지치는 일도 분명히 있겠지만 그 이상의 행복을 선물 받았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