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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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한겨레출판, 2018



2018년 12월 22일 토요일


이 책을 읽는 동안 몸이 많이 아프다. 요즘 나를 찾아오는 감기의 전조가 오른쪽 편도선이 붓는 것인데, 이번에는 단순 후두염이 아니라 a형 독감이라는 거미줄에 걸려 버렸다. 열이 39도 가까이 치솟고, 콧물과 가래, 따가운 목까지 거미줄은 팽팽하고 바람만 겨우 지나갈 정도로 촘촘한 그물을 쳐 놓았다.


병에 관해 생각한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약해지고, 마음이 아프면 몸도 덩달아 아픈 경우가 많다. 몸의 병과 마음의 병, 둘은 선후관계가 있는 것일까.



2018년 12월 23일 일요일


아내와 20개월 된 딸 없이 이 집에 남겨졌다. 기척 없이 잠들고 예고 없이 잠에서 깼다. 누룽지를 끓이고 김치와 씻어놓은 딸기를 조금 먹었다. 그래야 약을 먹을 수 있다. 타미플루를 12시간 마다 한 알씩, 감기약을 매일 식후 세 번 씩 꼭꼭 시간에 맞춰 챙겨먹는다. 병은 이렇게 성실하다. 뒤질세라 덩달아 나도 성실하게 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자주 언급한 롤랑바르트의 《애도일기》, 마쓰오 바쇼의 《마츠오 바쇼오의 하이쿠》를 곁에 두고 뒤적거린다. 치솟았던 체온을 낮춰준다.


병을 심하게 앓게 되면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므로 병은 사랑이다. 병을 잃고 나면 나를 사랑을 또 잊게 될 것이며 그것이 내가 병을 부르는 방식이며 병을 그리는 태도다. 그리하여 사랑은 망각이다. 잊어버릴 줄 알면서도 자꾸 기억하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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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은 제각각이면서도 밀접하게 엮여 있고, 보이는 것 과 달랐다. 실제로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비리의 말처 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이 삶이다.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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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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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대학생이 된 열아홉 남자와 중년의 여자의 사랑 이야기,라고 이 소설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사람의 일생을 태어나 먹고, 자고, 일하고, 사랑하다가 병들어 죽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이 말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남녀가(만남의 주체가 동성이라고 해도 상관없이) 만나 사랑했다,라는 문장은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불성실한 문장이다. 


이들이 세워나가는 사랑이라는 구조물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과 말들, 피하기도 전에 이들을 향해 맹렬히 굴러오는 맹수 같은 눈덩이를, 이들은 피하지 않는다. 서로를 끌어안고 돌덩이 같은 눈덩이를 돌파하려고 했다.


총3부로 구성된 이 소설에서 화자의 인칭은 바뀐다. 1부에서는 '나' 2부에서는 주로 '너' 3부에서는 '그'라고 지칭되는 주인공 '폴 케이시'의 시선에서 수전과의 연애와 사랑, 결별, 후회 등 그들이 '사랑'이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는 결말까지 '사랑'의 일생을 기록한 평전이다.


그리고 원제처럼 '단 하나의 이야기'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유일한 이야기'가 기억이라는 구멍이 많은 종이 위에 빼곡하다. 동일한 무늬가 무한히 반복되는 '프랙탈'구조를 보는 것 같은, 그들의 이야기가 곧 나와 너의, 우리의 이야기 같다.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린다. (중략) 첫사랑은 그 뒤에 오는 사랑들보다 윗자리에 있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 존재로 늘 뒤의 사랑들에 영향을 미친다."(136쪽)



"첫사랑은 늘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벌어진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압도적 현재형으로. 다른 사람들, 다른 시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137쪽)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나중에 오는 것이고,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현실성에 근접한 것이고,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심장이 식었을 때 오는 것이다."(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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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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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의 의하면, 

물체의 속도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느려진다. 


하루하루는 힘겹게 버티며 더디게 가는데,

지나고 나면 십 년은 훌쩍 지나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기억은 광속에 다가간다.


빛이 세월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아주 작은 구멍들 밖으로 굴절되고 산란되는 순간을 

추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벼운 나날들, LIGHT YEARS,

빛의 시간, 광속의 세월,


YEARS를 옮겨적다가 TEARS로 오기했는데,

어쩌면 가벼운 눈물 혹은 빛의 눈물이라는 제목도 괜찮겠다 싶기도 하고 


'비리'와 '네드라'가 함께 적어내려간 

결혼이라는 두꺼운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눈물에 번진 글자들이 펼쳐진다.


내게 남은 눈물이 있다면,

그들이 기르던 개 '핫지'가 목을 축일 수 있도록 주어야지


핫지가 부디 다음 생애엔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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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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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와 '어젯밤'을 먼저 읽고 그 다음은 순서대로 읽었다. 먼저 읽은 두 작품은 끝에서 나를 얼어붙게 했다. 날카로운 물체가 뺨을 스쳤을 때, 피가 얼굴에서 베어나오기 직전 순간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나의 주인, 당신'과 '귀고리'도 기억에 남았다. '나의 주인, 당신' 한 여자가 한 시인의 개를 따라가 그 시인의 집까지 찾아가게 되고, 그 개는 그 여자의 집을 서성거리는 장면들이 비현실적이면서도 계속 궁금증을 유발했다.



설터의 책은 처음이었는데, 할 말은 정확하게 하고 하지 않을 말은 하지 않는 문체였다. "가벼운 나날들"을 벌써 읽고 있다.









- 그는 식탁 위로 몸을 구부려 턱을 손에 괴었다.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녁을 함께 먹고 카드를 몇 번 쳤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 언제나 놀라게 된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혜성' 19쪽





- 우리는 그런 얘기를 가끔 했다.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또 바꿀 수 없는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 말하자면 어떤 경험이나 책이나 어떤 인물이 그들을 완전히 바꾸어놨다고들 하지만, 그들이 그전에 어땠는지 알고 있다면 사실 별로 바뀐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 처음에는 신경 쓰이지 않던 작은 습관들이 나중에 거슬릴 때가 있는데, 우리에겐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었다. 말하자면 신발에 들어간 자갈을 털어내는 일과 비슷했다. 우린 그걸 '포기'라고 불렀고, 이를 계속하는 데 동의했다. '포기' 99쪽





-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들.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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