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밖의 어떤 것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9
임승유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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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유 시집, 그 밖의 어떤 것, 현대문학, 2018



오랜만에 부천지원 근처에 있는 백숙 집을 찾았다. 올해 바뀐 부서에서 업무강도가 높아 주중에 쌓인 피로를 음식으로나마 풀고 싶었다. 장모님도 최근에 직장에서 야근이 잦아 기력이 많이 약해지셨다고 했다. 장모님까지 네 식구가 잘 차려진 상 앞에 앉았다. 서로의 앞 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고 국물을 자작하게 얹었다. 푹 삶아진 고기 사이사이에 국물이 베어 들었다. 거기에 파김치에 배추김치, 열무김치를 곁들여 오랜만에 아주 달게 백숙을 먹었다. 지윤이도 입맛에 맞는지 죽을 잘 받아먹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남은 닭 뼈들. 우리의 속을 따뜻하게 해주었음을 증거해 주는 잘 발라진 믿음의 뼈들. 한 주간 미뤄둔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근황을 얘기하고, 미래를 걱정하고 희망을 염원하는 말들. 그 말들을 꼭꼭 눌러 서로의 숟가락에 얹어주었다. 그런 말들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포만감과 흡족함이 묻어나는 자알 먹었다!는 표정. 여백.


이 시집은 서사나 묘사보다 배치에 집중한다. 단어의 중의적 의미와 동음이의어를 적절히 활용해 이를 세계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일반화하고 확장하기도 한다. 과거나 미래보다 바로 그 순간, 그때의 시공간과 상태, 물건에 포커스를 맞춘다. 어찌보면 싱거워 보여도 여운이 오래 남는 시들. 장면들. 수북이 쌓인 뼈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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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
필립 한든 지음, 김철호 옮김 / 김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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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한든, 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 김영사, 2018



꿈의 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잠이라는 깊고 넓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많을 것이다. 부연하면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내 잠 속에서 침잠해 버린 꿈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불가능인줄 알면서도 벼랑 끝에 매달려 열 손가락 끝으로 버티며 나는 기억해 볼 참이다.



2018. 1. 18. 금요일 한 주의 피로가 쌓였는지 초저녁부터 피곤했다. 밤 10시 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오전 1시 경에 잠에서 깼다. 나는 꿈을 꾸었다. 1996년 내가 중학교 3학년 시절 창원시에서 주최한 축구대회에 나가 우승했을 때였다. 그 대회에서 나는 중앙 수비수로 뛰면서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는데, 결승에서 우리 팀은 ‘박정록’이라는 친구가 하프라인 부근부터 터치라인을 따라 공을 드리블해 수비수를 제치고 강력한 슛으로 골망을 흔든 결승골에 힘입어 이겼었다. 나는 당연히 정록이가 최우수 선수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상은 내게 주어졌다. 그때의 미안함이 여태 남아 그 당시가 꿈에 재현된 것일까. 정록이와는 아주 친하다고 할 수 없는 사이였고, 우리는 연습이 끝나고 학교 근처의 슈퍼에서 팥빙수 아이스크림에 우유를 쏟아 넣으며 함께 얼음을 씹어 먹는 정도의 친분이었다.



꿈은 준비한다고 대비할 수 없고, 준비하지 않는다고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여행이다. 나는 그저 꿈속에서 꿈을 겪어내고 지나쳐 기억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래서 자유롭다. 꿈이라는 여행을 떠나는 나의 소지품 목록은 빈손과 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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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프로젝트 - 로더릭 맥레이 사건 문서
그레임 맥레이 버넷 지음, 조영학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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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초반을 읽다가 살인 사건에 대한 소설이라 밤에 잠이 잘 올 것 같지 않다고 덮어둔 책이었다.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소작인의 아들 로더릭 맥레이가 마을 치안관으로 새로 부임한 라클런 브로드의 멕레이 집안에 대한 완장질에 불만을 품고 라클런과 그의 자식들을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에 대해 피고인의 비망록(진술), 재판, 후일담이 담겼다.


특이한 점은 일반적인 범죄 소설과 달리, 범인은 분명히 특정되어 있고, 범죄를 자백했으며, 특별한 반전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여타 소설들과 무엇이 다를까?


일단 1860년대 소작제도에 기반한 스코틀랜드 시골 마을의 시대상이 매우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어 마치 내가 그 마을 주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이는 책장을 자꾸 넘기게 하는 동력이다.


나아가 규율(규칙), 사법제도(증인의 증언들, 정신과 의사의 감정결과), 당시의 언론과 여론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의 한 축과, 

개인(자유 의지)의 행복, 선택, 자유의지, 도덕(적 광기)의 쇠락한 기둥이 있다. 결과는 누구나 예상가능하는 것처럼 처참히 한 개인과 그 집안이 몰락한다.



재판과정에서 로더릭의 변호사가 행위 당시 피고인이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음을, 즉 우리나라 법체계에서 말하는 책임능력(사물을 인식할 수 있고, 이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비난가능성이 없음을 주장하는 장면은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로더릭이 살인을 저지르기 한참 전에 행한 행동들(이 행동들 때문에 그의 집안이 궁핍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다친 양을 가여이 여겨 둔기로 고통을 제거하는 장면, 사슴 사냥을 갔다가 막 사냥이 이루어지는 순간 수탉이나 새의 흉내를 내며 소리쳐 사슴을 쫓아버리는 장면, 다친 어린 새를 위해 헛간에 둥우리를 만들어 준 장면들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로더릭의 생명에 대한 공감능력 떄문이었으리라. 



진술 챕터에서는 로더릭의 1인칭 시점으로, 재판과정과 후일담 부분은 3인칭으로 서술되고 있어서 

인물의 내면 묘사와 사건의 진행에 관한 관찰자적 시점에 의한 서술의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흥미를 끈 쪽은 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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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아름다운 것만 만나기를
다치바나 가오루 지음, 박혜연 옮김 / 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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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두부 한 모와 레몬즙, 크림치즈, 메이플 시럽으로" 만드는 두부 크림 레시피를 메모했다.(68쪽)

가오루에게는 딸 요모기가 있고, 가오루는 요모기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행성


요모기는 분명 가오루의 뱃 속에서 열 달을 지내고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

왜 나는 요모기가 가오루를 낳았다고 느껴질까

요모기는 두부 크림처럼 부드러운 빛이다


쳐다보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아

새끼손가락으로 살짝 찍어 맛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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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1
강성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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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나이로 막 세 살이 된 딸이 엄지손가락을 자주 빤다. 다섯 손가락 중에 

왜 하필 엄지손가락만 빨고 있을까.


thumb이라는 단어에서 'b'는 묵음이다. 형태는 있으나, 소리가 없는 '눈'이다.

내 주먹을 바라보다가 나도 아이처럼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본다.

나는 아이의 행동을 승인한다(thumbs-up). 그리고 나도 돌아간다.


엄지가 있어 사피엔스는 물건을 집을 수 있고, 도구를 만들 수 있었다.

엄지는 왕이 아니라 하인이다. 

엄지는 '덤'이라 발음한다. 소리는 있으나 형태가 없는, 줄기 없는 가지다.

엄지는 엄지다. 덤은 덤이다. 


"천천히 생겼다 천천히 사라지는/ 믿음 때문에" 

나의 엄지는 항상 하늘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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