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뒷북소녀 > 고문(古文)과 금문(今文) 중 어느 것을 따라야 할 것인가.

11년전 11월 15일엔 참 부지런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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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11-15 17: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땐 ‘알라딘 서재‘가 있는 줄도 몰랐던 시절이었어요. 저보다 아주 오래전부터 글을 남기고 계셨군요. ^^
 
 전출처 : 뒷북소녀 > 가슴 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이선 프롬,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용기

알라딘서재에 새로 생긴 기능인가?
11년 전 오늘, 내가 쓴 리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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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앙마 2018-11-16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응? 요거 어찌 하는 거임? ㅋㅋㅋㅋ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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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과는 싸우지 말자! 다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 뿐!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2)는 『시학』에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비극'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세 명의 그리스 비극 작가를 소개합니다. 아이스퀼로스(BC525~BC456), 에우리피데스(BC484~BC406), 소포클레스(BC496~BC406)가 바로 그들인데, 그 중에서도 소포클레스의 작품들을 가장 완벽한 비극이라고 극찬합니다.
   소포클레스는 123편의 작품을 썼고, 비극 경연대회에서 무려 18회나 우승했습니다. 하지만 25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작품은 겨우 7편 밖에 남지 않게 됐습니다.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는 현존하는 그의 모든 비극(다른 세계문학전집에는 실리지 않았던)이 실려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천병희 선생님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의 비극과 그 이후 그의 자식들에게 벌어진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행 중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바이의 왕으로 추대된 「오이디푸스 왕」은 선왕을 죽인 살해범을 찾기 위해 부른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로부터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다시 전해 듣습니다. 원래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 왕의 아들로 자랐지만, 포이보스(아폰론)로부터 '어머니와 살을 섞을 운명이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자식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될 것이며,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죽이게 되리라는'(60쪽) 신탁을 듣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오이디푸스는 사악한 신탁이 이뤄지지 않도록 집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자가 또다시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언급하였고, 심지어 선왕을 죽인 것은 오이디푸스 자신이라고 합니다.
   선왕의 왕비이자 현재 오이디푸스의 왕비이기도 한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를 위로하기 위해 그 옛날 자신들에게 내려진 신탁을 피하기 위해 선왕인 라이오스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고백합니다. 그들에게 내려진 신탁은 아들이 라이오스를 죽이게 될거라는 것. 그래서 그들은 갓 태어난 아들을 버려 신탁을 피합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서 운명은 빗겨나가지 않았습니다. 선왕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가 버린 아들이 바로 오이디푸스였고, 선왕을 죽인 살해범도 오이디푸스였으며, 선왕의 왕비이자 자신의 어머니를 취해 자식들을 낳은 사람도 오이디푸스였습니다. 이에 좌절한 이오카스테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찔러 스스로 눈을 멀게 만듭니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오라비 크레온에게 자신의 불쌍하고 가여운 두 딸들,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부탁합니다. 아들도 둘이나 있었지만 아들들은 어디로 가든 제 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거라며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착한 안티고네는 눈먼 아버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와 함께 합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낯선 곳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아버지의 눈과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때 이스메네가 찾아와 오이디푸스에게 두 아들의 소식을 전합니다. 에우리피데스와 폴뤼네이케스는 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는데, 그들을 말리고 테바이를 이 재앙에서 구해낼 수 있는 건 아버지 오이디푸스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그리워하기 보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고 있는 두 아들을 원망합니다.
   마침 오이디푸스의 처남 크레온도 오이디푸스를 테바이로 데려가기 위해 나타납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크레온의 속셈을 꿰뚫고 있습니다. "자네가 나를 데리러 온 것은, 나를 집에 데려가려는 것이 아니라, 국경 가까운 곳에 데려다놓음으로써 자네 도시가 이 나라로부터 재앙을 피하려는 것이네."(187쪽) 이렇게 말하며 돌아가길 거부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납니다.
   오라버니들의 임박한 살육을 막기 위해 테바이로 돌아간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그러나 두 오라비들은 서로의 칼에 찔려 죽습니다. 그들을 대신해 테바이의 왕이 된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의 죽음은 애도하되, 다른 나라 군대를 이끌고 조국을 공격한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은 매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만약 이 명령을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죽음으로 다스리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굴하지 않고 크레온 몰래 오라비의 시신을 매장하려고 합니다. 어찌됐든 폴뤼네이케스도 안티고네의 소중한 오라비니까요. 화가 난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죽이려 하고, 안티고네를 사랑한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안티고네와 함께 죽으려 합니다.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크레온의 아내 에우뤼디케 또한 죽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으로부터 시작된 비극은, 이렇게 비극에 비극을 또 낳습니다.

  
필연(必然)과는 싸우지 말자꾸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63쪽

  
「아이아스」는 현존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중 맨 처음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죽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둘러싼 아이아스와 오뒷세우스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킬레우스가 죽자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에 대해 그리스 장군들 사이에서 투표가 벌어지는데, 투표 결과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한 아이아스가 아닌 오뒷세우스에게 아킬레우스의 무구가 주어졌습니다. 이에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아이아스가 늦은 밤 그리스 장군들을 습격해 그들을 죽이려 하지만, 아테나 여신의 힘으로 막히게 됩니다. 아테나 여신은 아이아스가 미쳐 장군들 대신 가축들을 도륙하게 만드는데, 정신이 돌아온 아이아스는 부끄러움을 느껴 헥토르에게 선물로 받은 헥토르의 칼로 자살합니다. 지략이 뛰어난 아니 얄미운 오뒷세우스는 지금껏 가만히 있다가 아이아스가 죽고나자 그를 매장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아가멤논에게 청합니다.
   사실 아이아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오뒷세우스는 지략은 뛰어나지만 결투에서는 약했으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머리로 싸움을 하는 오뒷세우스보다는 무공이 뛰어난 아이아스에게 아킬레우스의 무구가 더 잘 어울리고 필요했을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오뒷세우스는 그리스 장군들 뿐아니라 아테나 여신의 보살핌까지 한 몸에 받고 있어서, 독자인 저도 얄미운 건 사실입니다.


   「아이아스」와 마찬가지로
「엘렉트라」 역시 『일리아스』와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트로이로 전쟁을 떠났던 아가멤논은 돌아와서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살해됩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몰래 고향으로 돌아온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일부러 자신이 죽었다는 전갈을 집으로 보냅니다. 한편,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어머니와 아이기스토스를 원망하고 있던 엘렉트라는 마지막 남은 희망인 오레스테스 마저 죽었다고 하자 혼자서 그 두 사람을 죽여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때 오레스테스가 나타나 복수를 시작합니다.
   사실 정부와 함께 남편을 죽인 클뤼타임네스트라에게도 약간의 사정이 있었는데, 그 사정을 상세하게 볼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죠.

   그리스 명궁
「필록테테스」는 트로이 전쟁 때 트로이로 향하던 중 독사에 물려 무인도인 렘노스 섬에버려져, 헤라클레스에게 물려받은 활로 사냥을 하며 비참한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헤라클레스의 활이 없으면 트로이아가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는 예언을 듣고, 오뒷세우스는 네옵톨레모스에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필록테테스의 환심을 산 후 필록테테스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네옵톨레모스는 오뒷세우스만큼 간악하지 못해서 사실을 고백하고, 필록테테스는 헤라클레스의 혼백에게 계시를 받고 트로이아로 향합니다.
   이곳에서도 역시 오뒷세우스는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결국 최후까지 남는 사람은 지략이 뛰어난 오뒷세우스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명장은 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행운과 불행은 돌고 돈다는 점을 생각하시고.
   고통의 바깥에 있는 자는 위험을 보아야 하며,
   잘나가는 자일수록 인생을 세심하게 살펴야 하오.
   방심하는 사이에 느닷없이 파멸이 닥치지 않도록.

  
「필록테테스」 439쪽

  
「트라키스 여인들」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여성들을 짓밟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가 죽자 그의 부인도 노예가 되었듯이, 전쟁이 터지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자는 힘이 없습니다.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긴 자의 뜻대로 이리저리로 끌려다녀야 합니다.
   아버지 에우뤼토스가 헤라클레스와의 싸움에서 지자 그의 딸 이올레도 포로가 되어 헤라클레스의 집으로 끌려옵니다. 다른 포로들과 겉모습이 남달랐던 이올레를 본 헤라클레스의 아내 데이아네이라는 처음에는 연민을 느꼈지만, 남편 헤라클레스가 이올레를 얻기 위해 일부러 싸움을 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합니다. 그녀는 헤라클레스의 사랑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 켄타우로스가 알려준 방법대로 켄타우로스의 피가 묻은 옷을 남편에게 입히는데, 그 옷을 입은 헤라클레스는 옷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극심한 고통을 느낍니다. 이를 알게 된 데이아네이라는 자살하고, 고통을 참을 수 없었던 헤라클레스는 아들에게 자신을 산 채로 화장시켜 달라고 합니다. 이 와중에도 헤라클레스는 이올레를 걱정하며 아들에게 부탁하니, 남자는 정말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소포클레스의 7편의 비극에는 모두 신탁이 등장합니다. 오이디푸스처럼 그 신탁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 신탁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신탁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예정되어 있는 삶을 따릅니다.
   그렇다면
소포클레스는 운명론자였을까요? 만약 운명을 믿는다면, 이것이 모두 신의 뜻이라고 믿는다면 삶은 참 편할겁니다. 어떤 시련이 와도, 혹은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그렇게 생각하면 될테니까요. 하지만 우리에게 운명이 정해져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그 운명을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으니, 그 운명을 따를수도, 맞서 싸울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쩌다가 알게 된 운명 따위에 집착하며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할 뿐입니다. 이것이 소포클레스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은 일단 보고 나면 많은 것을
   헤아릴 수 있으나, 보기 전에는 아무도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예언할 수 없지요.

   「아이아스」 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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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 / 시학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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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오이디푸스 왕』을 극찬하게 되었을까!
   이데아를 중시한 플라톤(BC427~BC347)은 형이하학적인 모든 것을 부정했습니다. 문학과 예술은 이데아의 하급 위치에 있는 것이며, 작가와 예술가 역시 국가 건설에는 불필요한 존재라며 비판했습니다. 반면 그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2)는 '예술은 인간 삶에 대한 모방'이라며 스승과 다른 견해를 펼쳤습니다.
   『시학』은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론(인간의 삶을 모방한 예술 중 하나인 문학)을 담은 책으로, 오늘날까지도 문예 창작 이론서로 읽혀지고 있는 책입니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모방을 하며,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을 통해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이런 사실은 경험이 입증한다. 아주 혐오스러운 동물이나 시신의 형상처럼 실물을 보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도 더없이 정확히 그려놓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보고 즐거워한다. 350쪽

   희극, 서사시 등 인간의 삶을 모방한 문학 장르는 다양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문학 옹호론을 펼칩니다. '희극은 우리만 못한 인간을 모방'해 우리에게 웃음을 주지만,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을 모방'하는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실현'해 준다고 합니다. 지금도 고대 그리스의 희극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도 희극은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희극은 사람들에게 덜 중시되었던 탓이겠죠.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갖는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듣기 좋게 맛을 낸 언어를 사용하되 이를 작품의 각 부분에 종류별로 따로 삽입한다. 비극은 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서술 형식을 취하지 않는데,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 361쪽
 
   비극을 구성하는 요소는 볼거리, 성격, 플롯, 조사, 노래, 사상 등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짜임새, 즉 플롯이라고 합니다. 그는 "사건과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목적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363쪽)고 강조합니다. 특히, 플롯에 속하는 부분들 중에서도 '급반전과 발견'이 우리를 가장 감동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 소포클레스(BC496~BC406)의 『오이디푸스 왕』이라며 극찬합니다.

   급반전이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태가 반대 방향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변화 역시 앞서 말했듯이 개연적 또는 필연적 인과 관계에 따라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왕에서 사자(使者)는 오이디푸스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그를 모친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오지만, 그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 발견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무지의 상태에서 앎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뜻한다. 이때 등장인물이 행운을 타고났느냐 불행을 타고났느냐에 따라 서로 친구가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발견은 『오이디푸스 왕에서처럼 급반전을 수반할 때 가장 훌륭하다. 377~378쪽

  
모든 발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나 에우리피데스의 『이피게네이아』에서처럼 사건 자체에서 비롯되는 발견. 403쪽

   공포와 연민의 감정은 볼거리에 의해서도 환기될 수 있고 사건의 짜임새 자체에서도 환기될 수 있는데, 후자가 더 훌륭한 방법이며 더 훌륭한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플롯은 눈으로 보지 않고 사건 경과를 듣기만 해도 전율과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느끼는 감정이다. 389쪽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자식들을 얻은 오이디푸스 왕은, 일련의 사건들이 평면적으로 나열되지 않고 '급반전'과 '발견'을 통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납니다. 게다가 오이디푸스 왕은 사악한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를 맞춰 테바이의 왕으로 추대된 인물로, 우리보다 훨씬 나은 인간인데 그의 운명은 보통의 우리보다 불행하게 끝납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비극의 적당한 분량까지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배우가 사람들 앞에서 모방(연기)을 해야하는 비극은 당연히 시간적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여러 번으로 끊어서 볼 수도 있겠지만, 극의 재미를 위해서 "가능한 한 태양이 1회전하는 동안, 또는 이를 과히 초과하지 않는 시간 안에 사건의 결말"(359~360쪽)을 지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 왕 또한 그동안의 이야기들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려질 뿐이며, 무대 위에서 본격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급반전'과 '발견'이 있는 부분입니다.

   한마디로, 『시학』은 비극 창작 이론서이며 『오이디푸스 왕은 그 이론을 가장 완벽하게 따르고 있는 교본인 셈입니다.
   사실 『시학』을 읽게 된 계기는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은 「오이디푸스 왕」 때문이었습니다. 며칠 전 「오이디푸스 왕」을 포함한 소포클레스의 여러 비극들이 실려있는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을 읽고나니 소포클레스를 극찬한 『시학』도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2천년 전에도 극찬한 사람이 있다니, 그 사람은 어떻게 극찬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사실 나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다는 '문학적 허세'도 살짝 작용하긴 했고, 적어도 소포클레스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나의 안목이 비슷하다는 자부심도 느낄 겸해서요.
   고대 그리스 사상가라고 하면 현학적인 글들로 정신을 빼놓는 경우다 많은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매우 쉽고 실용적입니다. 그러니까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읽히고 있는 것일테지만요.

   비극은 완결된 행동의 모방일 뿐 아니라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모방이다. 이런 사건들을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상호 간의 인과 관계에서 일어날 때 최대의 효과를 거둔다. 사건이 그처럼 일어날 때 저절로 또는 우연히 일어날 때보다 더 놀라운 법이다. 우연한 사건이라도 어떤 의도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보일 때 가장 놀랍기 때문이다. 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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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그에게 덧씌어진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이미지, 이것이야말로 진짜 비극이 아닌가!

   어떤 이들은 고전이 진부할 것이라 지레짐작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래 살아남은 고전은 처음부터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웠는데 지금 읽어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읽어도 새로운 것은 쓰인 당시에도 새로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전이라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당대의 진부함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고전은 당대의 뭇 책들과 놀랍도록 달랐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진부함과는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낡거나 진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책들은 살아남았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후대로 전승되었을 겁니다. 김영하, 『읽다』 16쪽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왜 고전을 읽는가』 9쪽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왜 고전을 읽는가』 12쪽


   그러니까 이탈로 칼비노의 화법을 빌려 말해보자면, 최근에 「오이디푸스 왕」을 다시 읽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증오하고 어머니에게 품는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을 이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더 유명한 오이디푸스 왕. '다시' 읽어보니, 비록 그 덕분에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자신을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아이콘으로 만들어버린 프로이트가 꽤 원망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억울함 때문에 없던 콤플렉스가 오이디푸스 왕에게 생기지는 않았을까요?

   「오이디푸스 왕」은 프로이트가 정의하는 그런 콤플렉스를 가진 아들이 아닙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키운 코린토스 왕 폴뤼보스가 친부가 아니라는 술 취한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 사실을 알기 위해 아버지 몰래 포이보스(아폴론)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포이보스는 대답 대신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이디푸스가 '어머니와 살을 섞을 운명이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자식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될 것이며,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죽이게 되리라는'(60쪽) 이야기였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오이디푸스는 사악한 신탁이 이뤄지지 않도록 집을 떠납니다.
   테바이를 지나던 중, 사악한 문제를 내 그곳 사람들을 괴롭혔던 스핑크스의 문제를 맞춰 그곳의 왕이 됩니다. 마침 그곳의 왕도 살해되어 자리가 빈 상태였고, 혼자 남은 왕비 이오카스테까지 취해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줍니다.
   그런데 사악한 역병이 온 나라에 퍼져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왕비의 오라비 크레온은 라이오스 왕이 살해되었는데, 살해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오이디푸스는 살해자들을 찾아내 처벌하라고 명하는데, 이때 테바이의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나타납니다.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를 향해 '그대가 찾고 있는 범인이 바로 그대'(43쪽)라고 말합니다. 오이디푸스가 이 말을 듣고 화를 내고, 눈먼 것까지 조롱하자 테이레시아스는 들려주기를 주저했던 말들까지 쏟아 냅니다.

   "눈먼 것까지 그대가 조롱하니 하는 말이지만, 그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오. 그대가 어떤 불행에 빠졌는지, 어디서 사는지, 누구와 사는지 말이오. 그대가 누구 자손인지 알고나 있소? 그대는 모르겠지만, 그대는 지하와 지상에 있는 그대의 혈족에게는 원수외다. 그러니 언젠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저주라는 이중의 채찍이 무서운 발걸음으로 그대를 뒤쫓아 이 나라 밖으로 몰아낼것이오." 45쪽

   "단언하건대, 그대가 아까부터 위협적인 말로 라이오스의 피살 사건을 규명하겠다고 공언하며 찾던 그 사람은 바로 여기에 있소이다. 그는 이곳으로 이주해온 외지인으로 여겨지지만 머지않아 테바이 토박이임이 밝혀질 것이오. 하지만 그는 그런 행운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오. 앞 못 보는 장님이 되고 부자에서 거지가 되어 지팡이로 앞을 더듬으며 이국땅으로 길을 떠날 운명이니까요. 그리고 그는 함께 살고 있는 그의 자식들의 형이자 아버지이며, 자신을 낳아준 여인의 아들이자 남편이며, 아버지의 침대를 이어받은 자이자 자기 아버지의 살해자임이 밝혀질 것이오. 안으로 들어 그 일을 곰곰히 생각해보시오. 그러고도 내 말이 틀렸거든 그때부터는 예언에 관해 내가 무식하다고 말하시오." 47쪽

   눈먼 예언자의 예언을 듣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오이디푸스에게 왕비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며 그를 위로해 줍니다.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미래사를 예언할 수 없어요. 이에 대해 내가 간단한 증거를 보여드리지요. 전에 라이오스에게 신탁이 내린 적이 있었어요. 아폰론 자신이 아니라 그분의 사제로부터 말예요. 그 신탁이란 운명이 그를 따라잡아 그이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손에 그이가 죽게 되리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소문대로라면, 라이오스는 마차가 다닐 수 있는 세 길이 만나는 곳에서 어느 날 다른 나라 도적들 손에 살해당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아들은 태어난 지 사흘도 안 돼 라이오스가 두 발을 함께 묶은 뒤 하인을 시켜 인적 없는 산에다 내다 버렸어요. 그리하여 아폴론께서는 아이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라이오스는 아들의 손에 죽는다는, 그이가 두려워한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셨답니다." 57쪽

   이 이야기를 들은 오이디푸스는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차가 다닐 수 있는 세 길이 만나는 곳을 지나던 중 다른 무리와 부딪혔고, 그 중 한 노인이 나뭇가지로 자신의 머리를 내려쳐 그를 죽였던 것입니다.
   이때 오이디푸스의 고향에서 사자가 찾아옵니다. 그의 부친 폴뤼보스가 죽었으니, 고향으로 돌아와서 코린토스의 왕이 되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친부살해'라는 신탁은 벗어났지만 아직 어머니가 살아있으니 돌아갈 수 없다고 하자 사자는 오이디푸스가 코린토스 왕과 왕비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연하게도 사자가 버려진 오이디푸스를 주워 왕에게 선물로 전했다는 것입니다.
   오이디푸스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고, 신탁이 적중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오이디푸스는 좌절하고 그의 왕비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합니다. 이것을 본 오이디푸스 또한 왕비 옷에 꽂혀 있던 황금 브로치를 뽑아 자신의 두 눈앞을 여러 번 찔러 스스로 눈을 멀게 만듭니다.

   "아아, 슬프고 슬프도다! 가련한 내 신세.
불쌍한 나는 대지 위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목소리는 어디로 흩날려 가는가?
내 운명이여, 너는 얼마나 멀리 뛰었는가!" 81쪽

   "모든 재앙을 능가하는 재앙이 있다면,
그것은 오이디푸스의 몫이로구나." 83쪽

   이제 오이디푸스의 억울함을 아시겠죠?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모와 고향을 떠났지만, 결국 그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최악의 치욕과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런 오이디푸스에게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콤플렉스를 덮어 씌우다니, 아마도 오이디푸스는 지하에서도 영원히 고통받고 있겠죠. 이것이야 말로 오이디푸스의 진짜 '비극'이 아닐까요?

   소포클레스(BC496~BC406)보다 백 년 정도 늦게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2)는 『시학』에서 "비극의 모든 요건을 갖춘 가장 짜임새 있는 드라마"라고  「오이디푸스 왕」을 극찬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건과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목적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수사학/시학』 363쪽)하며 '비극에서 우리를 가장 감동시키는 것은 급반전과 발견'(『수사학/시학』 364쪽)인데 「오이디푸스 왕」은 이 요소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뻔하디 뻔한 출생의 비밀과 반전이 등장하는 드라마를 '막장'이라 부르며, 이 '막장 드라마'들의 인기비결이 궁금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제야 그 대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비극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혹은 가장 완벽하다는 「오이디푸스 왕」을 닮았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항상 생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를 지켜보며 기다리되,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마시오.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 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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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08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서 읽은 오이디푸스 비극과 나이 들어 읽게
된 오이디푸스 비극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던 것
같습니다.

어려서는 참 별 일도 다 있구나 싶었는데 말이죠.

고전이 그냥 허명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뒷북소녀 2018-11-09 13:05   좋아요 0 | URL
저두요. 고전은 읽을 때마다 항상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탈로 칼비노는 정말... 관찰력이 대단한듯 합니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