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가라 -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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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해! 무모하다 못해 절박해!, 절박해! 절박하다 못해 사악해!  

덕분에 마무리한 소설 한 편을 말끔히 그리고 깨끗이 지워 버렸다. 

   
 

아니,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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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4-1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쁘게 생겨가지구. 응? 그죠?

굿바이 2010-04-18 17:54   좋아요 0 | URL
그러게 그리 이쁘게 생겨서리....미웟!

huny 2010-04-17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무리한 소설 한 편을 말끔히 그리고 깨끗이 지워 버렸다.


, 자기 검열, 무서워


모르고 하는 소리지만, 그러지 말지....,

나중에 유명해지면 어떻게 하려구
습작 시절 작품도 남겨 놔야 다음에 할 일 할 사람들이 일거리가 있을텐데...
에궁, 성격하고는...,

굿바이 2010-04-18 17:56   좋아요 0 | URL
지우면서, 가슴이 쿵쿵 뛰었습니다. 그래도 잘했다,싶습니다....사실, 울고 싶어요ㅜ.ㅜ


Tomek 2010-04-18 0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도 독했나 봐요. 저도 「몽고반점」읽고 이후로는 계속 못읽고 있는데. 신경숙 작가 『바이올렛』읽고 그 이후로 못읽는 것처럼.

개인적으론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에서 한강 작가의 작품이 떠올랐었는데. <하늘이시여>였던가.. 뱀술 억지로 먹이는 장면이 「몽고반점」과 겹치더라고요. ㅡ.ㅡ;;;

굿바이 2010-04-18 17:58   좋아요 0 | URL
전작보다 독해요,그리고 잘 여물었구요. 어쩌면 이 작품이 작가에게는 9부 능선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다음 작품이 참 많이 기대가 됩니다.

아, 드라마를 못봐서, 궁금하네요. 뱀술을 억지로 먹이는 장면이라니^^
 
첫 맥주 한 모금
필립 들레름 지음, 정택영 그림, 김정란 옮김 / 장락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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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급할 것 하나 없는 책을 너무 빨리 해치워버렸다. 습관처럼 게걸스럽게 활자에 들러붙어 단어와 단어 사이의 간격을 무시하는 나는, 오히려 천천히 연필을 놀리며 나아가는 들레름의 속도를 따라 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책을 덮는 순간, 철 지난 놀이공원에 흘려놓은 내 추억들은 느린 멜로디에 맞춰 빙빙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멈춰야 한다. 그것들을 더듬기 위해서라면. 지금 나는 멈춰야만 한다.

언제부터였을까? 감각의 사냥을 포기해 버리고 되려 느림을 따라 잡을 수 없게 된 것이.
풍경을 음미하고, 사물의 냄새에서 빛깔에서 사실 그 이상의 것들을 포획할 수 있었던 말랑말랑했던 시절은 도대체 언제 끝나버린 것인지 기억조차 불분명하다.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사물들이 던지는 개별의 주파수를 감지해 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도시는 뷰파인더로 보는 사람들, 이어폰으로 듣는 사람들, 전광판 밑에서 쉬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반강제적으로 말랑거리는 감각들을 박탈당해 버린 지금, 나는 무엇도 볼 수 없고 어떤 것도 들을 수 없다.

작가의 말처럼 마지막 햇살이 잠들어 있는 얼음처럼 차가운 오디 샤벳,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쪼글쪼글해진 사과향기, 첫 맥주 한 모금의 통쾌함, 물에 젖은 에스파드리유의 축축한 느낌, 성글게 짜인 스웨터의 푸근함을 올곧이 알아채는 일은 삶을 반짝거리게 하는 능력이다. 그것들을 모조리 잃어 버린 이 밤, “멜랑콜리가 쳐들어 온다.”고 쓴 작가처럼, 어디로 끊임없이 내몰리고 달려야만 하는 내 목구멍 깊숙이 오늘 멜랑콜리가 쳐들어 왔다.

책을 읽으며 작가의 날렵한 문장, 따뜻함이 묻어나는 은유, 달콤한 단어, 문장을 깨끗이 자르는 호흡, 어디서도 훔쳐 본 적 없는 사유에 나는 오랜만에 행간의 틈바귀에서 쉴 수 있었다.
책의 제목이자 소제목의 하나이기도 한 [첫 맥주 한 모금]에서 저자는 “첫 잔은 목구멍을 넘어가기 전에 시작된다………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다. 가장 좋은 기쁨은 이미 맛보아 버렸다는 것을.”이라고 쓰고 있다. 맥주 한 모금이 전하는 짧지만 강렬한 기쁨을 통해 삶의 의미를 환기시키는 작가의 관능적인 글쓰기는 너무 많은 질문과 절망으로 끓어오른 머리를 식혀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물의 단면을 꼼꼼히 살피는 작가처럼, 나는 태아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아 내 기억의 단면을 찬찬히 살폈다. 비누방울처럼 팡팡 터져 붙잡을 수도 붙잡아서도 안 되는, 이미 맛보아 버린 내 작은 기쁨들.
한 겨울 밤 아버지의 점퍼 속에서 쏟아져 나온 축축한 호빵, 달달한 오뎅국에 데인 입천장, 언니가 그린 만화를 팔아서 모은 500원의 묵직함, 오빠의 자전거에서 나던 소음, 여름날의 소독차가 뿜어낸 연기, 가로등 아래서 만난 아찔한 목련의 그림자, 푸른 담벼락를 등지고 촌스럽게 울어버렸던 첫 키스, 누군가를 기다리던 코스모스 핀 익산역, 수술 후 깨어나 처음 보았던 울어서 엉망이 된 그 남자의 충혈된 눈……….

오늘처럼 녹슨 감각기관이 되살아 나는 날에는 잠시 멈출 수 밖에 없다. 오늘, 제대로 멜랑콜리가 쳐들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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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0-02-16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젊음이 느끼고 있는 그것을 나도 알고 있는듯 하다.
"첫잔은 목구멍을 넘어 가기전에 시작된다.. 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다. 가장 좋은 기쁨은 이미 맛보아 버렸다는 것을,"
젊음은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굿바이님의 글이야말로 참으로 관능적올시다. 날 것의 감각. 최승자처럼.
"개 같은 가을이 쳐 들어온다. 매독같은 가을"
그런데 최승자의 언어도 근래 많이 변하였다지요? 하하




굿바이 2010-02-16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그럴수도 있겠네요. 저는 아직 가늠할 수 없지만, 제 깜냥이 미치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리석음이 관능적으로 보일 때도 있나 봅니다. 그저.....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신궁 분지 강원도달비장수 감비 천불붙이 첫눈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22
천승세.방영웅 외 지음, 최원식 외 엮음 / 창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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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천승세의 <신궁神弓>은 1977년『한국문학』에 실렸던 작품으로 당골례 왕년이의 비색한 운명과 가난한 어민들의 삶을 녹여낸 소설이다. 1970년대 문학을 이야기함에 있어 시대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전후 아찔한 속도로 진행되었던 근대화.산업화의 물결은, 어떤 이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와 부를 선물했을지 모르나, 그 물결에 휩쓸린 모든 사람들을 유토피아로 인도할 수는 없었다. 하여 해체되는 공동체와 편중되는 자본은 대다수 민중들을 변방으로 내몰았고, 그들의 삶을 비극으로 몰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고통스러운 삶은 예컨데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이문구의 <우리 동네>, 천승세의 <신궁>같은 작품들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각설하고 당골례,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던가. 작고한 외할머니가 어린 내 손을 꼭 잡고 찾아가셨던 당집. 초라한 박수의 얼굴도 짠바람에 나부끼던 붉은 깃발도 나는 여태 잊을 수가 없다. 기억이란 때론 필요이상으로 명확하다. 늙은 박수의 해진 동정에서 풍기던 낙엽타던 냄새도, 검버섯 핀 뺨을 연신 훔치던 내 할머니의 모습도 꼭 어제 일처럼 그렇게 선명하다. 어쩌면 나는 시종일관 소설속의 당골례, 왕년이의 모습에서 이가 빠진 퍼즐의 어느 한 부분을 완성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닷가에서 살아 본 사람이라면 혹은 나처럼 일정 기간이라도 체류해 본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심심치않게 당집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집은 인간이 갖는 원초적인 공포를 드러내는 증거물이다. 하여 미신이나 곰팡내나는 관습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굿이 인간에게 주는 위무가 결코 적지 않다. 따라서 어촌에 존재하는 무당은 서울 한 복판에 간판을 내건 이들과는 무늬가 다르다. 적어도 내가 겪고 들은 바에 의하면 말이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왕년이는 호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습무로 주로 씻김굿을 하는 당골이다. 시어머니가 죽자 대를 이어 장선포에 자리를 잡은 왕년이는 한동안 무녀로서 부족할것 없는 삶을 살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끝을 맺는다. 대부업을 하는 판수의 살인적인 금리에 가진 재산을 전부 빼앗기고, 고기잡이 배를 타기 시작한 남편도 송장으로 돌아오면서 왕년이는 굿손을 놓아버린다. 왕년이가 굿손을 놓는다는 것은 단순히 실의에 빠져 하던 일을 멈추는 것과는 다르다. 이는 마을 사람들의 공동의 소원을 대신 빌어주는 행위가 단절됨을 의미하며, 자본을 가진 한 사람, 판수에 의해 공동체가 와해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1세기 신자유주의 하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국제 헤지펀드와 같은 보이지 않는 금융자산이라고 하지 않는가. 70년대를 산 작가는 그것을 미리 내다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에서 왕년이는 남편이 죽고 처음으로 다시 굿판에 선다. 오랜만에 풍어를 기대하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그녀는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신궁을 들고 바가지를 쓴 판수를 겨냥한 후 활시위를 당긴다.
"바가지를 쏘고 굿청에 떨어졌어야 할 화살은 바가지 깊숙히 꽂혀 끝대를 떨었고 판수는 바가지를 쓴 채 비식 옆으로 누웠다. 바가지 위로 꽃뱀 기듯 핏줄이 흘렀다." 
왕년이가 겨눈 활시위에서 화살이 튕겨져 나갈 때, 화살도 왕년이도 그것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공동체를 와해시킨 한 사람,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한 사람, 불릴만큼 배를 불리고도 허기져하는 한 사람, 판수를 향해.   

한 개인의 한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맺힌 것인지라, 이 소설의 결말은 개인적인 한을 해소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손을 탈탈 털고 돌아서 어디선가 넉장거리할 왕년이의 처연한 모습이 떠올랐다. 울 것도 웃을 것도 같은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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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hoya 2010-02-04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 다음에 계시질 않으니 자연 찾는 발길이 뜸합니다.
제 블로그 '책읽는 부족에게 고함'이란 포스팅에 미션 수행해 주시길요. *^^*

굿바이 2010-02-04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알겠습니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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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주인공 애디의 죽음을 통해 한 가족이 겪는 일련의 감정적 변화와 사건들을, 각기 다른 주인공들의 독백으로 전달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죽음이라는 한 사건을 두고 단일한 관점이 아닌 다원주의적 시선을 통해 설명하려는 노력은, 대체적으로 모던이즘이 지배하는 시절을 살았던 작가에게 실로 대단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이 쓰여진 시절을 감안하면, 물론 미국문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관계로 정말 대충 더듬어 보면, 분명 형식적인 면에서는 혁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작가의 역량은 형식적인 실험에만 머무르지 않고, 난해함과 방관자적 입장이라는 변수를 끌어들여 신비로움과 처연함까지 덧붙였다. 실로 명민한 작가다. 그러나, 2010년을 살아가는 독자로서, 어찌나 실험적인 책들이 쏟아지는 시대를 살아가는지, 더 나아가 실험적이기만 하고 건질것은 없는 책들이 쏟아지는 시대를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이제 이런 부류의 책들을 읽는 일이 그리 달가운 과정만은 아니었음을 미리 밝힌다.  

그렇지만, 구조가 갖는 답답함과 난삽함은 그저 내 게으름이나 무지를 탓하면 될 문제고,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살펴볼 필요는 있다. 서경식의 책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에드워드 사이드를 기억한다」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사이드는 "멸망할 운명임을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를 표명했다. 마치 한 편의 시와 같은 말이다. 서경식의 진술을 들여다보며, 작가가 말하려는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나는 멸망할 운명임을 알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을 [절망]이라고 이해했었고, 승산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를 [조롱]이라고 이해했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서경식의 책을 떠올렸던 까닭은, 책 전반을 통해 작가가 말하려고 한 것이 [인간에 대한 절망]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며, [절망]이라는 메세지를 전달하는 작가의 자세를 [조롱]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들 중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는 아버지, 죽은 부인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 벌어지는 모든 성가신 일들을 타인과 아들들에게 맡겨버리는 남편, 큰아들이 다리를 다치자 병원으로 향하는 대신 다친 다리위에 시멘트를 붓는 아버지, 또 다른 아들의 가장 아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팔아버리는 아버지,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방관자로 것돌고, 심지어 부인을 매장한 후 바로 머리를 빗고 옷을 단정히 입고 새 여자를 맞아들이는 아버지이자 남편인 앤스에게 작가는 어떤 판단의 잣대도 들이대지 않는 듯 보인다. 작가는 '저 놈은 원래 저런 놈이고, 저런 놈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으며, 인간은 사실 다 저런 놈일 수 있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혹은 부성애라는 사람들의 기대는 이데올로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어?' 정도의 썩소를 날릴 뿐. 물론, 앤스의 세째 아들인 주얼이 앤스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따라서 앤스가 오쟁이진 남편이라는 정황을 살짝 흘려보내며, 잠시나마 앤스를 비웃어 주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지만 글쎄....앤스가 부인의 부정을 알았던들 괴로워나 했을까! 되려 그것을 핑계로 철저히 노골적으로 군림하지는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작가 윌리엄 포크너는 "이 소설은 나를 일으켜 세우거나 거꾸러뜨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후 행보를 보았을 때, 이 소설은 그를 일으켜 세운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작품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면, 또한 인간에 대한 성찰이라는 것이 무심하게 풍경을 바라보듯 이루어 질 수 있었다면, 그는 작가가 아니라 神이 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인간을 조롱할 수 있는 것은, 실은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내가 이 책을 덮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인간에 대해 '어떻게?" 혹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것 뿐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는 김훈을 꽤나 닮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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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from 바느질하는 오후 2010-01-03 09:21 
    책읽는 부족의 독후감 도치님: http://blog.daum.net/shave4ever/17145132 쟁님: http://zanygenie.tistory.com/27 동우님 http://blog.daum.net/hun0207/13291016 호호야님 http://blog.daum.net/touchbytouch...
 
 
후니마미 2010-01-03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으면서 재미가 반감되는 바람에 주인공들에게 공을 들이지 못한 이 소설을
굿바이님의 독후감을 읽으면 재평가를 하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절망 그래서 이 소설이 작가의 조롱이 된다는 평에
동감합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아버지 앤스, 남편 앤스의 작태를 굵은 선으로 놓고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를 살필 수도 있겠군요
사람이 왜 그래? 라기 보다
그럴 수 있음에 인간인 것이 슬픈 일
사실 비일비재하지만 우리 독자는 그런 걸 문학으로까지 읽고 싶지는 않은가봐요
문학에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매달려
문학적 인간을 짝사랑하는 독자가 되고 있는지도 몰라요
내 주위의 그렇고 그런 인간, 그래서 어처구니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일 자체가
문학이어서 가능했던 게 이번 소설이 아닌가싶네요
굿바이님의 독후감은 핵심을 탁 짚어주는 깊이가 있어
독후감 읽는 맛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도치 2010-01-03 22:0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상주의라는게 있어서 실증적이건 지극히 냉소적이건 학습되어지고 무의식중에 기대하고 있는 향이나 방향이 있나봅니다. 그 무의식적인 망상에 사로 잡혀서 바라보는 식견도 좁아진 경우가 늘상 있는 일이긴 하죠. ^^;

정신 없는 시기인 연말연초에 깜빡하고 올해 목록을 이제서야 스크랩해갔습니다. 책 주문하고 틈틈히 읽어야겠어요.

굿바이 2010-01-06 16:10   좋아요 0 | URL
문학에서의 인간말고, 후니마미님이 생각하시는 인간,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가 더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어처구니없는 인간들에 대해서도 언제 한 번 고견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책을 통해서건 아니면 사석에서건 말입니다.
그리고, 매번 허접한 글 독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치 2010-01-03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약간의 허무주의도 느껴지기도 했는데 제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던 영화에서는 가족영화이다 보니 뻔한 교훈을 남겨주고 보는 관객은 그 뻔한 것을 확인하면서 만족감과 함께 훈훈함을 느끼려는 의도와 부합됐기에 그와 비슷한 소제의 이 소설에서의 결말의 횡포는 눈물이 날정도였습니다. ^^

굿바이 2010-01-06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로 윌리엄 포크너에게 삿대질하시는 분들도 많더라구요, 그래서 나름 위안을 받았답니다. 안그랬으면 저도 눈물이...^^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도, 작년에 봤던 [그랜 토리너]처럼, 물론 조금 다른 의미의 가족영화이지만, 뻔할 것을 알면서도 그리 끝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을 때가 있습니다. 워낙 사는 일이 팍팍하다보니 감동을 비타민처럼 소비할 때가 있죠. 작가에게 그 정도까지 바랬던 것은 아니지만, 여튼 저는 너무 위대한(?)작가는 좀 거시기 할 때가 많습니다.ㅎㅎ

동우 2010-01-08 0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작가가 전달하려는 '인간에 대한 절망'의 뜻을 '조롱'이라는 형식의 메시지로 표현하였다는.
굿바이님은 독수리처럼 이 책을 읽으셨습니다.
예리하고 신랄하기가.
김훈의 표정을 지으시고. 하하

서경식은 읽어보지 못하였지만 "나는 멸망할 운명임을 알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을 절망이라고 이해했었고, 승산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를 조롱이라고 이해했었다."는 말씀도 날카롭게 들립니다.

존재의 가벼움들이 싣고 떠나는 존재의 무거움.
그 상징성의 그림은 절망의 색채만 있었던것은 아니었다고 읽은 나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때'와는 상당히 다릅니다만, 굿바이님의 시각을 이해하고 동감하는바 없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젊으신 분의 사유가 너무 깊어 어두운게 아닐까 하는 늙은이의 노파심 하나.. 하하하


굿바이 2010-01-0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김훈작가 표정을 흉내낼 수 있을까요? 아~ 정말 한때는 남자였으면 좋겠다,싶었습니다.
[대부]의 "말론 브란도"정도의 표정이나, [태양은 가득히]의 "알랭드롱"이나, [데블스 에드버킷]의 "알파치노" 정도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아니 [미스틱 리버]의 "숀펜"정도?
그렇지만, 저는....그저 늙고(?) 병든 굿바이의 얼굴. 아흐~

여튼, 동우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도 막 탈선할까 생각중입니다.^^

민정 2010-01-14 0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부인을 못살게 구는 못난 남편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더라구요. ㅎㅎㅎ
저는 예전에 숙제로 읽던 1920년대 일제 강점기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아버지, 남편상은 맨날 술먹고 집에와서 부인이나 때리고, 아니면 첩을 얻어오고, 이런 모습들이라 화가 나고 챙피했었어요.
그게 우리나라에만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데서 위안(?) ㅎㅎㅎ

저 아버지 캐릭터 진짜 물건은 물건이죠?
뻔뻔하게 나가서 주얼의 말 팔고 돌아왔을때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니까요.
뭐 저런게 다있나 하고. ㅎㅎㅎ

약간이나마 작가에게 점수를 주자면
그런 바닥의 바닥에 있는 인간들에게서
결코 무관심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랄까요.
현실을 조롱하는 사람들 보다
진실에서 고개를 돌리고 인생사를 예쁘게 포장하는 작가가
저는 더 무서운 사람들 같아요.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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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Diaspora)는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거주하는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현재에 이르러 좀 더 확대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굳이 바다 건너 먼 나라의 형편을 살피지 않아도 이산離散의 피해와 고통은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차고 넘친다. 제국주의는 막을 내렸고, 식민植民의 기억도 사라지고 있으며, 전쟁도 휴전인 이 땅에 아직도 이산離散의 고통을 겪는 이들이 줄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책의 주인공 바리의 행로를, 가족이 해체되고, 두만강을 건너고, 불법 노동자로 일하고, 밀항을 하고, 영국에 정착하는 과정을 따라가며 어린 바리가 감당했을 차가운 두만강도, 밀항의 시간들도 나는 상상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린 바리가 극적으로 도착한 영국이라는 신세계는 그녀처럼 내몰린 사람들에게 또 다른 이름의 지옥일 뿐이었다. 갖가지 피부색을 한, 자신의 땅에서 쫓겨난 혹은 도망친 그들은, 일류국가의 삼류시민, 불법체류자의 이름으로 살 수 밖에 없었고, 배타적인 시선 속에서 또 다시 표적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또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 것인지, 흘러갈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게 주홍글씨를 목에 걸게 하고, 기약 없는 시간으로 몰아가는 대단한 제국들과 교만한 통치자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들에게 그리고 언젠가 내몰릴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희망이란 있는 것일까? 

폭정과 기근을 피해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넌 이들이 무관심과 착취로 인해 또 다시 죽어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우리의 주인공 바리는 설화의 한 대목처럼 그들을 그리고 자신을 구원할 [생명수]를 찾으려 한다. 생명수를 찾기 위해 들어간 지옥 같은 환상 속에서 바리가 떠도는 불쌍한 주검들과 나누는 통한의 대화는 이 소설을 넘어 이 시대를 관통하는 [절망]이었다. 환상에서 돌아온 바리가 그들을 구원할 생명수를 찾지 못했다고 토로하자 압둘 할아버지가 그녀를 가만히 달랜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남을 위해 눈물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 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P.286" 

그러나, 나는 압둘 할어버지의 위로, 그러니까 [희망]이라는 환상이 필요한 현실, 그리고 그것이라도 붙들어야만 하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희망]이라는 묘약을 주입하여 현실을 위무하고 버티게 하는 무엇이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희망]을 처방하는 약장사들의 의도를 의심한다. 그들이 내놓는 묘약은 이미 숱한 [절망]과 [극기]의 시간들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희망]을 말하는 것, [희망]만 놓지 않으면 현실은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동하는 행위는 위험하다. 그리고 그것은 기만이다. 물론 인간이란 [희망]없이 살기 어려운 것이라서, 神을 만들어 낸 생명체가 아니었냐고 한다면, 나는 그 대목에서는 할 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처방이 아니다. 그것은 아편일 뿐이다. 아편을 처방받은 이의 결말은 너무 뻔하다. 죽음이다.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P.223"
오히려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나를 붙드는 바리의 손끝에서, 나는 염치없이 위로받고 있다. 견디는 것, 지나가는 것, 그것들이 [희망]이라는 말 보다 나는 좋다. 물론 견디고 기다리기 위해 뭔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무엇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꼭 [희망]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견디고, 지나가는 것을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절망]이라면 오히려 편하다. 역시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상처 입은 자가 자신의 언어로 온전히 상처를 드러내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고통의 순간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일도, 그것을 타인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치환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상처는 치료를 위해서건 화해를 위해서건 기록되어야 하고, 비슷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알려져야 한다. 그러나 곤혹스럽게도 언제나 고통을 해석하는 타자의 시선은 일정한 선을 넘기가 힘들고, 때로는 자의적인 해석이 곁들여지기 일쑤다. 그러한 이유로 매개자의 자질과 능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이 한 개인의 문제일 때도 그렇지만 역사라는 집합적 기억을 다룰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하여 우리시대의 상처, 바리의 고통을 알리는 작가 황석영의 글은 치밀한 사전 조사를 바탕으로 하여 쓰여졌다는 점, 섣불리 감정을 들쑤시지 않고 과장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분투했다는 점에서 그가 수행한 매개자의 역할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이 땅에 이산離散의 고통이 차고 넘치는 이유는 우리 모두 [희망]을 잃어서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힘 있는 자들이 더 큰 힘을 얻고, 힘 없는 자들이 더 많이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하여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찾아야 할 [생명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패러다임, 이분법적인 구조로 세상을 가르지 않는 상생의 윤리라면 나 역시 [생명수]라는 [희망]을 붙들어 보고 싶다. 아니, 다시 한 번 속을 의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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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09-12-17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디아스포라'라는 어휘는 유대적인 슬픔과 유대적인 희망이 내포된 복합어의 느낌.
얼마전 이른바 좌파로부터 똥바가지를 덮어쓴 적도 있지만(작품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황석영은 훌륭한 작가입니다. 김일성과 만찬을 한사람이지만 적어도 '바리데기'를 쓸수 있는.
북한,중국,영국,아프가니스탄.. 세계사적 지정학적 정치사회적 그 복잡한 공학(力學)구조의 계산법은 현실의 약장사마다 다르겠지요.
하하 굿바이님. 당연히 희망을 처방하는 현실의 약장사는 굿바이님의 폄을 받아도 무방합니다.
굿바이님의 말씀처럼 '견디는 것', 그 '산다는 것' 속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희망.
바리데기의 희망, 디아스포라의 희망. 아우슈비츠의 희망.
하하, 굿바이님 마씀처럼 우리 그 희망이나 봅시다그려.

굿바이 2009-12-18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황석영 작가는 훌륭한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문학세계와 진정성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현실세계에서 워낙 액션이 크신 분이라서 간혹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더는 아니 그러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또 실수를 한들 어쩌겠습니까? 말달리고 싶은 어르신에게서 고삐를 뺏을 수도 없고^^

겨울입니다. 기다리고 견디는 것을 배우기에 겨울 만큼 좋은 계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웽스북스 2009-12-20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그렇게 속상해하며 술마시던 그날 밤이 떠올라요 언니.
지나고보니, 또 오라버니, 좀 측은하고 귀엽고 그러기도 하고..

아. 그래도 왜그랬을까 싶기도하고...

굿바이 2009-12-21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그러던데, 사람은 과거를 혹은 미래를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실존으로서의 현재만 살 수 있다고....오라버니도 그저 그 순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싶어. 물론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면죄부를 백 마흔 다섯개쯤 얻겠다는 심뽀이지만^^

요즘 잘 먹지는 못하는 술을, 그것도 속상해하며 마시는 날이 너무 많아져서, 이제는 그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나는 오늘도 절망의 끝에서, 이 시대의 습속과 괴멸을 외치고 있다오~ 아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