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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386 - 진짜가 온다 2035세대!
커밍아웃 2035 편집부 엮음 / 메카북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나는 '월드컵 세대'이다. 2002년도 한일월드컵의 열광적이고 감동적인 역사가 대학 시절로 대변되는 이십 대의 나이를 관통했기 때문에 그리 불리우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을 이십 대에 누린 자들을 '월드컵 세대'라고 한다면, 1988년 서울올림픽을 이십 대에 누린 자들을 '올림픽 세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대략 15년의 나이차가 존재하지만 두 세대를 보다 깊게 천착하면 숫자의 차이 못지 않은 중요한 한국 현대사의 특질과 모순을 목도하게 된다.
1987년 6월 항쟁은 4·19와 함께 대한민국 현대사의 찬란했던 시민의 힘으로 기록되고 있다. 4·19 혁명이 이승만 독재 부패 정권에 항거하여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인시킨 쾌거였다면, 87 민중항쟁은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 6·29 선언을 이끌어 낸, 요컨대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국민의 힘으로 되찾은 역사라 할 수 있다. 식민 지배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그만 반도국가가 불과 50년 만에 남부럽지 않은 자유민주주의의 만개를 이룰 수 있었던 연원이 4·19와 6월 항쟁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서두에서 언급한 '올림픽 세대'는 87년 6월 민중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주인공들, 소위 '386세대'들이다. '386'이라 하면 9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30대의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에 태어난 자들의 숫자 아이콘으로 해석한다. 지난 1997년 김대중 정부로의 정권교체 이후 386세대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는 더욱 증폭되어 왔다. 더욱이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정부는 386인사들을 청와대와 내각에 대거 입성시킴으로써 오랜 비주류의 정체성을 벗어 던지고 국가를 운영하는 주류적 권력자들로 대이동하게 된다.
『포스트 386 진짜가 온다 2035세대!』는 87년 체제의 중심에 서있던 386세대가 지난 5년 동안 국가 운영자로서 보여줬던 수많은 과오들을 언급하며 그들의 한계와 모순에 대해 역설한다. 더불어 386의 후배 세대라 할 수 있는, 현재 나이 20세에서 35세까지의 '포스트 386세대'와의 대조 분석을 시도한다.
시도에 있어 꽤 흥미로운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적지 않은 비공감과 거부감이 발산된다. 책의 초반부에는 87년 체제가 갖는 역사적 의미와 모순적 특질에 대해 흥미있게 분석한다. 386 민주화 세대의 염원이었던 군사 독재 정권의 몰락과 국민주권적 민주주의의 건설은 1987년을 기준으로 최소한의 절차와 형식에서 달성된다. 직선제 개헌 후 민주화 세력으로서의 존재 목적은 희미해졌고, 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드러난 그들의 현실감각은 철저히 과거의 트라우마에 갇혀 있다고 지적한 대목은 일견 타당하다. 21C에 이른 작금의 현실에서도 '민주'와 '평화'를 외치는 386국회의원들의 저항성과 선동성의 경향을 보면 현재성에 맞지 않은 과거로의 회귀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기에 공감된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구조와 언어관을 정신분석학과 인지심리학적 측면에서 분석하며 전체 분량의 3할을 할애하여 386세대의 모순성의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다소 어안이 벙벙한 측면이 없지 않다.
국가 지도자의 언어는 응당 중요하다. 대통령의 언어를 심층 분석하여 문제점과 개선책을 찾는 것을 나쁜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논지와의 연결성이다. 대통령의 말할 때의 용어 선택과 화법이 87년 체제의 전후 세대를 비교 천착하는 것과 무슨 연관성이 있단 말인가? 더욱이 말은 글과는 상이한 메커니즘이다. 말은 지극히 직관적이다. 말의 실수가 글의 실수보다 빈번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직관이라는 성질에 기인한다. 국가 지도자의 부적절한 언어 사용의 개선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를 반문할 수 없으나, 한 사람의 언어적 개성과 구어적 특질을 지엽적인 샘플링으로 소재삼아 논지 삼는 것은 논리 이전에 비겁함이기에 심히 거북하다.
비공감적 논지의 전개는 끊임이 없다. 예컨대 시종일관 386세대의 모순과 허구를 지적하고 있는데, 지면의 절반 이상을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정책 과오를 설명하고 분석하는 것에 할애하고 있다. 즉 저자는 386세대를 대표하는 샘플로 노대통령과 현 정부를 선정한 것이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참여정부에 386인사가 많이 포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 정부의 실정이 386의 모순과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단정짓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본질은 국정에 대한 무능과 아마추어리즘의 문제이지 '세대'라는 비본질적 요소가 아니다. 대통령의 언어 스타일과 부동산 정책의 실패 사유에서 특정 세대의 한계성을 찾고자 하는 논설구조는 아무리 곱씹고 곱씹어도 동의되지 않기에 거북하기만 하다.
저자는 계속해서 주장한다. 386세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분법적 사고라고 역설한다. 더욱이 현 정권의 이분법 사고는 매우 심각하여 나 아니면 너, 보수 아니면 진보, 가진 자 아니면 못 가진 자, 주류 아니면 비주류, 사업가 아니면 노동가, 수도권 아니면 비수도권 등으로 국민을 갈라놓았고, 이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역적 양극화가 더욱 심하게 전개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저자의 주장 또한 심한 이분법적 사고에 구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책의 중반 이후부터 386세대와 포스트 386세대를 여러가지 각도에서 심각한 이분법으로 갈라놓고 있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이성과 감성, 주체와 비주체, 반국가적과 친국가적, 저항(revel)과 운영(management), 관념과 실체, 투사와 인간, 정치와 경제라는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두 세대를 가르고 있다. 이미 다문화와 다개성이 지역과 세대를 초월하여 엄존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저자의 주장은 그 내용과 방법이 모두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선배 세대인 386세대를 존경한다. 서슬 파란 군부정권 하에서 대학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은 지성인으로서의 양심과 용기로 부정의不正義에 항거했다. 비겁하지 않았고, 용기가 있었으며, 정직하게 살았고,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있던 세대였다. 누가 감히 이들에게 돌을 던진단 말인가? 어설픈 논리와 조악한 지성으로 세대 간의 비교 우월성을 논하고 세대 단절을 부추기는 것에 대해 심한 구역질을 느낀다.
미래 지향적인 측면에서 포스트 386세대의 긍정적인 역할과 기능을 강조하거나 과거 세대에 대한 건전한 비판을 통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혜안을 유도했다면 보다 힘있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책 말미의 불과 몇몇 지면만이 미래에 대한 비전과 해법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것조차도 '선순환론'의 반복된 거론뿐이며, 그간의 정책 담론을 정리한 일반론적이고 사변론적에 불과하기에 가볍기만 하다. 책 전반에 걸쳐 두드러지게 논하고 있는 한 세대에 대한 집착성 핍박, 그리고 임기가 만료되는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편협한 조소는 '2035가 꿈꾸는 드림소사이어티를 말한다!'라는 표지의 매력적인 문구를 뒷받침하지 못하기에 가엾고 초라하기만 하다.
이미 제작해 놓은 액자에 그림을 맞추려다 보면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논설에는 논리와 예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논지를 펼 때에는 내용에 있어 논리가, 방법에 있어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논점에서 한참 벗어난 논거의 짜집기식 배열과 양비론兩非論 사고, 그리고 지극히 독선적이고 편향된 문제 의식에 적잖은 인내심 없이는 책의 막장을 확인하기 힘들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불편하고 암담한 독서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교훈이 있다. 독서에서도 '예고편에 혹하여 영화를 보지 말아야 한다'는 동일한 의미의 교훈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견강부회牽强附會'라는 한자성어의 의미를 곱씹게 한 점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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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