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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여행자 - 손미나의 도쿄 에세이
손미나 지음 / 삼성출판사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여러 여행 에세이를 읽으면서 정확히 두 가지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게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 여행 속에 '인간'과 '사랑'이 내재되어 있는 수기가 있는가 하면, 맛집과 지리와 여행스킬 등을 부각하여 기술한 수기가 있다. 잘 다음어진 전자 형태의 여행수기는 활자 속에서 타지와 타인과 자아를 동시에 탐구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즐겨 읽는다. 하지만 후자 형태의 수기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여행이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것이다, 라고 고백한 어느 작가의 명문장에 완전히 동의하기 때문이다.
『스페인 너는 자유다』에 이어 두 번째로 출간한 『태양의 여행자』는 아나운서 손미나의 도쿄 에세이다. 그녀가 아나운서 생활을 마감하고 여행작가로서의 첫 작품이기에 많은 독자들에게 관심을 주고 있는 책이다. 아나운서로서의 뛰어난 미모는 물론, 해박한 지식과 격조 있는 말솜씨, 재치 있는 진행이 마음에 들어 평소 나는 작은 팬임을 자임해왔기에 그녀의 신간 소식은 솔깃함 그 자체였다.
사실 일본은 가까우면서도 멀게만 느껴지는 나라다. 지리적으로는 가장 가깝지만 정서와 문화, 역사의식에서는 머나먼 당신이다. 동아시아권, 비슷한 용모와 생김새, 한자 언어권, 파란만장한 현대사, 최초의 월드컵 공동 개최 등 많은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시선은 보편적으로 곱지 않음이 사실이다. 이렇게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인 일본의 심장 도쿄를 작가 손미나는 소박하고 담백하며 인간적인 언어로 담아내고 있다.
몇 가지 흥미있는 내용을 소개하자면,
일본인들의 우상이자 친구로 통하는 만화 캐릭터 '아톰'의 태동이 일본 최고의 명문 사학인 와세다 대학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와세다 대학이 있는 '다카다노바바'라는 동네가 아톰의 고향이다. 아톰이 처음 등장한 원간지 《소년》 의 출판사가 다카다노바바에 있었고 만화 속에서 철완 아톰에게 가족을 만들어준 오차노미즈 박사가 일하던 과학성도 다카다노바바에 있다. 이러한 아톰의 태동적 지역성은 인근 지하철역에서 와세다 대학까지 가는 거리에 온갖 '아톰' 캐릭터로 도배가 되어 있는 풍경을 자아내기도 한다.
더욱이 125년 역사를 자랑하는 와세다 대학은 일본이 낳은 세계적 소설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배출한 대학이기도 하다. 평소 하루키에 심히 경도되어 있던 손미나는 여행을 할 때 그 나라의 명문 대학을 방문해보는 원칙을 일본에서는 와세다 대학을 통해 완성시킨다. 캠퍼스 내 소소한 풍경 속에서 책을 읽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관찰한다. 만화 왕국이 아니랄까봐 너도 나도 만화책을 읽고 있는 모습에서 웃음이 발산되고, 와세다 대학 중앙 도서관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라틴어 문구를 목도하는 장면에서는 한국에서 온 한 관광객의 마음을 압도한다.
'QUASE SIT SAPIENTIA DISCE LEGENDO
(진정한 학문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인간은 독서를 해야 한다)' <P. 126>
손미나의 여행코스 중 군침이 도는 곳이 한 곳 있다. 세계 4대 시장 중 하나이며 수산시장으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츠키지 시장이다. 인간들의 복닥거림과 생선 비린내의 퓨전이 만들어내는 광경을 좋아하는 유별난 습성을 갖고 있는 나는 평소 노량진 수산시장과 부산 방문 시 자갈치 시장을 즐겨 찾곤 한다. 그렇기에 세계 최대 규모의 수산시장을 방문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다. 더욱이 오랜 전통과 숙달된 스킬을 통해 나오는 맛있는 해산물과 함께라면 더욱더 말이다.
일본 내에서의 한류 열풍에 대한 이야기도 매우 흥미롭다. 일부 주책 없는 아주머니들의 광적인 연예인 찬양이라고 우습게 바라보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지만,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한류의 열풍 속에 일본인들만의 고독이 함의되어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원자폭탄 투하의 아픔을 겪은 일본인들은 전쟁 후 국가의 재건을 위해 오직 경제 발전에만 목숨을 걸고 너나 할 것 없이 돈 버는 일에만 매진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인심이 삭막해졌고 개인주의와 물질주의가 팽배한 일본사회를 만들었다. 소위 '정 없는 사회'로 대변되는 일본사회에 한국 드라마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 드라마 속에 살아있는 인간미와 따뜻함이 외로움이라는 트라우마에 갖혀 있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한국인은 일본인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이 하나 있다. 일본사람은 계산적이며 마음을 숨기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손미나는 자신이 만난 일본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러한 통념을 전복한다. 그녀가 만난 사람들은 누구보다 정이 많은 사람이었고, 마음 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진실성이 충만하고,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마음을 열고 닫는 문제는 국민성이라는 이름하에 일반화해버릴 수 없는 것을 손미나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명징하게 증명하고 있다.
인제 갓 두 권을 출간한 초보 여행작가의 글이 이토록 즐겁고 훈훈하며 감동적이었던 것은 여행에 '인간'의 존재감이 오롯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전혀 다른 인간을 만나고, 그 인간을 알고 느끼며,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것. 그것이 여행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가장 본질적인 선물이요, 축복임을 재확인한다.
차후 손미나는 여행작가로서 또 다른 많은 활자들을 선보일 것이다. 그녀 특유의 사람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식지 않고 계속 유지되기를, 그리고 여행을 통하여 보다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유하며 탐구하는 통찰력 있는 작가가 되기를 작은 팬으로서 기대한다.
실천하기 전까지 꿈은 단지 꿈일 뿐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새삼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나는 혹시 그동안 그런 꿈을 꾸면서 그 꿈으로 인해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해지는 것만을 즐기고 있지는 않았나? 그것을 진정 현실로 이루어내어 나의 꿈이 다른 이의 희망이 되도록 하기 위해 나는 과연 정말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가? 아무리 거창한 꿈을 꾼다 해도 그것이 그냥 꿈으로 끝나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p. 207>
나는 내 삶에서 커다른 걸음을 내딛는 그 마지막 순간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여유 있고 싶다. 젊고 싱싱한 외모로 자극적인 설렘을 주기보다는 세월이 갈수록, 나이가 들 수록 그윽하고 성숙한 아름다움으로 다른 이의 영혼에 감동을 주는 여성이고 싶다. 그래서인지 내게 있어 나이를 먹는다는 것, 시간이 추억으로 새겨진다는 것은 젊음에 서서히 작별을 고하는 서글픈 변화가 아닌, 가장 아름다운 나 자신의 모습에 가까이 가는 기쁘고 설레는 여정이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의 매순간을 즐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 221>
내가 만난 사람들, 그 사람들은 곧 거울에 반사된 나의 모습과도 같은 것 아닐까? 그들이 곧 나이고 내가 곧 그들이고, 서로의 모습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만남이고 인생이고 그런 것 아닐까? 여행은 언제나 낯선 환경 속에서 나의 진정한, 또는 숨겨져 있던 새로운 모습을 만나게 해준다. 도쿄에서 보낸 시간과 그 추억을 함께 만든 수많은 사람, 만남, 또 사건들은 모두가 나의 거울이었다. <p. 264>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