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침묵
질베르 시누에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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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없음.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많은 생각을 했다. 삼위일체( ) 하나님을 믿고 성경의 무오(無誤)를 인정하는 내게 이 한 권의 소설은 적잖은 도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을 비롯하여 성경의 절대 권위를 전복하고 있어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자에 기독교를 소재삼아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대단한(?) 상상력을 발동하는 미디어의 출현이 어디 한두 건이었던가. 어차피 허구는 허구일 뿐. 픽션임을 인정하며 작품 그 자체를 이해하기로 했다.  

  『신의 침묵』. 제목부터 강렬하다. 부제는 더욱 강렬하다. 소설의 표지에서 십자가를 가로로 횡단하며 적혀있는 '연쇄 살해범이 천사들을 죽이고 있다!'라는 부제는 요상한 그림과 문자와 조합되면서 강렬한 비쥬얼을 발산한다. 신은 무엇에 침묵한단 말인가. 그리고 왜 침묵한단 말인가. 천사들을 죽이는 연쇄살해범에 대한 침묵인가. 아니면 어떤 침묵이란 말인가. 다양한 사유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면서 이야기 속으로 침투된다. 

  배경은 스코틀랜드. 외딴 섬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 저명한 추리소설 작가 클라리사 그레이 부인의 집에서 생면부지의 남자가 죽임을 당한다. 목에 상처를 입은 남자는 죽기 직전에 그레이 부인에게 한 권의 수첩을 건넨다. 그 수첩 속에는 알 수 없는 암호가 기록되어 있다. 그레이 부인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언어학자 매클린 교수와 함께 암호를 해독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음모가 숨겨있음을 밝혀내기 시작한다. 그 수첩의 주인공은 가브리엘 대천사. 그리고 천사들을 연쇄적으로 죽이는 살해범을 찾기 위한 힌트들이 암호화되어 적혀 있던 것이다. 범인이 누구인가는 '숫자 19'와 '쌍둥이 0.809'에서 풀이할 수 밖에 없다.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된다. 주변 사람들과 천사들의 죽음이 연이어 계속되면서 공포심을 느끼는 그레이 부인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천사 다니엘의 요청으로 모세, 예수, 마호메트를 컴퓨터 모니터상에서 심문한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범인을 지목한다. 그런데 그 범인은... 

  작가 질베르 시누에는 유일신을 믿는 세 종교의 핵심 인물을 등장시킨다. 모세, 예수, 마호메트. 유대인들로부터 경배의 대상으로까지 추앙을 받는 모세,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 땅에서 죽고 부활한 예수, 알라신의 위대한 예언자 마호메트를 전면에 배치한 것이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이 셋 중에서 살해범이 있을 것임을 수첩 속의 암호를 통하여 그레이 부인에게 어필한다. 뿌리가 같은 종교라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 종교의 교리와 예언자들의 혼합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출발한다. 

  천사는 꽤 많은 책과 영화에서 소재가 되어 왔다. 사실 천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아름답고 신비로우며 능력이 있는 고차원적 존재이다. 하지만 시누에가 창조한 천사의 이미지는 무능하고 연약하며 초라하기 그지 없는, 별볼일 없는 존재이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고차원적 우주를 살아가는 그들이 신과 대면하지 못하고 신의 뜻을 알지 못하는 누추한 존재로 부각된 점은 흥미롭다. 게다가 자신들의 연쇄살해범을 찾기 위해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나약함은 마치 소설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살해범의 초라한 정체를 예견이라도 하듯이 강한 연관을 내포한다. 요컨대 작가는 신과 천사에 대한 기존의 고차원적 신비성 부여를 거부한 채, 인간적인 눈높이 수준에서 창조한 것이다. 

  작가 시누에는 유쾌하고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 곳곳에 복선을 깔아 놓는다. 복잡다단하고 희미한 연속적 복선이 아닌 범인이냐 아니냐의 단순한 복선 구조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진행될수록 천사와 인간들은 하나둘씩 죽어가고 사건의 실마리는 점점 좁혀져 간다. 가브리엘 천사가 죽기 전에 남긴 수첩 속의 암호가 해독되면서 엉킨 실타래는 풀려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 반은 예상했지만 반은 예상치 못한 범인의 출현은 마치 영화 《싸인》의 외계인의 등장 장면과 비견될 정도로 황당하다. 설마 그거였어? 고작? 

  문학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매우 중요하다. 작가의 상상력은 곧 작품의 생명과도 같다. 더욱이 작가가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질적 수준이 독자와의 공감과 부합한다면 작품의 완성도는 빛나게 된다. 하지만 자기우주적인 비공감적 상상력의 발현에는 독자는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최근 기독교 교리와 성경을 소재로 한 다양한 상상력의 활개를 자주 목도하며 그 수준을 의심하게 된다. 꿈과 희망을 주는 상상력, 누구도 생각치 못한 기발한 상상력, 현실의 연장선상에 맞닿아 있는 수준 높은 상상력이 아닌, 기존 교리의 정통과 신뢰를 살포시 전복하여 얻는 충격효과, 파급효과에 기생한 상상력이라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경우, 성경과 코란을 인용하면서도 몇몇 본질적 속성에 대한 뒤집기를 통해 독자에게 충격과 파급만을 전달하고 있는 낮은 수준의 상상력으로 내게는 비춰졌다. 

  기독교인을 위시하여 자신이 믿는 종교의 경전과 교리가 다르다고 해서 흥분할 필요는 없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에 불과하다. 사실이 아닌 허구이다. 픽션일 뿐이다. 작품 속에 작가의 신념과 철학이 얼마만큼 내재되어 있는지는 그 다음 문제이다. 어쩌면 근자의 신을 소재로 한 다양한 미디어의 발생은 매력적인 존재로서의 신, 호기심이 발동될 존재로서의 신을 인정하는 인간의 또다른 신앙심의 표현이 아닐까. 

  소설의 제목 '신의 침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사실 성경이 완성된 이후, 신의 계시는 침묵하는 듯 보인다. 지금 시대에서는 바다가 갈라지거나, 죽은 사람이 살아나거나, 모세나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출현하지 않는다. 반면에 수많은 기적과 회복을 통한 신자들의 간증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바로 여기서 내가 확신하는 것은, 질베르 시누에가 상상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신은 침묵하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난 그리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내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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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감성 - 기업을 살리고, 지역을 살리는
시마 노부히코 지음, 이왕돈.송진명 옮김 / GenBook(젠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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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대의 시류(流)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이콘은 오랜 기간을 유지하지 못하고 다음 시대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대체된다.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이 진행됐던 20세기 이후부터는 그 교체주기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잘 발견하며, 잘 해석하는 개인이나 사회가 발전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IQ(지능지수, intelligence quotient)'가 개인의 중요한 가치로 인식될 때가 있었다. 한 개인의 능력의 범주를 수치화된 지능의 지수로 한정하여 일반화 했던 것이다. 하지만 머리만 좋아서는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음을 인간 스스로 자각하게 되었고 어느새 'EQ(감성지수, emotional quotient)'가 부각되는 시대가 되었다. 단지 머리만 좋은 것보다 감성이 풍부하고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최근에는 'CQ(소통지수)', 'NQ(공존지수)' 등의 신조어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지만 당분간은 감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연구와 열망은 사그라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마이니치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와 특파원으로 폭넓게 시대의 조류(流)를 탐구한 시마 노부히코는 『돈 버는 감성』을 통해 경제적 관점에서의 감성코드를 풀이한다. 기업을 살리고 지역을 살리는 감성의 힘이 일본의 기업과 지역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실현되었는지를 다양한 예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빛의 속도로 급변하는 시대의 감성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역설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매우 흥미롭다. 

  저자는 21세기의 감성 키워드로 여러가지 항목을 소개하고 있다. 안전·안심, 청결, 건강, 살기 편한 커뮤니티, 간호·의료, 교육, 자연·환경, 엔터테인먼트, 문화·전통·역사, 즐거운 식사, 친구·가족 등이 저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감성의 키워드들이다. 이것들이 앞으로 10~20년 동안의 사회와 소비, 라이프스타일, 정치 등에 이르기까지 기둥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저자는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일본경제의 '잃어버린 10년'인 1990년대 이후 성장한 기업이나 유행하는 상품, 인기 있는 장소, 지역·도시, 라이프스타일 등을 논거로 제시하고 있어 설득력을 갖는다. 일본경제의 거품이 붕괴되면서 날카로운 '감성'의 시대를 예견한 기업과 지역의 선견지명이 결국 돈 되는 성공을 창출하였던 것이다. 도요타, 세콤, 샤프 등 일본 내의 세계적인 대기업들과 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실이 알찬 중소기업들의 성공신화 속에 담겨있는 감성코드를 많이 소개하고 있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저자는 21세기의 조류로 여성과 실버 세대의 주도적인 소비문화를 예견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남성과 기업이 경제를 이끌면서 20세기 고도성장기의 주역이 되었다면, 21세기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서는 소비 패턴의 극변에 따른 여성과 고령자들의 역할이 매우 커지게 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응당 고개가 주억거리게 되는 내용이다. 저출산·고령화 시대를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입하고 있는 한국 또한 경제 생산성과 국가정책 등의 문제에서 많은 고심을 하고 있는 터라 남의 일이 아님이 실감된다.  

  한 사회의 경제적 현재와 미래를 감성적 코드로 해석한 저자의 논지는 전반적으로 신선하고 흥미롭다. 하지만 지나치게 일본의 상황과 실례를 중심으로만 기술하여 공감 형성이 안 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뒷부분에서는 일본의 지역적 실례에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비공감적 지루함이 발산된다. 또한 '돈 버는 감성'이라는 제목과 핀트가 맞지 않는 내용들이 다수 있어 책 전체의 통일성과 몰입도가 떨어진 점은 아쉽기만 하다. 

  저자는 마지막 챕터에서 1988년 조지 부시(George Bush)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인용하는데, '가족이란 무엇인가?', '친구란 무엇인가?', '지역이란 무엇인가?', '우주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면서 건조해진 미국사회의 단면을 지적하고 국민들을 환기시킨 내용이다. 21세기는 결국 <인간>이라는 소중한 존재감을 재확인하는 시대가 될 것이며, 이는 커뮤니티 정신과 봉사의 정신이 개인과 기업, 지역과 국가에 충분히 고양될 때에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더 나아가 21세기 일본사회에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과제이며, 그것이 진정한 '감성'의 올바른 미래상임을 강조한다. 응당 동의되는 내용이리라. 

  앞서 언급했듯이 시대의 냄새와 색깔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급변하는 시대에서 변화를 감지하고 흐름을 읽어 내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불리우는 꽤 현명한 종족으로 자찬하지만 기실 그렇지 않은 면이 더욱 많다. 이성적인 만큼 감성적인 종족이 바로 인간이다. 인류의 역사에는 분명 한 시대를 대표하고 주도하는 감성적 조류가 있어 왔다. 그리고 그 흐름은 끊임없이 진화하면서 지금 이 시간에도 진행되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인정한다면, 어떤 감성이 돈이 되는 감성이요, 성공하는 감성인지를 추출하는 작업이 녹록지 않은 일임을 동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이 한 권의 책은 적절한 앎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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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인터뷰 특강 시리즈 4
진중권.정재승.정태인.하종강.아노아르 후세인.정희진.박노자.고미숙.서해성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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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心)은 인간을 존재케 하는 요소 중 매우 특별한 것이다. 사실 자존심이 쎄느냐, 쎄지 않느냐, 하는 등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인간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자존심을 소유한다. 타자를 비롯한 외부 환경으로부터의 자존심 공격에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응수하는 지에 대한 방법과 역량은 각기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자존심 자체의 존재 유무에 대해선 이론이 없을 것이다. 분명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 자존심의 사전적 정의다. 즉 자존심은 '남'과 관련된 매우 상대적인 마음이다. 남과 비교되지 않고, 남에게 공격 당하지 않는 이상 자존심의 성질은 쉽게 발동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자존심의 본질을 매우 좁고 불완전하게 해석한 오류일 수 있다. 내가 나로 존재하는, 다시 말해서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실존(存)적인 인간의 존재성을 사유한다면 자존심의 의미는 더욱 확장될 수 있다.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은 이 시대의 담론문화를 주도하는 여덞 명의 지식인들이 설파하는 '자존심' 강연집이다. 이미 한겨레출판사는 '교양'(2004년)과 '상상력'(2005년)과 '거짓말'(2006년)을 주제로 한국사회의 단면을 파헤친 바 있고,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최후의 정신적 힘이라 할 수 있는 자존심에 대해 아직 우리사회는 활발한 담론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 책의 존재가치가 거기에 있다. 미학적 관점에서 자존심을 탐구하는 진중권을 위시하여 여덟 명의 진보 지식인들은 각기의 관점과 분야에서 자존심학을 강의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다양한 관점과 분야에서 우리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자존심 코드를 해석한다. 미학적 관점, 과학의 자존심, 한미FTA의 허와 실, 이주노동자의 국내 현실, 여성과 문화적 관점에서의 폭넓은 주제로 여덟 명의 지식인들이 전하는 강의는 매우 흥미롭다. 출판사와 강연자들의 코드가 부합해서인지 전반적으로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색깔이 강하게 배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자존심들이 지켜져야 할까. 

  존재미학적 관점에서 자존심에 접근한 진중권의 강연 내용에 매료되었다. 평소 날카로운 문제제기와 용기있고 합리적인 언사로 한국 진보담론을 대변하는 진중권은 자존심의 의미를 타자가 아닌 자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의 비교에서 결락된 공복감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자기 자신의 존중감에서 자존심은 진정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능력과 감각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66억의 DNA 코드는 모두 다르며 모두 특별하다. 내 안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그것을 충분히 발휘하는 '아레테(Arete)' 상태의 경험과 확인. 그것이 진정한 자존감을 완성한다는 진중권의 주장에 동의한다. 

  과학의 관점에서 자존심을 설파한 정재승의 강의도 솔깃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과학적 자존심의 전제가 된다는 것이 정재승의 의견이다. 사실 그렇다. 인류의 역사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정복하고자 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연의 이치와 우주의 법칙을 하나 하나 발견할 때마다 인간의 자신감은 충만했고, 진리라 알고 있었던 것이 전복될 때마다 인간의 자신감은 무너졌다. 자연과 우주를, 겸허하게 탐구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정복과 영광의 수단으로 봐왔던 것이다. 과학은 지식의 범주를 넘는 경이로움이다. 과학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진실되게 바라볼 때에 인간의 자존심은 명징하게 빛나는 것이 아닐까. 

  한미 FTA에서 국가적 자존심의 의미를 도출하는 강연도 무척 인상깊다. 한미 FTA 반대 선봉장인 정태인이 전하는 강연 속에는 한미 FTA에 대한 내밀한 사실들이 자세하게 담겨있다. 부존자원이 없는 무역국가 대한민국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선진국가가 되기 위해 무역량을 늘려야 한다는 명제는 일견 타당하다. 이 명제의 연장에서 정부는 미국과의 FTA를 타결했던 것이다. 하지만 타결안의 조항들을 미시적으로 보게 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독소항목이 존재하는 위험천만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정부와 보수언론은 피해의 범위를 농업에 국한시키며 국민을 호도한다. 지적지산권, 투자, 서비스에 걸쳐서 전반적으로 국내의 법과 제도를 수정해야 하며, 이에 따른 천문학적인 금액의 손실과 심각한 대극적 양극화 현상이 불가피한 한미 FTA에 대한 재론은 범국민적인 공감대로 확산되어야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각도에서 자존심을 탐구한다. 대부분 한국사회에 만연한 모순과 오류를 지적하고 있어 공감되면서 동기가 부여된다. 실제 강의한 내용을 수록했기에 인문학의 딱딱하고 건조한 부담감이 많이 희석되었다. 강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구어체 문장의 정리와 강연 청중들의 다양한 질문과 강연자의 자상한 답변이 부가되어 매우 매끄럽게 완성된 점이 돋보인다. 더욱이 강연의 사회를 맡은 서해성 씨의 섬세한 질문과 유머러스한 추임새는 읽는 이에게 마치 강연장에 있는 듯한 생동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변화는 이제 한 개인의 과제가 아닌 국가와 세계의 과제가 되어 있다. 더욱이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의 변화가 예사롭지 않다. 러시아는 푸틴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냉전체제 이후 소멸된 패권을 다시 재현하려 하고, 중국은 전 세계 제조업의 23%를 빨아 들이면서 금년 베이징 올림픽, 2010년 상하이 엑스포, 2014년 달착륙이라는 야심찬 대사를 계획하며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하고 있으며, 일본은 UN 상임이사국 진출을 갈망하며 명실상부한 강대국 탑 클래스에 진입하려는 가시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주변 강국들의 역동적인 변화 속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자존심을 지키며 나아가야 할 것인가. 또한 나 자신은 어떤 자존심을 가져야 할 것인가. 자존(尊)에 대한 농밀한 사유가 머리속에서 일렁인다. 

  인문학의 위기라고 아우성이다. 인문학의 위축 현상은 현대 산업사회의 경쟁과 실용주의적 전신에 의해 더욱 심화되면서 확산되는 양상이다. 이럴 때일수록 인문학의 소중함을 새삼 곱씹어야 한다. 인류 문화와 정신 세계를 탐구하는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도전받게 될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현재의 세계를 반영하고, 변혁하기까지를 꿈꾸는 좋은 인문학 양서들은 인간에게 좋은 질문과 동기부여를 제시한다. 인간의 불완전함과 오류를 확인하고, 인정하며, 그것을 변화시키는 힘. 그것은 가장 좋은 책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며, 그런 책을 만들고 읽어야 할 의무는 응당 인간에게 있다. 바로 거기에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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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인생, 당신에게 배웁니다 - 시골의사 박경철이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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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이런 사람이 되겠다"라는 꿈을 갖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이전까지는 직업에 귀천이 있는 줄 알았다. 중학생이었을 시 내가 열망했던 직업은 뒤에 '사'로 끝나는 2음절의 세 가지 단어였다. 의사(師), 검사(事), 교사(師).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의사, 법과 정의를 세우는 검사, 사람을 가르치는 교사. 이렇게 세 가지 직업에 나는 심히 경도되었고, 사춘기 청소년 시기의 꿈과 이상으로 사로잡혔었다. 

  그 중 최고는 단연 의사였다. 내게 의사는 꿈이었고, 열망이었으며, 존재가치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의 '의사' 타령에 압박된 이유도 있었지만,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 연구하고 땀 흘리는 의사라는 존재의 무게감에 대한 여망이 더욱 컸던 것이리라.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 이후 의사와 나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임을 인식했다. 학업성적도 성적이었거니와, 사고가 트이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세상에는 의사 외에도 멋있고 소중한 직업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내 첫사랑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가슴 한 켠 소중한 곳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 잡아오고 있었다. 

  의사에 대한 나의 경외심은 김명민 주연의 의학드라마 〈하얀거탑〉을 시청한 이후에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물론 연출된 드라마였지만, 인간의 고귀한 생명보다 부와 권력에 대한 추구를 우선하는 의사들이 적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담이 걸렸을 때 제대로 검진하지도 않고 무작정 MRI부터 찍어야 한다는 의사, 소소한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입원부터 해야한다는 의사, 환자의 간절한 질문에 무성의하고 건조하게 대응하는 의사들을 나는 수없이 목도했다. 더욱이 지난 몇 년간 환자를 앞에 두고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위해 파업으로 일관했던 수많은 의사들의 행태는 의사에 대한 나의 냉소적 시각이 완성되는 동기가 되었다. 

  물론 이 땅의 모든 의사들이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베스트셀러였던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과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으로 대중에게 친숙한 시골 병원원장 박경철 씨는 신간 『착한 인생, 당신에게 배웁니다』를 통하여 의사에 대한 내 선입견을 전복한다. 앞서 출간된 두 권의 책이 저자 자신의 이야기에 중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번 신간은 저자가 만나고 치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삶의 한순간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소중한 삶의 가치들을 얘기한다. 

  저자가 책에서 소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프고 소외된 이들이다. 불치의 병으로 시한부를 선고받은 사람, 가난한 형편으로 반드시 받아야 하는 수술을 받지 못하는 사람, 불안정한 가정문제로 고통받으며 아파하는 사람, 주변에 아무도 없이 외로움에 갇혀 지내는 사람, 하지만 희망이 있어 행복한 사람들의 삶의 기록을 저자는 자신의 진료일기의 형식으로 훈훈하게 들려준다.  

  저자는 대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진료하지만 하루에도 수많은 환자들을 상담하고 치료하면서 인간의 생명은 물론, 인간 자체의 소중함을 인식하며 살아간다. 소비자와 공급자의 관계가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환자들을 대한다. 이러한 진심어린 소통방식은 친구로서, 선생님으로서, 조언자로서, 상담자로서 의사 박경철이 존재하는 원동(動)이다. 자신이 치료했던 환자들이 종합병원이나 대학병원으로 이관된 이후에도 수술결과와 치료성과 등을 저자에게 알려주고 피드백하는 사연들을 통해 진실하고 훈훈한 인간미를 보게 된다.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저자의 추억어린 이야기가 수록된 마지막 파트이다. 아버지의 부음 앞에서 슬픔에 잠겨있는 저자의 양옆에는 친구 두 명이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다. 두 명의 친구는 훗날 저자가 개인병원을 개원하는 궁핍한 상항에서도, 건강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 실려갈 때도 든든히 옆자리를 지키며 힘이 되어준다. 결국 한 친구는 저자와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면서 같은 병원에서 일하고 있고, 다른 한 친구는 인생의 동반자로서 언제나 저자의 옆을 지키고 있다. 농밀한 우정의 인과성(性)에서 나는 진한 감동을 느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나는 당연하다며 잊고 지냈던 감사함을 곱씹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소중한 것들이 참으로 많다.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건강이다. 아무리 많은 부를 누리고, 고매한 지성을 가지고, 높은 명성을 떨친다 하더라도 건강이 없으면 그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읽은 것이며,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은 것이다. 모범적 이타는 안정된 이기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이기의 기초가 바로 건강이다. 정신과 육체 모두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저자는 자신의 책이 청소년 우수도서에 선정되어 최근 중고등학교 강연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라고 한다. 그 누구보다 인간의 소중함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이 땅의 미래인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것은 도전이요, 축복일 것이다. 나는 '인간' 자체에 방점을 찍고 있는 저자의 직업관을 지지한다. 병을 고치는 수준의 치료를 넘어 한 사람의 삶과 영혼과 가치관을 치료하며 다스리는 치유의 마술사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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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페의 필름통
곽효정 글.그림 / 섬앤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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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IT 강국이다. 더욱이 인터넷 부문에서는 최고 중에 최고라 평가받고 있다. 세계 제일의 인터넷 보급율과 광랜으로 대변되는 회선의 초고속화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인터넷 기반 시설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있다. 하지만 우수한 IT 하드웨어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콘덴츠의 수준은 심히 조악하여 과연 인터넷 강국이라고 불리울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한국 네티즌들의 질적 수준이 과연 IT 강국이라는 외연적인 이름값에 부응하고 있는지에 대한 심도있는 곱씹음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터넷 예절과 콘덴츠 수준을 목도할 때면 민망함을 가질 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콘덴츠에 있어서는 빛의 속도로 은유되는 인터넷 속도에 비해 초라하기만 하다. 한국 네티즌들이 양산하는 콘덴츠는 대부분 1인칭과 3인칭의 '정보'의 전달이 아닌, 1인칭과 2인칭의 '교류'의 수준에 머물러있는 경향이 강하다. 미국 블로거들의 콘덴츠가 깊이있고 풍성한 정보의 바다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외연과 내면의 차이에서 확인되는 한국 인터넷 수준의 불균형은 아쉽기만 하다. 

  물론 자신이 직접 생산하는 양질의 좋은 정보로 블로거들에게 앎과 지혜와 도전을 주는 네티즌도 많이 있다. 그들은 책, 영화, 음식, 여행 등의 다양한 취미와 분류에서 자신의 논설과 경험과 노하우를 포스팅하여 한국 인터넷 콘덴츠 문화를 주도한다. '[페페] 시간을 움직이는 마을'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곽효정 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녀의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오롯한 사랑과 깊이있는 탐구가 담겨있다. 최근 출간된 신간 『페페의 필름통』은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잡지 《사과나무》에 그녀가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영화 에세이집이다.  

  영화 에세이지만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 속에서 저자 자신이 관찰했던 '삶'과 '사랑'에 대한 사유들이 가득 담겨있다. 저자는 영화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상들의 다양한 삶과 번민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더욱이 저자 자신의 삶과 사랑에 대한 경험적 네러티브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 독자로 하여금 훈훈하고 흥미롭게 몰입되게 만든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룬 영화 중 나는 세 편의 영화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산골 마을의 독특한 가족 이야기를 담은 《녹차의 맛》, '무엇인가를 기다리지만 보채지 않고 자신의 일에 소홀하지 않는 것!'이라는 기다림의 기본 자세를 이끌어내고 있는 《애프터 미드나잇》,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두 남자의 우정을 다룬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이 세 편의 영화에 호감을 느낀다. 특히 "한 명이 행복하면 다른 한 명은 슬프다. 그것이 감정의 공식이다."라는 멋진 아포리즘으로 소개한 《애프터 미드나잇》은 조만간 DVD 타이틀로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필연적 충동을 발산케 한 작품이다. 

  영화감독에 대한 저자의 의견이 공감된다. 영화라는 장르에서는 '감독'이라는 존재를 되도록 믿는다는 것이 저자의 철학이다. 영화는 연극과는 다른 메커니즘이다. 영화는 철저하게 감독의 예술이다. 조악한 시나리오가 감독을 잘 만나서 빛났던 경우와 허접 배우가 좋은 감독을 만나서 연기의 달인이 된 경우를 나는 수없이 목도했다. 한 작품에 대한 절대적 전권을 휘두르는 감독이라는 존재가 영화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 좋은 감독이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명제에 나는 온전히 동의한다. 

  왕가위 감독에 대한 농밀한 견해를 밝힌 부분도 매우 흥미있게 읽었다. 저자는 왕가위 감독의 매니아임을 언급한 뒤, 그의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전 작품을 관통하면서 설명한다. 나 또한 왕가위를 좋아하기에 왕가위 영화를 진심으로 즐기기 위해 저자가 제시한 순차적 영화 관람 순서는 솔깃했다. 〈중경상림〉 -> 〈타락천사〉 -> 〈아비정전〉 -> 〈화양연화〉 -> 〈2046〉 -> 〈열혈남아〉 -> 〈동사서독〉 -> 〈해피 투게더〉의 순으로 볼 것을 권장하고 있다. 돌아오는 주말 시간을 이용하여 저자가 제시한 순서대로의 왕가위의 작품 세계를 재천착해야만 하는 의무감이 발동되기도 한다. 

  만약 이 한 권의 영화 에세이가 영화 이론이나 영화평 등의 영화에 대한 사실적 설명에 국한된 내용으로만 일관했다면 그리 좋은 느낌으로 읽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깊이있는 삶의 통찰을 이끌어내는 관찰력, 자신의 고백적 이야기의 투영, 사랑에 대한 다양한 해석, 적절한 참고 설명 등이 잘 조합된 균형있는 에세이기에 마지막까지 호의 감정으로 읽을 수 있었다. 특히 각 파트가 끝날 때마다 저자가 직접 기록하고 그린 것으로 보이는 메모장은 이 책의 조리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모든 문화와 예술의 주제는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로 귀결된다. 책을 통해 인간을 탐구하며, 영화 속에서 인간을 성찰하고, 여행 가운데 인간을 천착하는 작업이 내게는 카타르시스이자 페이소스로 해석된다. 앞으로도 페페의 필름통 속의 필름에는 다양한 인간 스펙트럼이 끊임없이 투영되기를 기대한다. 더 나아가 앞으로도 꾸준히 활자화되어 나같이 우매한 이들에게 앎과 지혜와 도전을 제공해주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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