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무게 믿음의 글들 262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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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세기 기독교 변증가라고 불리는 C. S 루이스는 그의 명징한 사고와 신학적 지식 그리고 문학적 상상력이 어울어진 독특한 사상가이자 문학가로 유명하다.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 <헤어려본 슬픔> 등 그의 주요작품을 읽어보면 그가 결코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작가자 아님을 단박에 알수 있다. 그의 작품은 그만의 매우 명징하고 예민한 사고의 흐름을 따라 전개되는 특징때문에 그의 예리한 사고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금방 길을 잃고 책읽기의 흐름을 놓치고 만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쉼게 읽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보통 설교집이라고 하면 그냥 손에 잡고 누워서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집류라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보통 설교집이라고 하면 그다지 머리에 힘을 주지(?)않고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설교집의 특징 때문에 루이스의 <영광의 무게>또한 그렇게 쉽게 읽힐 수 있는 류의 설교집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과연 이러 설교를 행했을 때 그것을 들은 청중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사뭇 궁금해 진다. 왜냐하면 <영광의 무게>에 나온 설교 또한 구두로 전달되었을때 결코 팔짱끼고 편안한 자세로 들을 수 없는 머리에 힘을 주고 그의 논리를 열심히 따라가야하는 매우 고단한 작업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영광의 무게>는 여타 다른 설교집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하지만 쉽게 읽을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만큼 그의 설교는 우리의 의식을 깨우고 지성을 깨워 참된 신앙을 가지도록 독려한다. 영성과 지성과 상상력이 결합된 그의 설교는 듣고 보는 이로하여금 영성과 지성과 상상력이 깨어나게 할 것이다.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의 설교가 주로 성경에 대한 풀이보다는 그의 지성의 사용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설교보다는 강연식 설교에 더 가까운 듯한 느낌이 든다..

 

그의 <영광의 무게>를 읽어보면 지성으로 표현된 영성이 어떠함을 맛볼수 있을 것이다.

 

인상적인 구절

 

"한 번의 큰 모욕을 용서하는 건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끊임없는 자극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은 다릅니다. 들볶아대는 시어머니, 윽박지르는 남편, 바가지 긁는 아내, 이기적인 딸, 거짓말쟁이 아들을 계속해서 용서하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용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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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
장 베르쿠테 지음 / 시공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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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의 2권으로 발간된 책이다. 시공 디스커버리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소개하는데 중점은 두는 총서이다. 그래서 특정 분야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갖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면 읽어내기가 그리 만만치 않은 총서인것 같다. 이번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는 내가 읽은 4번째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의 시리즈이다. 이 총서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글로 다소 건조한 느낌이 있어서 잘 읽혀지지는 않으나 고급스러운 종이질과 도판을 많이 넣어 시각적 읽기를 함께 시도하고 있어 딱딱한 문체가 보완되는 것 같다.

 

고대근동의 세계는 참으로 낯설고 생소하며 이국적인 세계이지만, 그 거대하고 태고적 신비를 간직한 문명의 세계는 참으로 매혹적이다. 주로 파라오들의 연대와 그 업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나로써는 이집트의 도굴과 발견의 역사위주로 쓰여진 이 책에 그리 썩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이집트 발견의 역사 흐름에 대해서 간략하고 쉽게 쓰여져서 대략적인 그림을 그리기에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첫장은 고대근동의 패권자이자 거대한 문명을 이룩한 이집트 문명이 역사속으로 사라져간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4세기 이후 비잔틴 제국에서는 카톨릭이 지배적이었다.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이교도 신전을 모두 패쇄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 무렵 이집트에는 전통적인 신(神)이나 여신을 신봉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신전의 패쇄는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때까지 그곳 주민 사이에 쓰이던 상형문자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집트 문명이 사라진 배경은 그리스 로마 제국에 의해 이집트가 점령되고 테오도시우스 1세의 이교도 신전의 패쇄 명령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신전이 패쇄되고 신관이 쫓겨나면서 이집트 문자는 점차 사라지게 되고 이집트 역사 사본이 보관되어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 없어지므로 이집트의 기억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이집트 문명이 그때 사라지지 않고 역사속에서 전달되었다면 오늘날의 건축이나, 천문학등 많은 학문들은 이집트 문명에 많은 빚을 졌을 것이고 처음 인류세계에 대한 더욱 명확한 그림을 그릴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잊혀지고 파괴되어진 이집트 문명을 그 자체의 매혹과 거대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여행자들의 방문을 받게 되면서 서서히 잊혀졌던 문명에 대한 기억들이 복원되기 시작한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를 점령하뎐 제국주의 시대에 드농, 드로베티, 벨조니, 솔트와 같은 전문적인 도굴꾼들-이 책에서는 위대한 모험가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들도 돈이 될만한 이집트 유물들을 수집하여 프랑스와 영국에 비싼 값에 팔아버린 도굴꾼에 지나지 않는다-에 의해 이집트의 유적이 발견되고 유물들이 수집되면서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해독되어 감추어진 문명을 드러내는 단초를 마련해 주게 되었다.

 

고고학에서는 유물자료도 중요하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역시 유물을 해석하는 문서자료이다. 그래서 문자를 해독하는 것은 한 문명을 재발견하는데 매우 필수적인 것이다. 이집트 문명을 재발견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1799년 알렉산드리아 근처 로제타에서 프랑스 육군 장교에 의해 발견된 로제타 스톤이였다. 이 로제타 스톤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칙령으로 그리스어와 아랍어 그리고 이집트 상형문자로 구성된 비석이였고 이것을 프랑스의 고문서 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에 의해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해독되게 된다. 이것을 시발점으로 여러학자들의 연구가 쌓이고 자료들이 축적됨에 따라 이집트 문자에 대한 해독이 가능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투탄카멘이나 프수세네스 무덤과 같은 거대한 유적이 계속적으로 발견되면서 이집트의 역사는 조금씩 베일을 벗기 시작했고 새롭게 발견되어 그 거대함과 이국적인 문명의 실체를 드러내기기 시작했다.

 

조금씩 드러나는 이집트 문명의 거대함의 끝자락을 보고 나타내는 사람들의 반응은 놀람과 경외감이다. 1776년부터 3년동안 카이로에 머물면서 피라미드 내부들어간 사바리는 이렇게 썼다고 한다. 간신히 1.2km쯤 전진했을 때, 두 개의 거대한 피라미드의 머리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왕국과 제국이 붕괴하고 폐허가 되는 가운데서도 그대로 남아 있는 고대의 유적을 바라보면서 경외감이 솟아올랐다. 이들을 건설한 사람들의 위대함에 영광이 있으라!

 

이집트는 놀랍과 경외의 시선을 갖게 한다. 인류역사상 이렇게 거대한 문명을 이룩한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종교가 생활이였고 이생보다 내세의 삶을 더욱 믿었던 이집트인들은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그렇게 거대한 신들을 모신 신전을 건축하였던 것이다. 신비와 거대함과 놀람과 경외와 신으로 가득찬 이 이국적인 나라는 죽음 너머에 있는 내세에 대해 희망을 갖게하고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이상을 품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집트는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매혹적인 문명인 것은 분명하다.  

 

이 첵에 오타도 여러곳에서 발견되더라. 특히 66쪽 '2차로 그러모은'은 '2차로 끌어모은'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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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때 성적증명서가 필요해서 가까운 동사무소에서 성적증명서를

발급받았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때 문과와 이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솔직히 난 문과인지 이과인지 그때까지 나의 적성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나의 적성을 잘 살려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학교에 처음 입학했을때가 생각난다. 난 하얀얼굴에 정말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미소년이였다..ㅎㅎ(못믿겠으면 그때 사진을 보여주죠..ㅋㅋ)

첫 수업이 국어시간이였는데 국어선생님이 나를 계속 쳐다보시더니

문학을 하면 좋겠다고 하셨다..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그때부터 내가 문학이나 인문학을 했으면..아마 이름을 날렸을까??ㅎㅎ

 

암튼 부모님의 권유로 이과를 선택했고, 그것이 나의 대학생활의 괴로움의

시작이였던 것 같다. 과가 전혀 적성에 맞지 않았고, 몇번이나 전과를 할려고 했었다.

 

오늘 대학때 성적증명서를 발급받아서 훑어보았다. 딱 봐도 이과 전공과목은

시들시들한데 인문학 과목들만 'A'이 학점이였다.

'사회윤리', '국어의 이해와 표현', '종교학', '사상사의 이해', '21세기의 이해'

이런 과목들만 좋은 학점이였다.

 

오늘 성적증명서를 보면서 대학시절 유난히도 철학과 역사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동아리 선배가 자신이 유학을 가는데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나에게

어떠한 것으로 유학을 갈꺼냐고 물었다. 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철학'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시절에 낭만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볼수 없었던 이유가 적성에 안맞는

전공이였던 것이 분명하다. 대학시절이 끝날무렵 내 대학생활은 이렇게 끝나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씁씁했던 기억이 난다.

 

그뒤로 난 대학원을 진학했고 인문분야였다. 그때부터 제대로 공부했던 것 같다.

그 대학원 전공에서 부터 시작해서 역사, 철학, 교육, 문학 인문학 전반에 걸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좀더 일찍 내 적성과 전공을 살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학때 성적 증명서를 받은 오늘 왠지 기분이 묘하다..

자기를 알고 자기대로 살아야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 진다는 것을 말이다.

 

오늘 성적 증명서를 받아들고 씁씁하고 허전했던 내 청춘의 시간들이 추억되었고,

늦게나마 나의 걸음대로 걸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홍순관의 '나처럼 사는건 나밖에 없다고'라는 노래말이 생각난다.

 

들의 꽃이 산의 나무가 가르쳐줬어요
그 흔한 꽃이 산의 나무가 가르쳐줬어요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다고
강아지풀도 흔들리고 있어요 바람에

저 긴 강이 넓은 바다가 가르쳐줬어요
세월의 강이 침묵의 바다가 가르쳐줬어요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다고
강아지풀도 흔들리고 있어요 바람에
저 긴 강이 넓은 바다가 가르쳐줬어요
들의 꽃이 산의 나무가 가르쳐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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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2-11-06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왕 말 나온김에 사진도 공개해주시죠 ㅋㅋㅋ
 

 요즘 국가론에 관한 책이 많이 출판되는 것 같다.

아마 대선이 다가올수록 대통령론 못지않게 국가론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기

때문일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한 국가에 속해있어 국가에 대한 사유는

의식있는 사람이 아니면 좀처럼 하지 않는다.

 

최근 국가에 관한 몇몇책을 읽고 역사가 국가가 그 나라 시민들을 보호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오히려 합법적인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바로 국가라는 것도..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매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정도 책이면 양장으로 만들어야 무게감에 걸맞는데 가벼운 표지가 책의 격을 좀 떨어뜨리는것 같았다.

 

조금 오래된 책이긴 하지만 데릭 프린스의 이스라엘의 성경적 의미를 밝혀주는 책이다.

가장 기초적인 이스라엘의 의미를 담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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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비밀편지 - 국왕의 고뇌와 통치의 기술 키워드 한국문화 2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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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성군이였던 정조. 그는 조선의 정치적 격량속에서 정치개혁과 학문의 진보 그리고 더 나은 조선을 향하여 매진했던 후세인이 기억하는 위대한 군주였다. 그는 먼저 학문에 끊임없이 학문의 진보를 위해 잠을 줄여가면 책을 읽었던 학자이며, 심한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는 조선의 정치상황을 예민하게 조율하려 했던 노련한 정치가였다. 원래 임금이라는 나라의 최고어른은 평범한 사람이 근접하기 어려운 인물인 만큼 그에 대한 기록 또한 실록이라는 정사를 통해서만 단편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조라는 한 인물의 입체적이면서 한 인간으로써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기보다 한 나라의 국부로서의 존경할 만한 이미지를 위해 첨삭, 은폐되어 국부로써의 모습으로 미화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정사나 실록을 통해서 온전히 알 수 없는 정조의 다각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참 모습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 바로 정조의 어찰첩이다. 어찰첩이라는 것은 이 책의 정의대로 한나라의 군주가 그의 신하들에게나 친족들에게 직접 써서 보낸 편지를 말한다. 이 어찰첩도 하나의 공식적인 정치적 행위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보통 특정한 형식과 군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문체로 작성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정조의 어찰첩은 그러한 어찰첩과는 매우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정조의 어찰첩은 그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견제인이였던 삼환지에게 4년에 걸쳐서 쓴 297통의 편지로써 매우 개인적인 어찰이였다. 이것은 정조가 삼환지에게 편지를 받고 바로 없애라는 어명을 여러번 내렸을 정도로 그의 개인적인 사견이나 감정들이 많이 포함된 편지였다. 이것이 바로 정조 어찰의 사료적 가치로써뿐 만아니라 정조라는 한 인간을 조명해 볼 수 있는 귀한 사료인 것이다.

 

나는 이 책 <정조의 비밀편지>를 읽으면서 불운하게 불귀의 객이 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억울한 마음과 정치적으로 그러한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공격하는 정치적 상황속에서 유일한 혈육이였던 어머니 혜경국 홍씨와 의지하면서 온몸으로 한 나로 조선을 짊어진 정조가 한없이 가여웠고 그가 감당했어야 할 짐 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된 정조의 면모를 몇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정조는 군자학이나 성학론에 나오는 성군이기 보다는 자신의 성향을 자주 드러내는 독설이나 기만을 통해 벽파 집권세력에 대해 견제하고 그리고 상황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정치가였다. 먼저 대중들이 알고 있는 정조의 이미지는 이산이라는 티비 드라마를 통해서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 드라마 이산에 나타난 정조의 이미지는 철인이며 학자인 군자형 선비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정조의 어찰첩을 통해서 밝혀진 그의 진정한 모습은 독설 마다하지 않고 본인에게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여과없이 전달하는 다혈질적인 정치가의 모습이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치고 빠지는 예리한 정치가이다. 그는 신하들과 세상풍조의 어지러움을 화제로 대화하면서 모든 신하들이 나약하고 복지부동하다며 호통을 치는 반면에 심환지가 갑자기 소식이 끊겼을때는 약을 보내고 음식을 보내주면서 그의 환심을 사고 마음을 달래려는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정조는 정치적 상황을 파악하고 그것에 능동적이고 적절하게 대처한 정치가였다.

 

둘째 정조의 정치가라기 보다는 글 읽기를 사랑한 학자에 가깝다. 정조의 어찰첩에 자주등장하는 내용 중의 하나가 그가 책 읽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주서>를 읽는 중임을 밝힌 편지중에는 그가 주자의 저서 100권을 앞에 놓고 밤낮 비점과 권점을 찍으며 책읽기에 몰두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정조는 그의 만년에 거의 장님에 가까울 정도로 눈이 좋지 않고 온갖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독서에 열중하였다. 이것은 그의 본래 성향은 정치가라기 보다는 책읽기와 학문을 사랑한 학자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그 어떤 군주로서 업무의 과중함도 책읽기의 열정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였다.

 

셋째 정조는 정치가이며 학자이기 이전에 외롭고 병약한 한 인간이였다. 그는 그 시대의 정치적 격동을 온몸으로 안고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이였다. 그러는 와중에 그는 병이 많았고 는 화병과 가슴의 심한 통증이 많다고 호소하였다. 그가 사망하기 전에 쓴 편지에는 그의 병세의 심각함이 자세히 드러나 있다. 이것은 그가 한 시대를 감당하며 달려온 그의 열정에 대한 반작용이였다. 의지할 사람없이 홀로 외로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품으며 감당했던 그의 무게는 그를 위대한 군주이기 이전에 홀로 외로운 한 인간이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정조의 비밀편지를 통해서 나는 한 시대를 감당하며 짊어져야 했던 한 인간으로써의 정조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그의 후손으로써 그의 나라에 살고 있는 한사람으로써 무한한 감사와 애정과 연민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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