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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5부 :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도 야무나 공원의 마하트마 간디의 추모공원에는

간디가 말한 7가지 악덕이 있다.

 

 

철학 없는 정치

도덕 없는 경제

노동 없는 부

인격 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윤리 없는 쾌락

헌신 없는 종교

 

 

국가를 망하게 하는 첫번째는

"철학 없는 정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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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살림지식총서 76
홍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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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부터인가 피에르 부르디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는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읽고 나서부터였다. 강신주이 책은 나에게 새로운 담론에 대한 사유를 시작할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철학이라는 것이 거리를 두고 사유할수 있는 정의를 내려주었고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새롭게 사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중에 새롭게 사유해야할 대상들이 사랑과 가족과 국가였다. 그렇게 작은 자극에서부터 시작해서 지금나는 강신주로 인해 조금씩 철학하기를 배워가고 있다. 강신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의 책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 피에르 부르디외에 대해서 언급되어진다. 그는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만든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가 자본주의 체제가 이식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만든 용어가 바로 아비투스였다. 그렇게 그의 책을 통해서 부르디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여러 가지 검색을 통해서 피에르 부르디외를 전공한 홍성민이라는 분의 책을 알게되었다. 학자들이 쓴 책들이 대체로 현학적인 반면 이분의 책은 매우 명징하고 분명하게 헷갈리거나 어렵지 않게 매우 가독성있고 깊이 있는 글쓰기를 하는 분이였다. 단 한페이지만 읽어보아도 이 분은 자신이 피에르 부르디외를 소화하고 자신의 글로 써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살림지식총서 076번째인 이 책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생애와 주요 저작, 그리고 주요 개념에 대해서 매우 집약적이지만 쉽게 풀어주고 있다. 그는 프랑스 시골지방에서 태어서 소위 말하는 수재로 도시의 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고 과거 아웃사이더로 자라난 그의 삶의 궤적에 의해 그는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사회학자로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지식을 사회투쟁의 도구로 생각한 그는 현대 사회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책들을 저술하게 된다. 그중 가장 유명한 책은 <구별짓기>로 과거 봉건 신분사회에서의 계급이 자본주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소비와 문화의 취향을 통해서 구별짓기를 시도한다는 매우 뛰어난 문화비평서이다. 그의 이론을 통해서 현대소비문화에서 왜 매우 고가의 물건들이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잘팔리는지 왜 일반사람들은 구입하기 힘든 사치품들이 그렇게 잘 팔리는지 이 책은 이론적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뛰어난 문화분석서의 <구별짓기>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과 함께 세계 3대 사회과학 명저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소비문화 분석을 도구로 그는 예술과 문화 그리고 정치 전반에 걸쳐 현대사회에서 이해하기 힘든 현상들을 분석해 낸다. 그의 이론을 읽고 있으면 정말 설득력이 있고 공감이 된다. 그의 중요한 개념 몇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비투스(Habitus) 개념이다.

 

부르디외가 사회학적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아비투스 개념은 근대적 인간형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에 서있다. 우선 부르디외가 인간의 행위가 단순하게 자신의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논리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행위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로부터 유래하는 기억이나 사회적 관습체계, 그리고 이성적 요인으로 축소될 수 없는 감정과 같은 요인이 모두 포괄되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아비투스는 칸트로 대변되는 근대 철학의 이념형을 거부했던 사상적 맥락에 자리잡고 있다. 예를 들어 영혼과 육체의 이분법에 반대했던 스피노자, 파스칼과 같은 사상가들의 사고 속에 이미 아비투스에 대한 철학적 단초가 존재하고 있었는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부르디외는 알튀세르나 푸코와 함께 이러한 사상적 계보에 속한다. p.35

 

둘째 상징적 폭력(violence symbolique)

 

상징적폭력은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사회적 불평등은 착취의 문제로 귀결되었지만 근대 자본주의는 다른 방식의 착취를 취한다. 명예나 위신 같은 상징적 재화, 경제적 잉여에서 오는 왜곡된 배분 등과 같은 방식의 착취가 지배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것들을 상징적 폭력이라고 부른다. 이론적으로 상징적 폭력의 개념에 있어 유념할 것은 이러한 신분질서와 착취의 논리가 개인의 무의식적인 취향을 통해 발휘된다는 점이다.

 

셋째 장이론과 계급분석

 

이 책을 읽었지만 장이론과 계급분석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를 갖지 못했다. 차후에 다시 읽고 정리해야 겠다.

 

그는 뛰어난 사회학 이론가이지만 정치에도 참여하고 노동운동에도 참여한 실천적 사회학자였다. 그는 지식이란 사회를 바뀌는 도구가 된다고 주장했고 이 주장은 철학이 사회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시키는 도구가 되어야 된다는 마르크스의 말과 일맥상통하다. 이렇게 상아탑에 갇힌 학자가 아니라 이 사회의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해주고 그것으로 사회를 바꾸려는 실천적 노력은 그의 이론에 더욱 힘과 권위를 실어준다. 이 책의 저자 홍성민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는 함의는 크다고 말한다. 특히 문화 소비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부르디외의 이론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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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격

  -안도현-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서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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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2-11-09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 그 아래 쓴 것은 지우지요 ㅋㅋㅋ 간격을 여기서도 보게 되다니 ^^ 감격 ㅋㅋㅋ

불꽃나무 2012-11-09 13:58   좋아요 0 | URL
넵^^
 
위대한 한 스푼 - 365일 미각일기
제임스 설터.케이 설터 지음, 권은정, 파브리스 모아로 / 문예당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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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먹는 다는 것'을 단지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의식주의 하나로써의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인간생존의 필수조건인 '의식주'는 시대가 지날수록 그것이 하나의 문화이며 의식이 되어왔다. 그래서 입고 먹고 거주하는 것은 그것의 필수적인 기능을 넘어서 인류가 만들어온 하나의 문화가 되었고 의식주는 새로운 기능이 계속적으로 첨가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를 알려주는 기호로써의 기능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적인 이론가인 프랑스 철학자 쟝 보드리야르는 현대의 소비는 단순히 필요한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기호란 인간이 소비하는 모든 행위의 기본동기인 필요위에 그것를 넘어서 새롭게 생산된 모든 의미를 말한다.

 

예를 들어서 핸드폰을 살때는 원래 필요에 의한 기능만 있으면 된다. 그것은 상대방과 원거리에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통화의 기능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햅틱이나 이아폰을 구입하여 필요에 의한 기능을 훨씬 뛰어넘는 것을 소비하므로써 인류가 축적해온 문명을 소유하고 그러므로 자신이 현대문명에 깊이 소속되어 있다는 정체성을 갖게된다. 이것이 '기호'로써의 '소비'의 의미이다.

 

그중에 특히 '식' 즉 먹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와 계급을 표시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 뿐 만 아니라 독특한 의식으로써의 기능도 첨가되는 것이 현대사회에서 '먹는 다는 것'의 의미이다. 이것은 다른말로 하면 인간은 타자와 함께 음식을 나눔으로 인간적인 교류를 가능하게 하고 음식을 나눔으로 더이상 자신과 심리적으로 동떨어진 타자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절대로 아무나 하고 음식을 나누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은 생명을 함께 나누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그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먹는 것은 거룩한 의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는 의식을 통해서 나와 너는 남이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의 기본 개념은 '식구(食口)'이다.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이 바로 '식구(食口)' 즉 가족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먹는다는 것'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신성한 의식'이다.

 

이 책 <위대한 한 스푼>은 먹는다라는 것을 하나의 문화와 의식으로써 쓰여진 책이다. 요리책도 아니요 그렇다고 음식에 대한 문명사도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 어떤한 그림이 그려진다. 이 책을 쓴 두저자 제임스 솔터와 케이 솔터는 부부이다.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은 두 사람이 함께 부엌에서 요리를 하면서 그 음식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고 음식에 얽힌 이야기와 문학 이야기 그리고 댜양한 이야기들을 기록한 결과물이다. 간단한 음식 레시피가 적혀있긴 하지만 이것은 기술적인 요리책이 아니라 두 사람의 신성한 의식으로써의 음식만들기와 먹기를 간략하게 적은 것이다. 참 멋진 광경이다. 음식을 통해서 함께 생명을 나누는 '우리'임을 의식하고 다양한 주제로 대화하는 멋진 광경이 떠오른다. 1년 365일 그들이 나눈 '신성한 의식'으로써 '음식 만들기'와 '음식 나누기'를 엿보면 이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곱게 그리고 멋지게 나이들어 가는지 그저 부러울 따름이였다. 앞 날개 사진에 찍혀있는 그들을 보면 신성한 의식을 행한 그들이 얼마나 하나로 묶여져 있는지 단적으로 느낄 수 있다.

 

단순하게 보면 요리책도 아니고 음식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음식에 대한 소견을 주저리 주저리 나열하는 분명한 정체성없는 잡다한 책같지만 이 책은 나에게 분명하게 음식은 '신성한 의식'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나에게도 옛날부터 한가지 꿈이 있었다. 가족들과 식사를 하면서 하루의 삶을 이야기하고 토론하며 논쟁하는 신성한 의식을 만들고 싶다는 작은 꿈이였다. 식사하게 전에 촛불의식을 행하며 하루를 감사하고 서로 나누며 축복해주는 멋진 의식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한 것을 실천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식사법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 이제 조금씩 신성한 의식으로써의 식사를 실천해 봐야 겠다. 

 

"우리는 이 책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음식을 단지 생존을 위한 것 이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었으면 한다." (p. 9)

 

"태초부터 인류가 사회를 형성하게 된 원인은 다름 아닌 식량이었다. 사실 먹는 것이 섹스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그 횟수 또한 잦다. 음식과 노동의 격조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원시 인류는 시간을 정해놓지 않고 배고플 때 음식을 먹다가 차츰 일정한 시간에 먹는 방식으로 발전했으며, 더불어 먹을 때마다 가족이나 씨족이 자연스럽게 함께 모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인류가 집단을 형성하고 점차 사회로 발전되면서 도시가 생겨났으며, 이를 통솔하기 위해 정치가 시작되어쏙 식량 때문에 전쟁이 터지기도 했다." (p.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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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2-11-09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는 처음 보는 것이데요 ^^ ㅎㅎ 역시나 멋지구나 ~ ㅋ

불꽃나무 2012-11-10 23:01   좋아요 0 | URL
오래전에 써놓은 리뷰여요~ㅎㅎ 감사!
 
반 고흐 : 태양의 화가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7
파스칼 보나푸 지음, 송숙자 옮김 / 시공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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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적인 삶속에서는 대부분 스쳐가는 대상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한 대상들은 나의 시선을 비켜가고 나 또한 그러한 대상을 비켜가 진정한 본질적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일상적인 삶에서 만나지는 대상들의 대부분이다. 그러나 가끔 나의 직관을 사로잡고 시선을 머무르게 하고 찰나의 순간에 대상과의 본질적인 만남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대상들이나 인물들이 있다. 이러한 만남은 순간 본질과의 마주침으로 인해 매우 강렬하며 진한 아우라를 경험하게 한다. 대부분 이러한 대상들은 매우 모순된 인물이거나 강한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뚜렷하게 자신의 삶을 산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나의 집요한 탐구의 대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트라우마까지도 감정이입이 가능하게 했던 인물은 빈센트 반 고흐였다. 그는 매우 모순된 인물이면서 가장 뚜렷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였다. 그래서 더욱 흡입될 수 밖에 없는 인물이였다. 그는 열정적이였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늘 전혀 조화될 수 없는 극과 극을 오고갔다. 신에 대한 사랑의 열정이 그를 종교인이 되게 하였지만 그 종교적인 열정은 그를 사람에게서 단절되게 하였고, 그림에 대한 열정은 곧 자기를 파멸하는 열정으로 바뀌었다. 사랑을 갈구했지만 그가 사랑했던 여인은 창녀였고 그 사랑의 열정은 가족들에게서도 비난을 받았다.

 

사람과 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사람과 신에게서 버림받았고, 살아서는 비난과 멸시를 받았지만 죽어서는 최고의 예술가로 평가된 사람, 사랑했지만 그 사람을 떠나야 했던 모순과 히스테리와 광기로 가득찬 사람. 그렇지만 한없이 공감해주고 싶은 사람이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이다. 그를 알았을때 애정과 불쌍함과 의문과 신앙과 삶과...정말이지 풀어지지 않는 복잡한 실타래처럼 여러 가지 생각들이 얽히고 있는 것을 느꼈다. 한없이 끌리고 공감하고 싶고 또 한없이 반대하고 부정하고 싶은 묘한 모순이 더욱 그에게 애착을 가지게 하였다.

 

그를 통해 일어나는 질문들.. 그는 자신의 길에 충실하였나? 단순히 그가 자신을 잘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창조성과 종교는 늘 반대의 길에 서 있는가? 사람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가? 이어져 나오는 물음표...실타래처럼 얽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고흐를 통해서 본질적인 삶을 살아간 한 사람을 만난다. 자신의 삶을 살다간 사람을 만난다. 그의 글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강렬하고 신성하리 만큼 종교적이다. 그의 삶은 어떤 구도자보다 더 철저하게 구도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본질에 근접했고 어떤 종교적인 명제보다 더 급진적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나는 고흐를 통해서 오늘도 갈망한다. 모든 스치는 만남속에서 본질과의 마주침이 있기를, 본질에 근접한 삶을 살기를, 그리고 누구의 삶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삶을 살기를 갈망한다. 그것이 다른 어떤 기준에 의해 평가절하된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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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2-11-0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했지만 그 사람을 떠나야 했던 모순과 히스테리와 광기로 가득찬 사람. 그렇지만 한없이 공감해주고 싶은 사람이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이다.고흐를 보면서 연민해마지 않았던 부분을 너무 정확히 표현해주셨네요 ^^ 가장 마음에 드는 글귀네요 ^^ 나 자신의 삶을 사는 것.. 또 다른 김수영을 보는 기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