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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여행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이곳저곳으로 자주 유랑을 다니는 이유는 순전히 사람을 만나기 위함일 뿐, 뭔가를 보고자 함은 아니다. 에펠탑이니 자유의 여신상이니 나이아가라 폭포니, 그런 것들에 난 하등 관심이 없다.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 후미진 술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술잔을 기울이는 거다.
이랬던 내가 갑자기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꼭 유명한 건축물을 보지 않더라도 내가 가는 곳의 공기 한점, 풀 한포기를 느끼고 싶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지고 간 스케치북에다 그리고 싶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알랭 드 보통이 쓴 <여행의 기술> 때문이다. 목마른 낙타처럼 단기간에 쌓을 교양을 갈구하던 내게 홀연히 나타나 빈 머리를 꽉꽉 채워주던 멋있는 '보통'은 이번 책에서도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는 내게 고호의 위대함을 어느 미술선생보다 더 잘 가르쳐 줬고, 이름만 알던 워즈워드의 시 세계를 어느 문학선생보다 더 잘 깨닫게 해줬다. 이들 말고도 이 책에는 플로베르, 훔볼트, 러스틴 등이 등장, 나로 하여금 당장이라도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들어 준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진짜로 풀 한포기의 아름다움을 느끼러 떠나진 않을 것이다. 왜? 다음주까지 술약속이 쫙 잡혀 있으니까. 쉽게 말하면 오늘도 술, 내일도 술, 모레는 술... 이런 판국에 대체 어디를 가겠는가? 술 스케줄이 다 끝나고 가면 되지 않냐고? 나는 안다. 그때쯤 되면 <여행의 기술>을 읽은 감동이 다 사라져서, "여행은 무슨 여행? 그냥 술이나 먹자" 이럴 것임을.
책의 첫부분에서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2월의 늦은 오후에 나의 여행 벗인 M과 ...공항에 착륙했다."
그 순간부터 내 관심은 여기에 집중됐다. M이 남자일까 여자일까,에. 그게 신경쓰여 책에 몰입이 잘 안됐다. 더 읽다보니까 알게 됐다. M은 여자였다. 그 다음부터는 몰입이 잘 됐을까? 물론 아니다. 갑자기 M이 미녀라는 생각이 들고, 그러다보니까 보통이 부러워서, 몰입이 잘 안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올해 읽은 책 중 베스트로 꼽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 책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보통을 읽자. 그리고 이번 주말, 어디론가 한번 떠나보자. 나야 물론 술을 마시고 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