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하고 내 남동생이 내 방문을 노크했을 때, 나는 양 손에 각각 4kg 짜리 덤벨을 들고 스쿼트 중이었다. 헉헉 숨이차가며 들어와, 라고 말했고 남동생은 들어와서 '엽기 떡볶이 주문할 건데 무슨 맛으로 할까' 물었다. 나는 보통맛 있으면 보통맛으로 하라고 간신히 말을 끝마친 뒤, 온 김에 나 자세 좀 봐줘, 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맛폰으로 메뉴판을 보고있던 남동생은 고개를 들어 나를 잠깐동안 보았고, 그러더니 말했다. '잘하고 있어, 그대로 해' 라고. 앗싸. 내 자세가 제대로 됐을 거라는 건 사실 하면서도 알고 있었지만, 잘하고 있다는 말이 필요했다.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일을 더 잘하게 된다. 잘한다는 칭찬을 받으면 그 일을 더 잘해내고 싶어지는 거다. 그래서 학창시절에도 국어를, 영어를, 일어를 잘했다. 선생님들이 칭찬해줬고, 칭찬해주면 나 이렇게 잘한다고 보여주고 싶어 더 잘하려고 노력하고.... '못한다'고 생각하고 정말 못해서 혼났던 과목들은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국사, 세계사, 한국지리, 세계지리........씨양-



나는 영어를, 일어를, 국어를 앞으로도 내내 잘할 줄 알았다. 마스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자 나의 영어는 영어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저 교과서만 잘 했던 내가 무슨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겠는가. 대학에 가자 어학연수며 해외여행이며 어릴때 잠깐 살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애들이 툭툭 튀어나왔고, 그 애들은 교수랑 영어로 대화를 하더라..왓츠 유어 네임? 에만 답할 수 있던 나로서는 멘탈에 충격이 왔고..그래서...어차피 여기서 내가 영어 공부 해봤자 '잘한다'는 칭찬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영어에 손을 놔버렸고, 그래서 지금은 영어멍충이가 되었다...일본어는 쓸 일이 없으니 이제 히라가나를 읽을 수도 없게 되고.... 역시 사람은, 특히 나는, 칭찬해줘야 더 잘하는 그런 단순한 인간인 것 같다. 하아-





주말에 영화 [나쁜 사랑]을 보았다. 일전에 친구랑 극장에 갔다가 이 영화의 예고편을 보게됐고, 보자보자 며 호들갑을 떨다가 찾았던 것. 포스터에 쓰인 '당신은 내 심장을 멎게 해'는 좀 오글거리지만, 영화를 다 보고나면 왜 저런 카피여야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심장이 멎는 걸 알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이 영화는 진짜 .. 병맛이었다. 하아-


다 보고나서 친구에게 짜증난다고 하자 친구도 '너무 스트레스 받는다' 라고 했다. 하아- 결국 우리는 지하철 역까지 걸으며 이 영화에 대해 뒷담화를 해댔고, '다음에 좋은 영화를 봐서 이 기분을 만회하자'고 했다. 하아-


그러니까 여자는 우연히 늦은 밤 남자를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밤새 같이 걷고 이야기하고 담배 피우며 '다음에 파리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진다.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던 이들은 그러나 엇갈린 채 파리에서 만나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여자는 남자친구랑 미국으로 떠나고 남자는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남자가 결혼하게 되는 여자가 공교롭게도 여자의 친동생이다.


결혼 바로 직전에야 남자는 자신의 아내될 사람이 그녀의 여동생이란 사실을 알게되지만 번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결혼식장에서는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도저히 아내에게 집중할 수가 없다. 결혼식에 참석한 그녀는, 참석한 후에야 동생의 남편이 '그'라는 것을 알게되고, 짧은 일정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남자는 아내와 함께 아이를 낳고 행복한 일상을 산다. 정말로 행복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고 시간이 지나, 아내의 엄마 생일이 되었고, 그 생일파티에 언니가 참석한다는 걸 알게 되자 또 흔들흔들한다. 그리고 엄마의 생일에 만나게 된 그와 그녀는 눈에 불꽃이 튀고 감정을 전달하고, 정원의 으슥한 창고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언니와 동생은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언니는 지금 이 일이 몹시 괴롭다. 괴로운데 이 남자를 사랑한다. 히융-



다같이 엄마의 집에 머무르던 중, 동생과 조카와 엄마가 잠깐동안 집을 비운 사이, 남자는 이 언니가 혼자 있는 방에 문을 열고 들어온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이러면 안돼, 라며 잽싸게 자기 방에서 도망치고, 그때 마침 나갔던 가족들이 돌아온다. 이 장면이 가장 빡치는 장면이었는데, 아니, 대체 왜, 언제 가족들이 돌아올지 모르는 이곳에서 저 남자는 저렇게 그녀의 방문을 연거지? 왜 그방으로 들어간거지? 하고 자꾸 신경질이 난거다. 친구도 이 장면에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고 했다. 게다가 모두 다같이 산책가게 되었을 때는 산속에 있는 동굴에서 둘이 또 만나 또 사랑을 확인하고..



결국 미국으로 돌아갈 일정을 늦추게 된 그녀는 그와 밀월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러면서 그에게 말한다. 자신의 동생, 그러니까 그의 아내에게는 이 일을 결코 말하지 말아달라고, 동생이 알면 자기는 죽어버릴 거라고, 자기는 동생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이 자매는 몹시 사이가 좋았고 서로를 끔찍이 생각하는 사이었는데, 게다가 동생은 언니를 크게 의지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동생의 남편과 사랑하는 자신이 얼마나 야속하고 또 이 상황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이런 모든 복합적인 감정으로 그녀는 그에게 묻는다. 


왜 하필 내 동생을 선택했어요?



라고. 그런데 하아- 내가 가장 싫어하는 답변을 그가 한다.



내가 당신 동생을 선택한 게 아니에요.



야! 이런 병맛... 이건 뭐야..허세야 뭐야. 니가 선택한 게 아니라니, 니가 선택해서 결혼했잖아, 병신아. 난 이 장면에서 짜증이 폭발했다. 그래서 내가 잘하는 '대입하기'를 해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동생의 남편이 되었다. 그것이 야속하고 서운해 그에게 묻는다. 너 왜 하필이면 내 동생을 택한거야? 그런데 남자가 '내가 그녀를 선택한 게 아니야, 그녀가 나를 선택한거지' 라고 대답한다..... 야, 이 씨방새를. 있던 정이 다 떨어질 것 같다. 내 여동생과 사는 남자가, 내 여동생을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 '걔가 하자고 해서 했어' 혹은 '걔가 나를 좋아해서 그랬어' 라고 한다면...나는 내 사랑도 식을 것 같고, 내 여동생을 위해서도 화가 날것같다. 겨우 이따위 놈이랑... Orz


하아- 너무 짜증이 나는 거다.



돌아오는 길, 곰곰 생각해봤다. 나는 이런 적이 없었던가?

있었다. 왜 그를 사귀냐는 물음에 '그가 나를 좋아해서' 라고 답한 적이 물론 있었다.

게다가 이성을 잃고 가족들이 다같이 머무르는 집에서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는 남자가 짜증났다고 했지만, 나 역시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은 적이 있지 않던가. '그러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라고 뒤늦게 생각한 일이 내게도 있지 않은가. 

내가 스트레스 받고, 내가 짜증났던 영화속 상황들을, 내가 한 적도 있지 않은가. 후-



나는 내가 감성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고,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사람이란 걸 안다. 그래서 항상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이성을 끌어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잘 생각해봐, 침착해, 하고 스스로에게 정말이지 겁나게 많이 말한다. 내가 사랑에 빠져 둔하게 행동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다. 그렇다고 해도 언제나 냉정하고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뒤로 물러서 생각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때가 있었다. 아니, 많았다. 사랑에 빠져 간이고 쓸개고 내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주체적으로 사랑할 것이다...라지만 속절없이 끌려가기만 한 적도 있었다. 

영화속, 언니의 방문을 열던 남자도.... 이성이 없었던 건 아닐텐데...

그의 찌질하고 멍청한 모습들은, 전부 나였다.



그래도, 이 영화는 짜증나고 스트레스 이빠이 영화였다. 하아-








토요일에 만난 친구는 내게 꽃을 주었다. 눈 앞에서 꽃을 받다니. 아니, 이게 얼마만이야!!



기쁜 마음에 집에 가서는 꽃을 꽂았다. 마땅한 화병이 없어 생수병으로 대신했다.



이틀이 지난 오늘 아침엔, 꽃들이 더 활짝 피었더라!






어제는 문득, 우리집 저울이 고장난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3kg 이라고 쓰여진 덤벨을 저울 위에 올려놔 보았다. 그러자 정확히 3kg 라고 찍히더라. 저울은 고장나지 않았구나...



저울은 고장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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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5-04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영화보고 싶었는데~ 고민이 되기시작합니다~ㅎㅎ 처절한 사랑이 아니라 짜증나는 사랑인것 같아서 ㅎㅎ

내가 당신동생을 선택하지 않았어. 최고의 변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락방 2015-05-04 15:07   좋아요 0 | URL
저도 뭔가 처절한 사랑이라 감정이입 제대로 해서 막 안타까워하고 그럴거라 생각했는데 그다지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더라고요. 캐릭터가 어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너무 싫죠, 내가 선택한 게 아니야, 라는 변명이요. 구질구질해요 진짜. -_-

2015-05-04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4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5-05-04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나쁘네요. 안 봐야할 것 같아요. 짜증 제대로일 듯

다락방 2015-05-04 15:09   좋아요 0 | URL
저도 실제 여동생이 있고 여동생과 사이가 좋아서인지 감정이입이 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봤어요. 만약 저 둘이 `자매`가 아니라 `친구`였다면 다르게 느꼈을까? 하고요. 그래봤자 `내가 선택한 게 아니야` 에서는 어김없이 빡쳤을 것 같아요. -_-

붉은돼지 2015-05-04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좌절하지 마세요...
언젠가 한번은 고장나줄 거예요....아마도..^^;;;;

다락방 2015-05-04 15:10   좋아요 0 | URL
멀쩡한 저울에 올라가서도 씨익 웃을 수 있도록 제가 저를 어떻게 해봐야 겠지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치니 2015-05-06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를롯 갱스부르때문에 보고 싶었던 영환데, 흠. 별론가 봐요. 갱스부르가 동생이에요?

다락방 2015-05-06 10:35   좋아요 0 | URL
저도 갱스부르 때문에 보고 싶었던 거였어요. 갱스부르가 언니 입니다. ㅎㅎ 갱스부르는 진짜 쿨슄해요. 머리도 안빗는 것 같고 완전 씨쓰룩에 그냥 옷도 신경 안쓰는 느낌? 그런데 참 예쁘네요.
저는 엄청 별로였는데 치니님은 또 저랑 영화보는 게 다르시니까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어요. 치니님 보세요! 보시고 말씀 좀 해주세요!

비로그인 2015-05-06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덤벨이 3kg 가 아닐지도!?
모던클래식도 아름답네요♥.♥

다락방 2015-05-06 18:13   좋아요 0 | URL
덤벨이 고장난걸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