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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는 근본주의자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에리카는 나한테 주말에 센트럴파크로 점심 소풍을 가자고 했어요. 나는 우리가 이번에는 다른 사람 없이 간다는 걸 깨달았어요.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맹렬한 바람이 나무들을 흔들고 구름이 하늘에서 쏜살같이 달음질을 치는 뉴욕의 7월 하순, 어느 아름다운
오후였어요. 어떤 날씨를 말하는지 안다고요?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서늘하고 소금기 묻은 공기가 도시에 불어오면, 습기는
순식간에 사라지죠. 에리카는 밀짚모자를 쓰고 바구니를 들고 있었어요. 바구니에는 와인과 막 구운 빵, 얇게 자른 고기, 다양한
치즈, 포도 등이 들어 있었어요. 맛도 좋고 세련된 것들로 구색이 갖춰져 있었죠. (p.55)
그녀는 눈을 감고 팔꿈치를 대고 뒤로 기댄 채, 의심할 줄 모르는 소녀처럼 졸린 듯한 미소를 지었어요. 나는 소변이 마려워 방광이
터질 것 같았어요. 나는 곧 돌아오겠다면서 화장실로 다려갔어요. 그런데 내가 돌아오자 그녀는 곤히 잠들어 있었어요. "에리카?"
불러도 대답이 없었어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래서 망설이다가 결국 불을 껐어요. 블라인드가 올려져 있어서 맨해튼
불빛이 안으로 들어왔어요. (p.76)
이 책의 책장을
한장씩 넘기다가 나는 꼭, 반드시, 오랜 시간을 미국에서 머무르리라, 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곳은 뉴욕이어야 한다고. 어릴때부터
나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센트럴파크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과 센트럴 파크는 내가 읽는
소설속에도 등장하고 내가 듣는 노래속에도 등장했다. 나는 엠파이어 꼭대기에서 반드시 키스를 해야했고, 그곳에서 뉴욕의 야경을
바라보아야 했다. 나는 센트럴 파크의 벤치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미소로 인사하고 햄과 치즈가 푸짐하게 들어있는 샌드위치를
먹어야 했다. 가끔은 커피도 마셔야 했고 가끔은 책도 읽어야 했다, 거기에서. 이 책을 읽노라니 밤마다 내가 머무르는 곳에서
맨해튼의 불빛을 느끼고 싶어졌다. 7월 하순의 오후를 센트럴 파크에서 피크닉을 하며 보내고 싶어졌다. 뉴욕의 일상을 작가는
평범하게 그러나 지독하게도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 빽빽한 도시에서 찾아내는 이 아름다움이라니, 이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 책의 주인공은 파키스탄 사람이다. 그는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미국의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뛰어난 업무성취도를 보이며 미국 여자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런 미국에
대해 이렇듯 아름다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 거창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상속에 파고드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나는 넋을 잃고
무작정 기대하고 상상한다. 내가 마침내 도달해야 할 곳은 바로 그 곳이라는 듯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아니 그가 이런 일상을
보내놓고, 911 테러로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무너지는 걸 목격한 그는, 이런 감정을 느낀다.
다음날 저녁은 우리가 마닐라에서 보내는 마지막이어야 했어요. 나는 방에서 짐을 싸고 있었어요. 텔레비전을 켰을 때 처음에는 영화가
나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계속 보니까, 영화가 아니고 뉴스더라고요.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건물이 하나둘 무너지더군요.
그대, 나는 미소를 지었어요. 그래요, 혐오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의 첫 반응은 놀랍게도 즐거움이었어요.
(중략)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 공격의 희생자들을 생각한 게 아니에요. 텔레비전에서는 어떤 허구 인물이 죽으면 마음이 많이 움직이죠.
여러 일화를 통해 내게 친숙해진 인물이 죽으니까 그런 거죠. 그런데그 순간은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그 모든 것의 상징성에
빠져들었던 거죠. 누군가가 그렇게 가시적으로 미국의 무릎을 꿇렸다는 사실에 그랬던 거죠. (pp.66-67)
그
일이 있고난 후, 그는 공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검색을 받는다. 그가 파키스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상황을
외면하고 싶었고, 자신과는 관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전쟁에 대비하는 가족들을 맞닥뜨린다.
그에게 미국은 그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가족과 고향을 공격할 수 있는 대상이다. 아름답고 환상의 나라였던 바로 그곳이, 그에게
엄청나게 거대하고 잔인한 상징으로 닥쳐온다. 그는 그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 그는 내내 머릿속에서 자기 자신과 가족과
고향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며 일상에 방해를 받고 만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걸 보는 순간 제일 처음 느낀게 고통이 아니라니, 즐거움이라니, 아니 즐거움이라고 내뱉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소설인가. 더 놀라운 건 내가 그를 이해한다는 거다. '누군가가 그렇게 가시적으로 미국의 무릎을 꿇렸다는 사실'에 즐거움을
느꼈다는 그를 이해한다는 거다. 그 순간까지는 자신이 미국을 사랑한다고만 느꼈는데, 그 거대한 나라가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움을 느꼈다는 그 파키스탄 사람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겠다는거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라니, 이건 무슨 인문서의 제목인가 싶었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책에 이 제목 말고 무슨 제목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고 미국 회사를 다녔고 미국 여자를 사랑했지만, 미국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대신'도 될 수 없었다. 미국이 원한것도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여자가 원한것도 '그'는 아니었다,
그는 될 수 없었다.
"크리스가 보고싶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나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걸 보았어요. "그렇다면 내가 그라고 생각해 봐요." 나는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몰랐어요.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죠. 갑자기 그것이 가능한 하나의 방법 같았어요. "뭐라고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어요. 내가 다시 말했어요. "내가 그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천천히, 어둠 속에서 말없이, 우리는 했어요.
(p.95)
잠시동안 눈을 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김없이 눈을 뜨는 시간은 찾아온다. 눈을 뜨면, 거기엔 되고 싶은 내가 있는게 아니라 본연의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