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있다. 물론 정확히 아는것도 아닐테고 미처 알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것이다. 나는 알라딘에 글을 써온지 제법 오래되었으며, 댓글이 많이 달리는 알라디너이다. 즐겨찾기 수도 글쎄, 적극적 글쓰기를 하지 않는 알라디너에 비한다면 많은 편에 속할것이다. 나는 알라딘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글들을 읽고 있다. 처음 보는 낯선 닉네임의 글도, 한줄짜리도 열줄짜리도 거의 다 읽는다. 오래있었고, 많은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누가 나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고있다. 어떤이는 나를 버릇없는 인기인으로 만들고 어떤이는 나에게 권력을 가졌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내가 어떤 논쟁에 대해 글을 쓰기가 겁난다. 내가 소위 말하는 인기가 많아서, 혹은 누군가의 미움을 받고 있어서, 혹은 권력을 쥐고 있어서. 그렇다는 것을 내가 누군가로부터 듣거나 읽고 그래서 알고 있어서.
나를 처음부터 쭉 봐 온 사람이라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게 지금은 너무 강하고 커서 진정성에 의심을 받을까봐 글을 쓸 수가 없다. 나는 이럴때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변방에 있는 작은 알라디너였으면 좋겠다. 그랬다면 사람들은 거기에 어떤 껍데기를 씌우지 않고 그저 순수하게 내가 하는 말을 들어줄지 모르는데, 이제 내가 하는 말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힘' 혹은 '권력'으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나는 그런 글들을 쓰기를 포기하는 쪽을 택한다.
나는 이런 이유로 어떤 의견을 내기를 저어하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은 각자가 가진 다른 이유들로 침묵하는 경우가 종종 생길것이다. 나는 뉴스레터가 사생활을 침해하며 그것이 알라딘의 잘못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다수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의견을 드러내는 쪽은 모두 한쪽이라 그것이 마치 전체의 의견인양, 혹은 정의인양 드러나는 것이 불편하다. 서재의 메인을 장식한 그 의견들이 나는 불편하다. 알라딘에 어떤 불만을 제기하면, 마치 그 불만이 사회정의의 실현인것 처럼 보여지는 것도 불편하다. 그러나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침묵의 나선이론에 대한 글을 옮겨올 뿐이다.
침묵의 나선이론 [ the spiral of silence theory , 沈默 - 裸線理論 ]
여론형성의 사회심리학적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의 여성 커뮤니케이션학자 엘리자베스 노엘레-노이만(Noelle-Neumann, 1974)이 제시한 이론으로 침묵의 나선이론 또는 와선이론이라고도 한다. 매스 커뮤니케이션효과에 관한 소위 강효과이론(the powerful effects theories)의 하나로, 이 학설에 의하면, 인간들은 자신의 의견이 사회적으로 우세하고 지배적인 여론과 일치되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그렇지 않으면 침묵을 지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매스 미디어는 지배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전파시키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 곧 이론의 요지이다. 노엘레-노이만은 이와 같은 이론을 내세우면서 매스 커뮤니케이션 효과에 관한 논의는 다시 초기의 탄환이론과 같은 강효과이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아직 실증적으로 충분히 입증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매스 미디어가 사회적인 여론형성과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따라서 이 이론은 아직은 하나의 학설에 불과할 뿐이다. 노엘레-노이만에 의하면 여론의 개념은 크게 두가지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하나는 ‘양식있고 책임있는 시민의 판단’이란 의미로서 이성적 토론에 근거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보다 오랜 전통을 지닌 것으로 ‘따라야 할 압력’이라는 의미이다.
노엘레-노이만이 생각하는 여론은 후자의 경우이다. 이는 1744년에 여론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장 자크 루소의 개념이자, 그 이전에 로크와 흄이 생각했던 개념이기도 하다. 노엘레-노이만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외적 환경을 관찰하고 여론은 제재와 벌칙의 성격을 지닌 사회적 통제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이런 여론개념에 근거한 후, 노엘레-노이만은 사회적 환경에 대한 개인의 관찰을 통해 여론형성의 과정을 분석했다. 그녀에 의하면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원자화된 고립된 존재이며, 외부의 상황과 사회적 환경에 민감하다.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성도 홀로 남겨졌을 때 극도의 소심함과 신중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인간은 확신과 자신감을 추구하며, 그러한 확신과 자신감은 자신과 동조하는 사람의 숫자에 비례한다. 고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판단보다 더 중요하다. 그녀에 의하면 사회적 합의에 따른다는 것은 인간사회에서 공통된 삶의 조건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 자신이 고립될까 하는 영속적인 두려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의사통계적 감각’을 사용하여 어느 의견이 상승세 또는 하향세를 타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 주변의 환경을 주의깊게 관찰하게 된다. 만약에 자신의 의견이 지배적이거나 상승세에 있다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열세 내지는 하향세에 있다면 고립의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의 의견을 숨긴채 침묵에 빠져들게 된다. 전자의 경우는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반면에 후자의 의견은 실제의 숫자보다도 더욱 약해진다. 이것은 다시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게 하거나 침묵하게 함으로써 소용돌이의 과정이 일어나게 된다.
이처럼 침묵의 나선(소용돌이) 속에 여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매스 미디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인에 의한 환경의 평가라는 측면에서 여론은 두가지 원천을 갖고 있다. 하나는 매스 미디어의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환경에 대한 개인의 직접관찰이다. 노엘레-노이만에 의하면, 사람들은 개인적 영역 밖의 문제에 대해서 사실을 알기 위해 또는 의견의 기후를 알기 위해 거의 전적으로 매스 미디어에 의존한다. 오늘날 매스 미디어는 일반 대중의 지배적인 공공 정보원이다.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하여(편재성) 대중의 눈과 귀로 작용한다. 또한 오늘날의 매스 미디어는 어느 사회에서든지 독점적으로 단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고(협화성), 또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유사한 메시지를 반복하고 있다(누적성).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오늘날의 매스 미디어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다.
따라서 ‘강력한 미디어 개념에로의 복귀’를 주장한 노엘레-노이만의 이러한 관점은 사회와 개인에 대한 인식에서 과거 1930년대의 대중사회론을 연상시킨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의도했던 것은 오늘날의 사회가 그 당시의 사회와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대중사회 개념이 오늘날에 와서 진정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대 후기산업사회가 반드시 대중사회의 성격으로 이해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노엘레-노이만의 이론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