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이 있다. 사계절을 내내 안고 있었던 고민. 풀지 못하고 내내 끙끙대고 있는 속앓이. 점점 더 심해지고 힘들어지는 감정. 도무지 이걸 이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해서 나는 이제 뭔가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지난주부터 생각하고 있던 바, 그러던 차에 어제는 술을 마셨다. 소주를 마셨고 맥주를 마셨다. 

 

안주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아주 맛좋은 안주들. 부추전이 있었고 해물라면이 있었고 호박전이 있었고(오, 호박전!), 순두부찌개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유독 깍두기에 마음이 기울었다. 아주 시어버린 깍두기. 차가운 소주를 입에 털어넣고 시어버린 깍두기를 씹으면 그 조합이 정말이지 환상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이제 어느 정도 인생의 맛을 알아버린 기분이랄까. 삶의 고단함과 씁쓸함과 허무함이 나를 후려 갈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맛있는 안주들을 앞에 두고도 나는 깍두기를 한접시 더 요구했다. 소주를 마시면 캬- 소리가 절로 나온다. 여기에 깍두기까지 씹으니 젠장,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울 것 같은 기분이 되고야 만다. 빌어먹을. 

나는 내 앞에서 같이 술잔을 들고 있는 친구에게 강하게 권했다. 소주 마신 다음에 깍두기 먹어봐, 제발. 인생의 허무함이 느껴지지 않아? 느껴지지? 느껴지지? 

 

그리고 집에 가서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불러서 녹음했다. 내가 부른 곡은 총 세곡이었다. 스마트폰의 녹음 기능이 나는 어제 무척 고마웠다. 김지연의 [찬바람이 불면]을 불렀고, 에피톤 프로젝트의 [반짝반짝 빛나는]과 [오늘]을 불렀다. 녹음을 마치고 재생시켰다. 우웩. 나 왜이렇게 노래를 못불러!! 친구에게 노래 녹음해서 보내주겠다고 말해두었었는데, 아, 이래가지고 어디 전송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술을 마셔서 이따위인지도 몰라. 맨정신에 다시 불러야지. 맨정신에 다시 녹음해봐야지. 

 

그러다가 나는 책을 꺼내 읽었다. 예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였다. 레오때문에 미칠듯한 기분이 되어서, 자정이 넘긴 시간, 나는 새벽 세시를 읽다가 에미가 레오에게 쓴 부분을 낭독했다. 역시 녹음했다. 다시 재생했다. 처음부분에는 그저 책을 읽으려고 했었는데, 덤덤했었는데, 읽을수록 나는 에미가 되어서는 에미가 쉼표로 끊어준 문장은 쉬어주면서, 물음표를 붙인 문장은 억양을 올리면서, 그렇게 읽었다. 내가 읽은 부분은 이랬다. 

   
 

참, 빼먹은 게 있네요, 레오 선생. 당신은 어제 메일에 이렇게 썼어요. '우리는 서로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한말씀 드리지요. 여기서 우리가 뭘 하든, 무엇에 대해 얘기하든, 그건 사적인 영역이에요. 첫 이메일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적인 영역이 아닌 것은 없었어요. 우리가 자기 직업에 대해 쓴 적이 있나요? 우리는 자기 관심사가 무엇인지 드러낸 적도 없고 취미를 밝힌 적도 없어요. 그동안 우리가 주고받은 메일을 보면 마치 세상에 문화라는 게 없기라도 한 것 같아요. 정치 얘기를 입에 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날씨 얘기조차 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한 것, 우리로 하여금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든 것은 단 하나, 서로의 사적인 영역에 침범하는 것이었어요. 당신은 나의, 나는 당신의 사적인 영역으로 파고들었죠. 어떻게 이 이상으로 깊이 파고들 수 있겠어요. 당신은 저랑 '사적인 영역에서' 친밀해져 있음을 서서히 인정하게 될 거예요. 그것도 제가 좋아한다는 그 주제에 상응함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요.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사실 그것을 훨씬 넘어섰죠. 그럼, 이만. 에미. (pp.137-138)  

 
   

 

 

 

 

 

 

 

 

너무 못읽었고 발음도 구려서 나는 이것 역시 알콜이 들어가지 않았을 때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며칠간 '널 씹어서 뱉어준다'라는 노래만 반복해 듣다가 오늘 출근길에는, BMK 의 [꽃피는 봄이오면]을 들었다. 얼마전에 [나는 가수다]를 보다가 이 노래를 부르는 BMK 를 보았다. 사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나 가창력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노래만큼은 보석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자막으로 나오는 이 노래의 가사는 알고는 있었지만, 최고였다. 요즘 대세인 후크송과는 너무나도 차별되는 찬란하게 아름다우며 풍성한 가사였다. 노래의 처음부터 끝까지 버릴 가사가 하나도 없다.  

니가 떠난 그 후로 내 눈물은 얼 수 없나 봐 
얼어 붙고 싶어도 다시 흐르는 눈물 때문에 
널 잃은 내 슬픔에 세상이 얼어도 
날이 선 미움이 날 할 켜도 
뿌리 깊은 사랑을 이젠 때어 낼 수 없나 봐 
처음부터 넌 내 몸과 한몸 이였던 것처럼 
그 어떤 사랑조차 꿈도 못 꾸고 
이내 널 그리고 또 원하고 
난 니이름만 부르 짖는데 
다시 돌아올까 니가 내 곁으로 올까 
믿을 수가 없는데 
믿어주면 우린 너무 사랑한 
지난날처럼 사랑하게 될까 
그때의 맘과 똑같을까 
계절처럼 돌고 돌아 다시 꽃피는 봄이 오면 
기다리는 이에게 사랑 말곤 할게 없나 봐 
그 얼마나 고단한지 가늠도 못했었던 나 
왜 못 보내느냐고 
오~ 왜 우냐고 
자꾸 날 꾸짖고 날 탓하고 
또 그래도 난 널 못 잊어 
다시 돌아 올까 
니가 내 곁으로 올까 믿을 수가 없는데 
믿어주면 우린 너무 사랑한 
지난날처럼 사랑하게 될까 
그 때 그 맘과 똑같을까 
계절처럼 돌고 돌아 다시 꽃 피는 봄이 오면 
참 모질었던 삶이 었지만 
늘 황폐했던 맘이지만 
그래도 너 있어 눈 부셨어 
널 이렇게도 그리워 견딜 수가 없는 건 
나 그때의 나 그날을 내 모습이 그리워~ 
시간에게 속아 다른 누굴 허락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기대 서롤 묻고 산다고 해도 
날 기억해줘 한 순간이지만 
우리가 사랑 했다는 건 
너와 나눈 사랑은 
참 삶보다 짧지만 내추억속에 사는 사랑은 
영원할 테니깐 꼭 찰나 같다 찬란했던 
그 봄날을 

 

   

 

아, 진짜 가사가 예술ㅜㅜ 

 

커피를 마시고 있고, 이제 곧 여름도 올 것이다. 나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 처럼 여름을 기다린다.


댓글(63)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루쉰P 2011-05-21 09:35   좋아요 0 | URL
가면 총 쏩니다. 의미 없이요. 세금 낭비하는 거죠. 표적을 놓고 쏘기는 하는데 전 먼 산을 향해 쏴요. ^^
군대에서는 사회에서 쓸모 있는 것은 단 하나도 배울 수가 없어요. 살아 남아서 돌아오기만 하면 승리한 거에요. 군대는 여자사람들의 생각처럼 뭔가 다른 사람을 만들어 주는 곳은 아니에요. 지극히 더 폐인을 만드는 곳입니다. ㅋ

반드시 누군가가 있어요. 다락방님을 지켜보는 남자사람이요. 왠지 느껴져요.

비로그인 2011-05-19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민은 좀 해결하셨는지? 아님 또 풀리지 않는 고민때문에 오늘도 소주님과 함께 하시려나요?

왠지 오늘은 그러실듯 한데, 오늘은 위장님을 소주님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라도 "깍두기" 들을 피하시길. 골목 돌자마자 갑자기 깍두기님들 등장하면, 위장님 놀래요.

다락방 2011-05-20 13:00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오랜만이네요. 비 와요. 우산은 가지고 출근하셨습니까?
비 오네요. 좀전까지 멈췄다가 지금 다시 비가 오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아마 술을 마시게 될 것 같습니다. 하핫. 오늘은 깍두기 대신 육덕진걸로 먹어주겠어욧!!

Kir 2011-05-19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소주를 좋아하지 않아서 마시지 않지만 소주에 깍두기라니...
그것도 시어버린 깍두기라니요, 가슴이 울컥합니다.
BMK의 저 노래는 그녀가 아닌 다른 가수가 부르는 게 더 좋아요.
굉장히 노래 잘하는 가수인 건 알지만 들을 때마다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거든요.

그런데 가사, 정말 무서울정도로 처절하네요;

다락방 2011-05-20 12:58   좋아요 0 | URL
시어버린 깍두기에 소주는 정말 근사한 조합이에요. 말씀대로 울컥 하는데 말이죠, 그 울컥이 결코 싫지 않은 느낌이죠. 가끔 티브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이 많은 아저씨나 아주머니들이 술집이나 혹은 집 식탁에서 소주 한병과 김치 하나 꺼내놓고 술을 드시잖아요. 그때 그분들이 이날 제가 느꼈던 그 기분 때문에 그렇게 드시는 거였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리고 사실, 초라한 듯 느껴질 수 있지만 초라하지도 않아요. 물에 밥 말아서 오이지 하나 딸랑 얹어 먹는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저는 다른 가수가 부르는 건 들어보지를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BMK 가 부르는게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이 처절함은 BMK가 불러서 느껴질 수 있는 것 같거든요.

차좋아 2011-05-20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사진 보는 순간 족발집 생각이 났어요. 족발집의 순대국이요, 그 집에 막상 깍두기는 없는데 그 집 순대국이 떠오르더라고요. 저 오늘 공덕동 갈뻔한 거 알아요? 제가 오늘 할일이 많은데 순대국 먹으로 공덕동 갈뻔했다구요! ㅎㅎ

근데 BMK는 노래하는 물고기 같지 않아요? 이 느낌 아시려나~~

다락방 2011-05-20 12:56   좋아요 0 | URL
차좋아님 ㅎㅎㅎㅎㅎ
갑자기 순대국 먹으러 공덕동 갈때는 산이도 데려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졌어요. 차좋아님과 산이가 함께 사진찍으러 나가는 사진이 뇌리에 박혀있어서 그런가봐요. 살짝 긴장한 차좋아님. 같이 사진찍고 족발 먹으러 가요. 아니면 순대국. 특히나 순대국은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 같아요. 순대국을 거쳐야만 이 세상의 모진 파도에 맞서 잘 싸울 수 있을것 같아요.

BMK 의 물고기 같은 느낌...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물고기 같지는 않은데요? ㅎㅎ

무스탕 2011-05-20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소주 마실때 안주 안먹는데..
안주를 먹어야 될만큼 소주를 많이 마시질 못하기 때문에 날로 소주 한 잔이면 세상 모든 술을 즐긴듯한 느낌이지요^^

목소리는 녹음해서 들으면 안되어요. 제 목소린 특히 녹음해서 들으면 한 톤 처지고 콧소리가 종종 들어가서 후져져요.
마이크로 바로 방송타는건 괜찮다는데 왜 녹음을 해서 들으면 후져질까.. -_-a

다락방 2011-05-20 12:54   좋아요 1 | URL
네, 무스탕님. 목소리는 녹음해서 들으면 안되는게 맞는 것 같아요. 저 오늘 아침에 새벽 세시 읽은거 녹음해서 들으면서 아 구려..정말 구려.. 했거든요. 남들이 듣는 내 목소리 이지경인가? 싶은 생각도 들고. 후아- 그래도 저 다시 한번 도전해 볼거에요. 그렇지만 후져, 후져. 맞아요 후져져요. 그 말이 딱 맞는 표현이네요. 후진 목소리 ㅜㅡ

소주 좋아요, 무스탕님. 히히.

비로그인 2011-05-20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 독일어로 소리내어 읽어본 적 있어요. 다른 대목. 난 독일어의 느낌을 좋아해서, 내 목소리가 싫어도 읽게 되었죠.

다락방 2011-05-20 12:53   좋아요 1 | URL
전 이제 영어원서가 도착하면 영어로도 한번 읽어보고 싶긴 한데 발음이 영 시원찮아서 아마도 포기할 것 같아요. 이 책은 독일어로 읽는게 가장 완벽할 것 같지만, 그렇지만, 저는 이 책이 한국어로도 완벽하다고 생각해요. 꼭 레오처럼 말하는 남자가 있으니까요, 쥬드님.

2011-05-24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25 0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