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좀 당황했다. 소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배치된 듣는 자 기억하는 자 그리고 술 마시는 자’ 에피소드는 소설적이면서 매력적이다. 그런데 소설의 몸통은 180도 다르다. 솔로몬 볼코프가 엮은 증언:쇼스타코비티 회상록같은 르포르타주 형식을 취하고 있다. 줄리언 반스는 후기에서 진실과 편견과 망각 속에 집필되는 일기 식으로 보이길 원했다고 말했다.

 

작가와 역자, 많은 이들이 본 대로 쇼스타코비치는 과연 유로지비 or 유로디비(세속에서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금욕하는 수도자, 바보 성자)였을까. 줄리언 반스가 앞뒤에 배치한 듣는 자 기억하는 자 그리고 술 마시는 자는 어쩐지 쇼스타코비치를 유로지비로 보게 만든다. 쇼스타코비치는 20세에 교향곡 1번을 작곡하고 전도 유망한 음악가로 살아왔으나 한 사건으로 시대의 굴레에 꽉 잡힌다. 1936년 그의 첫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당의 의견이 실리는 <프라우다>지에서 형식주의에 치우친 전위성’,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혹평을 두 차례나 받으며 인민의 적으로 몰린다. 그즈음 문화예술계에서는 피의 숙청이 이뤄진다. 쇼스타코비치는 NKVD(내부인민위원회) 요원들이 자신을 끌고 갈 것을 대비해 정장을 하고 여행 가방을 준비해 밤마다 집 앞 엘리베이터에 서 있으며 공포에 시달린다. 스탈린에게 밉보였지만 스탈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한 예술가. 그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예술을 위한 유로지비였던 걸까, 겁 많고 걱정 많은 예술가 중 운이 좋았던 걸까. 자살을 가족들에게 알려 만류를 종용하는 소심함, 자유연애를 늘어놓았지만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결혼했고 바람이나 피우는 정도, 어머니와 아내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가장의 삶, 좋아하던 체호프나 스트라빈스키를 당이 비난하는 것에ㅡ자신의 도덕적 중립성을 남들이 알아줄 거라 예상했지만동조하는 모양새가 된 어리석은 태도. 줄리언 반스가 쇼스타코비치의 당시 사유와 신경과민에 가까운 내면 고통을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그의 외면적 삶은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으로 보일 여지가 많다. 줄리언 반스는 그래서 개인적인 정직성과 예술적인 정직성에 대한 문제를 계속 거론하는 거 같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정직의 문제를 되새기고 있었다. 개인적인 정직성, 예술적인 정직성. 정말로 그것들이 연결되어 있다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미덕을 얼마나 지녔는가. 얼마 동안이나 지니고 있을 수 있는가. 그는 친구에게 자신이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부인한다면 그들은 그가 정직성을 잃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사건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15개의 교향곡 중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교향곡 5(주제:인간성(인격)의 확립)을 완성한다. 그는 5번 교향곡을 포르티시모와 장조로 끝냈다. 그가 피아니시모에 단조로 끝냈다면 어땠을까? 이런 것에 한 생명이여러 생명이좌우될 수도 있다.”

 

 

 

Shostakovich : Symphony No. 5 in D minor Op. 47 


 

쇼스타코비치를 기회주의자로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는 권력에 아부해서 소비에트 작곡가 연합을 40년 넘게 이끈 크레니코프, 가족도 버리고 일신의 성공을 위해 망명한 스트라빈스키 같은 음악가, 공산주의 밑에서 살지 않으면서 공산주의를 내세우며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던 피카소, 저작권료를 챙기며 반동 진영을 떠나 진보 진영으로 간다 해도 물질적 보상은 마다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장 폴 사르트르와 분명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장이 바뀔 때마다 그가 아는 것은 그때가 최악의 시기였다는 것뿐이다로 시작하듯이 독재자들의 선전 도구로 이용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땅에 남아 그는 예술가로서 늘 굴욕적인 최악의 시기를 겪는다.

음악이 기분을 처지게 한다고 생각한 레닌, 자기가 음악을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안다고 여겼고 베토벤을 좋아해서 붉은 베토벤을 원했던 스탈린, 음악을 경멸한 흐루쇼프’의 시대를 지나오며 그는 당에서 보낸 개인교사에게 사상교육을 받고 스탈린의 초상화가 서재에 없는 걸 지적 당하며, 자신은 지도자에 비하면 벌레라고 자아비판을 하며, 음악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볼셰비키 이데올로기 교수인 척하고 시험 감독관 역할을 한다. 악보지도 당에서 주는 걸 받아쓰던 그가 이러한 시대의 광기와 소음 속에서 살아낸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음악우리 존재의 음악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을 고수하려 했던 믿음때문이었다고 줄리언 반스는 전한다. 그는 싸우는 이상주의자나 순교자가 되기보다 끝내 음악으로 기억하고자 한 사람 같다. 그래서 프롤로그를 다시 반복하는 에필로그는 울림이 크다. 양차 세계대전, 2월 혁명, 10월 혁명을 겪어야 했던 쇼스타코비치는 어느 기찻길에서 음란한 노래를 부르는 거지와 친구와 보드카를 담은 세 개의 잔을 맞부딪힐 때 삼화음을 듣는다. 전쟁은 끝날 테지만 공포, 부당한 죽음, 가난, 더러움은 계속될 것이다. 그 속 내용물이 만나 빚어지는 삼화음은 시대의 소음보다 더 맑게 울리며모든 이들과 모든 것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기억하려고 하는 자, 들으려고 하는 자에게 그것은 주어질 것이고, 지금 우리가 쇼스타코비치를 듣는 것은 듣는 자, 음악 역사의 지속을 말하는 증거이다.

 

  

 

 

Shostakovich : String Quartet No. 15 in E flat minor, Op. 144 (Emerson String Quartet)

​"머릿속에 들리는 마지막 울부짖음은 그의 예술뿐 아니라 그의 삶에 관한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어느 지점에서 비관주의가 적막함이 되었을까? 그의 마지막 실내악 작품은 그 질문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표도로 드루지닌에게 15번 사중주의 첫 악장은 '파리들이 허공에서 죽어 떨어지고, 청중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홀을 뜰 정도로' 연주해야 한다고 일렀다."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예술은 귀족과 후원자의 것이 아니듯, 이제는 인민과 당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인민이고, 누가 그들을 정의하는가? 그는 항상 자신의 예술이 반귀족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그가 부르주아나 코즈모폴리턴 엘리트 층을 위해 작곡을 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를 비난하는 자들이 그에게 바라듯, 교대 근무에 지쳐 마음을 달래주는 위안거리가 필요한 도네츠 광부들을 위해 작곡을 했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작곡을 했고, 누구를 위해서도 작곡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출신과 무관하게 자신이 만든 음악을 가장 잘 즐겨주는 이들을 위해서 작곡을 했다. 들을 수 있는 귀들을 위해 작곡을 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의 참된 정의는 편재하는 것이며, 예술의 거짓된 정의는 어느 한 특정 기능에 부여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떠올리는 기억들을 통제할 수 없듯이, 마음이 끊임없이 던지는 헛된 질문들도 막을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이 생에서 마지막 질문에는 어떤 답도 없다. 그게 그 질문들의 본질이다. 올림 바 음의 공장 사이렌처럼, 머릿속에서 울려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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