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명  《붉은 담장의 커브》시집에서 대상들은 모이면서 서로를 찌르고 갉아먹으며 침범하고 해체하지만 서로를 증명하는 ‘세계-내-존재‘(하이데거)임을 보여준다. 그것이 사라지는 결과일지라도.


부서진 계단


나는 계단을 오른다.
부서진 계단

내가 한 걸음 디딜 때마다
계단들은 사라진다.

두 사람이 싸우고 있다.
서로 계단을 던지며

모든 사람이 싸우고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팔을 꺾어
멀리 던져버린다.

멀리 날아간 팔이
되돌아와
계단을 오른다.

나에게로 자꾸
나는 굴러 떨어진다.

계단을 오르지만
계단은 보이지 않는다.

단두대에 앉았지만
나는 이미 머리가 없다.


서로를 반영하면서도 지우는 과정의 연속이라 이수명의 시는 탈자기화를 만들어낸다.  매일 간이 재생되어 되살아나는 프로메테우스 같은 이상한 시적 정황이 계속 펼쳐진다.


˝멀리 날아간 팔이/되돌아와 계단을 오른다˝(「부서진 계단」),

˝나는 내가 보낸 밀정을 살해했다. 또 다른 밀정을 보내서. 내가 제2, 제3의 밀정을 보냈을 때, 내가 내 밀정의 밀정이 되어 사라지기 전˝(「바다의 프리즘」),

˝길을 가면서, 그는 호도나무를 베었다. 호도나무는 눈에서 자란다. 호도나무가 두 눈을 완전히 가리기 전에, 그는 이따금 멈추어 가지들을 잘라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호도나무는 왜 돌아오는 것일까?˝(「호도나무를 베다」)

˝사과를 던지자 최초의 벽이 생긴다. 사과는 벽에 맞아 떨어진다. 벽에 맞는 순간 보이지도 않는 작은 조각들로 흩어졌다가 사과는 다시 뭉친다.//사과를 던지자 벽이 뚫린다.//푸른 사과들이 도로 양변에 늘어서 있다. 그중 하나를 집어 올리려고 몸을 숙인다. 머리 위로 내가 던진 사과가 날아간다.˝(「푸른 사과」전문)


그래서 《붉은 담장의 커브》 시집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악몽의 사전처럼 보인다.
하이데거 ‘세계-내-존재‘의 의미처럼 존재들은 주체적이지 않고 세계 속에서 끝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므로 무수한 사건과 부딪히며 비물질적이고 불확실한 상태에 지속적으로 빠진다. 안심할 수 있는 세계도 대상도 없다.

˝한순간 불빛이 그를 에워싸고 그를 파먹는다. 쥐들이 비명을 지른다//그의 머리는 불빛에 녹아서 완전히 사라진다.˝(「식당에서」)

˝나는 날마다 나타나는 낯선 사람이다.... (중략).... 호루라기를 불면서 나는 사라지는 것이다.˝(「안내」)

˝고양이에게 물려간 뒤/ 태양도 고양이를 물었다.//붉은 카펫 위에서/나는 그네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그넷줄을 잡고 있는 두 손은 손목이 끊어져 있었다.˝(「그네」)

세계 내에서의 불안으로 인해 시적 화자의 세계는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처럼 불길하면서도 매력적이다.

˝벽에서 튀어나온 못들, 못들을 피해 나는 잠잔다. 못들과 함께, 두 귀는 서 있고 손톱과 발톱은 공중에 떠 있다.˝(「」)


 

시적 화자는 불안과 의심 때문에 세계와 대상을 편집증적으로 추적하게 되는데, 이수명 시에서 사물들이 압도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파탄의 세계에서 이수명 시인이 아직도 치열하게 싸워나가고 있는 건 인간에게 꽤 긍정적인 소식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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