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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인 다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론을 지향하는 것 같은데, 이준규 시인은 이승훈 시인의 산문 정서에, 이제니 시인은 오규원 시인의 운문 정서에 더 가깝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김춘수, 이승훈, 오규원 즉 선대의 시인들은 죽은 문장을 원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이 후대 시인들은 시적 사디즘 세대? 시적 네크로필리아 세대인가. 너무 비약하지 않도록 하자. 살아있는 동안 내 인내심은 리필 가능하니까.

이준규, 이제니 시인과 연계해 함기석, 이수명 등 기타 혐의점이 보이는 시인과 비교해 볼 수도 있겠지만 전자 시인들의 공통분모가 워낙 강해서 맥락이 많이 달라진다. 미래파 시풍보다는 확실히 이쪽의 사유 개진이 더 불온한데 관심을 안 가지는군. 미래파의 확장세가 사그러드는 것을 보고 어차피 다 한때의 시류라고 생각하는가. 그대들이여, 더 치명적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기를. 이 흐름이 앞으로 얼마나 더 확산될지, 과연 이 접전에서 무엇이 살아남을지 궁금하다. 이제니 시인의 변모된 등장은 새 구원투수의 등장 같다고나 할까. 소설쪽 황정은 작가의 등장처럼 흥미로운 일이다. 눈 밝은 독자라면 이들의 공통된 화두가 '사라짐'이라는 걸 알 것이다. 그들은 언어를, 문장을 사라지게 만들고 싶어한다(더불어 나도 사라지면 더 좋고!) 내가 아는 바로는 이 실험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은 모리스 블랑쇼다.

어쨌거나 내가 논문을 쓸 생각이 아니라면 이러한 비교들도 다 무의미하다. 그들이 그러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사라지겠다는 사람의 뒤를 캐고 싶진 않다. 그 성취가 어찌 될 지 궁금하긴 하지만. 어차피 독자들도 자기 취향이 아니면 덮어버리면 끝인 세계 아닌가. 풍경화를 감상하듯, 가구를 갈아치우듯. 유홍준의 우리시 경계터답사기가 필요한지도.

에잇, 커피나 마시자. (커피를 마시다 문득), 두 시인이 함께 있는 시집이 있다면 아주 독특할 거 같다는 생각을,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츠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가 낸 「냉정과 열정 사이」같은 거 말이다. 시(詩)니까 시도(試圖)가 더욱 어울리지 않겠는가! 번역은 안 할테니 더욱 간편하다.

 

ㅡAgalma

 

 

 

   이준규「겨울」

 

  …(생략)… 담배를 피우며 세상을 바라본다. 귀신과 참새의 무게는 같다, 라고 그는 중얼거린다.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계단을 내려간다. 귀신과 남천의 무게는 같다. 귀신과 딱새의 무게는 같다. 귀신과 테니스공의 무게는 같다. 귀신의 무게는 모든 것의 무게와 같다. 그는 빵가게의 진열창을 현기증 속에서 본다. 귀신과 에그 타르트의 무게도 같다. 겨울이다. 그는 집에 있다. 그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차단된 겨울의 실내에 앉아 있다. 그는 세상을 바라본다. 노란 은행잎이 거의 다 떨어진 은행나무가 있고 그 은행나무 아래에는 …(후략)…

  

 

  이제니 「달과 부엉이」

 

  달과 부엉이는 가깝다. 기억과 종이는 가깝다. 모자와 사과는 가깝다. 꽃과 재는 가깝다. 모래와 죽음은 가깝다. 나무와 열매는 가깝다. 수풀과 슬픔은 가깝다. 눈물과 바람은 가깝다. 구름과 어둠은 가깝다.

 

  밤의 부엉이는 날아오른다

  멀어지는 달을 보는 부엉이의 눈

 

  검은색과 검은색 사이의 검은색

  한순간 소용돌이치며 타오르는 수풀

 

  …(후략)…

 

 

 

 

  이준규「겨울」

 

  …(생략)… 눈이 내린다. 눈이 내려 너의 눈꺼풀을 적신다. 차갑게. 뜨겁게. 눈이 내린다. 눈은 오지 않는다. 겨울. 너의 눈은 송어다, 라는 문장을 읽다. 겨울이다. 혼신을 다한 겨울이다. 다른 배열을 필요로 하는 계절이다. 겨울엔, 필요없는 문장을 태우고 겨울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 헐벗고 죽은 문장으로 가야 한다. 겨울이다. 어지럽게 얼어붙은 겨울이다. 새가 날면, 가지는 흔들린다. 새가 날아와 앉아도 가지는 흔들린다. 그때는, 가지 위의 새는 줄 위의 광대 같다. 겨울의 줄 위의 광대라는 이미지. 집중된 이미지가 필요했다. …(후략)…

 

 

  이제니 「가지와 앵무」

 

   가지가 있다

   가지가 하나 있다

 

   하나의 가지 뒤에 또 다른 가지 하나가

   또 다른 가지 뒤에는 앵무가 하나 온다

 

   앵무가 날아온다 날아와서 앉는다

   가지 위에 가지 위에 가지런히 가지 위에

 

   가지 위에 앵무 하나

   가지 위에 앵무 둘

 

   사라지지 않기 위해 나는 이곳에

   가지 위에 가지런히 두 발을 얹고서

 

   추위도 더위도 얼음도 눈물도

   이 가지 위에서는 모두 똑같다

 

   가지 위에 빨강 하나

   가지 위에 빨강 둘

 

   마중인지 배웅인지 모를 얼굴로

   앵무는 가지를 가지를 흔든다

 

   나는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무 뜻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가지 위에 얼굴 하나

   가지 위에 얼굴 둘

 

   누군가 손가락을 들어 나무를 가리킨다

'  무수한 가지들 위에는 무수한 앵무들이

 

 

 

 

  이준규「너」

 

  …(생략)… 너는 이제 새로운 잠으로 들어간 너를 바라보며 하나의 불안을 만들고자 하는 것인가, 너는 바람인가, 너는 흐르는 잔광인가, 너는 그림자인가, 너는 그늘인가, 너는 부드럽게 흔들리는 봄날의 이파리인가, 너는 무엇이냐, 너는 어지러운 과잉일 뿐이고, 너는 아무리 슬퍼해도 소용없는 그것일 뿐이다, 너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너는 전적으로 무용하다, 너는 무용의 쾌락을 잘 알고 있기에, 그것을 사용했을 뿐인데, 그 사용도 적절하지 못했고, 철저하지 못했다, 어디에 적절함이 있고, 어디에 철저함이 있겠는가, 다시 말해 너는 아무 형식도 없었다, 너는 너 자신에게도 겁을 내는 탁월한 겁쟁이이어서, 너는 아무런 곳으로도 가지 않았다, 네가 달아날 곳이 있느냐, 불쌍한 자여, 너의 노출엔 아무 모습이 없다, 너는 쓰는 기계일 뿐이며, 그것도 잘못된 기계일 뿐이다, 네가 낭비한 삶을 너는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느냐, 너는 진짜 실패이고, 진짜 헛발이다, 너에겐 영혼이 없다, 너는 죽음을 향해 다가갈 뿐이다, 너는 너의 잠을 엿보는가, 너는 누구인가, 그런데, 너는 누구인가, 너는 너의 이마인가, 너는 너의 비듬인가, 너는 너의 눈물인가, 너는 너의 콧물인가, 너는 너의 정액인가, 너는 너의 똥인가, 너는 흐른다, 너는 마른다, 너는 증발한다, 너는 사라진다, 너는 없어진다.

 

 

  이제니 「그곳에서 그곳으로」

 

   후회하지 않기로 하면서 후회한다. 눈 어두워 보지 못했던 것을 보면서. 다시 보면서. 나무가 있고. 거리가 있고. 벤치가 있고. 공허가 있고. 어둠이 있고. 고요가 있고. 바람이 있고. 구름이 있고. 들판이 있고. 묘비가 있고. 꽃이 있고. 시가 있고. 눈물이 있고. 네가 있고.

  …(중략)…

   이해하지 않기로 하면서 이해한다. 가지 못한 그곳으로 가면서. 그곳으로 다시 가면서. 계단이 있고. 창문이 있고. 강물이 있고. 잿빛이 있고. 희망이 있고. 한낮이 있고. 침묵이 있고. 춤이 있고. 노래가 있고. 하늘이 있고. 숲이 있고. 새가 있고. 내가 있고. 다시 네가 있고.

 

 

 

 

 

  이준규「문장과 슬픔」

 

  그는 하나의 문장을 읽는다. 그는 하나의 문장을 옮겨쓴다. 그는 하나의 새소리를 듣는다. 그는 하나의 문장을 읽는다. 그는 바퀴가 구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멈춘다. 그는 펜을 떨어뜨린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펜을 줍는다. 그는 비참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는 창밖을 본다. 숲은 매미 소리로 꽉 찬다. 그때 비가 쏟아진다. 그는 다시 책상 앞의 의자에 앉는다. 그는 하나의 둘의 셋의 넷의 새소리를 듣고 무수한 무한이라고 감각되는 무수한 무수하지는 않지만 무수한이라고 말하는 아니 그저 많은, 이라고 말해야 하는 그래야 하는 매미들의 소리를 듣는다. 매미들은 날개를 이용해 저 소리를 내는 것인가.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비교적 바른 자세로 앉아 하나의 문장을 읽는다. 그는 문장을 읽을 때마다 슬픔을 느끼는데 그것은 그 문장의 내용 때문이 아니다. 그 문장의 형식 때문이 아니다. 그 문장을 이루는 언어의 모양 때문이 아니다. 그는 문장을 읽으면 슬퍼질 뿐이다. 세상의 모든 문장은 그것이 문장일 때 슬프다. 그는 다시 하나의 문장을 읽는다. 그는 다시 하나의 문장을 베낀다. 그는 다시 해가 나오는 것을 느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것인지 어떤 하나의 문장을 쓸 것인지 망설인다. 그는 울 수 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정면을 본다. 정면에는 그가 있다. 어두운 얼굴. 치통을 앓는 소녀의 얼굴. 늙은 소녀. 갑자기.

 

 

  이제니 「나선의 감각 ㅡ 목소리의 여행

 

  이것은 흐릿한 목소리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공간 속에서 솟아오르는. 더없이 날렵한 선분들. 회오리치는 빛의 뿔. 뒤섞이며 자리를 바꾸는 문장들. 등장인물은 여럿이다. 장면은 파열한다. 거울은 어둡다. 먼지는 흩날린다. 그림자는 무모하다. 천은 부드럽다. 하늘은 흔들린다. 나무는 아름답다. 의자는 낡아간다. 의지는 단호하다. 거리는 길어진다. 상상은 끝이 없다. 시간은 저항한다. 구름은 증발한다. 기억은 모호하다. 손가락은 명료하다. 열매는 익어간다. 말은 줄어든다. 나는 이동한다. 너는 사라진다. 이것은 회전하고 이것은 끝없이 모양을 바꾼다. 공간은 확장된다. 속도는 증가한다. 너는 낡고 큰 가방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선다. 나서는 순간부터 네 자신의 죽음과 동행한다. 어둠은 짙어진다. 목소리는 가까워진다. 너는 전진한다. 너는 비약한다. 너는 비상한다. 너는 휘돌아나간다. 몇 겹의 눈동자. 몇 겹의 동심원. 몇 겹의 그림자. 몇 겹의 목소리. 무수한 겹과 겹을 통과하여. 시간과 거울과 얼음과 물음을 두 손에 쥐고. 날아갈 수 있는 한 높이높이. 나뭇가지들이 자라나듯이. 넝쿨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듯이. 끊이지 않는 노래들처럼. 뒤돌아보지 않는 마음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얼굴이 되어. 순간을 잊는 방식으로 순간을 살아가듯. 더없이 검은 말을 따라. 한없이 희미한 걸음으로. 방향 없는 방향을 향해. 기억을 버리듯 기억을 되살리며. 위로 위로 마음의 위로. 휘날리는 깃발처럼. 흔들리는 눈길처럼. 달려나가는 속도를 넘어. 사라지듯이 다만 사라지듯이. 목소리는 떠돈다. 창문은 열린다. 심장은 뛴다. 담은 허물어진다. 골목은 발견된다. 낱말은 교환된다. 일요일은 반복된다. 사물은 암시한다. 회상은 이어진다. 울음은 진동한다. 이미지는 증식한다. 회전하면서. 멀어지면서. 너는 이동한다. 나는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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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30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30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14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9-15 20:2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제니 시인과 이준규 시인은 등장했을 때부터 눈여겨 본 시인였는데, 두 사람이 ‘루‘ 동인 활동하며 이제니 시인이 이준규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초기 시와 많이 달라졌죠.
최근 문단 내 성폭력 문제로 이준규 시인이 큰 타격을 받았죠. 여성에 대한 대상화, 부정성 등 그의 시에서 느껴지지 않던 건 아니었지만 가시화되어 나타나니 좋은 소리 해주고픈 맘이 안 나요. 작가와 작품을 따로 볼 수 있는 창작 스타일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렇더라도 그의 시는 계속 읽고 있습니다. 언제 시집이 또 나올지 모르지만 나온다면 읽을 생각이고요.
현재로선 이들에 대해 글을 쓸 여유는 없습니다. 갈 길이 너무나 많고 멀어서요.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