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 21세기의 계보 프런티어21 9
조반니 아리기 지음, 강진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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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아리기는 내게 이름만 익숙한 사회학자다. 국내에 출간된 그의 저작을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 다만 신좌파 마르크스주의 학자쯤으로, 세계체제론자, <뉴레프트 리뷰>에 간혹 글이 실리곤 하는 학자로 안 것이 전부다. 모리스 돕, 폴 스위지, 로버트 브레너 등 그보다 앞선 좌파 경제사학자들의 글에도 익숙치 않은 내가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읽으면서 버거워 했던 것은 당연한 일. 이 두꺼운 책을 추천한 놈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꾸역꾸역 책장을 넘겼다. 아리기의 방법론적 시각을 보여주는 1부와 중국과 동아시아에 대한 대목인 4부에 대한 정리와 인상기다.

아리기의 관심사는 현재 펼쳐지고 있는 ‘중국의 세기’를 역사사회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19세기 초까지는 동아시아가 서구사회보다 경제적으로 더 발전해 있었다. 그가 ‘大分岐’라고 부르는 이 시기 이후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북측 세계’(서구 선진국)가 전세를 역전시켜 20세기 초까지 세계경제를 주도했다. 그리고 20세기 말에 다시 이 분기는 역전됐다. 바로 이 역전된 분기의 시기, 곧 ‘신아시아 시대’가 역사적으로 부상하게 된 연원과 매커니즘을 분석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이다. “현재 진행중인 세계 정치경제의 중심지가 북아메리카에서 동아시아로 이동하는 현상을 애덤 스미스의 경제발전론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리기의 목적이다.  

 

 

그런데, 왜 애덤 스미스가 베이징에 와 있는가. 중국의 시장경제 확산은 그 속도와 파급력 면에서 가히 “시장레닌주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아리기는 ‘디트로이트의 마르크스’와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를 대비시킨다. 마르크스의 논리는 격렬한 계급투쟁이 계속된 유럽에서 더 잘 관철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자본주의의 노자대립의 ‘전형’은 미국, 그것도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에서 였다고 말한다. <노동과 독점자본>으로 유명한 해리 브레이버만이 “몸으로 쓴” 마르크스주의 노동과정론이 출현할 수 있는 맥락도 바로 여기서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마르크스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미국 노동운동은 극히 쇠약한 지경이었지만, 브레이버만처럼 마르크스의 시각으로 볼 때 오히려 더 잘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부상은 “시장의 확대가 경제발전 정도를 견인한다”는 스미스적 시각으로 볼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는 아리기가 중국을 분석하기 위해 들이댄 이론적 프리즘인 셈이다.

동아시아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리기는 스기하라 가오루의 ‘근면혁명’이라는 독특한 설명방법을 끌어온다. 19세기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발전은 소농경제에 입각한 노동집약적인 산업화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는 가족경영을 포함한 노동집약적인 농업경제, 곧 ‘인적자본’을  통한 경제발전을 통해 세계 GDP에서 서구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의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서구가 산업혁명이라는 ‘생산의 기적’을 이루었다면, 동아시아는 노동집약적인 에너지 절약형 산업화를 통해 ‘분배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아리기가 애덤 스미스를 끌어들이는 부분이다. 그는 스미스에 대한 몇몇 이론가의 해석에 힘입어 “자기조정적인 시장의 옹호자, 노동분업의 옹호자, 경제팽창 엔진으로서의 자본주의의 옹호자”가 아니라 강한 국가의 존재를 전제한 자본을 규율하고 통제하려한 경제학자로 부각시킨다. 스미스는 “공공서비스를 하기에 충분한 세입을 국가에 공급”하기 위해 강한 국가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자본친화적이라기 보다 노동친화적이고, 기술적 분업을 통한 생산성 향상(그 유명한 핀공장의 사례)를 말하면서도 노동분업이 노동자의 지적 능력의 퇴화를 가져온다는 사실로 인하여 분업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이런 해석. <도덕감정론>에 기대어 시장자유주의자가 아니라는 지적은 들어봤지만, 나로서는 상당히 계몽적인 대목이었다. 스미스는 중국이 내부의 농경의 확대와 개선이 제조업으로, 제조업의 확대가 외국무역의 진전으로 나아간 “자연스러운 발전경로” 밟았음에 비해, 서구는 외국무역이 제조업을 도입하고, 이것이 다시 농업생산의 개량으로 나아간 정반대의 경로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부자연스러운 발전경로”라고 평가한다. 중국적 발전경로에서 농업노동자는 생산과정에 대한 주의나 판단이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서구 산업노동자보다 지적 퇴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스미스에게 중국은 “시장 기반 발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평가된다. 여기서 시장은 자본주의적 관계라기다 조금 더 포괄적인 상업적 거래를 의미한다. 유럽은 외국무역에 의존하고, 중국은 국내의 무역에 기반한 경로를 발전시켜왔는데, 스기하라가 말한 동아시아의 근면혁명은 소농경제에 기반한 노동력이기 때문에 상황에 유연한 대처능력, 예견과 방지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훗날의 유연생산이론에서 전형적으로 표출되는 노동의 형태와 유사하다. 이 대목은 노동과정에 대한 노동자의 능동적 참여를 보장하는 도요타 시스템을 연상시킨다.

중국적 발전과정은 서구의 자본주의가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의 과정을 거쳐 발전해왔다는 것과 뚜렷이 대비된다. 서구의 경우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정에서 농업노동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강제적으로 분리”되어 산업노동자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런 파괴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소농경제가 온존되면서 시장기반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마르크스적 설명이 중국에는 들어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서구의 경우는 베네치아,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경제적 주도국의 변천과정이 잘 보여주듯이 비자본주의 경제의 파괴와 식민화를 통해 이윤율의 지속적 하락에 대처하며 자본의 자기팽창을 거듭해왔던 것이다.  


중국과 서구의 또다른 차이는 국가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1500년 이래로 중국과 서구 자본주의의 분기의 원인은 서구는 자본주의와 근대국가를 발견했으나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못된 것이고, “서구와 중국의 경로의 차이는 특정 비즈니스나 국가제도의 존재가 아니라, 상이한 권력구조내의 조합 때문"이다. 그것은 서구는 자본가들의 국가의 힘을 넘어서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추구했던 반면, 중국은 국가의 자본가들을 경쟁시키고 국익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페르낭 브로델의 말 “자본주의는 오로지 국가와 동일시되거나 자본주의가 바로 국가일 때만 승리한다”는 말은 서구의 경우에나 해당한다.

스미스적 시각에서 본 이런 ‘유구한’ 맥락에서 볼 때 중국의 경제적 부상이 신자유주의적 개방에 따른 결과라는 것은 “깨져야할 신화”다. 중국과 인도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따르지 않았고, 그걸 따른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몰락했다. 중국은 외국자본에 모든 것을 내주지 않고 자신의 룰과 관습을 고집하는 “자국중심적 국민경제의 장점을 결합”하여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이뤘다. 국가의 역할은 마르크스의 “부르주아의 용무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그친 것이 아니라, 모든 자본 사이의 경쟁을 유도하고 개혁 역시 사유화가 아니라 국가독점과 장벽 제거를 위한 경쟁 강화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중국에서의 자본가는 마르크스의 자본가가 아니라 국익에 복무하는 스미스적 자본가다.

강탈없는 축적과정.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지역의 토착기업인 향진기업(鄕鎭企業)이었는데, 이는 농촌의 잉여인구를 흡수하고 시장진입에 다른 경쟁압력을 완화하고, 농민에게 수입을 보장하여 농민의 조세부담을 완화하고, 이윤과 임대수입을 지방정부에 재투자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경제적 인프라로 작용했다. 노동자에 대한 “강탈없는 축적”을 설명하는 대목은 주목을 요한다. 윈펑의 자동차 공장에는 로봇이 한대도 없는데, 여기서 만드는 수제 호화 지프는 8만~15만 달러에 팔린다. 자동화를 통해 노동자를 감축하지 않고도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것. 아리기는 “중국의 경쟁우위는 노동자 임금이 싸다는 게 아니라 관리자 임금이 미국보다 35% 싸다는 것”에서 찾는다. 자본을 절약하고 노동에 더 많은 역할을 다시 맡김으로써 중국의 공장들은 오히려 미국보다 더 (실제적으로) 높은 생산성을 유지한다.

아리기는 중국의 경제성장이 새로운 자본가 계급을 만들어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한다. 중국의 사회주의 전통은 국가개혁에 대한 내부 억지력으로, 국가의 부패나 불평등한 시장화에 대한 항의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덩사오핑의 경제개혁은 당과 관료들에게는 문화혁명으로 약화된 힘과 특권을 새롭게 부여했으며, 중국인민들에게는 중국 혁명의 성과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공공자산의 전유, 국가기금의 횡령 등 강탈에 의한 축적이 거대한 부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같은 문제들은 경제적 성공이 낳은 모순들, 예컨대 당-국가와 중국의 서발턴 사이의 전통적인 마오주의적 관계(양방향 사회주의)가 당-국가와 신흥 부르주아지로 대체되는 방식의 문제를 낳았다. 현재로서는 “중국에는 노동운동이 없다”는 전통적 상식은 전복되고 있다.

후진타오는 농촌경제 중시와 균형발전 전략이라는 진로 변경을 꾀하고 있는데, 이는 1장에서 말하는 후진타오의 마르크스주의 재해석과도 일맥상통한다. 농업중심 전략은 마오주의적 전통의 재해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득불평등의 확대에 따른 대중의 불만이 혁명전통을 침식할 우려에 대한 공식적 대응전략이기도 하다. 이미 중국 경제는 마오시대의 사회적 성과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것의 핵심은 농업생산 혁명과 교육의 보급, 기초복지의 확대다. 요컨대, 덩사오핑의 경제개혁의 사회적 토대는 마오시대에 이미 갖춰졌다는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아리기는 중국의 부상은 워싱턴 컨센서스를 대체하는 베이징 컨센서스의 등장이고, 이것의 핵심은 다자주의(multilateralism)와 지방화(localization)라고 규정한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과거의 제3세계 비동맹 회의인 ‘반둥’의 부활인 ‘새로운 반둥 모델’이 될 수 있다. 미국의 대중전략은 제임스 핑커턴의 제3자전략 ; 1차 대전처럼 유럽국가들끼리 싸우도록 놔두고 자금과 군수품을 공급, 헨리 키신저의 ‘끌어들이기 전략 ; 중국을 미국 중심 세계질서로 편입, 로버트 카플란 ; 중국을 군사적으로 봉쇄, 등의 대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마땅치 않다.

1997~98년 경제위기는 세계경제질서의 중심이 미국 패권이 관철되는 IMF에서 중국으로 옮겨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중국은 미국을 대체할 새로운 아시아 원조국가가 됐다. 흥미로운 표현 : “중국은 북쪽 경쟁자들과 비교하여 정치적 단서는 더 적게 붙이고, 비싼 상담료도 없으면서 더 많은 차관을 남측국가들에게 제공하고 비용은 북측의 절반밖에 안드는 벽지의 대규모 복합 인프라 프로젝트를 제공하여 남측국가들이 보다 더 여유로운 조건으로 천연자원을 개발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인도와 중국의 거대인구를 고려할 때 휴대폰의 새로운 표준은 그곳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고, MS의 대체물 역시 중국제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국가의 부상을 설명하면서 아리기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낙관적이다. 중국과 인도의 지배집단이 자국 뿐 아니라 세계 전체를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 따라 생겨난 생태적 황폐화에서 해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적 발전경로가 동아시아적 경로로 수렴되지 않는다면, 근대화의 혜택을 세계 인구 대다수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중국과 인도는 서구의 길이 아니라 강탈 없는 축적과 농업기반의 자국중심의 경제발전 전략, 내식대로 말하자면, 내포적 발전전략을 통해 경제적으로 세계에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간디의 말 : “만약 3억명이나 되는 한 나라 전체가 비슷한 경제적 착취에 몰두한다면 세계를 메뚜기떼처럼 초토화할 것이다.” 중국과 인도의 인구가 4분의 1이라도 미국과 같은 생산 소비 방식을 취한다면 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질식사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결론 : “만약 이 방향전환이 중국의 자국중심적 시장기반 발전, 강탈없는 축적, 비인적 자원보다 인적자원을 동원하고, 대중의 참여를 통해 정책을 만들어가는 정부 등과 같은 중국의 전통을 부활시키고 공고히 하는데 성공한다면, 중국은 문화적 차이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문명연방을 출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지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방향전환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중국은 아마도 사회적, 정치적 대혼란의 새로운 진원지로 변모하여, 흔들리는 세계 지배를 확립하려는 북측(서구 선진국)의 시도를 촉진할 것이다. 혹은 조지프 슘페터의 말을 다시 빌리면, 냉전 세계 질서의 청산에 수반하여 나타난 폭력의 격화라는 공포(혹은 영광) 속에서 인류가 불타버리는 것에 일조하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아리기의 논지. 두가지만 덧붙이고 싶다. 하나는 그는 자주 중국=동아시아로 혼동하고 있는데, 중국은 동아시아의 일원이지만 곧 동아시아 전체를 전형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중국적 경제발전 과정은 일본과 한국과도 대단히 상이하며 일치보다는 불일치의 경험이 많지 않나하는 것이다. 복수의 동아시아적 경로가 존재한다는 것. 이는 해제에서 역자도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다.

또 하나는 미국보다는 중국이 더 세계사적으로 볼 때, 긍정적으로 기여해왔고,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이다. 미국의 포식성과 중국의 포식성 중 어느 것이 더 잔혹스러울 것인가. 제국주의 미국과 제국주의 중국은 어느 것이 더 긍정적일까? 미국은 자신의 가치와 질서를 타자에게 강요하고 심어 왔지만, 중국 역시 과거 제국경영의 과정에서 그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 티벳과 신장위구르를 보라.

어쨌든 방대한 두께만큼이나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대해, 나로서는, 새롭고 신선한 설명이었다. 아리기의 중국에 대한 상대적 애정(?)은 중국이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도 역시 사회주의라는 국가적 틀을 유지하고 있다는데서 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도 있다. 마르크스를 부실하게 관리했던 구소련이나 국가적 실천이라는 경험이 부재한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전통 속에서 중국은 이들 좌파들에게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아니었을 런지. 동양을 ‘발견한’ 이들 서구 좌파 마르크시스트(캘리포니아 학파?) 중 한 사람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책 제목이 <리오리엔트>라는 것이 눈에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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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머나먼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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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는 늙었다. 60이 가까운 나이라니, “참 우습다/내가 57세라니/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소녀처럼 포르르 포르르 할 수 있는데”라고 말해봤자 허사다. 육신의 나이는 늙어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절망과 황폐와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누구의 집에서였던가. 내 20대의 한 때, 취한 눈으로 그녀의 시를 더듬거리며, 투박한 음성으로 술벗들과 더불어 주절주절 낭송하던 그녀의 시는 “이사 가고” 없다. 11년 만에 새로 나왔다는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은 그래서 예전의 그녀에 비해 “담담하게, 밍밍하게” 고여 있다.

교보 신간시집 서가에서 그녀의 시집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아파 어딘가에서 요양을 한다고 했던가, 정신병에 걸렸다던가, 가끔 번역서를 내기도 했던 것 같은데, 여전히 칙칙하고 어두울까. 1쇄 발행일자는 1월 11일, 내가 산 것은 1월 18일자로 나온 3쇄. 일주일 만에 3쇄를 찍었으니, 최승자 시를 찾는 자들이 여전하다는 것이고, 또 그들 역시 그녀의 “잿빛으로 삭은” 세계를 그리워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경이와 숭고, 분노가 사라진(가고 있는) 시대에 오로지 퇴행밖에 남은 게 없지 않겠는가. 이명박 시대에 “이 시대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최승자 독자들은 퇴행 증후군을 심하게 앓고 있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나역시 그런 퇴행의 일원, 구체적 공간으로 말하자면, 숙대 앞 청파동이다. 그곳은 오로지 그녀의 시로만 기억되는 곳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눈 덮인 꿈을 떠돌던/몇 세기 전의 겨울”(청파동을 기억하는가)이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 곳을 허술한 공복과 희미한 취기로 새겨진 신촌의 기억을 포개곤 했다. 그런데 새 시집에서 최승자는 “내 시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라며 “오랫동안 내 시 밭은 황폐했었다/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포오란 집으로 이사가고 싶다”고 한다. 그녀의 이사는 별로 반갑지 않다. 이젠 늙고 병들어 지친 시인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포오란’의 질감은 풍요와 넉넉함, 부드러움과 넓은 긍정이다. 예각이 사라진 최승자? 이번 시집이 재미없는 이유다. 그 빈 자리에 그녀는 노자와 장자, 승무와 탈춤, 시간의 영속성과 불변성, 집단무의식과 융, 흐르지 않는 강, 빈 하늘, 사막의 이미지를 쌓아 놓고 있다. 그 풍경은 아득히 멀어서 쓸쓸하다. 언젠가 보았던 키아로스타미의 사진들과 닮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아팠기 때문일 것이며, 그만큼 격절과 외로움에 시달렸을 것. “그동안 늘 40대”로 알고 살았던 그녀의 자기확인은 그런데, “깊고 고요하다” “내가 닫아버렸던 고통의 문”이 열렸지만, “가만히 스쳐만 가시라”고 바라기 때문. 병실 창가쯤에서 담배를 빨며 “하얀 낮달/푸른 붕새/멀고 먼 길/가다 가다 지치는 하늘//푸른 붕새 몇 점 띄워놓고 /다리 절룩이며 가는 하늘”을 바라보는 일. 그 풍경, 쓸쓸하다.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 쓸쓸해서 머나먼

아득히 먼 사막 위를 홀로 걷는 낙타. 시간은 바람처럼 알 수 없는 곳에서 불어오고,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 버리는 곳. 그걸 가만히 지켜보면서 “하늘 그 너머”를 몽상하는 그녀. 한때 여전사였다가 이젠 늙어 초원부족의 무녀가 된 늙은 인디언 주술사처럼.   

 

 

 

누구나 별 아래서 잠든다
길을 묻다 지쳐서
길 위에서 잠든다  

 

누구나 별 아래서 잠든다
죽음을 죽음으로 일깨우면서

 

그리하여 별빛 아래
홀로 가는 낙타 하나  


별 아래 잠도 없이
홀로 가는 낙타 하나. 
 - 홀로가는 낙타  

 

중앙일보에 실린 그녀의 인터뷰 사진은 말기 암 환자의 그것처럼 깡마르고 강팔라 보였다. 온몸의 독소와 함께 진기까지도 빠져나간 그녀의 얼굴은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늙음 탓만은 아니리라. 최승자의 광기를 이젠 다시 읽을 수 없으니, 그녀가 드디어 자신의 계보를 이을 시인을 발견했다니, 그 후예인 진은영이나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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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시인, 1년 만에 새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시인 최승자(58)씨를 20일 경북 포항의 한 대형 할인매장 카페에서 만났다. 최씨는 1990년대 말부터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 지난해 말부터는 병원 입원치료를 받아왔다. 최근 11년 만에 출간한 자신의 여섯 번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의 막판 교정 작업도 병상에서 이뤄졌다. 최씨는 인터뷰 요청에 선뜻 응했다. 만나 보니 건강해 보였다. “나, 비정상 아니다”라며, 문학세계의 변모와 근황 등을 열정적으로 얘기했다. “10여 년을 완전한 사막, 불모의 세월로 보냈으나 다시 문학으로 돌아왔다”며 “시는 물론 소설도 써보고 싶다”고 했다. 최씨는 인터뷰 덕분에 3박4일 ‘외박’ 허가를 받은 참이었다.

1980년대는 ‘시의 시대’였다. 최씨는 그 중심에 있었다. 당시 시단은 비명처럼 내질러지는 특유의 기동력으로 억압적인 현실, 시대와 불화하는 분열된 자아 등을 증언했다. 황지우·이성복·김혜순·장정일·박노해·백무산 등이 쏟아져 나왔다.

스스로를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일찌기 나는’)으로 표현하는 극단적인 자기모멸, 떠나간 애인에게 육두문자를 날리는(‘Y를 위하여’) 파격 등 최씨의 시 풍경은 강렬했다. “이전 계보를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여성시”라는 평을 받았다. 새 시집 얘기를 꺼냈다.

-시풍이 크게 변했다. 노자·장자는 물론 길가메시 같은 근동 설화, 융의 집단무의식도 나온다.
“1993년 『내 무덤, 푸르고』 낼 때 ‘너무 같은 얘기 반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영양학·식이요법 등에서 시작한 지적 호기심이 사상의학, 음양오행 관련 서적, 점성술 등 신비주의로 옮아갔다. 너무 심취하다 보니 정신분열증이 왔다. 신비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원리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이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은 무언가에 대한. 하지만 답을 얻지 못한 채 탈진했다. 병원 신세를 지면서는 철학책을 읽었다. 문명비판적인 시각이 생겼다. 문명은 오랜 시간 축적됐다는 점에서 과거에 붙들려 있다. 이번 시집의 핵심은 과거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초시간성’이란 말로 요약되는데, 그 경지에서 신비주의와 만난다.”

-일주일 남짓 만에 3000부가 팔렸다. 30대 후반, 40대 독자도 많다고 한다. 강렬함을 원한 독자들이 실망할 수도 있겠다.
“고민스럽지만 어쩌겠나. 쓸 수 있는 걸 쓸 뿐이다. 시는 계속 쓸 것 같다. 안 하면 병에 다시 걸릴 테니까.”

-옛날 얘기 좀 하고 싶다. 80년대, 극도로 강렬했고 비관적이었는데.
“세계문학을 열심히 읽다 문학성 높은 작품에 감염돼 비관주의자가 됐다. 안에서 부글부글 끓던 게 억압적 현실에 눌려 있다가 박정희 사망이라는 사건을 통해 밖으로 터져 나온 것 같다. 강은교·이성복 등 당시 문단의 해체적인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을 테고.”

-절반의 설명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여성 시인이 모두 당신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개성인가 보다. 나는 뭉친 게 한 번에 팍, 시로 터져 나온다. 프로페셔널이 아닌 프리랜서적 시인이랄까. 바깥과 의사소통이 없어 더 그랬을 수 있다.”

-건강은 어떤가.
“괜찮다. 혼자 있으면 먹지 않아 병원에 가는 거다. 병원에서는 밥 잘 먹고 약도 잘 먹는다.”

-계획은.
“이상하고 신기하고 아름답고 슬픈 중편소설 하나 쓰려고 한다. 노자 『도덕경』에 대한 장시도 쓰고 싶다.”

포항=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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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보 2010-02-2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의 이사가 반갑지 않다는 건 퇴폐적 '환멸주의자'가 특유의 뽐 없이 흘린 말인 듯 오히려 절절하구만요. 연이어 유통기한을 훌쩍넘겨 바랄 것이 남지 않은 퇴물로 폐기처분을 선언하는 데까지 구태여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심보는 그래서 더욱 고약스럽습니다. 이제 "늙어 초원부족의 무녀가 된 늙은 인디언 주술사" - 충분히 멋지구만. 덕분에 안 읽고도 그 시집 풍경 주루룩 펼쳐집니다. 일간 서점에 들러 다시 진경을 구경하고 싶군요. 반가운 소개, 진진한 평에 감사를-.
 
벨벳 애무하기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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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 애무하기’(tipping the velvet)는 여성 성기를 쓰다듬는 레즈비언들의 은어. 사라 워터스의 이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 한 여성 레즈비언의 人生流轉이다. 아니 빅토리아 시대라는 왕조적 배경보다는 차라리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쓰여진 시대(1867, 1885, 1894)라 하는 것이 더 합당할 듯 하다. 19세기 말 세계를 주름잡던 ‘대영제국’의 빈곤과 계급갈등을 배경으로, 섹슈얼리티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어떻게 사회주의에 이르는가를 한 여성의 곡절 많은 인생에 담아낸다.   


줄거리 : 굴 원산지로 유명한 윗스터블 출신 낸시 애쉴리는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남장 여성 키티 버틀러를 사랑한다. 여기까지는 10대 후반 사춘기 소녀들이 흔히 보여주는 레즈비언 취향과 유사. 그녀는 키티와 함께 런던에서 지내면서 스스로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하며 ‘커밍아웃’ 하게 되고 그녀와 더불어 진한 성적 탐닉에 빠져들게 된다. 키티가 양성애자라는 것을 알고 파국에 이른 뒤, 거리에서 여성의 몸으로 남성을 연기하며 남창 생활을 하다가 레즈비언 귀족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다. 이후 사회주의자여성과 사랑을 하게 되고, 당대 영국사회에 대한 계급적 각성에 이르게 된다. 이 각성과정은 이와 유사한 계급적 자각의 과정이 전형적으로 그렇듯이 ‘확신에 찬 대중연설’로 절정에 이르고, 헐리웃 엔딩처럼 연인과의 결합과 화해의 키스로 마감한다.

이 소설의 레즈비어니즘은 페미니즘, 그리고 더 두드러지게는 사회주의와 행복하게 결합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 : “그리고 이게 (레즈비언 섹스가) 정말 사회주의 혁명에 기여를 할까요?” 엉덩이를 움직이며 내가 말했다. “오 그럼요!”, 나는 꿈틀거리며 좀더 아랫부분으로 내려갔다. “그럼 이런 것도요?” “오 분명해요” 나는 시트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오” “맙소사” 내가 말했다. “몇 년째 사회주의자들의 음모에 가담하고 있으면서 전 지금까지 그걸 모르고 있었어요.” 그러므로, “벨벳 애무하기”는 레즈비언 섹스에 대한 노골적 비유이면서 혁명의 과정이자 여성적 연대의 구체적 현현(epiphany)이다. 가히 ‘섹스는 혁명이다’라는 68혁명적 사고의 재현.

내 기억에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존재론적 전이과정은 매우 전투적이고 엄숙주의적이었다. 세계를 구원하는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주체적 각성 과정에 어찌 섹스 따위가 끼어들 수 있었으랴. (가령, 김정환의 ‘기차’라는 비유가 보여주는 엄숙주의!) 이 소설은 섹스의 은밀한 쾌락과 사회주의 혁명의 열정적 의지를 뒤섞어 부드러운 쾌락의 순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소설을 읽는 과정이 ‘불편’하지 않았던 까닭도 이런 '마사지'에 있었을 것. 레즈비언을 소재로 했다는 점도 마찬가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전형적인 남성서사이기 때문이다. 상류층 레즈비언들의 ‘할렘’에서 보이는 ‘폭력적 레즈비언 섹스’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섹스와 사뭇 대조적인데, 이는 그 섹스가 ‘남성적 섹스’의 변형(딜도)인 까닭이다.

Eleanor Marx, the youngest daughter of Marx
19세기 말의 런던은 확실히 새로운 욕망과 정치가 들끓던 혁명과 열망의 공간. 여주인공과 그녀의 여성 애인을 런던에 데려간 매니저는 런던을 ‘다양성’이 충만한 곳이라 자랑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이 레즈비언 소설이자 성적 정체성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셈인데, 과연 소설속의 런던은 귀족과 노동자, 레즈비언과 게이, 도시빈민과 화려한 부르주아의 삶이 공존한다. 주인공은 런던의 상류층과 하류층을 수직으로 오가며 ‘몸으로’ 런던의 삶을 살아낸다. 당대 영국의 비판적 지식인들도 역사적 삽화로서 등장한다. 엘레노어 마르크스를 비롯해 시드니 웹과 같은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 월터 휘트먼과 같은 시인 등 익숙한 이름도 여럿이다.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읽으면 열광할 만한 대목들. 여성적 정체성, 성의 정치학 : 지배와 복종, 젠더와 계급, sisterhood, 여성적 주체의 ‘말하기’ 등. 특히, 주인공 낸시가 성적 정체성을 경유하여 계급적 각성에 이르면서 “자신의 언어”을 찾게 되는 대목은 여성-레즈비언이라는 ‘하위주체’의 자각과 주체화(말하기)의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변화의 과정은 다소 감상적인 문체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시퀀스의 이음매가 꽤나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요컨대, 공학적으로 잘만들어진 소설인 셈.

해설에 따르면, 저자 사라 워터스는 레즈비언과 게이 역사 소설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 소설을 처녀작으로 <끌림affinity>, <핑거스미스fingersmith>등의 작품을 썼다. 미루어 짐작컨대, 그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세기를 사랑했으며, 레즈비언까지는 아니더라도 페미니스트임에는 분명하다. 인생유전에 집착하는 걸 보니 19세기 소설에도 탐닉했으리라.

떠오르는 잡상들 : 나는 왜 게이보다 레즈비언이 좋을까 : 내가 생물학적으로나 성적으로나 ‘남자’이기 때문? 영국의 사회민주연맹(SDF)에 대한 궁금증 : 윌리엄 모리스와 엘레노어 마르크스의 동시참여?  디아길레프와 니진스키 : 공연예술과 동성애의 친화성, 몸에 대한 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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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 - 고종석의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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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꾸역꾸역 고종석의 책을 읽어왔다. 그가 처음 낸 <기자들>부터 이 <여자들>까지. 그중에는 실망스러운 글도 있었고(가령, 코드훔치기, 이건 지나치게 신문연재용이라는 티를 낸다), 나를 매혹시켰던 것도 있다. 그의 가장 좋은 글들은 ‘언어’를 제나름으로 해석하는 데 있다. 그의 호사취미와 인문적 배경, 무엇보다도 ‘언어’에 대한 관심 탓이리라.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이 바로 그것. 나는 그것을 후다닥 탐독하고는 술자리 어디선가, 잃어버렸다. 그때 잃어버린 고종석의 ‘사랑의 말’들은 술집 어느 구석에서 알콜을 뒤집어 쓰다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가버렸을 터.  

 

고종석이 편애해 마지않는 여자들의 목록은 예상을 별로 벗어나지 않는다. 여자들은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자가 포용하는 범위 내에 있다.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한국적 의미가 아닌 보편적 의미의 그것이고, 동시에 진보적 사유의 ‘안쪽’에 있다. 오른쪽으로는 복거일과 김현으로부터 왼쪽으로는 심상정과 로자 룩셈부르크에 이르지만, 오른편에 위치한 사람보다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 나는 그의 자유주의가 맘에 들고 마음 편하지만, 노무현과 김대중을 향할 때 표나게 보이는 냉소적 비판은 불편하다. 그럴 때 그의 자유주의는 돌연 진보적이 되는데, 그가 신자유주의를 혐오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억압과 착취를 혐오하는 ‘호모사피엔스’여서이기도 하다. 

 

그는 마더 테레사에 대해 쓰면서 스탕달의 “나는 민중을 사랑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사는 일은 내게 영원한 고문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그의 사유가 가진 정치적, 사회적 위상이기도 하다. 그는 인문적 사유를 사랑하는 지식인의 자리에 서 있다. 그 ‘거리감각’이 그의 글을 편안하게 만든다. 김철이 말했듯이 그는 우파보다 더 우파같고, 좌파보다 더 좌파같은 유연함과 활달함을 보여준다.   

 

 

스탕달에 공감하는 그에게 편애하는 여자의 상당수가 ‘좌파’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첫머리의 로자부터, 라 파시오나리아, 아룬다티 로이, 콜론타이, 마리 블롱도, 로자 파크스, 죠피 숄, 클라라 체트킨, 시몬느 베이유까지. 물론 이중 로이나 베이유처럼 좌우로 구분하기에는 애매한 인물도 있다. 동시에, 열정과 격정, 성적 욕망과 팜프파탈적 기질을 가진 여자에 대한 매혹도 한자리를 차지한다. 이화, 프랑수아즈 지루, 갈라, 사포, 니콜 게랭, 오리아나 팔라치 등. 하지만 고종석은 레니 리펜슈탈이나 마거릿 대처같은 우파적 열정은 사랑하지 않는다.  새된 목소리의 좌파 선동가부터 격정적인 욕망과 섹스의 화신까지,  남자의 욕망은 여자의 열정앞에 언제나 맥없이 무릎을 꿇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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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1-0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드디어 쓰기 시작했구랴. 근데 너무 한꺼번에 확 올린 거 아니우?
글 올리는 텀이 일정해야 손님들이 많이 찾습디다
그만큼 부지런히 쓰겠다는 각오로 봐도 되는 거죠?
어쨌든 축하하며 새해에는 더욱 건필하시길!

참, http://sheshe.tistory.com 이라고 들어가 보세요
글 좋습니다

트레바리 2011-07-2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게 고종석 선생은 <국어의 풍경들> <감염된 언어> <언문세설>의 고종석 선생입니다. 어떤 국어학자나 언어학자도 닮게 쓰기 어려운 명쾌하고 재밌는 언어사랑의 글들이라고 생각해서요..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에서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를 아주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나네요. 두 연인의 서한집 원문이 어떤 언어로 돼있는지 몰라도 선생이 새로 번역해주신다면 더 좋겠다 싶기도 하더군요.. 이번에 읽어본 <여자들>에서는 '최진실' 편을 가장 인상깊게 읽고 공감했습니다. 딴 여자들은 대개 잘 모르는 님들이라서 더 그랬지만(^^;), 한 편의 절실한 '제망매가'를 읽은 기분이더군요. <제망매>에서 망매 '지원'의 이미지도 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암튼 본인의 누이 콤플렉스를 직접 고백한 양반이기도 하니, 책 제목을 차라리 <누이들>로 하지 그랬나 싶기도 합니다..^^

모든사이 2011-07-25 09:54   좋아요 0 | URL
누이컴플렉스는 아마, 김현이 고은의 초기 시를 비평하면서 나온 말인 것으로 기억나는 데요. 님 지적대로, 고종석의 경우에는 그것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고종석에게 '여자'는 성적 대상이라기 보다, 친밀함의 대상에 가깝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성적 매력으로도 열려 있지만,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않는, 말하자면 프렌치 키스로 가기 직전의 키스 같다고나 할까요..

트레바리 2011-07-25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게 표현하시니 <제망매>의 키스씬이 바로 그랬던 것 같네요..^^ 여사촌이 '아이스크림맛'이 난다고 그러던.. 다시 생각해 보니 '누이컴플렉스'는 고선생 본인이 직접 말한건 아니고, 말씀하신 김현 선생을 인유해서 누군가 그렇게 표현했던 듯 하네요..(선생이 여러 누이들 사이에서 자랐고, '제망매가'를 좋아하면서 '누이'가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고, 또 누이같다는 연예인 허영란씨 팬인 것 등을 종합해서요..) 암튼 '누이'에게서 일종의 '久遠의 女像'을 보는건 미당이나 고은이나 고선생이나 비슷하군요..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조선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김태완 엮음 / 소나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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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임금인 광해군이 초시와 복시를 거쳐 올라온 서른세명의 과거 합격자에게 "지금 당장 시급하게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 질문은 왕 앞에서 치르는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 국왕이 몸소 출제한 '책문'이다. 서른 여섯살의 임숙영은 답안지격인 '대책'에서 "임금의 잘못이 곧 국가의 병"이라 일갈하며 왕에게 자만을 경계하고 겸양의 도리를 배우라고 증언한다. 그의 대책문을 읽고 진노한 광해군은 합격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영의정 이덕형과 좌의정 이항복이 부당하다며 간언하자 결국 명을 철회하고 만다.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라는 부제가 붙은 '책문'은 조선시대 왕과 신하의 문답을 담은 흥미로운 책이다. 왕이 과거에 합격한 신진 기예들에게 국가 경영의 방도를 묻고 초야에서 학문을 연마한 응시자들은 유교 경전과 역사적 사례를 들어 나름의 논리를 전개한다. 이 책은 왕이 출제했던 13개의 대표적인 책문과 함께 그 책문에 응답한 가장 뛰어난 대책을 함께 싣고 있다. 엮은이는 "책문은 젊고 싱싱한 넋을 가진 지식인이 시대의 부름에 대답하는 주체적 결단의 절규"라고 말한다. 국개 정치에서 실정을 거듭했던 광해군에게 임숙영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주장을 편 것이다.

책에 수록된 책문과 대책은 당대에 대한 절절한 시대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정벌이냐 화친이냐"는 책문을 내놓고, 박광전은 이에 "정벌은 힘, 화친은 형세에 달려 있다"고 대답한다.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세종의 물음에 성삼문과 신숙주, 이석형은 각기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술의 폐해를 논하라"는 중종의 책문 역시 당대의 술문화에 지극히 문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모든 책문이 심각한 것은 아니다. 광해군이 내놓은 "점차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다소 감상적인 책문에 대해 이명한은 "우리네 인생도 끝이 있어 늙으면 젊음이 다시 오지 않습니다. 역사의 기록도 믿을 수 없고, 인생은 부싯돌처럼 짧습니다"라는 '서정적인' 대책을 내놓는다.

엮은이는 과거 합격자들이 내놓은 대책을 일컬어 "새로운 시대를 설계하려는 시대의식의 투영"이라고 말하는데, 그의 이런 평가가 과장된 것은 아니다. 죽기를 무릅쓰고 써 내려간 젊은 지식인들의 글은 기개가 퍼렇게 살아 있다.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유교 경전에 통달한 선비들의 문장에서는 현대의 현란한 문장이 따라잡을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미덕 중 하나는 책문과 대책에 뒤이어 나오는 엮은이의 주석이다. 한학자인 엮은이 김태완은 왕과 신하가 머리를 맞대고 고뇌하는 장면의 전후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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