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엘레베이터를 탔다. 같은 엘레베이터에 남자 하나, 여자 하나가 어색한 모습으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의 숫자를 보고 있었다. 같은 층의 도착점을 찾아 내려가는 것에 대해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으되 서로의 존재는 인식할 필요가 없다는 듯 계속 뚝뚝 내려가는 숫자들만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다 여자는 남자의 몸차림을 쳐다보았다. 반팔에 반바지 차림. 검은 티셔츠에 노란 반바지 차림의 그를 흘깃 살펴보고는 '땡벌같구만..'이란 생각을 하며 훗~하고 웃었다. 물론 그 웃음 소리가 들키지 않을 정도의 교양은 있는지라 도착점 편의점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의 사이는 여전히 그 자리였다.
2. 남자는 먼저 편의점안의 주류코너에 붙어 있었다. 여자는 잠을 쫓기 위한 커피를 고를 예정이었지만 주류코너에 붙어 있는 그의 몸짓에 잠시 고민을 했다. '하나 살까?"하고.. 그러나, 냉장고에 남아있는 참이슬이 생각났다. 이슬은 선인의 선식..이라는 대학선배의 말대로 하나 비치해 놓았던 것이 생각났기에 더이상 고민없이 커피코너에 갈 수 있었다.
그의 선택은 좀 더 빨랐다. 여자가 맥심 믹스 커피를 고르고 계산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계산대의 편의점 알바의 냉험한 판결을 따라 참이슬 가격을 치르고 있었다. 그 다음에 여자는 계산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엘레베이터 앞에 섰을 때 그도 서 있었다. 땡벌 한 마리가 어느 꿀벌에게서 착취한 꿀통처럼 그는 참이슬을 야무지게 쥐고 서 있었다. 여자도 별반 다른 모습은 아니었다. "나 오늘, 오늘 밤이 무서워요."라고 했던 눈이 날서있던 한 여인의 노래처럼 그녀또한 두려운 밤을 쫓기 위해 커피를 들고 서 있는 폼새는 그렇게 당당한 것이 아니었기에.
3. 엘레베이터에 한 여자와 한 남자는 또다시 같이 올랐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야 할 엘레베이터는 오히려 하강직선운동을 하고 있었다. 둘은 말하지 않았으나 똑같이 머리 속으로 '젠장'을 외치고 있었다. 꺼꾸로 가는 인생길에 오케이라고 흔쾌히 외칠 이도 없겠지만 분명히 올라간다고 했던 엘레베이터가 꺼꾸로 내려가고 있다니... 말없이 엘레베이터는 지하 2층에 머물러 한 남자를 태웠다. 한 남자도 종이 봉투에다 물건을 가득 싣고는 올라탔다. 여자는 종이 봉투 바깥에 붙어있는 분홍색 리본을 흘깃 보았다. 아마도 그 남자에게 어떤 여인이 준 선물이 아닐까? 라는 상상으로 엘레베이터는 러브러브 분홍빛으로 물드는 듯 했다. 어흠~ 헛기침을 하며 올라탄 남자는 따로 자신의 집으로 가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침묵 속에 어디로 가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여인의 층인 4층이거나 남자의 층인 7층이거나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중 하나에 낯선 러브러브 분홍빛 후광 속 남자의 집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4.엘레베이터가 상승운동을 했다. 숫자들이 하나둘 바뀌면서 빛나고 그 순간에도 그들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엘레베이터에는 살아있는 생명체는 없는 듯 했다. 오직 살아있음을 숫자로 표현하고 있는 엘레베이터 외에는. 어쩌면 엘레베이터가 그들을 모두 소화해버리고 없는지도 모르겠다. 부재의 순간이 4층 불이 켜지고 엘레베이터가 배출의 신호를 낼 때까지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팅~'하는 배출의 소리와 함께 여자는 커피믹스를 들고 자신의 삶 속으로 배출되었다.
5. 땡벌과 분홍빛 리본또한 7층에 배출되어야 하는 각각의 물건처럼 아무런 이야기없이 조용히 상승기류를 탄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랐다. 땡벌의 손에 든 '참이슬'과 분홍빛 리본의 손에 든 '분홍리본의 종이봉투'이외에 그들을 표지할 수 있는 것들은 없었고 그들은 또한 '팅~'하는 소리와 함께 7층에 배출되었고 각각의 방으로 분리배출 되었다.
6. 7층의 위에는 옥상이 있었다. 그 오피스텔에 유일하게 유리창 너머로가 아니라 날 것으로 보이는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우주인들의 통신을 받는 둥근 안테나들처럼 스카이 라이프 안테나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하늘의 전파를 받는 곳인데 가끔 진짜 바람이랑 눈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분리배출된 물건들이 각자의 포장상자를 찾아가고 남은 여백같은 옥상에 달도 가끔 조명처럼 떠오르기도 하고 구름에 가리워져 나타나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바람은 찼고, 눈은 포근하게 다가왔다.
7. 4층 여자는 대학선배의 말대로 '선인들의 선식'이라 불리던 이슬을 깠다. 땡벌이었던 7층 남자도 여자친구의 사진이 박힌 사진을 바라보았고 또다른 7층남자, 분홍리본은 컴퓨터를 켜고 맛있는 커피를 끓이고는 따스한 차에다 손을 대고 몇십분 전에 슬며시 잡았던 그녀의 손과 입술을 기억하고 있었다.
8. 종합선물세트처럼 그렇게, 빼곡한 삶들이 새해 첫 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이후 어떻게 될런지는 지켜봐야 알 일....하늘에 감시하는 누런 눈깔이 없는 날에는 상상력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된다. 거짓말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