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돌바람 > 웃음과 눈물 사이



나는 웃음과 눈물 사이의 작은 공간에서 최고의 감정을 느낀다."
- Toots Thielemans -

 

Who Can Sail Without The Wind?

 

누가 바람 없이 항해할 수 있으랴?
누가 노 없이 배 저어갈 수 있으랴?
누가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고

사랑하는 벗을 떠나 보낼 수 있으랴?

나는 바람 없이도 항해할 수 있고
나는 노 없이도 배 저어갈 수 있네만.
그러나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고

사랑하는 벗을 떠나 보내지는 못하리.


Vem Kan Segla
(Swedish)
Vem kan segla förutan vind?
Vem kan ro utan åror?
Vem kan skiljas från vännen sin
utan att fälla tårar?

Jag kan segla förutan vind.
Jag kan rå utan åror.
Men ej skiljas från vännen sin
utan att fälla tårar.


 

 

누가 내게 소주 한 잔 할래요?

묻는다면 나도 김종삼 시인처럼

소주는 마실 줄 아는데 하모니카는 못 불어요 하고

뜬금없이 말해버리고 싶은

해지는 시간,

곧 하늘에 구멍을 내며

별들이 못질을 할 거야.

웃음과 눈물 사이의 시간,

못이 전속력으로 지상을 향해 돌진해올

준비를 하면

그러면 어둠이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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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니르바나 > [퍼온글] 작가 권정생, "교회나 절이 없다고 세상이 더 나빠질까"

한겨레 조연현 기자
» 〈강아지똥〉 〈몽실 언니〉작가 권정생 선생
〈강아지똥〉과 〈몽실 언니〉를 쓴 권정생(69)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자가 많은 동화작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려고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의 오두막으로 그를 찾아오지만 그는 사람들을
만나주지 않는다. 기자는 말할 것도 없다.
인터뷰 같은 것을 한 적도 없다. 어려서부터 앓아온
전신결핵의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홀로 살아가는 그는
“너무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사람을 맞을
자신이 없어서” 사람이 찾아와 불러도
아예 문조차  열어보지 않는다.

그런 그가 김장배추 속에 숨은 흰 속살 같은 얼굴을
내보였다.
지난 29일 그의 마을 정자 나무 아래서 한 ‘드림교회’
예배에서였다. ‘드림교회’란 이현주(62) 목사가
지난 4월부터 주일이면 좋은 사람과 좋은 장소를 찾아
예배를 드리는 ‘건물’ 없는 교회다.
이 목사는 이 마을에 찻길조차 없던 1970년대
이오덕 선생으로부터 숨은 ‘인간 국보’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다녔던 지기다.
그는 ‘드림교회’가 뭔지도 몰랐지만 그런 이 목사의
청으로 엉겁결에 마을 정자 나무 아래 앉았다.
그를 만나고파 전국에서 이날 예배에 온 20여 명과
함께였다.

» ‘교회 종지기’의 나무 아래 예배 - 권 선생은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러운 듯 모자를 눌러쓴 채 얘기를 했다. 그와 수십 년 지기인 이 목사도 “이렇게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이렇게 말씀을 오랫동안 하는 것도 처음 본다”고 했다. 권 선생이 생전 처음 베푼 말잔치는 소리 소문 없이 온 산하를 물들여버리는 가을 기운 같은 축복이었다.

작가 권정생이 말하는 하느님과 인간의 뜻

침묵 기도 뒤 사람들은 기도를 나누었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하나님께 ‘저를 왜 이곳에 불렀느냐?’고
물었다”며 하나님께서 이러저러한 응답을 주었다고 말했다.

“차를 타고 이곳에 온 게 하나님 뜻인가요?”

이 목사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권 선생이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을 하든 관성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갖다 붙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습관적인 말’에 대한
일침이었다.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들에게 그 많은 고통을 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요?
인간이 한 것이지요.”

권 선생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낙엽만이 침묵의 공간 속을 뒹굴었다. 마침내 여든여덟 살 난 마을 할머니 얘기를 꺼냈다.

인간이 저지르고 하느님 뜻이라니… 천당 가는 것보다 따뜻한 삶이 중요

“할머니가 네 살 때 부모가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뒤 아직까지 소식을 모른다.
그는 지금도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버렸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못 오셨을까’만 생각한다.
결혼해 자식 손자까지 다 있는데도 할머니는 아직까지 네 살짜리 아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하느님 뜻인가. 하느님이 일제 36년과 6·25의 고통을 우리에게 주었는가?”

권 선생은 “아니다”라고 자답했다. 그 고통 역시 “인간 때문”이라는 것이다.
얘기 중에도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눈으로 산과 들과 마을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마을 얘기를 이어갔다.

“우리 마을엔 당집이 있다. 거기엔 할머니신을 포함해 세 분이 모셔져 있다.
한 분은 후삼국시대에 백제에서 온 장군인데, 죽을 줄 알던 마을 사람들을 모두 살려줬다.
또 한 분은 비구니 스님인데,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 때 와서 사람들을 살려줬다.
당집에선 한해 동안 싸움 안하고 가장 깨끗하게 산 사람이 제주가 되어 정월 보름마다 제사를 지내면서,
또는 당집 앞을 지날 때마다 스스로 착하게 살려고 자신을 다잡는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평안하게 살아간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착하게 살아가라’는 설교를 귀가 따갑게 들으면서도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기 일쑤인데 왜 그럴까. 세상에 교회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는 또 “교회나 절이 없었더라도 더 나빠지지 않았을 것 같다”고 자답했다.
그는 “세상에 교회와 절이 이렇게 많은데, 왜 전쟁을 막지 못하는가”라며 다시 낙엽을 바라보았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600만 명이나 죽는 고통을 당하고도
왜 그렇게 남을 죽이고 고통스럽게 하는가.
1940년대 유대인들이 처음 팔레스타인 땅에 돌아올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키부츠 등에 땅도 내주고
함께 살자고 했는데, 이젠 ‘처음부터 막았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한다고 들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배경이 된 전쟁은 베트남전이다.
프랑스는 당시 베트남인들을 노예처럼 끌어다가 칠레 남부의 섬에 가둬 비행장 건설 노역을 시켰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자 베트남인들은 그대로 남겨둔 채 자기들만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섬엔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베트남 노인들이 살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악행만 얘기하지 자신들이 한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중국도 일본이 난징학살 때 30만명이나 살육한 것을 지금까지 그토록 분개하면서도
티베트인들을 그렇게 죽인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억압만 하고 있다.
미국은 자기는 핵무기를 만 개도 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나라들만 나쁘다고 한다.”

권 선생은 “모두가 자기는 잘하고 옳은데, 상대방이 문제라고 한다”고 했다.
그것이 불화와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 생각 하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사의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짓’임을 분명히한 권 선생의 말에
자신의 행동도, 세상의 해악도 하느님에게만 돌리던 핑계의 마음은 쓸려가 버렸다.
그러나 권 선생은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이 하는 것’을 보고 계신다”며
“그렇기에 홀로 있어도 나쁜 짓을 할 수 없고, 착한 일을 했어도 으스댈 수 없다”고 했다.

안동 / 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 기자 cho@hani.co.kr

장애와 천대 보듬은 ‘몽실언니’처럼
자기를 녹여 꽃피운 ‘강아지똥’처럼

권정생의 문학과 삶 / 마을 뒤편 작은 개울가에
있는 권 선생의 오두막은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
솟구치게 할 만큼 쓸쓸했다.
이끼로 덮인 바위를 지나 들어선 앞마당 잡풀
사이에 권 선생이 불을 때 밥을 한 것으로 보이는
솥이 걸려 있었다.
오두막은 5평 남짓.(사진)
그러나 그도 평생 읽어온 책들이 대부분 자리를
 차지했다. 그가 사용하는 공간은 몸을 웅크려야
겨우 누울 수 있는 0.3평이나 될까.

장애와 천대를 안은 채 살아온 가련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몽실 언니〉의 삶을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가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제 때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광복 후 외가가 있는 경북 청송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등을 했고, 전신 결핵을 앓으면서
걸식을 하다 열여덟살에 이 마을로 들어왔다.

스물두 살에 다시 객지로 나가 떠돌던 그는
5년 뒤 이 마을로 돌아왔고, 스물아홉살 때부터
16년 동안 마을 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교회 종지기로 살았다.

〈하느님의 눈물〉,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우리들의 하느님〉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승화한 작품들이었다.

고운사 경내에서 함께 걸으며 그에게 “시골 마을에서도 이제 모두 새집 지어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 집도 1983년에 120만 원이나 들여서 지은 집”이라며 “그런데 면에서 나온
공시지가를   보니, 89만원밖에 안 한다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을 할머니들이 죽기 전에 그 집이라도 팔아서 돈을 쓰라고 한다”고 했다.
종지기 때와 다름없이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본 할머니들이 너무도 안타까워 하는 소리일 터였다.
그는 무언가를 관찰해 쓰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은 끝내 녹아 없어져
아름다운 민들레꽃으로 피어나는 〈강아지똥〉의 실제 주인공이었다.

조연현 기자

'한겨레'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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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지속이다.

존재하는 것은 시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나를 이루는 본질이다.

시간은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지만, 내가 곧 강이다.

시간은 나를 삼키는 호랑이지만, 내가 곧 호랑이다.

시간은 나를 소진시키는 불이지만, 내가 곧 불이다.

세상은 불행히도 리얼하고, 나는 불행히도 보르헤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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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10-02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은 많은 상처를 잊게 해 주는 바람이지만, 내가 곧 바람이다.

보르헤스의 말에 한 번 궁시렁거려 보았습니다. 이 아침 철학적인 글 만나서 반갑네요. 저는 내일 비행기 탑니다. 그리운 얼굴들 보고 오면 더 마음이 여유있고 예뻐지겠지요? 달팽이님도 추석 잘 보내세요^^

달팽이 2006-10-02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님, 그리운 이들을 찾아 떠나는 추석여행이 즐겁고 행복했으면 합니다.
그리운 이와 좋은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전출처 : 니르바나 > 책사랑하기를 가신 님처럼 ...

독서광 故 정운영 `책갈피에 흘린 눈물`     -2006년 9월 27일 (수) 09:16   파이미디어



"추석 며칠 전날 한밤중에 정운영 선생의 전화를 받았는데, 느닷없이 자신의 책들을 내게 맡기겠다는 말씀이셨다. 어림잡아도 2만 권쯤 되는 장서는 선생이 유학 시절부터 모아오신 것으로 그 규모와 범위는 경제학계에서도 아주 유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애지중지하던 그 책들을 내게 맡기시겠다니..."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였던 고(故) 정운영 선생의 후배 윤소영(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가 고인을 추억하며 <프레시안>(2005. 9.25)에 기고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부활을 위하여`의 머리글이다.

지난 24일은 고인의 1주기였다. <한겨레>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해온 그의 칼럼은 저널리즘 글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토해낸 글은 바로 `책에 서린 세상과 정신에 띄우는 연서`였다.

`책사랑`이 대단했던 그는 유학시절 부터 책을 모으기 시작해, 무려 2만1천여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 1972년 벨기에 루뱅대학으로 유학, 그 후로 30여년간 한해 평균 잡아 6백여권을 읽었단 소리다.

올봄 유가족은 고인이 분신처럼 아끼던 책 1만6천여권을 모교인 서울대에 기증한 바 있다. 독어, 프랑스어 등 외서를 비롯해 마르크스 경제학을 포함 유럽 경제학의 고전들이 많았다고 한다.

정운영 선생의 막역지우(莫逆之友)인 작가 조정래는 <한겨레>("종이책을 절실히 사랑한 마지막 사람이 아닐까 한다", 2006. 7.19)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4년 전쯤에 정형과 유럽여행 갔다 서점에 들렀는데 체 게바라 관련 책이 54종이 있었다. 아무리 관심이 있는 사람도 대여섯권 사고 말 텐데 정형은 신용카드로 54권 모두 샀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일시적으로 신용불량자가 돼 있었다."

정운영 선생의 책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일화인데, "만약 정형이 책을 사지 않았다면 집안 형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고, 더 오래살지 않았을까 한다"고 조정래는 말했다. 2만여권을 어림잡아 1만원씩 계산해도 2억원. 정운영 선생의 가족은 평생 전세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니 헛말이 아닌 듯싶다.

최근 선생의 1주기를 기념해 딸 정유신씨가 펴낸 고인의 마지막 칼럼집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웅진지식하우스, 2006)의 발문을 봐도 선생의 `책사랑`이 얼마나 극진했는지 알 수 있다.

"아버지는 귀인을 대하듯 책을 다루셨다. 읽던 자리에서 서표를 끼우지 않고 책장을 접는 일이 없었다. 무슨 책이 어느 책장 몇 번째 칸에 있는지 까지 기억할 만큼 한권 한권을 소중히 여기셨으니 책을 다른 용도로-이를테면 무언가의 받침(!)으로-사용하는 일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책 위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칸칸이 달력 종이를 고이 접어 올려놓은 것을 보고 집에 온 제자들이 신기해했던 일도 있었다."

유고집은 곧 정운영 선생의 독서편력을 말해준다. <중앙일보>에 글을 쓰면서 내건 칼럼의 제목은 `정운영의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나는 이렇게 전해 들었다`는 뜻으로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풀어내곤 했다.

선생은 2004년 칼럼을 쓰면서 최소한 두 번 이상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는 `10월의 크리스마스`(2004. 10.23)에서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의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샘터)을 읽고 눈시울이 붉어진 연유를 밝혔다.

그는 흔들리는 곳에선 책을 읽지 않는다는 평소의 신조를 저버리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지하철에서 책을 펴들었다. 이날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여서 몸과 마음은 녹초가 된 상태. 그가 눈시울을 붉힌 대목은 이렇다.

`암 말기 환자인 젊은 엄마가 임종을 앞두고 아홉 살과 일곱 살짜리 아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언제나 씩씩하고, 아빠가 새엄마를 모시고 오면 잘해드리라"고. 엄마를 묻고 온 날 형제는 아빠에게 "우리 항상 씩씩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새엄마를 데리고 오지 마세요"라고 편지를 쓴다.`

또 한번 정운영 선생을 울린 건 완연한 봄, 2004년 5월이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고, 돈이 없어 꿈마저 작아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하 월세방에서 혼자 혈당을 측정하고 인슐린 주사를 찌르는 17세 당뇨병 소녀가 역시 중병으로 친정에 몸져누운 어머니를 향해 "엄마 아파서 미안해. 하지만 나를 왜 이렇게 외롭게 만들었어"하는 대목에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화끈했다..... 12세 우울증 소녀의 독백에도 마음이 스산했다. "부자가 아니라서 너무 싫어요. 공책도 아껴 써야 하고, 반찬도 김치하고 계란밖에 없어요."`(우리 모두 `도시락`을 풀자, 2004. 5.5)

칼럼에서 정운영 선생은 "생산력이 늘어났는데도 왜 부끄럽다는 생각은 점점 커지는가. 문제는 결국 소유의 많고 적음의 아니라 너와 나의 차별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며 "이제 혼자 놓는 주사로 그을 외롭게 하지 말고, 김치 반찬에 퍼렇게 멍든 마음을 풀어주도록 하자. 그것은 성장이냐 분배냐 따위의 거창한 토론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시대 최고의 논객`이라 평가받는 그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남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진지로 불린 한신대 경상학부에서 교수로 재직, 이어 서울대 고려대 경기대에서 강의를 했다. 병석에서 구술로 완성한 마지막 칼럼 `영웅본색(2005. 9.8)`을 끝으로, 그는 보름 뒤 지병인 신부전증이 악화돼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혈연을 떠나 모든 인연을 얻는 삶, 작은 집을 버리고 세상의 집을 얻는 삶`(출가내인 이야기, 2004. 5.29)을 동경했고, `혁명시인` 김남주에게 빚진 마음(그가 남긴 칼과 피의 사랑, 2004. 7.10)이 있었던 고 정운영 선생. 역사적 사회주의가 실패할 즈음, 진보운동의 이론적 바탕을 세운 <이론>(1992)지 창간을 주도한 그는 평등주의에 가까운 학문(분배론)으로 학위를 받았다.

평생 가난한 지식인으로 살았지만 그의 왼쪽 심장은 언제나 힘없고, 돈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뜨거웠다.

[북데일리 백민호 기자] mino100@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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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9-28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장은 왼쪽에 있지만, 온 몸으로 골고루 피를 보내주어야 하지요.
위장도 왼쪽에서 죽도록 운동을 하고 pH 높은 위액을 내뿜는 중노동에 시달리지만,
간은 오른쪽에 치우쳐서 가만히 있으면서 온갖 영양분을 받아들입니다.
왼쪽으로 조금 치우쳤지만, 결국 온 몸에 골고루 산소와 영양분을 보내는 그분께 감사드릴 일이 아닐까 합니다.

달팽이 2006-09-2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것 하나 고맙지 않은 것이 없지요..
온누리가..

비자림 2006-09-29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숙연해지네요. 얻어갈게요^^

달팽이 2006-09-29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연있는 사람이 보았으면 합니다.
고마움은 니르바나님께로 돌리죠.
 

  내 일찍이 고독의 몸으로서 적막과 무료의 소견법으로 거위 한 쌍을 구하여 자식삼아 정원에 놓아기르기 십개성상이러니, 올 여름에 천만뜻밖에도 우연히 맹견의 공격을 받아, 한 마리가 비명에 가고 한 마리가 잔존하여 극도의 고독과 회의와 비통의 나머지, 식음과 수면을 거의 전폐하고, 비 내리는 날 밤, 밝은 밤에 여윈 몸 넋 빠진 모양으로 넓은 정원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동무 찾아 목메어 슬피 우는 단장곡은 차마 듣지 못할러라. 죽은 동무 부르는 제 소리의 메아리인 줄은 알지 못하고, 찾는 동무의 소린 줄만 알고, 홀연 긴장한 모양으로 조심스럽게 소리 울려 오는 쪽으로 천방지축 기뚱거리며 달려가다가는 적적무문, 동무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때, 또다시 외치며 제 소리 울려 오는 편으로 쫓아가다가 결국은 암담한 절망과 회의의 답답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서는 꼴은 어찌 차마 볼 수 있으랴. 말 못하는 짐승이라, 때묻은 말은 주고받지 못하나, 너도 나도 모르는 중에 일맥의 진정이 서로 사이에 통하였던지, 10년이란 기나긴 세월에 내 홀로 적막하고, 쓸쓸하고 수심스러울 제, 환희에 넘치는 너희들의 요동하는 생태는 나에게 무한한 위로요 감동이었고, 사위가 적연한 달 밝은 가을 밤에 너희들 자신도 모르게 무심히 외치는 애닯은 향수의 노랫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천지적막의 향수를 그윽히 느끼고 긴 한숨을 쉰 적도 한두 번 아니러니--. 고독한 나의 애물아. 내 일찍이 너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칠 능이 있었던들, 이내 가슴속 어리고 서린 한없는 서러운 사정과 정곡을 알려 들리기도 하고, 호소도 해보고, 기실 너도 나도 꼭 같은 한없는 이 설움 서로 공명도 하고, 같이 통곡도 해보련만, 이 지극한 설움의 순간의 통정을 너로 더불어 한가지 못하는 영원한 유한이여.....

  외로움과 설움을 주체 못 하는 순간마다 사람인 나에게는 술과 담배가 있으니, 한 개의 소상반죽의 연관이 있어 무한으로 통한 청신한 대기를 속으로 빨아들여, 오장육부에 서린 설움을 창공에 뿜어내어 자연의 선율을 타고 굽이굽이 곡선을 그리며, 허공에 사라지는 나의 애수의 자취를 넋을 잃고 바라보며, 속 빈 한숨 길게 그윽히 쉴 수도 있고, 한잔의 술이 있어 위로 뜨고 치밀어오르는 억제 못 할 설움을 달래며, 구곡간장 속으로 마셔들어 손으로 스며들게 할 수도 있고, 12현 가야금이 있어 감정과 의지의 첨단적 표현 기능인 열 손가락으로 이 줄 저 줄 골라 짚어 간장에 어린 설움 골수에 맺힌 한을 음률과 운율의 선에 실어 찾아내어 기맥이 다하도록 타고 타고 또 타, 절절한 이내 가슴 속 감정의 물결이 열두 줄에 부딪혀 몸부림 쳐가며 운명의 신을 원망하는 듯 호소하는 듯 밀며 땡기며, 부르며 쫓으며, 잠기며 맺으며 풀며, 풀며 먹으며, 높고 낮고 길고 짜르게 굽이쳐 돌아가며, 감돌아가며 감돌아들며, 미묘하고 그윽하게 구르고 흘러 끝가는  데를 모르는 심연한 선율과 운율과 여운의 영원한 조화미 속에 줄도 잊고, 나도 썩고 도연히 취할 수도 있거니와 --. 그리고, 네가 만일 학이라면 너도 응당 이 곡조에 취하고 화하여, 너의 가슴속에 가득 답답한 설움과 한을 잠시라도 잊고 춤이라도 한 번 덩실 추는 것을 보련마는-- 아아, 차라리 너마저 죽어 없어지면 네 얼마나 행복하며 내 얼마나 구제되랴. 이 내 애절한 심사, 너는 모르고도 알리라. 이 내 무자비한 심술, 너만은 알리라.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아. 말 못하는 짐승이라 꿈에라도 행여 가벼이 보지 말지니, 삶의 기쁨과 죽음의 설움을 사람과 같이 느낌을 보았노라. 사람은 산 줄 알고 살고, 죽은 줄 알고 죽고, 저는 모르고 살고, 모르고 죽는 것이 다를 뿐, 저는 생.사 운명에 무조건으로 절대 충실하고, 순종한 순교자--. 사람은 아는 것을 자랑하는 우월감을 버리고 운명의 반역자임을 자랑 말지니 엄격한 운명의 지상명령에 귀일하는 결론은 마침내 같지 아니한가?

  너는 본래 본성이 솔직한 동물이라, 일직선으로 살다가 일직선으로 죽을 뿐, 사람은 금단의 지혜의 과실을 따먹은 덕과 벌인지 꾀 있고 슬기로운 동물이라, 직선과 동시에 곡선을 그릴 줄 아는 재주가 있을 뿐, 10년을 하루같이 나는 너를 알고, 너는 나를 알고, 기거와 동정을 같이 하고 희노애락의 생활 감정을 같이 하며, 서로 사이에 일맥의 진정이 통해 왔노라. 나는 무수한 인간을 접해 온 10년 동안에 너만큼 순수한 진정이 통하는 벗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찾지 못했노라. 견디기 어렵고 주체 못 할 파멸의 비극에 직면하여 술과 담배를 만들어 마실 줄 모르고 거문고를 만들어 타는 곡선의 기술을 모르는 솔직 단순한 너의 숙명적 비통을 무엇으로 위로하랴. 너도 나도 죽어 없어지고 영원한 망각의 사막으로 사라지는 최후의 순간이 있을 뿐이 아닌가? 말하지니 나에게는 술이 있고, 담배가 있고, 거문고가 있다지만 애닯고 안타깝다. 말이 그렇지 망우초 태산 같고, 술이 억만 잔인들 한없는 운명의 이 설움 어찌하며 어이하랴. 가야금 12현에 또 12현인들 골수에 맺힌 무궁한 이 원을 만분의 1이나 실어 탈 수 있으며, 그 줄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타본들 이놈의 한이야 없어질 기약 있으랴. 간절히 원하거니 너도 잊고 나도 잊고 이것저것 다없다는 본래 내 고향 찾아가리라. 그러나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이것저것 다 있는 그대로 그곳이 참 내 고향이라니, 답답도 할사, 내 고향 어이 찾을꼬, 참 내 고향 어이 찾을꼬.

  창 밖에 달은 밝고 바람은 아니 이는데, 뜰 앞에 오동잎 떨어지는 소리 가을이 완연한데, 내 사랑 거위야, 너는 지금도 사라진 네 동무의 섧고 아름다운 꿈만 꾸고 있느냐?

  아아, 이상도 할사, 내 고향은 바로 네로구나. 네가 바로 내 고향일 줄이야 꿈엔들 꿈꾸었으랴. 이 일이 웬일인가? 이것이 꿈인가. 꿈깨인 꿈인가? 미칠 듯한 나는 방금 네 속에 내 고향 보았노라. 천추의 감격과 감사의 기적적 순간이여. 이윽히 벽력같은 기적의 경이와 환희에 놀란 가슴 어루만지며,  침두에 세운 가야금 이끌어 타니, 오동나무에 봉이 울고 뜰 앞에 학이 춤추는도다. 모두가 꿈이요 꿈 아니요, 꿈깨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만상이 적연히 부동한데 뜰에 나서 우러러보니 봉도 학도 간 곳 없고, 드높은 하늘엔 별만 총총히 빛나고, 땅 위에는 신음하는 거위의 꿈만이 그윽하고 아름답게 깊었고녀--.

  꿈은 깨어 무엇하리.

 

                                           

                                                                                                            -- 공초 오상순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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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8-25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의 애잔함과 허무를 응시하는 작가의 마음.
"내 고향은 바로 네로구나. 네가 바로 내 고향일 줄 꿈엔들 꿈꾸었으랴."
산문의 힘은 이런 걸까요? 맞닥뜨린 상황과 굽이치는 정서의 세밀한 부분을 낱낱이 해부하여 보여 주는 것...

잘 읽고 가옵니당^^

水巖 2006-08-25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고1때 국어교과서에 나온 겁니다. 그 시절에는 저 글에 심취되어 통으로 외우고 다니기도 했었죠. 다시 한번 읽고 갑니다.

파란여우 2006-08-25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문고도, 가야금도, 담배도 못하지만 몰운대에서 하현달을 보며
달적지근한 가시오가피를 마실 수는 있다죠.
술은 달팽이님이 사세요.
그러니까 이게 화개차 혼자만 마시고 늦게 온 변명의 댓가입니다.^^

달팽이 2006-08-26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님, 저도 그 부분이 클라이막스처럼 느껴졌더랬어요...
수암님, 그 시절 물질적으로는 형편없었던 그 시절이 그래도 가끔 그리워지는 이유는 뭘까요? 이런 힘넘치는 수필을 요즘은 보기 힘들어서일까요?
여우님, 물론입니다. 여우님 그 자체로 안주 몫은 하니까요..ㅎㅎ

로드무비 2006-08-26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고 때 영어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스스로 도취되어 읊으시던 기억이 납니다.
제목이 귀에 딱 들어왔죠.^^

달팽이 2006-08-26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그랬군요.
갑자기 로드무비님의 세대가 궁금해지군요...
난 내 정도의 연배로만 알았는데 이제껏...

소와룡 2016-06-28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양이의 여러가지 이야기가 떠올라서 선생님의 글을 읽고 빌려봅니다. 감사합니다.

달팽이 2016-07-12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소와룡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