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위에 새긴 생각
정민 엮음 / 열림원 / 2000년 7월
구판절판


<돌 위에 새긴 생각>을 다 보았다. 이 책을 매일 한 장씩 다 읽자는 새해 결심 하나는 성취한 셈이다. 그동안 페이퍼를 통해 이 책의 내용을 간간이 소개했는데, 정말 멋진 부분은 포토리뷰로 올리려고 아껴두었다. 사진이 좀 시원찮지만 전각의 세계에 한번 빠져보시길! ^^

17쪽
고개 들어 하늘 보니 하늘 또한 괴롭다 하네.

내용이 참 기막히다. 글자도 예쁘고. 그런데 이 글귀에 대한 정민 선생의 해석(혼자 끙끙 앓다가 세상 일 어째 이리 불공평하냐고 따져 물었다. 하늘이 대답했다. “나도 괴로워 죽겠다. 이 녀석아! 내게 따져 묻질 말아라. 네 혼자 삭혀야지, 내게 물어 어쩌자는 게냐.”)이 맘에 안 들어 연필로 여백에 이렇게 써놨다.

‘네 혼자 삭혀야지?’ 삭히란 말인가? 해결하지 않고? 인간이 노력해 해결해야 한단 뜻이 아닌가?

(올리고 보니 사진을 클릭해야 제대로 보입니다. 죄송.)

24쪽
흰 돌 맑은 샘, 씩 웃는 사람.

전각의 모양새도 기묘하고, 글의 울림이 청아하다. 맑은 약수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켠 듯.

33쪽
남의 선함을 들으면 의심부터 하고
남의 악함을 들으면 덮어놓고 믿는다.
이것은 마음속에 가득한 살기이다.

나쁜 소문은 빨리 퍼진다. 서늘한 가르침이다.

40쪽
거문고 갑 속에 간직하여 두었더니
이따금 줄 끊어지는 소리 들려오누나.

왠지 안타깝다. 끊어질 때 끊어지더라도 힘껏 한 번 울리고 끊어지기를.

50쪽
저녁이 아름다운 집.

나중에 전원주택이라도 마련하면 이대로 써서 문 앞에 걸어두고 싶구나. 글자도 예쁘다.

56쪽
바람이 없는데 일렁이는 파도, 눈을 뻔히 뜨고 꾸는 꿈,
이 모두 도를 향한 마음을 증진시킨다.

눈앞에 보이는 자연, 세상 속에 계시가 가득한 기분, 그런 기분일 테지. 이토록 명백한 것을 왜 그동안 못 보았을까 싶은 것.

62쪽
오만한 사람도 의협심이 강한 사람도,
아첨하던 자도 천한 자도
마침내 모두 다 마른 뼈가 되나니.

65쪽
젊어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하나의 불행이다.

정말이다. 젊어서 이름을 떨치는 것도 불행이다.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이 든다.

76쪽
한바탕 노래라도 불러보고 싶지만
눈물이 쏟아지면 걷잡을 수 없으리.

머리말에 따르면 <돌 위에 새긴 생각>은 정민 선생이 <학산당인보>라는 책의 일부를 추려 번역하고 해석을 단 책이다. <학산당인보>는 명나라 말엽 장호(張灝)란 사람이 명나라의 유명한 전각가들이 옛 경전에서 좋은 글귀를 골라 새긴 인장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렇다면 이들 글귀는 적어도 500년 전, 짐작건대 천여 년 전에 누군가 썼다. 그렇게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이 지금의 내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다니, 신기한 일이다.

85쪽
길이 좁은 곳에서는 한걸음을 남겨 남과 더불어 가고
맛이 깊은 곳에서는 삼분을 덜어 남이 즐기도록 양보해야 한다.

나 같은 욕심쟁이가 특히 유념해야 할 말이다. 길이 좁으면 마주 오는 사람 어깨를 밀치며 갈 게 아니라 한걸음을 남겨 남과 더불어 가야 한다. 맛 좋은 음식이 있으면 한 입이라도 더 먹으려고 달려들 게 아니라 한 숟갈씩 덜 먹을 생각을 하자.

95쪽
마음의 일이 마치 파도 가운데 앉아 있는 것 같아
때때로 화들짝 놀라곤 한다.

가만있어도 요동치는 내 마음이여.

98쪽
귀하지도 않게 부유하지도 않게
가난하거나 천하지도 않게.

딱 그렇게 살면 좋겠다.

99쪽
산을 나서니 구름이 옷깃에 가득하네.

신선이구나. ^^ 글자 모양도 흐르는 구름 같다.

115쪽
세상일은 대부분 유명무실하다.

그러게, 별것도 아닌 걸 다 구색 맞추고 체면 차리라 하니.

134쪽
구름으로 마음 삼고
달로 성품을 삼네.

글의 내용보다 글자 모양이 예뻐서.

145쪽
찻물 달이려 얼음을 깨어오네.

147쪽
가슴속에 ‘기(奇)’란 글자 없이는 시를 읊조리지 말라.

그래선지 인장 새긴 모양도 기이롭다. ^^

157쪽
깨달은 사람은 묘하기가 물과 같다.

글자 새긴 모양이 정말 물 같군. ^^

167쪽
지금 사람 가벼이 보지 않고 옛사람도 사랑하네.

글자 새긴 모양도 글만큼이나 호방하다.

175쪽
오늘 시든 꽃
어제 피어난 것.

새기고 또 새겨도 충격적이다. 오늘 시든 꽃은 바로 어제 피어난 그 꽃. 인장 한가운데를 떡 차지한 꽃 화 자(花)가 인상적이다. 저게 꽃 화 자인지 모르는 사람은 영 못 알아보겠지만, 동산에 나무가 솟고 그 아래 꽃이 피고, 동산 아래엔 긴 뿌리가 뻗고, 꼭 그런 모양새를 그려놓은 것 같다.

176쪽
이런 사람 하나쯤 없을 수 없다.

간절한 말이다.

183쪽
선비가 염치를 알지 못하면 옷 입고 갓 쓴 개, 돼지이다.

흥, 내가 알기로 대한민국에서 선비연하는 자들 거개는 염치를 모르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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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5-04-05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추천! 저도 이 책 얼른 볼랍니다.
그런데 이 책 리뷰에는 살짜꿍 우울함이 전혀 엿보이지 않는데요. ^^

숨은아이 2005-04-0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 고맙슴다~ 사진을 좀 잘 찍었으면 좋을 텐데... 책 찍는 게 어렵더라구요. 우울함은 금세 털었죠~

로드무비 2005-04-05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혈을 기울인 포토리뷰군요.
사진을 잘 찍었니 마니 그런 문제가 아니고.
저도 '책'으로 꼭 읽어보고 싶네요.
땡스투 눌러요.^^

숨은아이 2005-04-05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고맙습니다, 로드무비님.

숨은아이 2005-04-06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따우님! 나머지 두 권도 가을까지는 해치우고 싶은데...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 신화와 허무의 민족주의 담론을 넘어서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 신화와 허무의 민족주의 담론을 넘어서
임지현 지음, 소나무 발행.

작년에 박노자 선생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 ‘민족’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이 책을 읽기로 했다. 1999년에 나온 책을 2001년에 사서 2004년 말과 2005년 초에 걸쳐 읽은 셈이다. /,.|

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회비만 내는 회원’이다. 작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어렵게 추진해온 친일인명사전 발간 사업에 국가 예산을 배정받은 기회가 생겼는데, 그 예산을 국회가 몽땅 삭감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성금을 냈고, 그 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지속적인 후원이 필요하다며 만인 봉화 운동을 벌일 때 회원으로 가입했다. 내가 민족주의자라서가 아니다. (난 애국애족을 실천하시는 분들이 발표하는 글에 동원된 표현을 보고 거북할 때도 많다.) 하지만 ‘민족’으로 통칭할 수 있는, 내가 속한 사람들 집단(말하자면 공동체)이 외부의 압박 때문에 풍요로운 문화를 잃어버리고 자유로운 성장 가능성을 제압당했는데, 그때 그 외부 세력에 빌붙어 앞잡이 노릇하며 이웃들을 착취한 대가로 잘 먹고 잘 살던 인간들이, 해방 후에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고 도리어 이웃들을 기만하며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자신의 업적인 양 도둑질했다. 그래서 우리 ‘민족’ 사회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상류층은 대대로 도둑 집안이고, 정직하게 사는 건 바보들이나 할 짓이며, 짓밟히지 않으려면 큰 도둑의 망을 봐주고 뒷돈을 챙기는 작은 도둑이 되어야 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렇게 거꾸로 되어버린 질서의 시작을 밝히려고 애쓰는 곳이기에, 내가 내 발로 서서 제정신으로 잘 살 수 있으려면 이런 곳이 잘되어야 한다. 이것이 민족허무주의자에 가까운 내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 된 사연이다.

하긴 월요일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며 애국 애족하는 마음을 고취하는 교육을 받아온 내가 진정 민족허무주의자가 될 수나 있을까? 우리 사회에 보이는 배타적 가족주의, 혈연주의, 지역주의를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생명보다 속도를, 자율권보다 금전적 이득을 더 추구하는 태도에 나 자신 물들어 버린 것을 끔찍하게 생각하면서도 한국인을 모욕하고 비웃는 외국인 소식을 들으면 저도 모르게 열이 오르지 않는가? 외국 그림책만 들입다 수입하는 국내 굴지의 출판사에 대해 어린아이 적부터 외국적인 감성에 맛들이게 해야 해? 하며 분통을 터뜨리지 않는가? (그건 눈앞의 이익만 보고, 풍요로운 문화를 계발하는 소임을 소홀히 하는 출판사에게 화가 나서. --a)

사회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나는 ‘민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민을 가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를 낳고 키운 것이 한국 민족의 문화이니까.
 
그럼 ‘민족’은 그렇다 치고, ‘민족주의자=애국자=좋은 편’이라는 도식은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서유럽이나 러시아에서 대놓고 “민족” “애국심”을 들먹이면, 적어도 지식인 사회에서는 파시스트 아냐? 하며 위험하게 볼 것이다. 무리의 안쪽을 사랑하다 보면 바깥쪽에는 등을 돌리기 쉬우니까. 박노자 선생이 2002 월드컵 때 깜짝 놀랐을 만도 하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국가로서 가해자였던 민족과, 식민지 경험이 생생한 피압박 민족에게 “민족”이니 “애국애족이야말로 내가 살 길”이라는 말이 동의어일 수 있을까? 작년에 쿠르드족 아이들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을 볼 때는 ‘그래서 나라가 있어야 해’ 하는 생각이 들어 나 스스로 섬찟했다. 그러나 나라가 없어 이등 인간 취급을 받는 민족이 나라를 세우겠다고 총을 드는 걸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모든 민족이 다 개별 국가를 세울 필요는 없을 터이다. 다민족 국가로서 평화로이 나라를 유지해온 스위스 같은 나라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 애국은 애족과 동의어가 아니며, 애국이 “국가권력에 충성하는 것”인지 “현재의 권력자를 보위하는 것”인지 “나라 사람들의 안녕과 평화를 도모하는 것”인지도 역시 경우에 따라 다를 터이다.

그리고 피해자였다고 해서, 피해를 받은 만큼 가해해도 되지는 않을 터이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주장에 파르르 떨면서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압박을 비난하면서도 “만주 땅은 우리 땅”이라고 참으로 당당하게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설령 임나일본부설이 옳다 하더라도 일제의 침략이 정당해지는 건 아니잖아? 유대민족이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 살았다 하더라도 지금 그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쫓아내는 게 옳은 일은 아니잖아? 마찬가지로 만주와 연해주가 고구려 땅이었다 해도 그 땅을 오늘날 우리가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옳지 않잖아?)

그래, ‘민족’의 정체는 한 가지가 아니고, ‘민족주의’의 얼굴도 가지가지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의 1부의 요지는 바로 그것이다. “민족 개념이나 민족주의에 대한 이론은 지구상의 각 민족이 겪은 역사적 경험만큼이나 다양”(24쪽)하고, “민족주의는 특정한 사회적 교리를 완강하게 고수하기보다는 역사적 변화에 열려 있는 이데올로기”(24쪽) “사회적 총관계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방향과 내용을 수정하면서 살아 움직이는 역사적 변화에 열려 있는 운동”(25쪽)이다.

그렇다는 건 어쨌든 ‘민족주의’가 다양하게 변신하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실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민족 단위의 정치, 경제, 문화가 대다수 사람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리고 박노자 선생 말대로 자신이 속한 생활 공동체에 애착심을 갖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기에.
 
결론. 민족은 실체가 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절대선이 아니다. (참 단순하기도 하지. -_-)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이 책은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논리를 전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주진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쓴 글이 아니고, 지은이가 다양한 지면에 발표한 논문을 모은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1990년에 동구권이 해체되며 민족주의가 대두하는 걸 보고 쓴 글도 있다. 15년 동안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데!

그래서 “운동으로서의 민족주의” “한국사 학계의 ‘민족’ 이해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 이루어진 <1부 민족주의 : 운동사와 관념사>(주 내용이 민족 개념과 민족주의에 대한 고찰)와 “사회주의 거대 담론의 틈새 읽기” “이념의 진보성과 삶의 보수성”으로 이루어진 <4부 에필로그-이데올로기의 속살들>(현실 좌파 세력의 치부와 희망적인 가능성을 살펴봄)은 재미있고 유익했지만, 2부와 3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한참 뜨지만, 아마 좌파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기에 그러한 논문들을 한 권으로 묶을 수 있었으리라.

<제2부 맑스주의와 민족주의>에서는 맑스주의자(로 자처했던 사람)들이 민족 문제를 어떻게 봐왔는지 흐름을 정리해,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럽의 사회주의자들도 책상 위에서 남의 민족 운명을 이리저리 좌우하려 든 건 유럽 제국주의자들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왜 논쟁을 벌일 때 진짜 문제가 무엇이고 그 해결책은 또 무엇인지 따지기보다, 반애국주의니 민족허무주의니 교조주의니 기회주의니 경제주의니 정치주의니 하고 서로에게 딱지를 붙이기 바빴을까? 80년대 한국의 운동권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제3부 동유럽의 민족주의>는 지은이의 전공이 서양사인 만큼 근현대 동유럽에서 민족주의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왔는지 정리한다. 학교 다닐 적에 교과서 퀴리 부인 이야기가 나오자 선생님이 폴란드와 우리나라는 외세의 침략을 자주 받은 점이 닮았다고 했는데, 이 책을 보니 폴란드와 우리나라가 닮긴 닮았나 보다. 외세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봉건 귀족의 위상과 변신 양상이 ‘양반’과 비슷해서다. 폴란드의 봉건 귀족은 국수주의에 가까운 우월의식을 가지고서 외국에서 배울 거라곤 없고 다만 프랑스 문화만이 예외라고 생각했다. 인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통합하여 민족적 전망을 이끌어내지 못하면서도 자신들만이 민족문화의 주체라 생각했고, 자본주의의 물결이 몰려들자 부르주아로 변신했으며(그래서 폴란드 부르주아는 보수적이라 서유럽 부르주아가 해낸 것 같은 사회 진보를 이룩하지 못했다), 노동자 농민 운동이 거세어지자 도리어 위협을 느끼고 외세에 협력했다. 구한말 양반의 변신 과정과 아주 비슷하지 않은가? 조선시대 양반들도 중국만 예외이고, 다른 세계는 다 오랑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은 과연 무슨 뜻일까? “민족주의는 반역의 이데올로기여야 한다(그러니 국수적인 민족주의는 꺼져라)”? “민족주의는 혁명 세력에게는 적이 되는 이데올로기다(그러니 배격해야 한다)”? 그냥 심오한 뜻 없이 멋을 부린 제목인지도 모른다(아마 그런 것 같다). --;


*제 글을 보고, 이 책을 편집한 분이 아래와 같은 답변을 하셨습니다. *

그 책의 편집자로서 한마디하면... 그냥 멋을 부린 것은 아니라는 말씀. 국내에서 무비판적으로 사용되면서 자민족중심주의와 동일하게 쓰이는 민족주의는 역사적 대의에서 반역이란 뜻으로 쓴 말이지요.

물론 이러저러한 말을 생략한 것은 단순한 문장이 갖는 힘을 기대한 측면도 있고... 뿐만 아니라 당시까지만 해도 민족주의는 막연하게 그저 '선'이라고 여겨졌던 측면에 대한 강력한 제동으로서의 이슈 파이팅이라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말씀처럼 중간에 끼여 있는 2,3부는 저로서도 못마땅한 부분이었지만...

이번에 소나무에서 나온 임지현 선배의 책, <적대적 공범자들> 또한 비슷한 맥락의 구체적 현상들을 지적하는 시론들의 모음입니다. 일독까지는 아니지만 한번 서점에서 훑어 보시고 판단해 보시는 것도 좋겠지요. 삼인과 휴머니스트에서 나온 필자의 책들과 크게 다른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서두...

암튼 민족주의에 대한 의식 환기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한적으로 뿌듯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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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02-01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뇨. ^^a 무슨 책인지 알아보러 가요.

숨은아이 2005-02-02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넣었어요. ^^
 
위대한 어머니 여신 : 사라진 여신들의 역사 살림지식총서 11
장영란 지음 / 살림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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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엔 여성의 모습으로 신의 형상을 빚던 인간이 어이하여 “신”이라면 수염 달린 할아버지를 연상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책입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빚은 신상이 여성인 이유는, 그들이 믿은 신이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인식 범위 안에서 위대한 자연의 신성과 가장 닮은 것은 생명을 낳고 젖먹이는 어머니였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다 강력한 군장을 중심으로 한 청동기 문명-계급사회가 도래하면서 신화는 가부장제의 입김을 받아 어머니 여신을 살해하거나, 여신을 어머니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최고 남성신의 아내나 누이로 만들어버립니다. 이 책은 구석기 시대의 여신상-메소포타미아 신화-이집트 신화-바빌로니아 신화-그리스 신화를 훑으며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지은이가 그리스 철학을 전공한 이라선지 우리나라나 동양의 신화 속 여신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94쪽짜리 문고판이니 지식 충족 면에선 배부르지 않은 책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수메르와 이집트를 비롯, 여러 지역의 신화를 더 찾아보고 싶은 의욕(! 사놓은 책이나 다 읽으시지? T_T)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도리어 좋습니다.

다만 책의 머리와 꼬리에서는 약간 황당했습니다. 서두에서 지은이는 여신을 철저히 배제한 기독교를 겨냥해, 완전한 신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데 왜 하느님을 “아버지”로, 구세주를 신의 “아들”로만 인식하느냐고 시비를 겁니다. 그 시비 자체에는 동의하고, 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하느님 아버지를 불러온 기독교인들이 바빌로니아나 그리스 신화를 보고서 태도를 바꿀 것 같진 않습니다. 기독교의 “아버지” 비판과 고대 신화의 변천사는 둘 다 매우 중요하지만, 서로 약간 방향이 다른 이야기인데, 지은이는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리고 이 책의 맨 마지막 문단도 그렇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결국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긴 여정이었다면, 고대에는 세계로 통하는 통로의 역할을 신화가 주로 담당했고, 중세에는 종교가 그리고 현대에는 과학이 그러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프레이저(J. Frazer)의 말처럼 다가올 미래에는 지금 우리가 예측하기 힘든 또 다른 학문이 과학의 자리를 대신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를 결승점이 없는 목표에 대한 무한한 도전의 과정으로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멋지게 느껴지긴 하지만, 이런 결론이 이 책의 어떤 맥락에서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앞 문단, “신화적 상상력이 중요한 이유는... (후략)”으로 잘 정리되는 듯했는데.

2003년 7월에 나왔습니다. 살림지식총서 011권인 이 책에는 앞서 보았던 [인도신화의 계보], [두 얼굴의 하나님]보다는 별 한 개를 더 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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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1-25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아시아 여성신화를 추천할게요^^ 며칠 전에 밑줄 긋기에 글을 한참 쳤는데 다 날아갔어요-_-

숨은아이 2004-11-25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그 책 읽으시는 거 보고 보관함에 챙겨뒀어요. ㅎㅎ / 저런. 역시 한글에서 치고 나서 복사해 올리는 방법이 안전해요.

로즈마리 2004-11-29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화와 기독교 신에도 관심이 많으신 듯 하네요. 저도 그쪽으로 관심이 많아요..^^ 비슷한 관심분야를 가진 사람과 만날 수 있다는 게 알라딘의 장점인 듯 하네요. 혹시 읽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신의 역사>란 책을 추천합니다. 성서의 신, 이슬람, 유대교의 신, 즉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역사라 할 수 있는데, 아주 재밌고 유익한 책입니다.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장영란 선생님은 신화를 통한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 약간 생뚱맞지만 그런 글귀들을 적어 놓으신 것 같네요.

숨은아이 2004-11-29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즈마리님 반갑습니다. 신화와 종교 역사 쪽에 관심은 있는데, 아직 책을 많이 읽진 못했어요. 추천하신 책, 고맙습니다. 보관함에 넣어둬야겠어요.
 
위대한 어머니 여신 : 사라진 여신들의 역사 살림지식총서 11
장영란 지음 / 살림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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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엇보다도 여기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문제는 처음에는 단순히 비유적인 신의 이미지가 나중에는 특정한 종교 경전 속에 문자로 정착되면서 이데올로기화된다는 것이다. 가령 '하느님 아버지'라는 단순한 표현도 오랜 세월 동안 문자화되면서, 우리는 신 존재를 '남성적' 이미지로만 떠올리게 된 것이다. 또한 최초의 여성 '이브'에 대한 묘사가 인간 존재에 대한 비유적 설명으로 인식되지 않고 여성의 일반적 특징으로 왜곡되어 '여성은 열등한 존재'이거나 '여성은 악의 원천'이라는 인식이 이천 년 이상 팽배해왔다.-7쪽

종교가 신을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아버지로서 배타적으로 규정하며 문자의 힘을 또 하나의 절대적인 권력으로 맹신할 때 인간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쉽게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왜, 신은 아버지여야만 하는가? 특히 그것이 유일신인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상징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기 확장의 법칙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상징의 의미보다는 상징 자체가 가지는 형식적 틀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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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4-11-23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도그마라는 영화를 보면 여자가(우린 아줌마라 부르는데 ^^;;) 하느님 역할을 하지요.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그림을 보면 아들을 껴안는 아버지의 손이 하나는 아버지손으로 또 하나는 어머니 손으로 그려졌지요. 그 그림속의 아버지가 하느님의 이미지인데 여성성과 남성성을 지니신 하느님을 상징적으로 그린거라고....

생각나서 써봐요.. ^^

숨은아이 2004-11-23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최근 영화야 그렇다 치고, 렘브란트의 그림 이야기는 놀라운데요.

릴케 현상 2004-11-23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처음에는 신은 여성이었잖아요? 남성신은 애초에 없었다는 말도 있더군요.남녀 평등의 신이 아니라^^ 신의 속성을 여성에서 찾으니까요? 태초에 동물신들 혹은 자연신들의 신성은 생산성에 있었고, 인간으로서 그런 자연신의 생산성을 연상시킬 수 있는 건 여성밖에 없었던 거죠. 그러다가 남성이 남성신을 내세우게 될 무렵에 와서야 인격신이 등장하게 된다는 주장이 있더군요. 자연신이 인격신으로 변모하게 되는 과정^^ 지금에와서 신이 남자냐 여자냐 하는 것도 우습지요

숨은아이 2004-11-23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명한 산책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이 책은, 태초에 신은 남성성 여성성 나뉠 것 없이 그 자체로 신성했는데, 왜 오늘날의 우리는 "신"이라 하면 수염 달린 남성을 떠올리는지를 문제 제기하는군요.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후지따 쇼오조오 지음 / 창비 / 1998년 12월
구판절판


여러가지 견해가 대립하는 과정 그 자체 속에서 생산력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기뻐하는 사고방식이 생겨나지 않은 한 말살충동의 발생은 피할 수 없다.-214쪽

'제정신(sanity)'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일까? (중략) 체제적인 사회의 상식(!) 속에서 가장 건전하다고 생각되고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 비슷'하다는 것으로 자신의 '건전함'을 자타에게 납득시키려 하는 예의 '동조' 경향의 정신적 이상성(異常性)을 도려내려는 범주인 것이다. 이 '동조' 경향이야말로 실은 개개인이 자신의 내면적 규범을 상실해버린 정신적 공허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조'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조차 많이 있다.-229쪽

[헤이민신문]은 1903년에 (중략) 왈, "평민, 신(新)평민, 그들은 권세에 의지하지 않고 황금에 의지하지 않으며 문벌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인간으로서 서며 오로지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서는, 우리 동포 중에서 가장 신성한 자일러라"고.-235쪽

보편적인 가치를 목표로 하는 '운동'에서의 '승리'란 권력관계에서의 승리와는 전혀 다르다. '적'을 타도하여 '권력'을 획득하는 것 자체가 운동의 승리는 아니다. '이 세상'의 권력관계에서는 설령 '패배'하더라도 운동이 목표하는 가치가 사회 속에 스며들어 육화(肉化)되어간다면 그거야말로 운동의 승리인 것이다. 그 경우에는 권력까지도 이 가치체계가 구속하거나 지배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운동의 승리'가 우리 자신의 현세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 가치의, 앞에서 언급한 삼투와 사회에의 구조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은 그것을 섬기려 하는 자들이다. 이와같은, 운동의 '승리관'과 현세적 '승리관'의 결정적인 차이는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260쪽

말할 수 없이 느린 걸음걸이,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끈질김, 백년도 넘는 세월 동안 결코 멈추지 않은 그 걸음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힘,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풍설을 견디는' 쓰라린 고통을 딛고 살아온 그 엄숙한 정진, 그리고 그 유연한 참을성. 외면적으로 높게 우뚝 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 '감추어진 차원'에서의 실질적 특징은 높은 기품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소나무에게 들어라"에서-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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