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그림자 - 멕시코 한 혁명가로부터 온 편지
마르코스 지음, 윤길순 옮김 / 삼인 / 1999년 3월
품절


(154-160쪽 "치아파스 주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의 지방 신문 [티엠포]의 가스파르 모르케초 에스카미야 씨에게" 전문을 몽땅 옮기고 싶지만...)

세뇨르 모르케초, 우리는 피와 총탄, 유산탄, 무장 헬리콥터, 로켓탄을 발사할 곳을 찾는 비행기들 속에서 단순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를 정복할 수는 없다는, 우리가 싸움에서 질 수는 없다는...... 우리는 싸움에서 질 자격이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156쪽

그러나 지금 말한 대로, 우리 임무는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그들이 더 좋은 삶, 지금 우리가 뒤에 남기고 온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싸우다 죽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예, 하지만 그것이 당신의 임무는 아닙니다. 제발 당신 자신을 돌보십시오. 파시스트 야수는 잠복해 있다가 가장 무방비한 상대에게 공격을 가하니까요.-156쪽

[티엠포]가 진정 영웅인 것은 프레드 플린트스톤 기술로 신문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콜레토(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의 비인디언 거주자)들만큼이나 부조리한 이 꽉 막힌 문화에서 여러분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지금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만)에게 목소리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156쪽

내가 젊고 멋졌을 때는, 지식인들이 각 간행물을 중심으로 끼리끼리 모여 자신들의 입장을 공고히 하면서, 이를 통해 무지한 인간들 세상에 진리를 말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들을 ‘엘리트 지식인’이라고 불렀는데, 여러 잡지와 이념적 경향들이 유행하였기 때문에 지식인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것들은 이를 출판한 사람들 사이에서 읽히는 간행물이었습니다. 루차는 그것을 ‘편집자들의 자위 행위’라고 말합니다. 순진한 속인인 여러분이 그들의 상아탑을 만지려면 가시밭길을 통과해야 했을 겁니다.
과장하고 선별하고 배제하는 이런 ‘엘리트 저널리즘’과 계속 거리를 취해 왔다고 보이는 신문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엘 피난시에로(El Financiero)]입니다. 이 신문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움직임에 대해 무턱대고 비난하지도 않았고, 다른 매체에 영향을 주고 또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지적인 윤활유로 성급하게 굴지도 않았습니다. 이 신문은 기다리고(전쟁 기술에서 가장 배우기 힘든 미덕), 조사하고, 취재해서, 확고한 기반을 가져야 비로소 지금 자기네 독자들이 즐기고 있는 다각적인 분석을 엮어 내기 시작했습니다.-178-179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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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그림자 - 멕시코 한 혁명가로부터 온 편지
마르코스 지음, 윤길순 옮김 / 삼인 / 1999년 3월
품절


내가 신문을 보니 안헬이 ‘X’ 논설위원이 쓴 칼럼을 보여 줍니다. 나는 안헬에게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설명해 줍니다. 즉 그는 치아파스에 빈곤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원주민들이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계획적으로 봉기할 수 있었다니 그건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며, 원주민들은 으레 아무런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들고일어난다는 것, 그렇다면 외국인과 다른 나라가 멕시코와 멕시코의 대통령을 나쁘게 말하기 위해 원주민들의 빈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EZLN이 원주민들 사이에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그들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는 걸.
안헬은 갑자기 발을 쿵쿵 구르며 풀쩍풀쩍 뛰어다니기 시작하더니, 너무 화가 나서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게 첼탈 족 방언과 스페인 어가 뒤섞인 말로 마구 더듬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항상 우리가 어린애들 같다고 생각하는 거죠?" ...(중략)... "왜 그들 생각에는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수도 없고, 좋은 계획을 떠올릴 줄도 모르고, 또 싸움을 잘할 수도 없는 거죠?"-135-136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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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그림자 - 멕시코 한 혁명가로부터 온 편지
마르코스 지음, 윤길순 옮김 / 삼인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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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끔 손가락 사이에 무언가가 남아 있는 것을, 문장으로 표현되고 싶어하는 어떤 말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그리고 영혼의 주머니를 다 비우지 못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죠. 그렇게 많은 악몽을, 그리고 그렇게 많은 꿈을 다 담을 수 있는 추신은 절대 없을 겁니다. ......-52쪽쪽

EZLN은 온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를 위해 싸우는 모든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조직들이 필요한 발전을 정직하게 이루고 있는 데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 조직 외에 다른 혁명적인 조직들도 있고, 또한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군대 외에 다른 대중적인 군대들도 있고, 또한 앞으로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우리를 하나밖에 없는 진정한 역사의 전위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직한 멕시코 인이 모두 우리 사파티스타의 기치 아래 일치단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깃발을 내걸고 있을 뿐입니다.
-131쪽쪽

EZLN은 모든 멕시코 인들에게 이 깃발을 올리라고 요청합니다. EZLN의 깃발이 아니라, 무장 투쟁의 깃발이 아니라, 모든 사고하는 존재의 깃발, 우리 민중의 이성과 지성을 표현하는 깃발,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의 깃발을 올리라고 말입니다.-132쪽쪽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를 위한 투쟁은 EZLN의 임무만이 아니라, 각자의 장에서 각자의 투쟁 형태로 각자의 조직과 이념을 가지고 싸우는 모든 멕시코 인과 모든 정직하고 자주적이며 진보적인 조직들의 임무입니다.-132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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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보수를 論한다 - 보수주의자의 보수 비판
박효종 외 지음 / 바오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보수주의자라는 사람들의 글에서 대단한 걸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이니, 정연한 논리로 자신들을 진단할 줄 알았다. 그런데 책이 중반에 접어들 때까지만 해도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는 보수 비판을 하랬더니 진보 세력에 대한 비난이나 하고, 복거일과 함재봉의 글에서는 보수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대중에게 자기들이 잘했다는 걸 잘 표현하지 못해서(선전전에 패해서) 보수의 위기가 왔단다.

그러나 김정호와 함재봉의 글은 읽을 만하다. 함재봉도 보수는 역사 해석에 실패했다고 말하는 데 그치긴 했지만, 이들 두 사람의 글은 전형적인 보수의 논리를 잘 정돈해 놓았다. 이들의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할 수 있어야 이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보수라 자처하는 이들에 대해 전체적으로 받은 인상은 이렇다.

첫째, 보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지금 보수 세력이 대단히 위기에 처한 줄 아는 모양이다. 내가 봤을 때 여전히 한국 사회의 ‘힘’과 ‘돈’은 다 보수 세력이 쥐고 있는데?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들어서 바뀐 거라고는 자신들이 그토록 앙망해 마지않는 선진 자유시장경제 국가들의 법과 제도를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밖에 없는데 왜 그러는 걸까?

둘째, 이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전쟁의 참상을 극복하고, 경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다 보수 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라를 이만큼 발전시킨 주류, 보수 세력이 시대가 바뀌어 철없는 젊은이들에게 퇴물 취급을 받다니 쯧쯧쯧, 한다. 보수 세력의 오만과 욕심을 비판한 박효종 교수도 54쪽에서 “과거 대한민국 건국 시 혹은 6.25 때 보수주의자들의 헌신과 자기초월 행위는 분명히 보수주의를 이 땅의 ‘메인 스트림’으로 자리잡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산업화의 열기 속에서, 열사의 사막에서 가족과 떨어져 땀을 흘리고 젊음을 불사르며 무에서부터 배와 자동차를 만들고 수출까지 한 것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해방 후 50년 동안 힘들게 일하며 살아온 한국 사람은 몽땅 보수라는 것이다. 이런 아전인수를 보았나. 진보는 어디서 떨어진 천둥벌거숭이인가?

셋째, (아주 중요한 이야기인데 빼먹어서 보충한다. ^^) 이 사람들은 "보수가 일으킨"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매우 잘사는 나라인 줄 안다. 이렇게 훌륭하게 나라를 일군 보수 세력이 요즘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대한민국은 지금 북조선에 비해서 여러모로 형편이 나은 것 같다. 하지만 흔히들 착각한다. "요새는 밥 굶는 사람은 없잖아"라고. 없기는 왜 없단 말인가? 9시 뉴스에 심심하면 나오는 게 결식 어린이와 청소년 이야기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자살 사건이 많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자살의 이유도 인생이 허무해서라거나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회의가 아니라, "경쟁에서 떨려나 당장 생계가 막막해서"다. 이대로 가자는 말인가?

마지막에 실린 ‘젊은 보수’ 정성환의 글에서 그나마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았다. 귀여우리만치 순진한 건지 줄타기를 교묘하기 하는 건지 모르긴 해도, 곧이곧대로 읽자면, 20대 보수주의자들이 이 정도만 생각하고 실천해도 매우 고맙겠다.

아래에, 책을 읽다가 걸리는 문장에 딴죽을 건다.

- 박효종의 글에서
36쪽, 인간은 향수와 낭만에 끌린다고 하면서 “최근 ‘뉴보이’가 아닌 ‘올드보이’가 57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타지 않았던가.” 한다. 이걸 유머라고 썼겠지? --;

48쪽, “말을 탄 기수의 발을 안정적으로 받치는 등자가 발명된 것이 중세였으니”라고 했는데, 유럽 사람들이 등자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때가 중세인 건 맞지만, 등자가 “발명”된 것이 중세라는 말은 틀리다. 고구려 사람들을 비롯해 동북아시아의 기마민족은 이미 5세기 이전부터 등자를 썼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말을 탄 무사가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자세는 등자로 몸의 균형을 잡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게르만족을 압박한 훈족이 바로 그런 자세로 싸워 유럽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고 한다. 

52쪽, 비보수주의, 반보수주의, 반반공주의를 표방하는 영화들이 수백만 청중을 동원했다면서 예로 "쉬리" "JSA"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를 들었다. 허허... "JSA"는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60쪽, “이념적 이단아 추방에는 아테네에서 유행했던 ‘오스트라시즘’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외국어를 쓴 데가 많다. 그냥 도편추방제라고 하면 사전에서 찾아보기도 쉬울 것을.

104쪽, “가히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할 만큼 격렬한 진통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 이한우의 글에서
119-120쪽에서 한국의 방송사들이 “힘만 센 미숙아들”이라고 하면서 탄핵방송에 관해 “그들은 자신들의 일방적 편성의 근거가 국민의 70퍼센트 지지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노무현의 지지도가 20퍼센트대를 맴돌고 있는 요즘은 대통령 물러나야 된다는 식의 특집방송을 하루 종일 해도 괜찮다는 논리가 된다. 이게 말이 안 되듯 탄핵방송은 두고두고 한국 방송의 부끄러운 치부의 하나로 남게 될 것이다.”고 한다. 노무현 지지도가 20퍼센트라고 해서, 나머지 80퍼센트가 노무현 물러나라고 주장한다는 말인가? 이게 무슨 흑백논리인가? 그리고 노무현의 이른바 ‘실책’에 대해서는 방송에서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는 것 같은데?

122쪽에서 “유감스럽지만 그 시대는 다 지나갔다. 특히 그 시대를 살면서 이렇다 할 ‘전력’을 보여주지 못한 사람일수록 더 거세게 <조선일보>를 향해 달려든다. 전북대의 강준만 교수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고 한다. 아니, 70-80년대에 어떤 ‘전력’이 없는 사람은 90년대와 2000년대에 조선일보가 보여주는 어이없는 꼼수를 비난할 자격도 없다는 말인가?

140-141쪽에서 “일반적으로 좌파성향의 우리 현대사 개설서들은 ... 20년 가까이 진행된 역사 뒤집어보기, 거꾸로 보기 등의 결과로 지금은 마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우리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국에 의해 민주공화정이 이식된 것처럼 되어 있다. 예를 들면 강만길 상지대 총장식의 ‘우리 현대사’가 대표적이다. 이것은 우선 사실(史實)과도 맞지 않다.”고 하면서, “3.1운동 후에 국내외에 세워진 대여섯 개의 임시정부 안에서도 ... 왕정복고를 염두에 둔 임시정부는 단 하나도 없었다. ... 대한민국이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마추어 좌파 역사평론가들이야말로 ... ‘대한민국 국민은 역사를 스스로 개척할 능력이 없는 국민’인 양 매도해오고 있다”고 한다.
강만길 교수를 아마추어 좌파 역사평론가로 폄하한 것도 그렇고, 이 사람이 강만길 교수의 한국 현대사 책을 읽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이른바 “좌파 역사서”에서는 해방 공간에서 한국 사람들이 민주공화정을 세우려 노력했던 걸 부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주적인 민주공화정 수립을 위해 애썼으나, 미군정의 개입으로 자주정부 수립이 좌절되었다고 쓴다.

- 김정호의 글에서
163-164쪽에서 “진보진영은 외국의 것들에 대한 폐쇄성도 드러내고 있다. ... 쌀도 그렇지 않은가. 진보주의자들은 쌀 시장 개방에 반대한다. 한국 사람은 한국 농민이 재배한 쌀만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만한 차별이 어디 있는가. 만약 수도권 주민들이 경기도 농민들이 만든 쌀만 소비해야 한다면 어떻게 이야기하겠는가. 과거 한때 전라도 지역에서 그랬다고 전해지듯이 그곳 주민은 해태제과의 제품만 사먹는 격이다. 그러면 경상도는 경상도 사람이 만든 것만 먹고, 충청도는 충청도 사람이 만든 것만 먹어야 하는가. 당장 여러분은 이것을 지역감정이라고 말할 것이다.”
핫. 과거 한때 전라도 사람은 해태제과 제품만 먹었다고?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90년대 초반에 나는 전라도 시골 구멍가게에도 롯데제과 제품이 더 많아서, 아니 전라도 사람들은 지역 기업을 이리 홀대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부산 가보니 정말 해태제품은 찾아보기 어렵더군. 이 글의 요점은 그게 아니겠지. 그런데 시장경제가 생산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에 절대선이라는 사람이, 생산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람이, 왜 ‘생산자’의 생존권은 무시하는지?

그리고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보이지 않는 손에 시장을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는 사람이, 박대통령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가한다.
179쪽 “나는 박정희식 통치 모델이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첫째, 패배주의와 무력감에 빠져 있던 당시의 국민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잘살아보세’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하는 새마을운동 노래들은 그 부분을 잘 담아내고 있다. 둘째는 국가주의다. ... 셋째는 반공주의이다. ... 넷째는 개방이다. ... 나는 이중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 네 번째의 것은 박대통령의 공이었고, 두 번째의 것은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첫 번째 잘한 일에 대해, 새마을운동의 방법은 유치하고 조악했지만 “당시 우리 국민들의 수준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담벼락마다 소변금지, 낙서금지 글자가 필요할 정도로 타인의 재산을 존중하지 않던 국민이었다. ... 자신이 노력하기보다는 남의 덕으로 살아가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는 도덕률을 각인시킬 수 있을까. 국민 각자가 번 돈을 가렴주구로 뺏어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떻게 믿게 만들 수 있었을까.”(180-181쪽) 한다. 허! 박통이 국민의 돈을 가렴주구로 뺏어가지 않았다고? 지금 박근혜의 재산, 그리고 새마을운동본부의 재산이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지?

그리고 세 번째 반공주의에 대해서도 “그가 집권할 당시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자였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 그런 상황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운동까지 포함한 완전한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었다면 우리의 운명은 지금과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 박정희의 반공주의가 있었기에 당시의 척박한 지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나마 시장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182-183쪽)고 한다.
아니, 뭐든지 자유경쟁이 좋다면서? 그럼 사상이나 제도도 자유로이 경쟁하는 속에서 선택되어야 하지 않나? 박정희의 반공주의는 주의 표명에 그친 게 아니었다. 지식인뿐 아니라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노조운동은 왜 그 ‘자유’에서 배제되어야 하지? 엄청난 인권 유린의 역사를 간단히 “반공주의”로 얼버무리고 넘어간 데에는 분노가 치민다.

그리고 185쪽에서는 심지어 “집권의 정당성을 논외로 한다면 그가 독재자인 것을 탓할 수만은 없는 것 같다. 당시는 누구나 다 독재자 아니었던가.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기업에서는 사장이, 후배에게는 선배가 모두 독재자였다. ... 그것을 독재라고 한다면 당시 우리 국민들의 생활모습 자체를 비하하는 말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누구나 독재자였다고? 그럼 집안에서 아버지의 독재를 받는 어머니와 자식들은, 학교의 학생들은, 기업의 노동자들은, 그리고 어린 사람들은 다 사람도 아니었나 보지? 그것을 독재라 한다면 당시 우리 국민의 생활을 비하하는 거라고? 바로 앞에서 자기가 “당시 우리 국민들의 수준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충분히 비하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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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5-03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의 내공이 한껏 드러난 기가 막힌 리뷰입니다. 특히 딴죽을 건다고 쓰신 부분에서는 제가 한때 님과 술을 같이 마신 적이 있다는 게 영광으로 느껴지는군요. 아주 찬란하게 빛이 납니다그려^^ 글구 저 도편추방제가 뭔지 몰라요... 하여간, 이 책이 나왔을 때 전 뻔할 뻔자라고 생각해 읽을 마음이 안들었어요. 님 리뷰 보는 것으로 만족하렵니다. 글구 강준만 교수에 대한 비판 말이죠, 그당시 싸우지 않았던 사람이 조선일보에 딴죽 거는 걸 뭐라고 한다면, 그때의 투사가 뭐라고 하는 건 겸허히 수용해야 하는 게 옳을텐데, 그런 것도 아니잖습니까? 하여간 웃기는 애들이어요. 이 나라의 발전은 죄다 보수가 한 거라고 우기니, 세상에 이런 코메디가 있단 말입니까. 좋은 리뷰 감사드리고, 제가 요즘 님께 서운하게 했던 게 있으면 다 잊어버려 주십시오. 앞으로는 님께 잘 하렵니다. 저란 놈은 원래 강자에 약하거든요^^

숨은아이 2005-05-03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제게 뭘 서운하게 하셨단 말이어요? 흐음~ 자진해서 고백하세욧. ^^ 그런데 지금 보니 해야 할 말을 빼먹고, 또 실수도 몇 개 있어 고쳤어요. 칭찬 고맙습니다. 꾸벅.

릴케 현상 2005-05-04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은 경우 도무지 읽지 않을 책을 이렇게 꼼꼼히 읽고 인용까지 열심히!하시다니... 잘 읽었습니다. 책 안 읽고도 다 읽은 듯한 느낌입니다^^

숨은아이 2005-05-04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에고, 아니에요. 이 책을 읽고 대체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니까요. ^^

비로그인 2005-05-10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 논리 개발.. 숨은아이님. 멋져요^^ 하여튼, 정말 보수라고 말하는 그들이 스스로 위기라고 말하며 난리법석 떠는 그 모양새가 정말 정말 맘에 안 들어요--+

숨은아이 2005-05-10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아이, 제가 뭘... 고맙습니다. ㅎㅎ 그런데 그들, 요즘은 다시 기고만장한 듯...

로드무비 2005-05-11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제가 잘 쓸 수 없는 논리적인 글을 쓰시는군요.
추천 아직 안 늦었죠?
('올드 보이' 유머 무진장 웃겨요. 그것도 유머랍시고 써놓고 우쭐댔겠죠?ㅎㅎ)

숨은아이 2005-05-11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에 때가 어딨겠어요. 고맙습니다. 부끄...

내가없는 이 안 2005-05-15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이요! 뒤늦게 읽었는데 너무 흥미진진해서 열심히 읽었어요.
이런 글은 숨은아이님이니 가능하죠. 저도 이런 글 쓸 수 있었으면. ^^

숨은아이 2005-05-15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전 이안님처럼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ㅠ.ㅜ
 
나는 죽을 권리를 소망한다
뱅상 욍베르 지음, 최내경 옮김 / 도서출판빗살무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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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식물인간인 아내를 오래 간호해 오다가 안락사 시킨 남편에게 미국 법원이 무죄 선고를 내렸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다. 그리고 오늘, 반신불수인 남편을 30년 동안 간호하다가 남편이 자살하도록 도운 아내 이야기가 포털 뉴스에 떴다. 예순이 다 되었다는 이 여성에 대해 오늘 수원경찰서에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한다.

먼저 사건을 들었을 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나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다. 그냥, 이 책이 떠올라서, 뒤늦은 독후감이나 쓴다.

뱅상 욍베르는 열아홉 살 때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다. 전신마비 상태에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움직였고, 이것을 보호자인 엄마가 발견할 때까지 아무도, 뱅상 스스로도 자신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는 걸 알지 못했다.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던 환자가 엄지손가락을 까닥인다. 상상해 보자. “내 말 들리니? 들으면 두 번 까닥여 봐” 하는 말에 그가 손가락을 두 번 까닥인다. TV극이나 영화라면, 이 순간이 감동의 절정, 혹은 해피엔드의 시작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자기 혀와 이를 움직여서 과일이라도 먹으며 두 눈 뜨고 드라마를 즐기는 사람이 보기에 그런 것이고, 내가 바로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그 사람이라면?

뱅상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방식으로 엄마와 의사를 소통하고, 엄마가 일하러 나간 사이 엄지손가락으로 리모컨을 눌러 이리저리 채널을 바꾸어 가며 TV를 보면서 기나긴 하루를 보내는 것, 단 두 가지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전신마비 환자가 몹시 “아프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마비되었으니, 움직이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몇 년 전에 야구선수 한 명이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도 난 “식구들이 고생이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뱅상은 몹시 아프다고 한다.

이 고통에 대해서는 표현하기가 힘들다. 전에 항상 경련에 시달렸던 것과도 약간 비슷하다. 다리가 뻣뻣해지고 팔이 아프다. ... 아파서 숨쉬기조차 힘겨울 때에도 그들은 곧 괜찮아질 것이라고만 한다. -90쪽

팔다리가 묶인 채 누워 있는 것과 비슷할까 생각해 보았다. 팔다리가 묶인 채 24시간, 48시간, 아니 언제까지일지도 모르게 누워 있다면. 아, 내 맘대로 한번 뒤척이지도 못한다면. 나는 힘들 때, 아플 때, 내 손으로 얼굴을 감싸거나 몸을 웅크리거나 아픈 부분을 주무르거나 한다. 나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전신마비 상태에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덮쳐 오는 아픔을 맨몸으로, 무방비 상태로 맞아야 한다. 차라리 잠들어 버렸으면... 그런데 의식은 또렷하여 아픔과 고독을 온전히 맨몸으로 느끼고, 내 앞에 놓인 것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간뿐이라면. 그렇게 2년 3개월을 살았다면.

뱅상은 편안하게 죽기를 소망했고, 결국 아들의 끈질긴 청을 받아들인 어머니와 의사의 도움을 받아 저세상으로 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에서는 “소생 가망이 없는 말기 환자가 생명연장 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환자와 임종의 권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고 한다. 뱅상에게 주입되는 링거에 신경안정제를 치사량으로 주입한 어머니는 구속되었다가 일단 풀려나고, 뱅상의 호흡기를 뗀 의사는 살인죄로 기소되었다는데 그 후 어찌 되었을까?

이 책의 원고는 프레데릭 베이유라는 기자가 뱅상 욍베르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자기 손을 대고서, 알파벳을 하나하나 부르다가 뱅상이 엄지손가락을 누르면 그 글자를 받아 적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단어 하나가 완성되면 그 단어가 맞는지 다시 물어보고, 뱅상이 엄지손가락을 눌렀다 뗐다 하여 확인해 주었겠지. 얼마나 길고 지루한 일이었을까. 베이유 기자와 뱅상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는 죽을 권리를 소망한다 | 원제 Je vous demande le droit de mourir (2003)
뱅상 욍베르Vincent Humbert  (지은이), 최내경 (옮긴이) | 도서출판빗살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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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4-1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읽고 싶진 않아서 땡스 투는 안했음

숨은아이 2005-04-12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 (근데 이번엔 안 했다 하셨지만, 땡스투 할 때는 로그아웃 안 한 상태로 48시간 이내에 주문해야 적용되는 거 아시죠? 로그아웃했거나 48시간이 지나면 주문할 때 따로 땡스투를 눌러야 해요.)

릴케 현상 2005-04-12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8시간? 그런 거 몰랐는데요^^ 그냥 다 재미로 하는 거죠 뭐

숨은아이 2005-04-1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근데 재미라뇨. 60원에 집착하는 숨은아이. ^^

릴케 현상 2005-04-12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회사에서 책값을 내 준답니다(소곤소곤 사장이 보면 안 되는데-_-)

숨은아이 2005-04-12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에게 마일리지를 줄 수 있잖아요. (회사에서 책을 사주다니, 좋군요. 부러워라.)

릴케 현상 2005-04-12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48시간 안에 안 사면 땡스투 당한(?) 사람도 무횬가요? 이거 넘 한 거 아냐-_-

숨은아이 2005-04-12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버의 기억력 한계가 48시간인가 봐요. 그래서 책 살 때 바로 땡스투를 해야 한다는.

내가없는 이 안 2005-04-19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베이유 기자와 뱅상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대단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책이었군요! 저도 판단은 유보하고 싶지만, 자꾸만 꼼짝없이 누워 있는 뱅상의 속으로 들어가 앉게 되는데요...
그런데 숨은아이님, 전 땡스투 하는 법 알아요. 그러니 요 책을 알라딘에서 사게 되면 꼭, 꼭, 땡스투할게요. 60원도 허투루 보시지 않는 님. 호호.

숨은아이 2005-04-19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이유 기자와 뱅상은, 아마 오랜 인내 끝에 완성의 기쁨을 누렸을 거예요. 그렇지요? (60원이 어디예요. ^^)

마태우스 2005-05-0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 책도 읽으셨군요. 반갑네요.... 그 뒷얘기는 몰랐는데 알려주셔서 감사. 그 뒤의 뒷얘기는 님도 모르시군요.

숨은아이 2005-05-04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쓰고 나서 마태님도 이 책에 관한 글 쓰셨다는 걸 알았어요. ^^ 그 의사가 나중에 쓴 책이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던가? 하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서 나왔더군요. 어머니와 의사가 형사 처벌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