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거짓말, 통계
대럴 허프 지음, 박영훈 옮김 / 더불어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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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다.

그럴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

- 벤저민 디스레일 ,마트 트웨인 자서전 中>

 

 

통계가 거짓말이라니!! 아니 그보다 1950년대에 태어난 책이라니!!

2015년!! 강산이 변해도 6번은 더 변했을 시간이며 1900년대와 2000년대 한세기가 바뀐 시간속에 살아남은 책이라 더 흥미롭다. 시간이 흘러 생명력이 더해가는 것이 고전이라면 대럴 허프의 <새빨간 거짓말, 통계>역시 고전으로 남을 책이 될 것 같다.

 

통계는 숫자다. 숫자는 모호한 문자에 신뢰를 더한다.

 

초등학교에서 부터 숫자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길러진다. 수학은 정답이 단 하나다! 숫자는 거짓말 하지 않는다.

수학시간 통계역시 정확한 근거에 의한 문제들과 풀이로인해 신념은 더욱 확고해 진다.

12년이라는 시간, 맹목적인 풀이과정과 정답. 그렇기에 사회에 나와서도 숫자를 첨부한 자료들을 보면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통계가 거짓말이라니!! 이건 뒤통수를 맞는 것 보다 더 큰 충격이다.

물론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통계를 이용하는 사람들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

있는 사실을 거짓으로 만들어 버리는 교묘함! 단순히 진실을 숨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부풀리는 것 까지

 

대럴 허프의 말 처럼 '통계로 사기 치는 방법'의 입문서로는 <새빨간 거짓말, 통계> 보다 좋은건 없을 것같다.

그럼 지금 부터 대럴 허프의 통계로 사기치는 방법을 단계별로 배워 보자!

이것만 잘 배워도 당신의 보고서는 날개를 달고 날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통계를 보고 숨겨진 의미를 읽을 수도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뉴스에서 보여지는 통계를 바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기며, 회사원들에게는 실적을 그럴듯 하게 보이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될것!

 

진실을 알고 나면 결국은 여러번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뉴스와 각종 통계를 이용한 발표들의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단점이 보이겠지만...

 

그럼 차례를 따라 통계로 사기 치는 법을 배워 보자!

 

첫 번째 여론조사는 언제나 의심스럽다!!!

여론조사! 이는 뉴스만 틀면 나오는 말이다. 툭하면 여론 조사, 국민의 의견이 어떻고, 대세가 어떻고, 여론이 어떻고, 이들이 말하는 여론은 과연 누구 일까? 통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사 대상이다. 조사 대상에 따라 같은 통계라도 그 결과는 달라진다. 여론이라 하면 누구를 말하는 걸까? 예전엔 모르겠지만 요즘은 대충 여론이 누구라는 것을 뉴스에서는 밝혀 주고 있다. 어디에서 무엇을 이용한 몇명의 조사 결과!

 

이 조사 대상이 되는 여론의 선정 방법. 전문 용어로 여러 가지 표집법들이 있지만 결국은 이 여론은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지도, 대변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하는데 쌍둥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는데 임의적으로 비슷한 분류로 묶어 뽑는다? 그리고 퍼센트치로 표현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대표 할 수 있을까? 그러니 기본적으로 통계는 거짓이 되어 버린다.

 

내가 어떤 통계를 할 것인지 정하고 나면 그 결과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대상을 표집하게 되겠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에 가까운 결과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사람을 대상으로 '생각'을 물어보는 모든 통계, 여론 조사는 기본적으로 거짓이다.

 

두번째 평균은 하나가 아니다.

평균하면 백분율을 생각한다. 평균값은 하나로 알고 있지만 통계에서 평균은 여러가지가 있다.

산술적 평균, 중위값, 최빈값 같은 것들이 평균이다.

산술적 평균은 말그대로 모든걸 더해서 나누는 것, 중위값은 가운데의 값, 최빈값은 빈도가 가장 높은 값을 말한다. 그러니 어떤 조사냐에 따라서 각각의 평균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것.

숫자가 100에 가깝거나 0에 가까울 수록 어떤 조사에 대한 믿음이 증가한다는 것을 이용한다면 내가 만약 그들이라면 어떤 평균을 사용할까? 생각해보면 금방 답을 알 수 있다. 여러 평균중 이용하고 싶은 평균을 이용하면 내가 원하는 답을 받을 수 있다는것,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설득할 수 있다는 것.  반대로 생각하면 상대의 생각을 짐작하면 어떤 숫자를 알려줄지 예측도 가능하다.

 

세 번째는 작은 숫자를 생략하는 방법

네 번째는 쓸데없는 숫자를 이용하는 것

다섯 번째는 그래프로 눈을 속이는 방법

여섯 번째는 그림으로 눈을 속이는 방법

일곱 번째는 마구잡이로 통계를 보여주는 것.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는 통계의 논리와 통계를 조작하는 방법을 말해준다.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조작된 통계에 속지 않는 방법!!

통계를 조작하는 방법을 전부 소개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에 줄이며

 

가장 중요한 조작된 통게에 속지 않는 방법을 남겨둔다.

 

1. 조사의 출처를 확인한다.

누가 발표했는지 그 출처를 아는 것 만으로도 통계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 진다.

 

2. 조사 방법을 확인한다.

어떤 방법을 통해 조사했는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은 책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 빠진 데이터는 없는지 숨겨진 자료를 확인한다.

여러 결과들 중에서 의도적으로 빠진 것들이 분명 있다. 없다면 다행이지만 통계발표의 원본을 찾을 수 있다면 어떤 것을 숨겼는지에 따라서 의도를 알 수 있다.

 

4. 내용이 바뀐것은 아닌지 쟁점 바꿔치기에 주의해야 한다.

데이터와 결론사이에 연관성이 없음에도 통계자로로 둔갑되어 발표되는 경우들도 많다고 한다.

 

5.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 인지 살펴보고 석연찮은 부분은 조사한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들도 숫자로 말하면 그럴듯 하게 보일 수 있다.

 

결국 언론이나 기관들에서 사용하는 통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통계는 일단 의심부터 해야 한다.

통계의 거짓말에 속지 않는 것은 어떤 발표든 비판적으로 바라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 누구의 말이라도 통계를 이용해서 설득하려 하는 말이라면 그 이면의 진실을 들여다 보기 위한 생각의 준비를 미리 해두고 찬찬히 살펴봐야 한다.

 

뭐 시간이 없다면 '또 거짓말 하고 있네' 라며  믿지 말고 쿨하게 넘어가는 것도 한 방법.

통계까지 신경쓰기에는 대한민국 청년들이 너무 바쁘다. 취업 때문에...

 

지나친 의심은 병이 되겠지만 적당한 의심은 삶의 지혜가 된다.

통계의 거짓에 속지 말고 스스로 멋진 결론은 내릴 수 있는 지혜를 얻기 위해

<새빨간 거짓말, 통계>를 읽어보길 추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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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패러독스의 시간 나남창작선 131
이정은 지음 / 나남출판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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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패러독스의 시간> - 이정은

 

1950년 그해는 패러독스, 역설이 넘쳐났던 시대다.

1945년 8월 15일 30여년간의 일제시대를 지나 겨우 빛을 봤는데 완벽한 빛은 아니였다.

지리적 위치, 이념과 힘에 따라 한반도는 38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찢어졌다. 타의에 의한 강제 분할...

빛을 본줄 알았으나 빛이 아니였다. 또다른 어둠이였다.

 

그리고 5년... 1950년 여름 한반도에 또한 번의 비극이 일어났다.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  군대와 군대, 이념과 이념, 힘과 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리전 성격을 띈

한 민족의 슬픈 살육전쟁. 이역만리 먼땅에서 타국을 위해 싸운다? 과연 "타국"을 위함 일까? "자국"을 위함일까? 혼잡한 이념들의 전쟁에서 결국 고통 받는 것은 가진것 없는 사람들 뿐이다.

 

국민? 시민? 서민? 어떤 말로 불려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

<그해 여름, 패러독스의 시간>은 힘없는 한 가족의 이야기 이며, 그 가족이 격은 6.25 전쟁의 증언이다.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는 증언이 아닌, 사람으로 써, 온 가족이 겪어낸 이념 전쟁으로 인한 가족의 기록이다.

삶과 죽음속에서 강요 받은 선택, 자의인지 타이인지 구별도 못한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

 

영화 <월컴투 동막골>에서 보여줬던 이야기는 웃음이란 요소를 통해서 슬픔을 씻어 치유하려 했다면,

<그해 여름, 패러독스의 시간>은 역설의 시간을 날것 그대로 보여 준다.

 

광복이후 용인의 한 마을에 자리잡은 가족사, 이승만 정권과 김일성, 남로당과 북로당, 6.25전쟁, 인천상륙작전, 휴전. 이런 굵직한 이야기 들은 너무나 먼 이야기다. 일년 농사를 짓고 겨우 먹고 사는 사람들, 남는 것이 별로 없던 그 시절, 육체적 노동만이 생계를 책임지던 시절의 이야기, 전쟁에 피난을 가기도 하고 폭격의 두려움을 온몸으로 견뎌내던 이야기. 큰 대의가 무엇인가? 가족이 잘 먹고 행복하면 되는 것을.

 

무엇이 삶이고 죽음일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이 무엇이라고 무수한 목숨을 버렸는가.

 

삶과 죽음 앞에선 그 어떤 이념도, 정치도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한가.

살수만 있다면 다행인 것을...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희생자만 있을 뿐.

전쟁속에서 여자들의 운명은 남자들 보다 더 하다. 1950년, 500년 왕조의 뿌리 깊은 유교적 삶이 지금보다 더 많이 남아 있는 시절, 모든 것은 장자 우선, 충과 효의 이념이 생생히 살아 있는 그 시절,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사회주의란 무엇인지 명확히 알수 없는 그 시절, 삶을 위한 선택이 죽음에 이르는 길이란 걸 몰랐던 그 들은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까?

 

종교와 이념을 앞세운 전쟁은 지금 이시간에도 진행중이다.

한반도 역시 아직 전쟁중이다. 휴전 62년 이란 시간, 정전이 되고 통일을 할 수 있을까?

무력이 아닌 평화 통일이란 명목으로 피흘리지 않는 통일이 가능할까?

 

최근에는 시리아 내전이 지구적으로 극심한 문제로 인식됐다. 시리아 난민사태로 관심도 없던 머나먼 나라의 소식이 뉴스에서 들려온다. 종교적 이념에 의한 전쟁으로 시작된 시리아 내전, 그 이면에는 세계 강대국들의 이익에 따라 전쟁이 확산 됐고, 그 피해는 결국 '난민'이 되어버린 시리아국민들이 짊어 지고 있다.

 

그들의 전쟁을 바라보면서 한국전쟁을 떠올리게 된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권력과 이념에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리는 전쟁. 누구를 위한 것일까? 처음의 대의 명분은 시간이 흘러 부질 없는 것이 되어 버리며, 종국에는 '국가를 위해'라는 미명아래 모든 것을 착취당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전쟁의 역설을 통해 삶과 죽음을 들여다 본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 계급과 권력이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전쟁이란 광기는 끝이 없어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것은 아닐까. 삶에서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 그리고 사회, 서로 잘살기 위해서 시작했던 모든 일들이 파멸의 원인이 되어 고통과 광기만 남겨 버리는 전쟁. '어쩌다가'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 가족이 힘들고 공통 받지 않고 편안히 행복하게 살기 원하는 그 마음속에 '독'이 숨어 있어서 그런 걸까?

 

하루 벌어 하루를 겨우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직장에서 밤낮으로 일을 해야 겨우 겨우 한달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지주와 소작농에서 사용자와 노동자로 바뀌였을 뿐 세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역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희망이 있는 것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랑'이 있다는 것.

 

'사랑'의 힘으로 모든 것을 극복 할 순 없어도, 고통의 진통제는 될 수 있겠지.

 

우리는 또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게 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결과가 펼쳐질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은 있고, 우리는 결국 견뎌내며, 끝까지 살아가겠지.

패러독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역설. 선택의 강요.

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 과거의 시간속에서 미래의 시간을 짐작해 보는 것 또한 사람의 일.

 

<그해 여름, 패러독스의 시간>은 우리들의 '삶'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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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마지막 7일 나남창작선 132
김상렬 지음 / 나남출판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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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를 먼저 보고 책을 접했다.

<사도의 마지막 7일>은 8년전 김상렬 작가의 <목숨>을 수정해 영화 개봉에 맞춰 출간 됐다.

 

<목숨>을 접하지 않았기에 무엇이 어떻게 수정됐는지 알 수 없지만

<사도의 마지막 7일>은 영화 <사도>를 먼저 접하고 읽었기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소설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면서 부터 시작 한다.

 

p.11

쾅, 세상의 문이 닫혔다. 당신의 성난 고함이 다시 들려온다.

"네 놈은 반드시 그 안에서 죽어야 한다!"

 

소설의 첫 문장을 읽으면 영화의 첫 장면이 오버렙된다.

송강호의 영조, 유아인의 사도세자...

 

영화의 의미지가 너무 깊게 남아서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의 장면들이 하나 둘 오버렙 된다.

 

김상렬의 소설은 영화를 소설화 한게 아니기 때문에 영화와는 많은 차이가 난다.

 

소설속의 사도세자와 영화속의 사도세자를 비교할 수 밖에 없게 되며, 비교를 하다 보면 배우 유아인이 대단했음을 느끼게 된다.

 

소설속의 사도세자는 '광증'에 시달려 죽는 그 순간까지 허상에 허우적 된다.

잠시 정신을 차리기도 하지만, 갇혀있다는 것, 뜨거운 여름, 굶주림, 죽어감을 느끼며 보내는 지옥같은 하루들

사도세자가 아닌 인간 '이선'으로 느끼는 공포와 죽음을 그린다.

 

영화 사도는 아버지와 아들관계를 번갈아 가며 보여주고, 하루가 지날때 마나 하나의 사건을 통해 행복했던 날 부터 차츰 사이가 멀어지며 벌어짐을 그려 왕과 왕세자가 아니라 아들을 죽인 아버지, 죽임을 당한 아들로 그려진다.

당쟁은 배재된다. 오로지 관계와 관계사이에 집중된다.

 

소설은 영화와는 다르다.

사도세자에게 집중이 된다. 죽음과 함께하는 날들. 점점 미처가는 사도

그러면서도 함께하기로 했던 이들을 생각하며 사도세자의 죽음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억울하게 죽을 순 없다!, 조금만 기다리면 따르던 충복들이 구하러 올것이라는 헛된 희망.

 

이 모든건 사도세자의 '광증'으로 설명하려 함이였을까?

지워진 기록들사이의 진실은 결코 복원될 수 없지만 여러 짐작을 해본다.

기록과 기록사이. 소설은 임오화변을 당쟁을 원인으로 설득해 간다. 당파싸움으로 갈라 놓은 관계.

억울하게 희생된 사도세자, 그렇게 본다면 영조 역시 당쟁의 희생량일 뿐이다.

 

소설은 그래서 아쉽다.

구성은 영화와 비슷하지만 집중력에서 흐려진다.

비구니 '가선'이란 인물때문에 이야기에 힘이 빠짐을 느낀다.

당쟁에 집중했거나, 영화처럼 관계에 집중했거나, 그도 아니면 첫 제목이였던 <목숨>

삶과 죽음의 비극에 집중했더라면 단테의 신곡의 주는 교훈 쯤은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은 '사랑'이였나? 하는 생각에...

 

'가선'이란 인물이 있어, 도피처, 은신처가 아니라 '광증'의 원인이 되어 버린 것 처럼 보였다.

동정심으로 인한 관심에서 '사랑'으로 커져 나간 마음을 담았지만, 애달픔에 집중한 것도 아니였다.

 

뒤주에 갇혀 죽는 그 순간 까지의 7일... 결국 억울함만 남았다.

당쟁도, 가선도, 아버지도, 모두 억울함 속에 묻힌다.

 

소설은 결국 소설로 남았다.

작가도 서문에서 분명히 밝혀두고 있다. '소설'일 뿐이라고.

소설이라서 이해 한다. 소설이라서 아쉽다.

 

지워진 기록. 어떻게 채울지 확립되지 않은 시간들.

그때를 살아내지 못한 미래의 사람들은 결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복잡함.

진실에 다가갈 순 없지만, 진실처럼 보이는 가정은 수도 없이 만들어 질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을 '가선'이란 인물의 등장부터는 '사랑'에 집중 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까?

슬픔을 공유하지도, 억울함에 공감하지도 못했다.

아무래도 영화의 잔상이 너무 깊게 남아서 그런가 보다.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에 이어지는 비극은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유교국가라는 것, 왕정이라는 것, 당쟁이 치열했다는 것, 영조(연잉군)도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고 철저했다는 것.

성장과정에서 지금과는 분명 다른 것들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 시대적 상황에 의한 비극으로 기록된 사건.

 

그 마저도 대부분의 기록이 지워졌다는 것.

지워진 기록속에 우리가 건질 것은 무엇인가?

 

최근 몇년 영조와 사도 정조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 만큼 그 시대의 불확실성과 지워진 기록이 가진 매력이 현시대에 살아있다는 것이겠지.

시대가 흘러도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목숨>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였으면...

 

소설의 장면 장면마다 오버렙 되는 영화의 장면들이 있어 소설을 읽는데 색다를 재미가 있었다.

 

자결하라며 칼을 던지는 영조의 모습, 뒤주에 갇히는 장면, 뒤주속에서 미쳐가는 장면, 어린 정조가 물한잔을 주겠다며 우는 장면, 영화속의 장면들 덕에 소설을 깊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좋았지만...

어쩔 수 없이 영화와 비교하게 되며 마지막 까지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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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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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07번째 작품

책을 읽고 어떻게 남겨야 할까 한참을 생각하다 이제서야 리뷰를 쓴다.

 

책은 너무나 쉽게 읽힌다.

또 너무나 깊게 공감이 된다.

 

짧게 요약하자면 계나의 호주이민 정착기로 줄일수 있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간단하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

행복이란 무엇인가? 라는 생각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계나의 이야기에 빠져들기도 하고 반박해 보기도 한다.

 

소설과 해설을 모두 읽고 견해가 궁굼하다며 담화를 시작해보자는 허희님의 마지막 글을 읽고나면

책을 다시 한번 펼쳐들고 더욱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행복론'일 수도 있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그 자체에 대한 깊은 고찰의 시간이 될 수도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나는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현실이 된다.

 

소설의 주인공인 계나가 호주로 떠나는 이유는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이고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몰 살겠서다. 좀더 깊히 들어가면 한국에서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을 직시한 것이고, 살기 위한 대안이 호주로의 이민이다. 소설 마지막에서는 결국 호주로 가려는 이유가 사람대접 받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계나가 직접 밝히는 한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p.11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p.44

'한국에서는 딱히 비전이 없으니까.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그렇다고 내가 김태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나 이대로 한국에서 계속 살면 나중엔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폐지 주워야 돼.'

 

그렇다. 작품해설에서도 말하고 있는 바로 이부분.

책을 읽으면서 여러번 읽게 된 이부분... 나또한 비슷한 처지라 더욱 공감이 갈 수밖에 없는 이 부분을 보면 호주로 이민을 가고 싶은 생각이 들긴 한다.

 

그럼에도 나라면 한국을 선택하고 싶다. 그렇게 비전이 없고 가진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결국은 조건을 따지며 출발선부터 불평등한 세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계나의 선택은 결국 도망이고, 이 도망은 문제 해결에 아무것도 도움될 수 없다는 것. 호주로의 이민이 정답 처럼 느껴지지만 그건 장소만 옮겼을 뿐... 세상은 바뀐것이 없는 선택이다. 다시 보면 그건 가진것 없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국을 떠나 호주에서는 아주 작은 가능성. 쉽게 말해 보이지 않는 신분 상승을 위한 선택일 뿐이다. 문제를 인식했음에도 바꾸기 보다는 다른 곳에서 부족함을 채워 신분을 상승한 계나의 선택... '행복'이란 가치를 놓고 생각하면 과연 계나는 '행복'할까?

 

아무리 힘들어도 모두가 행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

사회구조가 잘못됐으면 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문제라면 그 시선을 돌리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 그것이 나라면 한국에 남는 것을 선택한 이유다.

'가치'를 선택하는 것. 잘 살고 못사는 것의 기준을 돈에서 '행복'과 '자유'로 돌려 놓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러 분야에서 이런 저런 힘든 일들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노력하는 '사회복지사'란 직업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p.61

'아니, 난 우리나라 행복 지수 순위가 몇 위고 하는 문제는 관심 없어.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런데 난 여기서는 행복할 수 없어.'

 

p.97

'여기서 내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거야. 이런 일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겪어야 해?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었어. '

 

p.103

'주가 사라지자 바퀴벌레가 들끓었고, 바퀴벌레 다음에는 개미가 나오고, 그랬던 거야. 뭐가 바뀌긴 했는데 나아진 건 아니었어.'

 

이렇듯 소설 곳곳에서 계나는 한국에서 살수 없는 이유들을 늘어 놓는다.

행복을 바라지만 행복할 수 없는 상황들 그래서 도망가고 싶어 했고, 한국에서도 무엇인가 나아지는 것이 있었다면 남았을 텐데 그렇지 않았기에 떠날 수 밖에 없었음을 역설한다.

 

데체 한국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그래 이런 질문은 문제가 너무 많기에 쓸데 없는 질문이겠다.

 

저출산, 고령화는 기본이요, 양극화에 점점 줄어드는 중산층이라는 계급, 아니 그런걸 다 떠나서 모든걸 '돈'으로 평가해 버리는 시스템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그것이 이 문제의 핵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란 가치 조차 이젠 '돈'으로 환산해서 수량화 된 사회. 여기서 '돈'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절망적일 까.

자본의 세습! 사람들의 욕심이라 하겠지만... 가끔은 우리가 인간이길 포기하고 퇴화하고 있는 과정에 있는 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하긴 얼마전 발표된 최저임금안... 아니 최저임금을 정하기 위한 협상과정들...

사용자측에서는 8년 연속 고정하길 희망했다고 한다. 그래 사용자 측에서는 인건비를 어떻게든 줄이는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면(여기선 인간을 단순한 재료로 봐야 한다.) 그들은 그렇다 치고 조정위원회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조정안을 내놓을 수 있는지 그것또한 불가사의다...

 

이런 뉴스를 접하게 되면 나 역시도 한국을 떠나고 싶다.

태어날 때 부터 가진거 하나 없이 났으니...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 무엇은 재능이 없어 그저 평범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라고 하지만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그 가치를 증명할 길도 없다는 것이 되어 버렸으니. 공부라도 잘하라는 말...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태어날 때 부터 있던 그들은 절대 공감할 수 없다.

 

어느 통계에서는 상위 10%에 들어 가 있는 그들은 자신들이 그만큼 노력을 했기에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가난해 지는 것은 '노력'부족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들에게 묻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과연 노력 안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노력'이란 것을 수치화 한다면 어쩌면 상위 10%의 그들보다 나머지 90%의 사람들이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에 막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그래 어쩌면 계나의 선택이 옳은 선택일 수도 있다.

바뀔수 없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바뀔 수 있는 세상으로 도망이라도 가야 된다는 것. 그 선택이 호주이민이였고 결국 계나의 입장에서는 성공적인 선택이 되었다는 것. 비록 한국에서 사는 것 보다 더한 경험들과 고생을 했지만 결국은 호주의 주권을 가진 사람이 되어 한국에 있을 때 보다는 높은 계급에 올라 선것.

 

보이지 않는 계급속에서 방법을 찾아낸 계나가 성공했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소설속에서는 그럼에도 한국에 남아 있는 계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계나의 동생이 있다.

비록 공시생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듯이 그려져 있긴 하지만, 언젠간 이라는 희망을 잡고 한국에서 살아가는 그녀, 조건이 아니라 사람이 좋아서 이름없는 밴드의 멤버지만 괜찮다는 그녀가 어쩌면 소설가 장강명이 말하고 싶어한 숨은 뜻은 아닐까.

 

그 무엇보다 '사람'그 자체를 바라보고, '사람'으로써 '사람'답게 살 고 싶다는 말을 이 소설을 통해서 하는 것은 아니였을까? 아니 계나의 문제들, 우리들의 문제들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에서 부터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모순, 사회구조의 문제, 호주이민의 현실등등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들에 꼭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터틀맨의 안타까운 죽음에서는 거북이의 경쾌한 멜로디 속에 숨어있는 슬픈 노랫말들이 생각 났고,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마지막 노래하는 모습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장강명은 계나를 통해서 호주사회와 한국사회를 비교했고,  한국사회를 그대로 옮겨간 한국 교민사회의 문제들을 바라보며 어쩌면 한국인의 속성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있는 것 역시 '우리들'이기에 한국사회에 '글'을 통해서 호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 같이 이 문제를 고민해 보고 답을 찾자고, 우리들은 할 수 있다고, '행복'이란 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우리도 '사람대우'를 하며, '사람대우'를 받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아니였을까...

 

그래 나 역시 다른 분들의 견해가 궁굼하다.

우리 모두 담화를 시작해 보자!.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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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국가 - 우리가 목도한 국가 없는 시대를 말하다
지그문트 바우만 외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위기의 국가> 우리가 목도한 국가 없는 시대를 말하다.

 

지그문트 바우만과 카를로 보르도니의 대담집이다.

국가와 위기에 대한 두 석학의 폭 넓고 깊은 생각들이 담겨있다.

 

솔직히 쉬운책은 아니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두권을 읽고 세번째 읽는 책이기에 그동안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과 글, 그리고 옮긴이의 번역에 익숙해 졌기 때문인지 앞선 두권보다는 편하게 읽었다.

여전히 불친절한 번역임을 느낀다. (글쓰기 특강 덕분에 글을 보는 눈이 높아져서 그렇다. 단점은 내글을 어떻게 고치든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

 

<위기의 국가>

우리는 '위기'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현 시대는 '위기'의 시대로 정의 해도 의견이 없을 정도로 우리 삶 주변에는 다양한 위기들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위기는 역시 '경제 위기'다. 우리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언제나 문제는 '경제 위기'라고, 하지만 이것이 다일까? '경제 위기'가 문제라고 알고 있다면, 정확히 무엇을 '경제 위기'라고 말하는지 알고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막연하게만 생각 하고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정확한 정의 없이 써오고 들어 오던 용어이니까.

뉴스에서 쉽게 접하는 '경제 위기'라는 단어, 청년실업이 문제되는 것은 '경제 위기' 때문이다. 환율이 폭락하는 것은 '경제 위기'때문이다.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 역시 '경제 위기'다. 무역 적자, 무역 흑자도 '경제 위기'가 원인이자 결과가 된다. 자유경제무역협정, 중산층의 몰락, 부익부 빈익빈 현상, 빈부의 격차, 노숙문제, 자살, 복지 그 어떤 문제와 결과들에서 '경제 위기'라는 단어가 꼭 들어간다. 정말 그럴까?

 

거의 모든 문제에 '경제 위기'가 원인이지 결과라면 결국 '자본주의'가 원인이자 결과가 되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그중에서도 특히 '소비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것, 현 시대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이념, 경제 원리인 '소비 자본주의'가 지금의 문제들을 만들어 온것은 아닐까?

 

세상에 '자본주의'가 등장한지 200여년이 됐다고 한다.

인류의 역사, 문명의 역사에서 보면 지극히 짧은 200여년의 시간동은 우리는 너무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산업혁명, 문화혁명, 정보혁명,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국가, 자유국가 등 많은 용어들이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

 

너무 갑작스러웠던게 문제였을까? 미처 변화는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없는 것일까?

인류는 지금껏 가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걸아가고 있다.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이렇다 할 수 없는.

어느 방향으로 바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환상, 과거를 돌아보며 현 시대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지금 '문제', '위기'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원인과 결과들을 분석하고 좀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길 끝에 희망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위기'에 대해서 카를로 보르도니와 지그문트 바우만은 같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두 석학의 대담은 '위기'라는 말의 어원부터 더듬어 간다.  '위기'는 어디서 부터 왔는지, 어떻게 '위기'라 불리고,  왜 현대 사회에 '위기'가 만연해 있는지.

 

카를로 보르도니는 위기가 늘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위기와 함께 살아가는데 익숙해 져야 한다고 말한다.

위기와 국면, 두 단어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현시대의 위기는 결국 '책임자'의 부재로, 모든 것을 '개인'이 '책임'지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역시 위기에 대해 이야기 하며 현대의 문제는 결국 정치와 권력의 분리라는 상황에서 '주체'가 없기 때문이라 진단 한다.

 

가를로 보르도니는 '공위기'를,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사회'를 말하면서 때로는 같으며, 때로는 다른 의견들을 폭 넓고 깊게 이야기 하며, 주제에 대한 깊은 생각을 불러온다.

 

국가의 위기를 말하기 위해서는 '위기'와 '국가'가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 해야 한다.

두 사람이 말하는 '국가'역시 흥미롭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국가'에 대한 정의

영토와 영공, 영해가 있고 국민이 있는 국가의 정의 에서 더 넓게 나아가 이념, 이데올로기 문화까지 포함한 '국가'의 의미와 그런 의미로 인해 역으로 '국가 없는 국가'가 되어버리는 상황, 현대의 지구적 범위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의견까지 따라가다 보면, 지금껏 갇혀 있던 생각의 틀이 깨진다.

 

21세기, 2015년의 지구는 인터넷 공간과 '경제'의 흐름속에 많은 부분이 '지구적'이 된 세상이다.

'지구적'이란 말 그대로 물리적 공간의 범위가 지구 전체라는 것, 원한다면 지금 이곳에서 미국으로 돈을 보낼 수 있고, 순간 순간의 생각들을 지구 반대편의 이름 모를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 문화역시 곳곳에 퍼져 있다.

거의 모든 것이 국적을 초월해 가는 세상에서 아직까지 '국가'의 틀에 얽혀 있는 것은 '정치'단 하나다.

 

두 사람은 '위기의 국가'를 말하면서 '근대의 위기'를 집어준다.

현대는 근대의 연속이기에 근대를 꼭 알아야 현대를 진단 할 수 있다.

근대는 격동의 시대였다, 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티를 지나 훗날 정의 할 수 밖에 없는 '현대의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용어가 익숙하지 않아 개념을 따라가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내가 이해하기로 간단하게 말하자면 '모더니티'는 산업혁명이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확실성'을 전제로 하는 정치적인 모든 것들을 말한다면 포스트모더니티는 확실성위에 점점더 불확실해 지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19~20세기를 포스트모더니티라고 한다면, 21세기 이후는 포스트모더니티를 벗어난 그 '무엇'이 된것. 지그문트 바우만은 '무엇'을  '액체 사회'라는 새로운 '이론'을 말한다.

 

근대를 벗어서 인류 역사상 처음 가보는 현대와 미래, 여기서 두사람은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포스트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는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중은 무엇인가? 민중을 강력하게 통제했던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서 받아들이는 민주주의란 '자유'와 '위협'이였고, 지금의 민주주의는 그때와 또 다른 의미가 되었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란 어떤 의미일까? 과연 민주주의는 죽었을까? 아니면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이 민주주의의 모습일까? 민주주의 역시 앞에 '대의'라는 말이 들어간다. 소수의 의견 보다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많은 것들이 정해지는 정치형태, 대의 민주주의에서는 투표권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투표율이 점점 낮아지는 지금 '민주주의'는 무엇일까?

요즘 교과서에는 어떻게 다룰지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시절 사회선생님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가 떠올랐다.

"다수의 사람들이 예외되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

이때 그 소수의 사람들이 부자들이냐고 따졌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우리들만의 정의를 내렸었다.

"민주주의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게 소통하며 작은 의견이라도 무시하지 않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지그문트 바우만과 카를로 보르도니의 이야기를 힘겹게 따라가며, 제대로 이해 했는지 아직까지 의심스럽지만

그 들이 말하는 '위기'에 대한 것들, 결국에는 '사람'의 문제이며, '관계'의 문제가 아닐까?

 

'사람'이 사람보다 '자본'을 위선시 하는 도덕 없는 '자본주의'에 빠지면 서부터 문제들이 시작 된 것은 아닐까?

혁명이란 이름아래 굴복했던 많은 사람들... 그들을 '재화'로만 바라보면서 시작된 문제,

현대의 모든 문제는 '사람다움',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는 것은 아닐까?

 

단체에서 개인으로, 다시 개인에서 단체로 관계가 '사람대 사람'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둘 모두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고 해결해 나갈 길이란 생각을 해본다.

모든 것을 '자본의 재화'로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사람'답다는 것을 찾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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