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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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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분담이 가능한 사회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내심 까뮈와 사르트르의 갈등에 초점이 맞춰지길 바라는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까뮈와 사르트르가 전후 프랑스 시기에 역할극을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불온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편과 특수, 당파성과 일반성, 혁명과 저항- 마치 모든 목욕탕에 냉수와 온수가 나오듯이, 건강한 사회에 실천적인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두 개의 롤모델이라고 할까. 

물론 저자는 소련의 몰락 이후 까뮈적 인간형의 승리를 강변하고자 책을 썼다고 하지만, 그레서 왠지 사르트르를 위시한 일군의 집단이 까뮈를 일방적으로 이지메를 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여러 장치들 - 까뮈 사후에 그에 대한 사르트르의 언술이 마치 그렇다는 인상을 주는 것과 같은 -이 등장하지만, 결론적으로 보자면 프랑스 지성인 사회의 역할 분담에 대한 놀라움만 남게 되었다. 

강남좌파형 인간 까뮈, 386형 인간 사르트르 

공교롭게도 <사르트르와 까뮈>와 <강남좌파>를 함께 보게되어서 좋았던 점은 까뮈의 이해할 수 없는 여러 태도들 -이 책에서 그의 반공주의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고, 프랑스의 식민주의에 대한 그의 관용성도 잘 설명되지 않는다-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까뮈는 전형적으로 강남좌파 모델과 닮았다.  

   
 

 강력한 정치 활동을 경험한 후에 그는 대안을 제시하는 일에 만반의 준비가 된 것처럼 느꼈다. 필요한 개혁안을 발표하기 위해 그는 필요한 경우 오직 그 자신만을 의지하겠다고 결심했다. 이 같은 결심은 부분적으로 카뮈 자신의 뿌리 깊은 소명에서 기인한다. 폭력의 미덕을 실천하는 것을 거절한다는 소명이 그것이다.(194쪽)

 
   

얼마나 전형적인 태도인가? 그러면서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벌이고 있는 식민지 침략에 대해서는 입장을 보이지 않고(196쪽), 국내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기 위한 정치연합을 위해 활동을 벌였다. 성공을 위한 그의 태도는 일관되었다.   

반면, 사르트르는 과정으로서 폭력을 인정했고 비폭력으로 고통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폭력으로 그것을 끊어내는 것이 도덕적 태도라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사르트르에게서 윤리와 역사, 그리고 윤리와 정치를 구별할 수 없게 된다. 도덕적이라는 것은, 인간과 세계가 필연적으로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가정하는 것이다.(239쪽)

 
   

 나는 이와 같은 까뮈와 사르트르의 태도에서, 우리 식의 강남좌파 모델과 386모델을 떠올린다. 명민함과 사회적 성공, 그리고 치우침 없는 합리성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얻는 강남 좌파형 집단은 사실상, 까뮈와 같이 사회의 급진적 일부를 배제함으로서 의미를 획득한다. 마치 까뮈가 반공산주의적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그의 '반항적 인간'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반면 무능하고, 전문성도 없으며 난폭하기까지한 386 모델들을 보면 뛰어난 당파성에 대한 헌신과 비타협적인 태도들이 사르트르의 '혁명적 인간'과 닮았다. 김진석의 표현에 따르면, 현실의 더러움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태도랄까. 

까뮈의 복권이 껄끄러운 이유 

이 책이 사르트르의 과대포장을 벗겨내고 까뮈의 복권을 꾀하는 책이라면, 역설적이게도 저자는 사르트르의 책을 번역하고 사르트르에 대한 연구를 집중하는 학자임에도, 그 의도가 독자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하나의 맥락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현실에서의 대안없음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조건이다. 

사르트르는 한국전쟁으로 침묵한 메를로퐁티와는 다르게 발언을 지속했으며, 냉전체제에서 고립을 자처하면서도 공산주의자를 자처했고 끝까지 불안한 실존을 현실에 대한 직접적 개입과 당파성을 바탕으로 실천해왔다. 반면 까뮈는 주관적인 신조에 현실적 지형을 대입했고, 사람들을 안전하게 만들기 보다는 자신 스스로 안전하기를 택했다. 굳이 비난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태도가 시간이 지나 타당하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변한 것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그런 면에서 까뮈적 태도는, 마치 '희망버스'에 대해 폭력성과 대안없음을 질타하는 일군의 진보적 연구자 혹은 교수들을 보는 것과 같이 껄끄럽다.  

저자의 편견이 짜증스럽다 

   
 

 알제리의 가난 속에서 성장한 카뮈에게서 노벨상은 그의 성공의 정점이었으며, 또한 그 상은 그의 인생이라는 작품이 완결되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안락한 주거지를 구입하기 위해서 상금을 이용했다. 반면, 파리에서 성장한 유목한 어린이였던 사르트르는 정치적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노벨 문학상과 그 상금 그리고 거기에 동반되는 모든 것을 거부했던 것이다.(482쪽)

 
   

솔직히 이런 저자의 태도는 마치 '조선일보'식 심리소설을 보는 것 같아 짜증이 난다. 까뮈도 인간이었고 한계가 있었다면 이를 그대로 보면 그만인 것이지,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았던 출신의 내용을 바탕으로 성인이 되어서 본인 선택한 행위를 합리화하는 것은 합당한 태도가 아니다. 

어쨋든 이 책은 일종의 의도된 편견을 가득담고, 저자의 일방적인 상황해석이 독서를 방해하는 불편한 책이다. 만약에 균형추 역할을 해주는 번역자의 서문이 없었다면 '뭐 이런 책이 다 있어?'하면서 중간에 독서를 접었을 지도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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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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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남좌파는 엘리트다. 그리고 사실, 우리 사회의 엘리트는 '강남'이라는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엘리트는 강남좌파와 강남우파, 그리고 강남중도가 존재할 뿐이다. 

 솔직히 강준만의 <강남좌파>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분명했다. 실제로 일반 대중에게 강남좌파는 특정한 기호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옷잘입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등) 신분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진화했고, 정치적 의미에서 강남좌파는 엘리트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2.만약 <강남좌파>의 출간이 몇 개월만 늦춰 졌다면, 안철수에 대한 인물평을 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느새 우리의 정치는 완벽한 대리정치로 수렴하고 있는데, '개 중에 나은 사람'이 무리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무리의 지도자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강남좌파>를 하나의 현상으로 파악하면서, 

   
  한국인은 물질적 삶과 정신적 삶에서 서로 융합하기 어려운 두 개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물질적 삶은 박정희식 개발독재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는다. 반면 정신적 삶은 개발독재 패러다임을 거부하며 세게 최첨단을 달리는 패러다임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한국 사회 도처에 그런 모순이 널려있다. 이게 바로 '총론 진보, 각론 보수'와 그에 따른 '투표와 여론의 괴리 현상'이 나타나는 배경이기도 하다.(73쪽)  
   

 라는 강준만의 지적이 현 시점에서 타당하고 핵심을 말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안철수에 열광하는 것과 이명박에 열광하는 것은 총론에서만 다를 뿐 각론에서 같다고 뒤집어 생각할 수도 있겠다. 

3.엄밀하게 말하면, 이 책은 '지금'이라는 시기에 개입하는 현재적 책이다. 사실 모든 강준만의 책이 그런 '현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 책은 특히나 지금 여기의 현실정치에서 보이는 하나의 딜레마를 가장 정면에서 응시하게 해준다. 

앞서서 말했지만, 소위 현 정권에 대한 대안으로 거론되는 이들이 모두 '강남좌파'라면 그것은 호불호를 떠나서 하나의 현상으로서 심사숙고해볼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왜 우리는 '무리 중에서 나은 사람'의 정치에서 '나은 사람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정치에 빠지게 되었나? 

4.혹자는 계급정치(넓은 의미에서의 계층정치)의 종언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할테고, 이런 저런 변화로 인해 '평평해진 세계'에서 이유를 찾기도 할 테지만, 개인적으로는 대중이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없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를테면 '정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이라고 부를 수 있을텐데, 농담이라도 '내가 해도 그보단 잘하겠다'는 말 대신 '그 사람 대신 저 사람이 상대적으로 낫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정치적 불구의 징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5. 사실 <강남좌파>의 1장~3장이 본론이고 인물평이 담긴 4장 이후는 부록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머리 한켠에서는 '왜 이들 중 교수, 사장이 아니라 청소부, 자영업자, 월급 노동자 출신이 없을까'라는 질문을 달고서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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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읽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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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은 1975년에 한나 아렌트가 사망한 이후 그에 대한 방대한 평전을 쓴 사람이고,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해에 또 다시 그에 대한 평전을 쓴 사람이다. 한 사람이 한 인물의 주요한 시기에 쓰여지는 평론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거의 유일한 일이 아닐까 싶다. 책의 내용에도 소개되지만, 영-브루엘은 아렌트의 수많은 제자 중 수제자로 꼽히는 2명 중 한명이다.  

2. 

흥미롭게도, 영-브루엘의 아렌트에 대한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2007년과 2011년이다. 원작은 20년 가까이 시차가 있지만, 90년대 후반부터 생기기 시작한 국내 아렌트 연구자들의 활동으로 인해 아렌트의 저작은 봇물 터지듯이 소개되었고, 그에 대한 2차 저작 역시 그렇다.  

3. 

이런 맥락에 놓인 이 책 <아렌트 읽기>는 'What X Matters'라는 총서의 한 권으로 출판된 것을, 독립된 책으로 번역한 것이다. 앞서의 전기가 아렌트의 생물학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책은 아렌트의 '정신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하는 그의 정신적 삶을 전기, 중기, 후기라는 대략적인 시기 구분을 통해서 살펴본다. (아쉬운 것은 통상 그가 '세계사랑'에 대한 개념을 사용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시작하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이 점은 분명한 이유가 있기에 넘어간다) 

전기, 중기, 후기 할 것없이 아렌트가 강조한 한 단어를 떠올리라면, 나는 '생각'이라는 단어가 적절할 것이라 본다. 그 만큼 아렌트는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다. 실제로 필화사건이 되어 버린, 나치전범 아이히만에 대해 그가 붙인 '악의 평범성'은 '생각없음'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의 어떤 정치체제와는 다르게 현대의 체제로서 존재하는 전체주의 역시 '생각없음'과 연결된다. 생각은 자신의 머리가 아니라 미디어나 언론, 혹은 정치지도자에게 맡기는 순간 생겨나는 정치체제가 바로 전체주의라는 것이다. 이는 극히 현대적인 정치체제인데(이에 대해 영-브루엘이 얼마나 강조하던지...), 그것은 '무지'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와는 다르게 문맹률도 낮고, 고전에 대한 교양도 높지만 생각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바로 전체주의를 특징짓기 때문이다.(전범 재판을 받던 아이히만이 칸트의 도덕률을 인용할 만큼 상식 수준은 높았다!!) 

4. 

<아렌트 읽기>를 읽으면, 난해하기 그지 없는 아렌트의 주요한 저작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를 제공받을 수 있다. 특히 <인간의 조건>과 같은 책에 대해서 그가 강조했던 '행위'가 사실상 예측불가능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해석은 꽤나 놀라웠다. 그렇게 해서 가능성의 영역으로서 정치에 대한 고민, 그리고 프랑스혁명에 대별되는 미국 혁명의 가치 등 그의 고유한 문제의식이 떠올랐다. 결국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그에 그치지 않는다. 아렌트의 현재화 혹은 '아렌트주의'라고 칭할 수 있는 방식 때문인데, 영-브루엘은 아렌트의 사상과 911테러, 그에 이은 전쟁행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과거청산과정, 동유럽의 민주화 등 아렌트 사후의 사건들을 연관시킨다. 이를 통해서 아렌트 사상에 대한 훈고학적 해석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에서의 비판적 독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영-브루엘이 한국판 서문에서 '진실과화해위원회'의 한계를 지적하고, 중동에서 일어난 잇단 혁명적 움직임에 대해 평가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동시대에 대한 관심이 이해된다(상아탑 속의 세상에서 진리를 찾는 수많은 아렌트 전문가가 아니라 이 사람이 평전을 쓴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영-브루엘은 아렌트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아렌트를 통해서 '아렌트주의'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며, 바로 이 책 <아렌트읽기>는 그 전범이 되는 책이다. 

5.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아렌트읽기>가 아니라 <아렌트를 통해 읽기>로 바뀌어야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된다. 책을 보는 과정에서 수십개의 책귀가 접혀나갔고, 많은 부분에 밑줄이 그어졌다. 최근에 본 어떤 책보다 많은 영감을 준 책이다(필멸성과 불멸성 사이에서 나타나는 행위의 영웅적 측면, 그리고 용서와 약속의 의미...). 더구나 아렌트 전문가가 번역한 책은 꽤나 잘 읽힌다. 모처럼, 짜릿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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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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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0년대 후반, 문화비평가라는 직함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전에 문화비평이라는 장르가 탄생했다. 문화비평이란 작업이 영미권의 특수한 환경에서 숙성된 문화'비평'이었던 반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문화'라는 대상을 비평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어렵게 태동한 문화비평은, 그야말로 대상에 매몰되는, 그래서 문화를 다루는 비평작업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문화비평가라는 직업은, 그 전까지 자유기고가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들의 새로운 직함이 되었다. 

2. 

그래도 그렇게 문화비평의 황금기가 있었다는 것이, 지금과 같이 문화의 영역이 더 이상 생산을 멈춘 불모지의 시대보다 나았다는 생각이다. 당시만 해도 문화현상에 대한 다양한 비판적 담론이 만들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문화의 생산자-향유자-비평가라는 삼각의 구도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디워'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문화에 대한 향유자와 비평가의 취향 차이는 서로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비판적 문화비평은 소란속에 거세되었다. 그렇게 남은 영역은, 향유자의 손해보지 않는 상업적 선택을 도와주는 문화상품에 대한 소핑호스트들과 문화적 소란을 인용하여 사회, 경제, 정치영역의 엄숙함에 '똥침'을 날리고자 하는 '문화 전사'만이 남았다. 

3. 

그런 점에서 이택광 교수가 내놓은 <이것이 문화비평이다>(자음과 모음)은 어쩌면, 불모지가 된 우리의 문화비평이라는 척박한 토양에서 끈기있게 피워낸 성과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문화비평가란 뿌리에서 문제를 본다는 의미에서 '급진적 비평가'(11쪽)이며, 문화비평은 문화라는 형식을 통해 사회의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문화비평이라는 장르 자체가 곧 정치적인 것(13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문화비평이야말로 일상에 파묻혀 있는 불편한 정치성을 발굴해서 제 몫을 찾아주게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글쓰기'(15쪽)라고 평가한다. 

저자의 문화비평은 대개 신문지면을 통해서 공개되었으는데, 그런 특징을 반영하듯 100개의 꼭지에 달하는 글들은 3~4쪽의 짧은 내용이다. 하지만 기고된 글이 그렇듯 길이와 상관이없이 각각의 글이 수미일관하고, 완결된 논지의 형태를 지니고 있느니 가볍게 볼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표제들을 죽 읽어보면, 10년 상간의 일들이 기억의 뒤편에서 톡톡 튀어나오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4.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맘에 드는 글을 '강준만을 위하여'와 '신세경, 송두율, 쌍용자동차', 그리고 '마빡이, 근대적 노동에 대한 조롱'이다. 나는 각각에서 저자의 태도, 방법, 입장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준만을 위하여'에서 저자는, '움직이는 진정성'에 대해 언급한다. 90년대 자유주의의 급진성을 보여주었던 강준만이 끝끝내 자신이 지켜왔던 자유주의에 의해 무시되는 현실에서, 진정성이 위기에 처한 현실을 읽어 낸다. 하지만, 저자는 강준만이 주목한 진정성을 '인물에 매몰됨으로써,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진정성의 범주로만 인물을 봄으로써 강준만은 윤리적 차원을 떠나서 작동하는 구조적 지형도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88쪽)고 말한다. 저자가 말한 강준만의 동맹 중 장졸에 불과했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저자의 지적은 정확하다. 강준만이 '인물과 사상'에 주목했다면, 이택광은 '구조와 문화'에 주목하는 것이고 나름대로 강준만의 자장 속에서 '반인간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신세경, 송두율, 쌍용자동차'는 어떻게 대중이 익수한 주제에서 점점 낯선 주제로 오버랩핑해가는지 보여주는 글이다. '보이지 않는자', '몫이 없는자'로서 신세경이 처한 위치, 그리고 달성할 수 없는 욕망이 어떻게 비극으로 달려가는지를 신세경, 송두율, 쌍용자동차라는 문화적 키워드로 직조해낸다.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발언권이 없는 이들을 계속해서 침묵케 하는 통치이고 "이 통치의 기술은 신세경과 송두율 교수, 그리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를 외부자로 만들어버리는 현실의 논리 그 자체인 것"(196쪽 )이다. 아마도 송두율과 쌍용자동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신세경을 알고 있었다면, 저자가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역으로 송두율과 쌍용자동차를 알고 있지만 신세경을 모르는 이는, 왜 당시 대중들이 신세경이라는 극중 인물에 대해 몰입했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저자는 상이한 문화적 주체들이 '공진화'하고 있는 구조를 해명함으로써 일종의 '감정의 공시성'을 짚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마빡이, 근대적 노동에 대한 조롱'은 벤야민이 인용한 역사의 천사처럼 뒤돌아 있는 저자를 떠올리게 한다. 저자에 따르면, 개그의 한 형식으로 마빡이는 새로울 것이 없는'재 브랜드화'의 성과이다. 하지만, 과거와 다르게 마빡이의 개그를 보고 웃는 것은 어쩌구니 없는 행위에 대한 웃음이 아니라 '조롱'이라고 분석한다. 우리를 웃기는 것은 이렇게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노동의 구조에 대처하지 못하는 출연자의 무기력이기 때문에 그 웃음은 "조롱"(263쪽)이다. 참 가슴아픈 분석인데, 신경제니 혁신이니 하는 사회분위기에서 소위 근대적 노동행위가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분석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창조성이라는 새로운 축적 패러다임을 위한 노력의 반작용으로서 근대적 노동에 대한 조롱이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아마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겪는 변화가 대개 이런 식의 토대를 무너뜨려가면서 집을 짓는 어쩌구니 없는 행위라는 조소가 아닐까.  

 5. 

이 책을 읽다보면 참 많은 생각을 하게된다. 평론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다른 장르처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인물의 인용으로 기를 죽이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좀 하면 대강이라도 알 수 있는 사회이슈로 풀어내는 글을 통해서 보지못했던 것을 보게끔 해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 "그것이 문화비평이다"라고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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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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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다. 그것은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느끼고 있다. 오히려 불안이 만성화되서 그것이 일상이 되어버리고 있어, 불안하지 않았던 시대를 말하는 것이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말하는 듯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제로섬의 미래: 불안의 시대에 미국 파워'라는 원제를 '불안의 시대'로 번역하여 붙인 것이나, '우리가 낙관했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부제는 호구력이 높은 표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우리'가 굳이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와 한울타리에 있는 것인가가 헤깔리기는 한다. 그렇기 때문이 이 책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불안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대략 80년간의 제국을 이끌어온 아메리카니즘의 불안감을 분석한 책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불안은 모두가 공감하더라도 그 해법에는 쉽게 수긍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8년부터 1991년까지의 전환의 시대, 1991년부터 2008년까지의 확신의 시대, 2008년 이후의 불안의 시대라는 저자의 구분법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저자는 이 세 시기를 관통하는 정치사상으로 민주적 평화라는 이론을 제시하는데, 이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기술이 동시에 발전한다"(11쪽)는 것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민주적 평화라는 정치사상의 붕괴가 2008년 이후, 즉 불안의 시대의 출발점이라는 것인데, 이런 시각은 저자 특유의 아메리카니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각 시기의 주요한 행위자로 사실상, 중국, EU, 미국을 제시하는데 이런 거대 세력 중심의 균형이론은 미국의 국제정치를 이끄는 현실주의적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1979년 영국의 대처리즘, 1991년 소련의 붕괴, 1991년 미국에 의한 걸프전, 1999년 시애틀의 반세계화 시위, 2001년 911테러라는 주요한 연표상의 특이점을 중심으로 하는 서술은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세력 균형을 근거로 하는 국제 정치경제의 이해방식에는 선뜻 동의가 안된다. 

이 책의 원제인 제로섬의 미래라는 것은 결국, 과거 확신의 시대가 보여주었던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장치로 이해된다. 그래서 길고긴 여정 끝에 도착하는 24장의 제목이 '세계를 구원하라'이며, 이 책의 가장 마지막에 저자가 오바마 대통령에서 품는 희망의 말을 듣는 순간 아득한 메시아주의가 떠오른다. [끝]

   
 

 대공황이 일어난 지 80년이 지났다. 강하고 성공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미국의 모습이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는 세계를 위한 최선의 희망이다.(374쪽)

 
   

 PS: 결정적인 악덕에도 불구하고, 마치 꼴라주 처럼 주요한 역사적 사건을 엮는 저자의 수려한 구성은 매우 설득력 있다. 또한 저널리스트로서의 저자 약력이 보여주듯이 쉽게 읽히는 글의 매력 또한 만만치 않다. 다만, 서구 중심의 주류 경제지 기자출신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인식적 한계는, 오히려 불룸버그의 보도를 신주단지 모시듯하는 우리의 금융 전문가들을 떠올린다면 그리 낯선 풍경만은 아니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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